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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술을 좋아하고 남보다 많이 마신다고 생각한다. 이전 60살 즈음에 얼마나 마시는지 알아보려고 메모해 보았는데, 반년 동안에 소주·맥주·막걸리를 합해서 288병이나 마셨다. 하루 1.6병을 먹은 꼴이어서 스스로 놀라고 이건 아니다 싶어서 적는 걸 그만두기는 했지만, 이후에도 술을 줄이지는 못했다. 조금 덜 마시고 건강도 생각해야지 하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무슨 병 아닌가 하고 생각하기도 한다. 물론 내 몸이 받아 주지 않는다면 권해도 안 마시겠지만, 술을 좋아하는 만큼 술에 대해서 아는 게 있냐?고 묻는다면 대답할 말은 없다. 겨우 알콜과 칼로리로 되어 있다는 정도. 책의 저자 이대형 선생도 나처럼 술을 좋아한 모양이지만, 그는 술에 대해서도 알고, 술에 인문학과 철학을 부여하면서 마시는 것 같은데, 그와 같이 술 마신다면 덜 취하고 ‘행복한 술 마시기?’가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 보면서 그를 따라가 보기로 한다.
포도주에 관한 문헌상의 기록은 고려 시대로 올라간다. 《고려사》에 충렬왕 11년(1285) 음력 8월 28일 ‘무진 원경 등이 원나라에서 돌아왔는데, 황제가 왕에게 포도주를 하사하였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포도주는 원나라에서 제조한 것인지, 유럽에서 실크로드를 타고 온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또 목은 이색(李穡, 1328∼1396)은 연회에서 포도주 마시고 감상을 한시로 남기기도 했다.
1980년 초·중반은 경제가 급성장하면서 나이트클럽, 룸살롱, 스텐드바 전성기였다. 아련하지만, 서면과 온천장 나이트클럽을 자주 갔던 기억이 나고, 거기서 만난 아줌마들과 재밋게 놀았던 생각도 난다. 그때는 독주 위스키가 음미하면서 마시는 술이 아니었다. 지금도 그렇다고 집사람은 말한다. 빨리 취하기 위해 폭탄주를 마시고, 위스키 마셨다는데 자존심을 세우던 때였다. 오죽하면 발렌타인 사장이 서울 와서 폭탄주로 마셔대는 것을 보고, 놀라면서도 ‘매출이 많이 오르겠으니 고맙게 생각했다’라는 우스개 소리도 있을까. 우리가 직접 위스키를 만들지 못하지만, 위스키 시장은 2008년을 정점으로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고 한다. 고도주를 저도주로 바꾸면서 ‘혼술’하는 사람이 많아졌고, 2016년부터 시행된 김영란법으로 접대문화가 사라지면서 급감한 것이다. 그러나 코로나-19 이후에 싱글 몰트 위스키와 하이볼이 다시 유행한다는 소리도 들린다. 싱글 몰트 위스키는 다른 증류소에서 생산한 위스키를 섞지 않고, 한 증류소에서만 만든 것을 말한다.
세계에는 3대라는 것이 많은데, 축제도 그렇다. 삼바 춤의 본고장 브라질의 ‘리우축제’, 엄청나게 많은 눈과 얼음을 이용한 일본의 ‘삿포로 축제’, 맥주의 본고장 독일의 ‘옥토버페스트’가 그것이다. 독일 맥주축제는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가보고 싶을 것이다. 바이에른 뮌헨에서 9월 말부터 10월 초까지 열리는 옥토버(10월)+페스트(축제)로, 〈10월의 축제〉로 1810년 10월 17일 시작해 매년 개최되고 있으므로, 200년이 넘었다. 태자이던 루트비히 1세와 테레제 공주의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해 경마 경기를 열면서 시작되었는데, 축제는 공주의 이름을 딴 ‘테레지엔비제’라고 불리는 12만 7,050평(42만㎡)잔디공원에서 열린다. 2주간 어마어마한 양의 맥주가 판매·소비되고, 전세계에서 700만 명이 몰려든다고 한다.
