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중공군 개입과 통일의 좌절
1950년 10월 25일, 북진을 계속하고 있던국군과 유엔군이 박천-울산-온정리 회천을 연하는 선까지 진출하였을 때 불의에 중공군의 기습을 받게 되었다. 국군은 물론 미국의 정보기관이나 미군의 군사정보 기관에서도 중공군 개입에 관한 사전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한국전쟁 발발 최초의 상황처럼 전혀 캄캄한 상태였다.
일부에서 소련이나 중공의 군사개입을 염려하는 소리도 가끔 있었지만 미군 당국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중공군 대부대는 울산, 온정리, 회천 방면으로부터 은밀히 침투하여 국군 및 유엔군 공격부대를 후방에서 차단하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서도 10월26일에는 육군 제6사단의 전투부대가 압록강변 초산에 도달하였으며 서부 지역의 미 제1군단 예하 미 제24사단은 11월1일에 신의주 남방 27km 지점인 정거동까지 진출했다.
중공군은 국군과 유엔군의 진격에는 개의치 않고 후방 깊숙이 침투를 계속하고 있었다. 중공군은 그들의 관용전술 (慣用戰術:usage tactics)인 「후방 치단 후 포위하여 뒤통수를 치는 전법」을 구사하기 위해 은밀히 움직일 뿐이었다.
그 수조차 정확히 알 수 없는 중공군의 기습공격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순식간에 혼란에 빠졌다. 공세가 좌절된 것은 물론 병력과 장비의 손실이 막대하였다. 통일을 눈앞에 두고 흥분에 들떠 있던 국군에게는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생전 듣지도 못한 이상 야릇한 피리소리와 함께 징, 꽹과리, 북 등을 치며 사방에서 공포심과 함께 혼을 빼는 소란을 피워가며 포위망을 좁혔다.
중공군은 공격의 기세를 늦추지 않아 국군과 유엔군은 1월7일에 평택-삼척선으로 후퇴, 새 방어선을 편성하였다.
그러나 중공군도 병참선이 멀어지고 유엔 공군기의 집요한 공격으로 피해가 늘어감에 전력이 약해지는 징후가 보이기 시작했다.
중공군의 공격역량이 한계점에 다다른 것을 간과한 국군과 유엔군은 1월25일을 기하여 수원-강릉선에서 일제히 반격을 개시하였다.
국군 및 유엔군은 한강남안-횡선선에 이르렀을 때 다시 중공군에 반격에 부딪쳐 한때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했으나 3월15일을 기하여 국군과 유엔군은 1.4후퇴 이후 70일 만에 서울 재탈환에 성공하였다.
이 여세를 몰아 국군과 유엔군은 전진을 계속하여 3월 말에는 38선을 회복하였다.
중공군은 다시 다섯번째의 공세가 되는 소위 춘계 공세를 시작하였다. 이 공세는 중공군의 참전 이후 최대병력이 동원된 마지막 공세였다.당시 중공군의 병력은 4개 병단,16개 군단,51개 사단 규모였다.
중공군의 춘계공세는 쌍방간 서울 공방에 초점을 두고 실시된 작전이었으나, 중공군의 서울 탈환은 성공하지 못한 채 피아 공히 막대한 손실을 내고 막을 내렸다.
국군과 유엔군은 반격작전을 계속하여 6월15일에는 문산-철원-화천-간성에 이르는 주요지역을 점령하고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기 시작하였다.중공군도 그 북쪽에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유엔군이 공격을 중단하고 방어선을 구축하게 된 이유는 작전의 주도권을 장악하여 전세는 유리한 상태에 있으나 전쟁 전의 원상태에서 휴전을 모색하려는 미국의 정치적 고려 때문이었으며, 중공군이 수세로 전환하게 된 이유는 춘계공세 이래 연이은 치명적 손실로 인하여 공격능력을 상실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이때부터 전선은 교착상태로 전환되고 있었으며 전투는 국지전 형태에서 피아 소모전만 반복하게 되었다.
이렇게 됨으로써 한국측은 실망과 좌절에 빠지게 되었다.왜냐하면 국토통일의 기회를 상실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측에 강력한 항의를 하는 한편,국군만의 북진 결행으로 사태를 반전시키겠다고 위협했지만 미국의 국익과 세계 여론이라는 두 장벽에 부딪쳐 우리의 염원은 관철되지 못하였다. 이는 한국과 한국인에 있어서 비극의 또 다른 시작이었다.
