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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1:67-80) 주일 예배 축도의 뜻을 실현하는가?
누가복음 강해 (10)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하여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
며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일이라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하신 맹세라 우리가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받고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준비하여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들에 있으니라.”(눅1:67-80)
제사장의 축도
누가복음은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예수님의 탄생과 연결되는 찬송 시 네 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이 하나님의 인류 구속사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일로서 각 개인의 영원한 운명을 구원과 심판 둘로 나누는 출발이라는 점을 강조하려는 뜻입니다. 그 시들의 주제는 그래서 주님의 오심은 구약 성경에 이미 약속되어 있었다고 밝힌 후에 장차 주님이 베푸실 구원의 은혜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 네 편의 시가 단순히 예수님의 탄생을 미화 칭송하는 차원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정수를 가르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첫 번째는 이미 살펴본 마리아의 찬가입니다. (1:46-55) 그녀는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성령이 임하여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을 낳을 것이며 그 아들이 야곱의 집을 영원히 다스릴 것이라는 예언을 받았습니다. 거기다 엘리사벳이 마리아가 자기 사정을 말하기도 전에 동정녀 임신을 먼저 알아보고서 ‘내 주의 어머니’라고 칭했습니다. 마리아로선 하나님이 자신을 통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을 실현할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확신하고서 그 큰 은혜에 감사하며 찬양했습니다.
본문은 두 번째 찬양 시로 제사장 사가랴가 아들 요한이 출생한 후에 같은 주제인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찬양한 것입니다. 그는 아들을 주신다는 천사의 예언을 의심하는 바람에 열 달간 벙어리로 지내는 벌을 받았습니다. 엘리사벳이 아들을 출산하고 이름을 천사가 알려준 대로 요한으로 짓자, 혀가 풀렸고 곧바로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64절) 통칭 ‘사가랴의 축가’라고 부르는데, 영어로는 마리아의 찬송처럼 라틴어 첫 단어를 따서 ‘베네딕투스’(Benedictus)라고 합니다.
누가는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예언하여 이르되”라고 기록했습니다. (67절) 짐작건대 그가 입이 풀리자마자 지난 열 달 동안 하나님과 영적인 씨름을 한 결과를 쏟아놓았을 것입니다. 마리아의 찬양 시에는 성령 충만을 받았다는 설명이 없으므로 엘리사벳의 집에 석 달간 거하는 도중에 혹은 집으로 돌아가는 시점에 그 찬양을 했을 것입니다. 마리아에게 성령이 역사하지 않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가랴가 아무래도 마리아에 비해 구약 성경에 관한 지식이 더 많은 데다 세 배나 더 오랫동안 하나님과 씨름한 열매가 본문의 찬양이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는 평범한 아녀자인 마리아와는 달리 제사장이었기에 단순히 하나님의 은혜만 찬양하지 않고서 백성들을 향한 제사장적인 축복 기도의 양식을 취했습니다. 그는 평생에 한 번만 차례가 돌아오는 분향을 하는 날에 성소 안에서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분향을 마친 제사장은 성소에서 나오면 곧바로 밖에서 함께 기도하며 기다린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아론 대제사장에게 명한 축도를 해주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그 기도문은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입니다. (민6:24-26)
이 축도도 제사장은 평생에 한 번밖에 못 하는데, 사가랴는 벙어리가 되는 바람에 행하지 못했습니다. 그로선 자기 잘못으로 축도하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함께, 일생의 기회를 허무하게 날려버렸다는 미련이 계속 남았을 것입니다. 드디어 말문이 트였기에 성전은 아니지만, 함께 모인 이웃과 친족들에게 속 시원하게 축복하는 기도를 한 셈입니다. 아론의 축도처럼 하나님의 구원을 간구하면서 결론도 똑같이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라’라고(79절) 마무리했습니다.
성전에서 행하는 아론의 축도가 제사장 개인에겐 평생에 한 번 돌아오지만, 이만 명이 넘는 제사장이 번갈아 가며 매일 행했습니다. 이 찬양 시도 그래서 사가랴 자신의 신앙고백으로 그쳐선 안 되며 백성이, 당연히 오늘날의 신자들도 매일매일 하나님께 올려드려야 하는 찬양이 됩니다.