아무래도 맥주는 서양에서 들어온 것일 텐데, 우리나라에서는 언제부터 마셨을까? 맥주에 관한 한 장의 사진이 전한다. 「맥주병을 들고 있는 사람」으로 불라는 사진은 1871년 5월 30일 당시 조선인을 찍은 사진으로 상투를 뜬 사람이 미국 군함에서 맥주병을 들고 있다. 이탈리아 종군기자 펠리체 베아토(1832∼1909)가 찍은 것인데, 당시는 신미양요가 터지기 전이었으나, 인천부 아전 김진성이 미군으로부터 얻은 맥주 10여 병을 들고 웃고 있는 모습이다. 1882년 월리암 그리피스는 <은자의 나라 한국>에서 이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맥주를 들고 있는 이진성]
“몇몇 조선 사람들이 우정의 표시를 보이면서 아무 주저함 없이 갑판에 올랐다. (중략) 그들은 사진을 찍기 위하여 갑판 위에 섰는데, 이때 매우 귀중한 사진 몇 장을 찍을 수 있었다.”어쩌면 사진 속의 아전 김진성은 150년 전 맥주 모델로 맥주를 마신 최초의 조선인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사진을 찍은 이틀 후인 6월 1일 강화해협을 지키던 광성보진지가 함락되고, 순무종군 이재언을 비롯한 수비대 350명이 전사하였다. 미군은 20일간 통상을 요구하며 주둔했으나, 완강한 쇄국정책으로 협상은 이루어지지 못하고 철수했다. 이후에 조선은 척화비를 세우고 쇄국정책을 강화했다. 그러나 5년 뒤 1876년 일본의 강압에 의해 〈조일수호조규〉가 맺어지면서 개항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일합병(1910) 이후에는 《매일신보》에 맥주 광고가 실리는 등, 맥주 소비량이 크게 증가했다. 광고에는 일본 맥주인 ‘삿포로, 아사히, 기린, 사쿠라’등 네 종류였으며, 소비량 증가에 발맞추어 〈대일본 맥주 주식회사〉가 1933년 〈조선맥주 주식회사〉를 설립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 맥주회사였다. 이어 기린맥주(동양맥주 전신)가 1934년 4월부터 맥주 생산을 시작했다. 이때 생산한 맥주는 2,933㎘로 조선에서 총생산 주류 38만 5,882㎘의 1.9%였다. 지금은 전체 주류시장에서 맥주가 40%를 차지하는 것과 비교하면 아주 미미했다. 이제 우리가 맥아를 수입해서 맥주를 만들어 외국에 내다 팔기도 하는 것과 비교하면 천양격차를 느끼게 한다.
술은 농경사회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발전해왔다. 파종과 수확기 제천의례에서 구성원들을 묶어주는 촉매제 역할과 함께, 신을 대접하는 기능으로도 사용되었다. 여러 사람이 모이는 잔치에서는 마음의 벽을 허무는 기능도 했다. 종교적 소재인 동시에 사교와 향락의 수단이었고, 정치적 의도로 이용되기도 한 것이 술이었다. 삼국시대 고구려인들을 중국인들은 ‘자희선장양(自喜善藏釀-즐겁게 술을 빚어 저장한다)’고 하기도 했으며, 《삼국지》〈위지동이전〉에는 부여 영고(迎鼓), 고구려 동맹(東盟), 동예 무천(舞天) 등 제천의식을 지낼 때, 사람들이 모여 밤새워 술을 마시고, 춤을 췄다(飮酒歌舞)라고 기록하고 있다.
‘술에 취한다’는 의미는 두 가지로 생각 할 수 있는데, 긍정적인 점과 부정적인 점이 그것이다. 긍정적인 것은 약주(藥酒), 반주(飯酒), 주내백약지장(酒乃百藥之長-술은 백 가지 약의 으뜸)이란 뜻이고, 부정적인 것은 주폭(酒暴), 광약(狂藥-사람을 미치게 하는 약), 중독(中毒) 등이다. 조선시대 실학자 이익(李瀷)은 《성호사설》에서 “노인을 봉양하고 제사를 받드는 데 술 이상 좋은 것이 없다.”고 하여 인간생활에서 술이 필요한 것으로 보았다.
