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기업인 고 최위승 회장의 思母詞
오하룡 시인, 도서출판 경남 대표
무학소주 등의 기업으로 잘 알려진 큰 기업인 마산의 무학그룹 최위승 명예회장이 지난 2022년 6월 2일 향년 9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마산의 대표적인 기업인, 아니 경남의 대표적인 기업인으로 유명한 그는 1932년(양력 1933년생) 경남 고성군 대가면에서 태어났다. 그의 회고록 <포기는 없다>(2012. 도서출판 경남)를 보면 그야말로 흔치 않는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중농의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일제 치하라는 제한적 상황과 부친의 한량 기질로 하여 집안이 점차 몰락하여 겨우 초등교육을 마치고 집안일을 도와야 하는 상황에 처한다.
그러나 영민한 그는 그대로 고향에 붙박여 농사에 매달려 있어서는 미래가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미래를 모색하기 위해 초기에는 가까운 도시 마산을 드나들다가 범위를 차츰 넓혀 부산에 진출하는 계기를 만들게 된다. 적수공권인 여건에서 그는 닥치는 대로 밑바닥부터 여러 직종을 전전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그로 하여 세상물정을 터득하게 되고, 드디어 천부적인 성실성과 사업적인 기질을 바탕으로 유망한 업종을 찾아 만나는 계기가 되어, 오늘날의 대기업인 무학그룹을 일으키게 된다.
필자는 최 회장을 그의 회고록 <포기는 없다>를 출판한 이후 종종 뵈어왔다. 이 책은 그와 평소 절친한, 대한적십자가 경남사무총장과 합포문화동인회 이사장을 지낸 조민규 고문과 경남도민일보 사장, 마산, 창원상공회의소 부회장, 315의거기념사업회 초대회장 등을 지낸 이순항 회장의 소개로 그 집필을 소설가 김현우 선생에게 의뢰하게 되고 그 인연으로 출판까지 맡게 되었던 것이다.
그 이후 최 회장은 김현우 선생과 필자를 종종 점심자리에 초대하는 흥감한 기회를 주셨다. 자신의 책을 집필하고 출판한 인연을 고려한 배려라고 여겨졌다. 필자로서는 책을 출판한 출판사로서 도의적인 면에서 한 번이라도 식사를 대접하고자 했으나 그는 필자의 그런 의사를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언제나 미리 예약하여 처리하는 단호한 성품이었다. 그의 그런 성벽을 알고 나서는 다시는 필자도 고집을 부리지 않고 순순히 그의 뜻에 따랐다.
그가 주선하는 점심이라고 언뜻 좀 특별할 것이라고 여길 수 있겠으나 일반식당의 수준을 넘지 않는 소박한 자리인 것도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식사 성향을 알 수 있는 식당은 조촐한 초밥 집, 아니면 갈치구이 혹은 갈치찌개 전문집, 혹은 선창의 복집 등으로 기억되는데, 한결같이 소탈한 서민 식단을 벗어나지 않았다. 그가 어렵게 자수성가하는 과정의 오랜 습관에서 온 게 아닌가 하는 짐작이 되기도 했지만, 자세히 보면 일부러 그렇게 지향하는 어떤 서민적 철학이 몸에 배어 있다는 느낌도 들었다.
그런 어느 날 2~3년 전이라고 기억된다. 조민규 합포문화동인회 고문의 전화가 있었다. 최 회장님이 같이 점심을 하자는 것이었다. 그는 이런 자리에는 거의 상례이다시피 조 고문을 동석하게 하는 것도 습관이라면 습관 같은 것이 있었다. 그만큼 조 고문과의 가까움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조 고문은 개인적으로 필자와도 가깝게 지내기 때문에 그가 합석하면 그만큼 무난하고 자연스럽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이 자리에서 최 회장께서 필자에게 꺼낸 얘기는, 뜻밖에 생모에 관한 것이었다.
“책의 내용을 봐서 알겠지만 나는 생모에 대한 생각이 간절하다. 그래서 오래전부터 혼자 생각해 왔는데 이제 앞으로 얼마 살지도 모르고 해서 조금이나마 마음의 위안이 되고 생모를 그리는 일이 될까 하여 묘지 앞에 단출한 추모비 같은 세우고 싶다. 쉽지 않겠지만 추모 글을 하나 지어 주면 좋겠다.”
최 회장의 말의 요지였다. 그 말에는 태어난 지 7개월의 유아 때 사별하여 사진 한 장 남아 있지 않아 그 모습도 모르는 그 모친에 대한 아쉽고 안타까운 간절한 연민이 묻어났다.