결국 진지 쟁탈전에 진입하면서 휴전협정으로 이어지고 한국전쟁은 승자와 패자가 없는 끝나지 않는 전쟁의 국면으로 들어섰다
중공군은 공격의 기세를 늦추지 않아 국군과 유엔군은 1월7일에 평택-삼척선으로 후퇴, 새 방어선을 편성하였다.
그러나 중공군도 병참선이 멀어지고 유엔 공군기의 집요한 공격으로 피해가 늘어감에 전력이 약해지는 징후가 보이기 시작했다.
중공군의 공격역량이 한계점에 다다른 것을 간과한 국군과 유엔군은 1월25일을 기하여 수원-강릉선에서 일제히 반격을 개시하였다.
국군 및 유엔군은 한강남안-횡선선에 이르렀을 때 다시 중공군에 반격에 부딪쳐 한때 치열한 공방전을 전개했으나 3월15일을 기하여 국군과 유엔군은 1.4후퇴 이후 70일 만에 서울 재탈환에 성공하였다.
이 여세를 몰아 국군과 유엔군은 전진을 계속하여 3월 말에는 38선을 회복하였다.
중공군은 다시 다섯번째의 공세가 되는 소위 춘계 공세를 시작하였다. 이 공세는 중공군의 참전 이후 최대병력이 동원된 마지막 공세였다.당시 중공군의 병력은 4개 병단,16개 군단,51개 사단 규모였다.
중공군의 춘계공세는 쌍방간 서울 공방에 초점을 두고 실시된 작전이었으나, 중공군의 서울 탈환은 성공하지 못한 채 피아 공히 막대한 손실을 내고 막을 내렸다.
국군과 유엔군은 반격작전을 계속하여 6월15일에는 문산-철원-화천-간성에 이르는 주요지역을 점령하고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기 시작하였다.중공군도 그 북쪽에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다.
유엔군이 공격을 중단하고 방어선을 구축하게 된 이유는 작전의 주도권을 장악하여 전세는 유리한 상태에 있으나 전쟁 전의 원상태에서 휴전을 모색하려는 미국의 정치적 고려 때문이었으며, 중공군이 수세로 전환하게 된 이유는 춘계공세 이래 연이은 치명적 손실로 인하여 공격능력을 상실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이때부터 전선은 교착상태로 전환되고 있었으며 전투는 국지전 형태에서 피아 소모전만 반복하게 되었다.
이렇게 됨으로써 한국측은 실망과 좌절에 빠지게 되었다.왜냐하면 국토통일의 기회를 상실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측에 강력한 항의를 하는 한편,국군만의 북진 결행으로 사태를 반전시키겠다고 위협했지만 미국의 국익과 세계 여론이라는 두 장벽에 부딪쳐 우리의 염원은 관철되지 못하였다. 이는 한국과 한국인에 있어서 비극의 또 다른 시작이었다.
결국 진지 쟁탈전에 진입하면서 휴전협정으로 이어지고 한국전쟁은 승자와 패자가 없는 끝나지 않는 전쟁의 국면으로 들어섰다.
이렇게 하여 장장 70년 오늘까지 이어지는 한국전쟁 정전 상태는 인류의 유래없는 비극으로 남게 되었다.
7.한국전쟁 4대 영웅 선정의 진실
전쟁에는 영웅이 출현한다. 우리나라 역사를 통해 가장 위대한 영웅을 추대하라면 단연코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 장군이다. 어디 임진왜란뿐이랴, 우리나라는 반만년 간 수 없는 외세의 침탈에서 그때그때 영웅이 나타나 나라를 지켰다.
한국전쟁, 역사상 가장 처참한 동족상잔을 선정하라면 한국전쟁일 것이다. 그 전쟁에서의 인명 피해와 재산 손실이 역사상 가장 큰 것으로 유추하기 때문이다.
1983년, 정부와 육군본부는 전역후 전업 작가로 창작에 몰두하고 있는 나에게 중요한 과제가 주어졌다. 한국전쟁의 영웅을 부각시켜 그 영웅의 전기 소설을 집필해달라는 내용이었다. 한편 그 작품을 원작으로 하여 KBS 1TV에서 3부작 드라마로 방영하겠다고 했다.
나는 우선 많은 영웅 가운데 최고의 영웅을 선정해야 했기에 우선 선정 작업 계획을 세웠다. 원로 장군을 위시하여 선정에 일가견이 있는 장군 세 분을 정중히 모셔서 고견을 듣기로 했다.