조선시대 술 팔던 곳을 주막(酒幕)이라고 한다고 알고 있지만, 주막은 술만 판 곳은 아니었다. 식사만 하는 곳을 국밥집, 약주만 파는 곳을 약주집, 탁주(막걸리)만 파는 곳을 주막, 또 하등(下等)의 음식을 팔던 곳을 전골집(煎骨家)이라고 했다. 막걸리 팔던 주막집에서는 음식도 팔고, 숙박도 겸했는데, 식당과 숙박업을 하는 주막은 외국인의 눈에는 많지 않았던지 1866년 독일 상인 오페르트는 《조선기행》에서 “중국과 요리법이 비슷한 측면이 있으나, 중국의 빈촌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밥장수, 떡장수, 죽장수 등을 전혀 볼 수 없다”라고 하고 “지구상 어느 왕국도 유럽인 여행자에게 알맞은 호텔, 찻집, 그 밖의 유흥시설을 찾을 수 없는 곳은 서울뿐인 듯하다.”고 했다. 하지만 부분만을 본 것으로 〈삼강주막〉등 전국에는 주막이 곳곳에 있었다.
선술집과 목로주점은 같은가? 다른가? 한성부 안에 여자를 두고 술을 파는 -접대부를 둔- 술집을 색주가라고 했는데, 조선 초에는 이를 허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세종 때 허가했다. 그것은 중국 사신으로 가는 양반들이 무악재를 넘으면, 기생을 불러 환송연을 열어주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들끼리만 술잔을 드는데 불평이 많았다고 한다. 이에 정승 허조가 세종에게 건의해 접대부를 두도록 허가받았다는 것이다.
주막과 달리 지나가면서 간단히 한 잔 할 수 있는 술집이 목로주점이다. 목로는 술잔을 놓기 위해 만든 널빤지를 말하는 데 좁고, 기다랗게 만든 상(木壚)이다. 여기에 술을 놓고 판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목로주점에서는 술 한잔에 안주도 하나, 지금과 달리 같이 계산했다. 술값에 안주값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말이다. 목로주점을 다른 말로 ‘선술집’, 여기는 따로 의자는 없고, 그냥 서서 술 마시기에 그렇게 부른 것이다.
내가 보기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고 많이 마시고, 외국서도 인기 있다는 소주는, 〈안동소주〉로 대표되는 증류식 소주와 〈좋은데이〉, 〈하이트 진로〉, 〈대선소주〉, 〈참소주〉, 〈입새소주〉등이 희석식 소주가 소주의 대명사다. 소주는 에탄올이 주요성분으로 증류소주는 알코올 끓는점이 78.32도로 물보다 낮은 점을 이용하여 알코올을 포함한 용액(밑술)을 가열시켜 수증기로 만들고, 수증기를 냉각시켜 다시 액체로 만든 것이다. 그것은 ‘소줏고리’라고 하는 전통 방식의 옹기그릇을 사용해 만든다. 또 희석식 소주는 95% 고순도 에탄올인 ‘주정’을 원료로 해서 물을 80% 이상 섞은 뒤, 맛과 향을 첨가한 것이다. 전국 9개의 주정제조업체에서 만든 주정을 소주 제조업체가 사서 물과 감미료(과거에는 사카린, 현재는 올리고당, 자일리톨, 아스파탐 등)를 섞어 만든 것이 희석식 소주다.
마론 브란도 주연의 영화 《대부》는 미국의 금주령을 배경으로 마피아 두목 알 카포네가 권력을 장악하고, 그것의 흥망을 그린 영화다. 마피아, 아쿠자 영화에서는 반드시 술이 관련된다. 그냥 마시고 취하면 문제가 덜 될 텐데, 금주령이 변수로 작용한다. 우리나라도 금주령이 있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삼국사기》에는 백제에서 ‘곡식이 여물지 않아 백성들이 사사로이 술을 빚는 것을 금했다’는 기록(다루왕 11, 38년)이 있고, 《고려사》에도 ‘현종 원년(1010) 승려와 노비가 서로 다투는 것을 금지시켰으며, 비구나 비구니가 술을 빚는 것을 금지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충목왕, 우왕 때도 가뭄으로 금주령을 내렸다고 한다.