최위승 회장의 모친에 대한 기록은 그의 회고록 <포기는 없다>(2012년)에 다음과 같이 짤막하게 서술되어 있다. 이 기록은 소설가 김현우가 최위승 회장의 구술을 받아 기록한 것이다.
“나를 낳은 어머니(김해 허씨)께서는 7개월밖에 되지 않는 젖먹이인 나를 두고 갑자기 돌아가셨다. 어머니 제삿날이 칠월 열흘이니 내가 태어난 지 7개월 후임이 확실하다.”
그의 생일은 음력 1932년 12월 19일(양력 1933년 1월 14일)이다.
“마전(고성군 대가면)에서 조금 떨어진 중곡 마을에 외갓집이 있었는데, 어린 나는 외할머니 손에 맡겨져서 키워졌다. 외할머니는 어미 잃은 갓난애를 키우느라 정말 고생을 많이 하셨다. 조모님은 마전에서 자주 오가며 옷가지나 먹을 것을 가져오시곤 하면서 손자 걱정을 많이 하셨다고 한다. 조모님은 장수하셔서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까지 살아계시다가 83세에 돌아가셨다.”
책의 내용에 없는 내용을 최 회장은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주변의 젖먹이를 둔 아낙들을 찾아다니며 돌아가며 젖을 얻어 먹이기 일쑤였다는 것이었다. 외할머니가 그 역할을 맡았고 친할머니는 아침저녁으로 손자의 기저귀며 옷가지를 챙겨 나르느라 몹시 바빴다는 것이다.
최 회장은 생모가 가장 생각날 때가 생존을 위해 객지를 떠돌 때인데, 허기지고 배가 고플 때와 잠자리가 마땅찮아 불편할 때, 그리고 풍족하게 된 후에는 푸짐한 밥상을 볼 때 가장 생각이 많이 났었다고 말했다.
필자는 그 말씀을 듣고 한동안, 과연 그런 최 회장님의 마음을 담는 글을 쓸 수 있을까 솔직히 저어하는 마음이었다. 다른 분을 추천할까 하는 생각도 하며 여러 모로 번민을 하다가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하여, 서너 가지 형식의 시를 만들어 보여 드렸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후 그 중의 한 작품을 표시를 해 주었다. 그러면서
“당장은 실천하기는 어렵고 주변의 의견도 들어야 하고...”
하는 여운을 남기셨다. 그의 부친은 최위승이 6살 때, 그러니까 생모 사후 6년 만에 새 모친을 맞는다. 이 모친에게서 남동생 둘과 여동생이 태어난다. 모친은 전형적인 조선시대 부덕을 지닌 분으로 가정을 원만히 지켰고 아이들도 차별 없이 사랑으로 훌륭히 길러주었다.
필자의 짐작으로는 최 회장께서 생각이 많을 수밖에 없는 것은, 막상 생모에 대해서만 사모의 추모비석을 세우려 하니, 자신을 길러준 계모에 대해서도 일말의 책임의식이 생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다 동생들도 있다. 아무리 생모에 대해 각별하더라도 일방적인 진행은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아무튼 이 정도에서 더 이상 진척을 이루지 못하신 채로, 최 회장은 생모 곁으로 서둘러 이승을 떠나시고 말았다. 최 회장님은 지금쯤 그리던 생모를 만나 그간의 못다 한 회포를 풀고 한껏 모친의 사랑에 감싸여 계시리라 짐작이 되지만, 한편으로는 지상의 한 가지 마지막까지 이루지 못한 추모비에 대해서는 모친께 말씀도 못 드리고 아쉬워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미완의 비문이나마 여기 소개하는 것은, 이렇게나마 그런 최 회장님께 위안과 위로가 되는 자리로 가름 드리고자 하여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리운 어머니
고성 마전리에서 나신
김해 허씨, 우리 어머니
제 낳으시고 일곱 달 만에
너무 일찍 별이 되셨습니다.
할머니, 외할머님이 제 젖줄이었지요.
어머니 그리움
평생 한이었습니다.
심히 배고플 때
잠 잘 곳 마뜩찮았을 때
어머니, 가장 그리웠습니다.
아- 어머니,
넉넉한 밥상 마주하였을 때
눈물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꿈에라도 뵈었으면 했습니다.
그러나 얼굴을 모르는
그리운 어머니,
한없이 그리운 어머니!
0000년 7월 10일 어머니 기일에
외아들 최위승 세움
<월간 경남 11월호(통권 29호)/ 경남신문사>
첫댓글 경건한 마음입니다.
ㅡ고성문협 밴드로 옮겨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