신자라면 교회 예배와 각종 모임은 물론이고 혼자 개인적으로 부르는 찬양을 예사로 여겨선 안 됩니다. 자신의 진심과 전심을 담아서 삼위 하나님께 온전한 감사와 경배로 바쳐져야 합니다. 찬양은 곡조보다 그 가사에 주목해야 합니다. 어떤 가사든 자기 입에서 내뱉는 순간 그 가사대로 믿을 뿐 아니라, 그 가사대로 자기 삶에 실현하고 있다는 간증이 되어야 합니다. 최소한 그렇게 되고 싶다는 간절한 기도문은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 찬양을 올려 드린 것이 아니라 자기 혼자만의 감상에 젖어서 그냥 노래를 부른 것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의 맹세
이 찬양의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눠집니다. 전반 68-75절의 주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 베푸실 구원이고, 후반 76-79절의 주제는 태어난 아기 요한이 앞으로 맡을 사역에 관한 것입니다. 전반이 하나님을 높인 찬양이라면, 후반은 찬양이 곡조가 붙은 기도라고 하듯이 요한을 필두로 백성들을 위한 기도인 셈입니다. 요한이 행했던 사역은 익히 알고 있고 이미 실현되었으므로, 신자들이 그 뜻을 정확히 살펴서 자신의 신앙고백으로 삼아야 할 바는 전반의 하나님에 대한 찬양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제사장 사가랴가 열 달이나 구약 성경을 연구한 끝에 작사한 찬송가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구약 성경도 곳곳에서 구원이 인간의 공로에 달린 것이 전혀 아니며 전적으로 하나님의 긍휼에 따른 은혜라고 계시한다는 점에도 주목해야 합니다. 사가랴도 그런 말씀들에 주목하여서 지었기에 사실상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찬양하는 내용입니다.
우선 구원의 뿔을 다윗의 집에 일으켜서 원수와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해 준다고 했습니다. (69-71절) 메시아를 다윗의 집에 일으킨다는 것은 구약 내내 예언되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네 몸에서 날 자손”이 영원한 왕국을 세울 것이라는 언약을 다윗과 맺었으며(삼하7:12-16),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도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라고 그 언약을 다시 확인했습니다. (사11:1-10) 이 약속대로 예수님의 육신적 아버지인 요셉은 유다 지파, 다윗 가문의 후손입니다. (마1:1-17) 사가랴도 그래서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라고 강조한것입니다. (70절)
특별히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일이라”(71절) 라는 표현은 다윗 본인의 말을 인용한 것입니다. 다윗은 자기 인생 전반에 역사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회상하는 장문의 찬양 시를 지었습니다. (삼하 22장) 그 표제를 “모든 원수의 손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신 그날에” 라고 붙였으며, 그 내용도 전부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어서 사가랴는 이스라엘의 구원은 하나님이 그들의 선조인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의 성취라고 마리아의 찬양과 같은 맥락으로 선언합니다. (72, 73절) 그런데 그 구원을 하나님의 ‘약속’이나 ‘언약’이라고 말하지 않고 ‘맹세’라고 표현했습니다. 맹세라는 히브리어 ‘니시바’는 약속이나 언약보다 그 실현의 진정성과 신실성을 더 확실하게 보장한다는 뜻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이 명시적으로 맹세하신 적이 딱 한 번 있는데, 사가랴는 그 일을 기억하고서 언급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인생 말년에 외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에 순종하자, 하나님은 당신께서 미리 준비해 놓은 양을 제물로 대신 받으시고 이삭은 살려주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창22:16-18)
히브리서 기자는 이 말씀을 두고서 하나님이 “자기보다 더 큰 이가 없으므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셨다”라고 설명합니다. 사람들은 자기들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함으로써 약속을 확증하지만, 하나님에게 더 큰 자가 없으므로 스스로 맹세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셨으니까, 만약 어기면 하나님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없어지는 법은 절대로 없으니까,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반드시 실현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맹세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이어받는 언약의 후손에게 영원토록 유효한 소망이자 위로가 된다고 히브리서 기자는 부연해서 설명했습니다. (히6:13-18)
아브라함의 씨는 하나님의 구원 약속을 실현할 후손인데, 직접적으로는 하나님이 어린 양 대신에 살려 준 이삭이며 궁극적으로는 이삭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님입니다. 바울도 그래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롬9:7)라고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차면서 이삭, 유다, 이새, 다윗으로 이어지다 예수님이 약속의 씨로서 요셉과 동정녀 마리아 사이에 탄생한 것입니다. 천하 만민에게 구원의 복을 주어서 영원한 왕국을 세울 수 있는 존재는 인간 왕이 아니라, 성육신하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뿐입니다.