조선 시대는 중종 38년(1543) 금주가 명문화되기 시작해, 술을 통제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들이 논의되기도 했다. 하지만 금지에도 불구하고 유교 사상으로 제사에 사용한다는 명분으로 양반가에서는 술을 빚었다. 조선 최초 법전인 《경국대전》에는 금주 관련 조항이 없지만, 《대전후속록》에는 ‘노인과 병자 외에 소주를 금한다.’는 조항이 있다. 소주가 다른 주류에 비해 곡물을 많이 사용하는 폐단과 사치풍조를 조장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영조는 금주법을 시행한 왕으로도 유명하다. 그때는 사대부 집안에서도 양조해 술을 팔았는데, 그만큼 이익이 남았다는 것이다. 금주령을 내리고 강하게 시행했지만, 술집이라는 ‘주가(酒家)’가 처음 등장한 것이 영조 때이고 보면 당시 술 파는 곳이 형성되고 확산되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금주법을 시행하고 1년 뒤에 영조는 ‘금주를 어겨 섬으로 유배당한 자가 700여 명이나 되는데, 모두 풀어주도록 하라’(영조실록 33년 10월 24일)고 했다고 한다. 그만큼 지켜지기가 어려웠다는 것이다. 이후 순조, 고종 때도 금주령을 시행했으나, 실효는 미미했다. 술을 마시고자 하는 욕망과 알코올 도수가 높고, 맛있는 술을 만들기 위해서 쌀을 더 많이 사용해야 한다는 것은 금주법 강화와 연결된다.
막걸리는 우리 전통주로 생각하고 또 자부심도 가진다. 그러나 2015년 기준 전국에는 387개 막걸리 제조업체 중에서 76.7%가 수입쌀을 막걸리 원료로 사용했다. 특히 상위업체 30위권은 82.1%가 수입쌀을 사용했다. 2021년에는 한 해 쌀수입량이 40만톤이었는데, 가격은 1㎏에 923.5원으로 정부미 햅쌀 3,500∼4,000원에 비하면 1/3수준이다. 그러니 수입쌀을 사용한다고 비난할 수도 없다.
쌀 생산을 비롯한 농업은 공익적 가치가 얼마나 될까? 차 한 대 팔아 쌀 사 오면 여러 가마니 살 수 있을 텐데, 그런 생각하기도 했고 농사는 단순한 먹거리를 생산하는, 부가가치가 낮은 산업으로 인식했던 것 또한 사실이다. 다양한 생산활동을 통해 식량안보, 환경 및 경관 보존, 수자원 보호, 홍수방지, 지역사회 유지와 전통문화 계승 등 다양한 공익 기능을 갖고 있다는 생각은 산업화 시대에는 간과했다. 2018년 국립농업과학원에 따르면 농업이 수행하는 다원적 기능의 연간 가치는 27조 8,993억 원으로 평가했다. 환경보전에 대한 가치 66.8%, 사회문화적 가치 14.7%, 식량안보 11.2% 경관보전 7.3% 등으로 공동체적 가치를 만들고 있다고 한다.
이 책에는 현재는 사라져간 것들에 대한 것도 보여준다. 필름 카메라가 사라진 것은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누룩 광고가 있었다는 것은 나도 기억하지 못한다. 1928년 10월 19일자 《동아일보》광고다.
‘밀양곡자-조선유일의 누룩’
조선에서는 밀양주가 좋다고 상찬을 받는 터입니다. 술맛이 좋다함은 국자(麴子-누룩)가 좋은 원인입니다. 밀양곡자 중에서도 표충산(表忠産), 산동산(山東産), 유천산(楡川産), 마암산(馬岩産) 등이 가장 좋습니다. 금반 차등 종류의 생산지가 주주가 되어 밀양 ‘생산곡자판매주식회사’를 설치하고, 생산품에 대하여는 일일이 정밀한 검사를 마친 후 양호한 물품에 한하여 판매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지방에서 비로소 안심하시고 사실 수 있을 것입니다. 향기롭고 감미있는 밀양주를 제조하시려면 위선(우선) 곡자를 본사로 다소 불문하시고 용명하심을 바랍니다.”
하지만, 이때는 전국 2,466개 누룩생산 공장을 786개로 통합하여 가정에서는 누룩을 만들거나 판매하는 것을 금지했다. 자유롭게 만들던 누룩을 국가가 통제하자 전국의 양조장 주인 등이 크게 반발하였다. 이는 일제의 강압이 있었다는 것과 그것이 국가통제에 효과가 있다고 보았다는 것은 명백하다. 현재 전통주를 만들기 위하여 누룩을 대량 생신하는 제조장은 3곳 정도다. 나머지는 소량 생산에 그친다. 다양한 전통주를 만들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누룩에 관한 연구가 필수적, 대학이나 연구소에서 우수균을 얻기 위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으나, 업체들은 자신들 술이 차별화되기를 바란다. 차별화야말로 발전의 밑그림이기 때문이다.