1군사령관을 역임한 이한림 예비역 중장, 2군사령관을 역임한 이병형 예비역 중장,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장을 역임한 박정인 예비역 준장 그 세 분 장군이었다. 그 세 분 장군은 공정하고 신망이 두터운 장군이었기에 심사 후에도 그 결정에 대해 누구 하나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다. 더구나 1983년 만 해도 한국전쟁 참전 장군들이 대부분 생존해 있었기 때문에 그들로부터의 여론 수집은 쉽게 취합할 수 있었다. 여론 수집 또한 4대 영웅에 이견이 없었다.
내가 제시한 4대 영웅은 첫째, 한국전쟁 초전, 국군의 붕괴를 수습하고 한강방어로 인민군의 남침을 4일간 이상 저지하면서 국군의 재편성을 가능케 하고 미국의 군사개입을 성사케 한 시흥지구전투사령관 김홍일 장군. 특히 중국군 장군으로서 항일전과 광복군 공로도 첨가됐다.
두 번째, 한국전쟁 초전 춘천 전투에서 전선 사단장 가운데 유일하게 적 진출을 일시 저지에 성공하여 인민군의 남침 전략을 변경케 한 6사단장 김종오 대령, 그 후 백마고지 전투에서의 대승을 이끈 전공이 첨가됐다.
다음으로 미군측 인천상륙작전의 맥아더 장군과 낙동강 방어작전 불퇴전의 워커 장군이었다.
이미 6.25 참전자들은 그들 4명의 영웅적 전공을 입에 오르내리는 명실공히 4대 영웅이었다. 그래서인지 첫 모임, 첫 심의에서 그 네 영웅에 대해 단 한 사람 이의를 제기하지않았다. 만장일치였다.
나는 관계 당국에 이를 알리고 이 가운데 김홍일 장군 전기 소설을 집필하기로 하여 1984년 10월 1일 '五星將軍 김홍일'을 서문당 출간작으로 완성했다. 김홍일 장군은 옛 중국군 유일한 정규군 중장으로 2성이었고 한국군 중장 3성을 함께 해 5성장군으로 비유했다. 이어서 다음 해인 1985년에 내가 추천한 유현종 작가에 의해 '白馬高地'를 을지출판사에서 출간, 김종오 장군 전기소설을 당국에 제출됐다.
1985년 KBS 1TV는 박경석 원작 3부작 '五星장군 김홍일' 을 3일간에 걸쳐 국군의날을 기해 골든 타임에 방영 되었고 다음해에 유현종 원작 '白馬高地'가 역시 골든 타임에 KBS 1TV에서 방영했다.
그후 긴 세월 동안 아무런 잡음 없이 한국전쟁 4대 영웅이 이미 공개한 김홍일, 김종오, 맥아더, 워커로 전해지고 있으나 근간에 한국군 측 영웅으로 백선엽 장군과 김동석 대령이 언론에 언급되면서 혼란을 야기했다. 확인과정을 거쳐 밝혀진 내용은 미군측에 의해 보도된 것이었다. 그 두 인물의 공적을 폄하할 의도는 없지만 그들은 미군을 위해 헌신적인 협조자로 이미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었다.
원래 전쟁 영웅이 때때로 가짜가 돌출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구 일본군의 경우 태평양전쟁 중 '육탄3용사' 라는 전쟁 영웅을 부각시켜 일본 여러 곳에 동상을 세우는가 하면 교과서에도 일제히 게재되어 일본 국민들이 눈물을 흘려가며 추앙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일본군 '육탄3용사'가 조작되었음이 밝혀져 해프닝으로 끝났다.
한국전쟁에서도 일본군 만주군 출신 장군들에 의해 가짜 영웅이 만들어져 한때 소동이 벌어졌지만 요즈음은 잠잠해졌다. 우리 육군의 적 전차를 육탄으로 부셨다는'심일 소령'과'육탄5용사', 적 토치카를 육탄으로 파괴하고 장렬하게 산화했다는'육탄10용사' 사건이 대표적인 해프닝이었다. 육탄으로 토치카를 부수고 전사했다는 '육탄10용사' 가운데 한 사람이 북한 방송에 귀순병으로 출현한 사건은 웃어 넘길 수 없는 우리의 지난 부끄러운 전사의 한 가닥이였다. 이 엉뚱한 가짜 영웅을 기리는 동상이 아직 그대로 남아있고 과거 교과서에도 실렸는가 하면 군가까지 만들어 불러댔다. 이야말로 이 모든 흔적들이 일본군(만주군 포함) 출신 장군들에 의해 만들어졌으므로 이 경우 일본 군국주의 잔재라 하겠다.
*자료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