속량의 구원
사가랴가 하나님이 맹세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한 것은 이스라엘의 구원이 단순히 그들의 선조와 맺은 언약을 지키는 차원을 넘어선다는 뜻입니다. 이삭을 대신해 당신께서 미리 준비해 놓은 양을 번제 제물로 받으신 후에 맹세하셨으니까, 이스라엘의 구원도 그런 방식이 될 것이라고 예고한 것입니다. 물론 그가 아직은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 진리를 정확히 알지는 못했겠지만, 성령의 충만함을 입었기에 구약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이 베푸실 ‘긍휼의 구원’은 깨달았습니다.
그러니까 이 시에서 가장 먼저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보사 속량하시며”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67절) 그로선 모든 이에게 꼭 알려주고 싶은 내용이라서 서두에 결론부터 제시한 것입니다. 이제 곧 실현될 이스라엘의 구원을 원수의 손에서 건져주는 것으로만 보지 말고 오히려 ‘속량’이라는 차원으로 접근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입니다.
여기서 ‘속량(贖良)은 한자어로서 ‘몸값을 받고 노비를 풀어서 양민으로 만들어 주는 것”을 뜻하는데, 같은 의미의 헬라어를 번역한 것입니다. 속량의 헬라어 ‘리트로시스’는 노예의 몸값으로 바치는 물건이나 대금(영어로는 ransom)을 뜻하는 ‘리트론’에다 행동을 나타내는 ‘이시스’를 붙인 합성어입니다. 사가랴는 지금 이스라엘이 노예로 속박되어 있으므로 반드시 대속물을 바쳐서 풀어내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이스라엘이 로마의 식민지가 되어 있는 상태를 말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틀림없이 사가랴는 제사장으로서 성전에서 드리는 속죄의 제물, 특별히 대속죄일에 드려지는 희생양을 통해서 얻는 속량을 염두에 두었을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그는 이삭을 대신해서 어린 양을 제물로 받고서 하나님이 맹세하셨다는 사실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로마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키려면 현실적으로는 전쟁을 치러야만 합니다. 만약 금전이나 재물로서 대속물로 바쳐 해방되려면 수치로 환산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양이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감당할 수도 없으며, 로마가 그런 제안을 받아들일 리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로마와 독립 전쟁에서 전사할 이스라엘 백성의 수많은 죽음을 속량이라고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메시아를 보낼 필요도 없고 당장이라도 열심당이 주도하여 전쟁을 일으키면 됩니다.
사가랴는 성령의 영감을 받아서 장차 하나님께 합당한 대속물이 바쳐짐으로써 이스라엘이 속량 될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아들 요한이 맡을 일도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알게 하리니”라고 선언한 것입니다. (77절) 말하자면 하나님이 로마의 사악함을 처벌하여서 로마보다 의로운 이스라엘을 해방해 주는 구원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당신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그들 자신의 죄에서 건져주는 구원입니다.
따라서 오실 메시아는 원수를 무찌르는 힘이 센 용사가 아니라 백성들의 죄를 사하기 위해 대속 제물로 바쳐지는 존재가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의 죄를 사해주는 권세는 오직 하나님만이 가지므로 하나님이 직접 베푸시는 구원입니다. 그리고 가브리엘 천사의 고지대로 마리아가 지극히 크신 이의 아들을 성령으로 잉태할 것입니다.