〈폭탄주〉로 불리는 술을 섞어 마시는 문화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앞에 발렌타인 사장 이야기도 있었지만, 술을 섞어 마시는 ‘혼돈주’는 조선 시대에도 있었다. 혼돈주는 찹쌀로 빚은 막걸리에 소주를 타서 마신 것으로, 좋은 소주 한잔에 막걸리 한 사발을 따르되, 그것을 약 1분 동안 따르게 되면 소주가 위로 말갛게 떠오른다. 이때 마시면 다 마시기까지 막걸리와 소주를 함께 마시는 것이 된다. 이때 막걸리는 차고, 소주는 더워야 좋으며, 홍소주라면 빛깔도 곱다. 이 술은 아무리 술을 잘 마시는 사람도 5잔 이상 마실 수 없을 정도로 매우 취한다.
폭탄주가 한국 음주 문화를 대표하지는 않는다. 조상들은 풍류로 술을 가까이하고 계절마다 술을 담가 적당히 즐겼던 것에서 지금과 다른 음주문화를 볼 수 있다. 폭탄주의 유래는 20세기 초 미국의 가난한 부두 노동자들이 적은 돈으로 빨리 취하기 위해 싸구려 위스키에 맥주를 혼합해서 마신 게 시초라는 설, 시베리아 벌목공들이 강추위를 이기기 위해 보드카에 맥주를 섞어 마셨다는 설 등이 있다. 한국에서는 1983년 강원도에서서 군, 검찰, 경찰, 안기부 간부 등 기역기관장 모임에서 처음 시작되었다고 하기도 하는데, 전두환 시절 ‘현대갈비식당’에서 가진 회식에서 00서장(이제삼)이 바케스에 여러 가지 술과 안주를 섞어서 워커에다가 따라주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급변하는 현대사회, 아니 조직만을 강조하던 시절 ‘우리는’자신도 모르게 많이 마시고 빨리 취하는 음주문화를 당연하게 여겼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 그런 음주문화는 결코 장려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나는 경남 마산에서 오래 산 적은 없다. 그러나 잠시 머물기는 여러 번 했다. 내 친구들 중에는 마산에 사는 이가 많다. 영순, 기석, 애자, 옥화 문식 등등. 아마 고향 남지와 가깝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알기로 마산은 꽃의 도시자 술을 도시, 간장의 도시다. 일본 자료에 따르면 간장은 빼고 꽃과 술을 언급하고 있는데, 몽골이 일본을 점령하러 가기 위해 마산에 거점을 마련하고, 간장(몽고간장)을 생산했다는 것 때문에 잔장은 뺀 것이 아닐까 싶다. 일본에서 만든 마산 관광안내 팸플릿에는 무학산과 합포만, 벚꽃과 술이 환상적으로 그려져 있기도 하다. 최초의 청주(사케)양조장은 개항 5년 후인 1904년 일본 거류민 아즈마(東忠勇)에 의해 설립된 아즈마 주조장이다. 이듬해에 서성동에 이사바시(石橋)주조장이 설립되었고, 또 1906년에는 장군동에 고단다(五反田)주조장에 이어, 엔무 주조장, 니시다 주조장, 오카다, 지시마엔주조장 등이 1930년대까지 줄줄이 들어서 조선 대표 술 생산지로 마산이 꼽혔다.
1920년 마산의 청주 생산량은 13개 양조장에서 4,400석으로, 부산의 6,300석에는 미치지 못했으나 1923년에는 1만석을 넘겨 부산을 추월했고, 1929년 소화주류가 설립되면서 2만석을 넘겨 내수용을 넘어 중국과 만주에도 수출되었다고 한다. 1876년 개항(병자수호조약)과 더불어 이후 부산, 원산, 목포, 진남포, 마산에 이어, 1899년에는 군산까지 강제로 개항됐다. 군산 역시 쌀 수탈의 전초기지였던 것이다. 일제는 1908년 국내 최초로 전주-군산간 전-군가도를 포장했으며,(지금은 벚꽃 100리길로 유명)군산-익산간 철도를 개설해 군산을 호남 최대 상업도시로 성장시켰다. 이것은 물론 호남평야의 쌀을 군산항에 집결시키기 위한 조치였다. 1909년 조선 전체의 쌀 수출량 32.4%가 군산항을 통해서 일본으로 갔다. 1910년 한일합병에 이르기까지 전북지역에는 24개의 일본인 농장이 만들어졌고, 이후 1920년까지 18개 농장이 더 만들어졌다. 이 농장들은 군산의 청주생산을 맡았고, 지금도 유병한 〈금관청주〉는 군산에서 생산되고 있다.
