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무시무시한 한니발 렉터 박사는 FBI 연수생 클라리스 스탈링에게 이렇게 제시합니다.
“자, 당신이 그의 문제를 해결해 준다면 나도 당신의 문제에 대해 얘기를 해 줄 수 있을 거요. 퀴드 프로 쿠오(Now. See if you can apply yourself to his problem and perhaps i’ll apply myself to yours. Quid pro quo).”
(토마스 해리스의 ‘양들의 침묵’에서)
라틴어 ‘퀴드 프로 쿠오(quid pro quo)’는 법률용어로 ‘대가성 거래’를 말하는 것인데, 쓰임에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기브 앤드 테이크(give and take)’라는 말과 닮았습니다.
기브 앤드 테이크는,
내가 이만큼 해주니 너도 그에 상응하는 것을 해야지.
네가 전에 이렇게 해줬으니까 내가 이 정도 해준다.
이런 뜻이겠습니다.
가끔 사람들 간에 갈등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가 이만큼 해줬는데 쟤는 거기에 보답이 없어.
내가 다섯 번 샀으면 너는 한 번 정도는 사야 되는 것 아니야?
지난 번에도 내가 먼저 전화했는데 또 내가 먼저 전화하네.
이번 화이트데이 때 선물은 내가 발렌타인데이 때 해 준 것보다 못하네 ...
이 ‘주고 받는다’는 개인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국제적인 문제로도 여겨집니다.
2019년 우크라이나 스캔들로 미국 정가가 한바탕 소란스러울 때 당시 미국 대통령 트럼프가 자주 쓰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우크라이나에 군사지원할테니, 민주당 조 바이든의 우크라이나 에너지업체 비리의혹을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오죽하면 NYT(뉴욕 타임즈)는 이와 관련해 “퀴드 프로 쿠오란 무엇인가?”라는 기사를 올리기도 했습니다(‘What Is a Quid Pro Quo?’ 2019. 11. 21).
성서로 갑시다.
구약성서에 종종 “~하면, ~하리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조건절로 보이는 이 구절들은 흔히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된 자가 율법조항을 지키면, 하나님께서 이러저러한 복을 내리신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성서의 본질은, 먼저 하나님이 강조됩니다.
즉 ‘이미 하나님께서 하셨으니’가 저 내용의 기초로 있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박해받는 동포를 구원하고자 설익은 혁명가 흉내를 낼 때, 응답은 그가 광야로 쫒겨나 살아가는 삶이었습니다.
광야에서 오랜 시간을 보낸 후 그는 하나님의 계시를 듣습니다.
그제서야 순서를 제대로 짚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당신의 백성의 고통을 보셨고, 그 부르짖음을 들으셨고, 그 근심을 아셨다는 것을 말입니다(출 3:7).
벌써부터 자기 백성에게 한없는 연민을 가지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신앙은 하나님께서 먼저 하신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의 잘 알려진 구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10).”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일 4:19).”
여기에는 기브 앤드 테이크가 낄 자리가 없습니다.
잘못하면 이는 거래가 됩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주시고 나는 받는다, 이 말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렇게 잘하셨으니 내가 이 정도는 해드리지요’라든가, ‘내가 이렇게 정성을 보이니 당신은 내게 구원이든, 천당이든, 물질이든 뭐든 꼭 줘야 합니다’는 문제가 됩니다.
이는 경건한 사람이 가져서는 안 될 생각입니다.
더욱이 문제는 ‘내가 무엇을 했으니’라는 말에서 보이는 오만입니다.
여기에는 주권을 내가 갖고 있다는 뉘앙스가 있습니다.
참 성도는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사람들입니다.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약 4:15).”
바울은 하나님의 선물로서 은혜를 오해하지 말 것을 당부합니다(로마서 4:1 이하).
만약에 ‘의로움’이 나의 공로로 얻어진 것이라면 그것은 하나의 삯(보상)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보다는 ‘내가 잘한 무엇’에 집중하게 됩니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주권으로 그저 주시는 것입니다.
덧붙여서 말하고 싶습니다.
이는 신학의 스승에 대한 나의 태도와도 연결됩니다.
왜 스승을 따릅니까?
무엇을 얻고자 합니까?
스승은 내게 직업을 주는 사람도 아니요, 물질을 주는 사람도 아닙니다.
내가 스승으로 인해 얻은 유일한 유익은 내게 주신 그 ‘가르침’입니다.
깨닫는데 느리고, 이해가 미욱하며, 행하는데 게으르지만 가르침 하나만으로도 평생을 사유하며, 계속 배워나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제자에게 배움 외에 ‘그리고 다른 무엇’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배움이 내게 주어진 상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이미 풍족한 사람입니다.
행복한 사람입니다.
첫댓글 깨우침을 주시는 말씀 감사합니다
복 있는 저녁되세요 ^^
모세가 순서를 제대로 짚게 되네요.
메시아 컴플렉스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행하고 계심을 고백합니다.
오늘도 풀리지 않는 문제들을 붙들고 광야에서 고민합니다.
목사님, 사모님, 늘 기브 앤 테이크를 넘어서는 사랑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배우는 목회자로 서려고 하니 감사할 따름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