마리아와 사가랴의 두 찬송을 합치면, 성자 하나님이 이 땅에 직접 오시고 또 그분이 대속 제물로 성부 하나님께 바쳐짐으로써 이스라엘의 죄를 사해주는 구원이 이뤄질 것이라는 뜻이 됩니다. 결국 메시아가 와서 무찔러 줄 원수는 아담의 타락 이후로 인간을 노예로 묶고 있는 죄의 힘입니다. 또 그런 구원에 대해 요한이 백성들에게 알려줄 것이라고 지금 사가랴는 성령의 인도에 따라서 예언한 것입니다.
죄 사함의 물세례
나중에 요한은 실제로 메시아의 오심에 대비해 백성들로 죄를 회개케 하는 물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러면서 오실 메시아는 성령과 불로서 세례를 줄 것이라고, 즉 쭉정이와 알곡을 구분하여 직접 구원과 심판을 행할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그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나오는 것을 보고 임박한 진노를 피할 수 있다고 여기지 말고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통렬하게 꾸짖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능히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할 수 있으므로 너희가 감히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고 예리하게 지적했습니다. (마3:7-12)
만약 로마에서 해방시켜 주는 구원이라면 메시아는 유대 지도자들인 바리새인 및 사두개인들과 적극 협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요한은 그들이 진심으로 회개하지 않으면 불에 태워진다고 했고, 더 중요하게는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은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후손이 되게 한다고 합니다.
돌은 도덕적으로 의로운 선행이나 종교적으로 경건한 관습을 전혀 할 수 없는 사람을 상징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구원을 베푸신다는 뜻으로, 모든 인간이 죄의 노예가 되어서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죽음의 벌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도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서 그들을 꾸짖으면서 사실상 십자가 복음을 선포한 것입니다. 어쩌면 그가 자라면서 아버지 사가랴에게 본문의 찬양대로긍휼의 구원에 대한 신앙 교육을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사가랴는 태어날 아이가 맡을 일이 죄 사함의 구원을 백성들로 알게 하는 것이라고 예언한 후에, 그 구원이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라고 밝혔습니다. (78절a) 당시에 도덕적으로 가장 의롭고 종교적으로 가장 경건했던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돌에 비유되었다면 다른 모든 이도 그렇습니다. 말하자면 인간 쪽의 자격 조건 실력으로는 아예 구원을 얻을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이 긍휼을 베풀어 주셔야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한다”라고 한 것입니다. (78절b) 인간의 육신적 생존을 책임지는 해는 땅이나 바다에서 위로 돋지만,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79절) 인간의 영혼을 되살리는 구원의 해는 그 반대로 하늘로부터 임한다는 것입니다.
속량에 의한 죄 사함의 구원도 서두에 말씀드린 대로 구약 성경 곳곳에서 예언되어 있습니다. 히브리어 속량 ‘파다’는 몸값을 치르고 해방시킨다는 뜻이고, 또 억울하게 죽은 친족의 피를 살인자에게 대신 갚아주는 ‘고엘’도 그와 같은 맥락입니다. 특별히 이스라엘이 성전에 올라갈 때 부르는 시편 130편은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 그가 이스라엘을 그의 모든 죄악에서 속량하시리로다”(7,8절)라고 끝을 맺습니다.
제사장 사가랴는 눈을 감고도 외우는 찬양이었고, 열 달 동안 벙어리로 있으면서 하나님과 영적인 씨름을 할 때도 성전에서 여호와의 면전에 나아간다는 생각으로, 계속 마음속으로 외웠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의 구원이 다윗 왕국의 재현이 아니라 속량에 의한 죄 사함이 될 것이라고 더더욱 확실히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열 달 후 말문이 트이자 곧바로 내뱉은 첫 마디가 이스라엘을 속량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었습니다.
완전히 파괴된 성전
안타깝게도 이스라엘은 사가랴의 찬양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다윗의 집에 일으킨다는 ‘구원의 뿔’에만 모든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유대 지역 동물 중에 뿔이 난 것은 힘이 세므로 ‘뿔’은 힘센 장수나 왕을 뜻합니다. 사가랴는 다윗의 집에서 영원한 왕이자 백성의 죄를 속량하는 대속 제물이 나온다고 말한 것인데, 백성은 정치 군사적으로 아주 힘센 장수나 왕이 나와서 이스라엘을 로마에서 해방해 주리라 기대했습니다. 자기들은 율법을 잘 지키고 성전 제사도 성실히 준행하고 있으므로 죄를 사해주는 구원은 아예 필요 없다고 착각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마지막 주간에 하나님께 만민이 기도하는 집을 강도의 굴혈로 바꾸었다고 성전의 환전상과 제물 장사치를 크게 야단치며 쫓아내었습니다. 그리고 그 성전을 허물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짓는다고 선포했습니다. 성전은 속죄 제사, 즉 죄 사함의 구원을 위해 존재하는데 당신이 바로 그 성전이라는 것입니다. 당신께서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 백성의 죗값을 대신 감당하고, 또 사흘 만에 부활함으로써 야곱의 집을 영원히 다스리는 왕이 되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아무 죄 없는 당신께서 하나님께 온전한 제물로 바쳐지는 영단번의 제사가 참 하늘에서 성취될 것입니다. 성전에서 짐승 제물로 죄 사함을 받는 모세의 율법 시대는 완전히 종결되고 은혜의 새 시대가 열림으로써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행한 맹세도 완전히 성취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께서 택하여서 성령으로 간섭한 하나님의 자녀들을 빼고는 모든 이스라엘이 여전히 모세 율법과 성전의 짐승 제사에 집착하면서 주님을 거역 배척 대적했습니다. 급기야 스스로 로마에서 독립하려고 전쟁을 일으켰으나,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서 AD 70년에 성전의 돌이 하나도 남지 않고 무너질 정도로 처참하게 패배했습니다. 특별히 주후 73년에 마사다에서 마지막까지 항전한 약 960명의 유대인이 집단 자결함으로써 전쟁은 비참하게 마무리되었습니다. 앞에서 설명해 드린 대로 그 많은 사람이 자신을 일종의 대속물로 바친 셈인데도 이스라엘은 완전히 멸망했고, 약 천구백 년간 고향을 등지고 온 세계를 떠돌아다녀야 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비극적인 과거 역사로 그치지 않습니다. 너무나 안타깝게도 그들은 아직도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면서 자기 민족만 높여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신약 성경은 아예 인정하지 않으며 구약 성경에서 예수님을 정확히 예언한 이사야서 53장도 빼버리고 가르칩니다. 창조주 여호와는 천하 만민의 유일한 하나님이므로 이미 오신 예수님 외에 그들에게 다시 오실 그들만의 메시아는 없습니다. 참으로 안타깝고 애처로운 민족으로, 사가랴의 이 찬양을 들었을 때 느꼈을 친족과 이웃의 감동은 완전히 허사가 되었습니다. 짐작건대 천국에 올라간 아브라함은 자기 후손들의 완악한 고집을 무너뜨리려고 매일 눈물로 기도할 것입니다.
구원의 의미
정작 문제는 그들이 아닙니다. 오늘날의 신자가 과연 사가랴의 이 찬양을 온전히 자기들의 현실 삶에 실현하고 있을까요? 아니 그 의미라도 제대로 알고 있을까요? 자신이 받은 구원이 자기를 대신해서 예수님이 죽음으로써 영단번의 죄 사함을 받아서 하나님의 친 백성이 되었음을 진정으로 확신하고 있을까요? 교회에서 성실하게 봉사하고 새벽 기도마다 뜨겁게 기도하고 있어도 혹시 자기만의 다윗 왕국을 쌓으려는 소망에 가득 차 있지는 않을까요?
성인이 되어서 교회에 출석하게 된 동기가 현실적으로 너무나 큰 문제나 환난에 빠져서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심정이 대부분이라고 합니다. 물론 그것도 하나님이 구원으로 인도하는 과정일 수 있고 또 그래서 간절히 기도하여 문제를 해결 받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신자를 개인적으로 알고서 그 삶을 주관 보호하신다는 진리를 깨닫게 해주려는 그분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그 후로도 계속해서 현실적인 문제와 고난만 해결 받으려 하나님을 찾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해선 안 됩니다. 요한에게서 크게 야단맞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처럼 쭉정이로 분류되어서 불에 타는 심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 전에 모든 세대의 모든 인간은 평생토록 자신의 의로는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합니다. 자기 죄를 도무지 씻을 수 없는 영적인 시체, 즉 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인 당신의 독생자를 대속물로 받으시고서 그 의를 믿는 자만 구원해 주십니다. 인간에게 하나님의 이 십자가의 긍휼 외에는 아무 소망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신자에게 현실 삶의 형통과 풍요를 주려고 구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아무 공로 없고 완전히 무익한 죄인이었다가 여전히 죄에서 벗어나지 못한 신자에게만 현실적 축복을 준다면, 역으로 따져서 일종의 차별입니다. 하나님이 창조 때부터 영원까지 인간에게 바라는 것은 영적인 순결이며, 또 그런 상태라야 당신과 진정으로 아름다운 교제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을 이 땅에 존재케 한 유일한 목적이 당신을 평생토록 기뻐하며 찬양 경배토록 하는 것입니다. 인간을 그렇게 지었기에 그러지 않고는 절대 인간다워지지 못합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큰 업적을 세워도 허망 갈급해지며 그 결과는 죄의 삯인 죽음일 뿐입니다. 인간을 위해서 당신을 찬양케 하는 것입니다.
사가랴의 찬양에서도 이스라엘에게 다윗 왕국의 영광이 아닌 죄 사함의 구원을 주시는 목적을 어떻게 설명합니까?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75절) 라고, 즉 종신토록 신자에게 바라는 것이 성결과 의라고 합니다. 하나님 쪽에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대로 회복시켜 주겠으므로 신자더러 두려움이 없이 그렇게 하라고 합니다. 신자는 성결한 삶을 살면서 항상 기뻐해야 하고 주변에 하나님의 의를 실현해 보여야 합니다. 성령으로 온전히 거듭난 신자라면 하나님이 명하지 않아도 실천은 비록 더딜지라도 반드시 그런 삶을 지향하게 됩니다. 또 그렇게 살면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늘의 기쁨과 만족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행위 구원을 가르치는데 그 결론은 죽은 후에 나므로 종신토록 심판의 두려움에 떨게 됩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당신의 십자가 은혜를 순전하게 믿으면 생전에 영생을 선물로 주시므로 심판의 두려움은 완전히 제거됩니다. 신자는 이미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가 되어 있습니다. 아들이 아버지가 자기를 내치리라고 걱정하는 법은 없지 않습니까?
신약 시대 신자에게도 믿음의 조상은 아브라함입니다. 신자는 모든 민족 앞에 복의 근원으로 서야 합니다. 평생토록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주변에 흘러 나가게 하는 통로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를 믿어서 신자가 된 후의 인생의 목적과 삶의 방향은 오직 십자가 복음을 어떤 방식으로든 이웃에 전파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매일 사가랴의 찬양은 물론이고, 세상 사람들을 향해 죄를 사해주는 제사장적인 축복의 기도도 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제사장에게 축도를 하도록 명했듯이, 오늘날의 목회자들도 예배를 마치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 기도를 해줍니다. 그 기도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13:13)를 인용한 것입니다. 주일 성수를 잘 지켰으므로 이번 주도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 아래 형통하라는, 아니면 최소한 고난에서 지켜준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현실적인 축복이 쏟아부어질 것 같은 기대로 그 축도를 들어선 안 됩니다. 예배를 마감하는 축도이므로 새로운 한 주간의 삶을 설교에서 가르친 대로 예수님이 십자가로 구원하신 그 뜻과 은혜에만 의존해야 하고 또 이웃과 그 받은 은혜를 나누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현대 교회의 축도도 사가랴의 이 찬양을 축약한 셈입니다. 신자는 죄 사함의 구원은 이미 받았으니까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라”라는 것이 그 뜻입니다. 새로운 한 주를 반드시 그렇게 살라는 것입니다. 정말로 솔직히 한 번 따져 보십시오. 최소한 주일 예배에서 지난주에 지은 죄라도 진심으로 회개합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선 다음주에는 그와 똑같은 죄는 절대 짓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실천하십니까? 그러지 않고 하나님의 힘을 빌려 나만의 다윗 왕국을 세울 꿈에 젖어 있다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것이 아니라 아직도 ‘돌들’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11/16/2025) 박진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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