1915년 일본인 니시하라가 논산에 조선주조(주)를 세워 조화(朝花)라는 상표로 청주를 생산하다 생산량이 늘자 1917년 군산에도 분공장을 비롯한 향원양조장, 상야양조장, 암본상점, 군산주조, 일본주조 등 6개를 세웠다. 주영하의 〈식탁위의 한국사〉에는 광복 이후 청주(사케)에 대해, “광복 후 일본 청주 공장들이 적산(敵産)으로 분류되고 미군정을 통해 정식으로 한국인 손에 넘어갔다. 그럼에도 일본 청주는 여전히 ‘정종’이라는 이름으로 인기리에 판매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축제〉에는 술이 빠지지 않는다. 독일 ‘옥토버페스타’는 맥주 하나만을 위한 축제이고, ‘청도맥주 축제, 영국의 위스키 축제’도 술을 즐기는 축제다. 일본의 ‘사케노진(酒の陳’은 니가다지역 축제로, 여기에서는 니가다에서 생산된 사케만을 판매하는데, 니가다는 일본의 사케 생산 3위에 해당할 정도로 사케가 유명하다. 우리나라는 문체부 자료에 따르면, 2022년 한해동안 997개 축제가 열렸다고 한다. 하루에 2.7개꼴이다. 하지만, 축제들 모두가 술과 관련되어 있지는 않다. ‘진달래 축제’등 오히려 술과 관련 없는 축제도 많다.
술 이름에서 청주와 약주, 사케와 정종은 어떻게 다른가? 사실 약주와 청주는 같은 방식으로 만든다. ‘쌀(찹쌀)+국(麴-누룩)+물’을 섞어 발효시킨 술덧을 여과해 재성한 것이기 때문이다. 약주는 태종 때도 있었다고 한다. 신하들이 몸을 보하기 위해 ‘약주를 마시라고 권했으나,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조선시대는 맑은 청주를 약으로 인식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청주는 일제가 우리가 맑은 술이라고 하여 청주라고 하던 것을, 같은 뜻인 ‘사케’라로 부르다 보니, 청주가 약주로 변하고 쌀만 사용한 순곡주 청주는 찾아보기 어렵게 되고, 약재를 첨가한 술이 많아지면서 약주로 불리게 되었다. 이제는 약주와 청주의 용어 교체를 고민할 때다. 일본식 제조법으로 만든 청주는 ‘사케’라고 그대로 부르되, 맑은 술, 약주는 청주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암튼 ‘전통주’하면, 막걸리를 떠올리지만 막걸리는 억울하다. 2020년 막걸리는 6,927㎘를 생산해 주류시장 11.7%를 차지하는데 그첬다. 이것은 1973년 77.4%에 비하면 6.6배 줄었다. 77.4%는 현재의 소주·맥주를 합친 81.8%에 비교될 정도로 당시에는 막걸리 소비가 엄청났다. 이후 쌀 사용금지, 거친 옥수수로 만든 막걸리라는 인식, 1978년 밀가루와 옥수수로 만든 막걸리 1말이 1,400원이었으나, 쌀로 바꾸면서 2,100원으로 올림으로 ‘값싸고 맛 좋은 술’이라는 인식이 깨지는 등의 이유로 막걸리는 계속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규제보다는 자율성에 의한 전통주를 발전시켜야 할 때다.
술은 따뜻하게 마시는 것이 좋은가, 아니면 차게? 1809년 써진 《규합총서》의 〈음식총론〉에는 “밥 먹기는 불같이 하고, 국 먹기는 여름같이 하고, 장 먹기는 가을같이 하고, 술 먹기는 겨울같이 하라 하니, 밥은 따뜻하고, 국은 뜨겁고, 장은 서늘하고, 술은 찬 것이어야 한다.”고 했다. 이 무렵 고종이 목재냉장고를 이용해 여름에도 찬 냉면을 먹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그전에는 석빙고가 있어 여름에도 얼음을 먹을 수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왕실이나 지배층의 일이었다. 냉장고는 1926년 미국에서 처음 발명되었고, 일본은 1930년 도시바사에서, 우리나라는 1965년 히타치와 기술을 제휴한 금성사(GS 전신)가 〈눈표 냉장고〉를 만들었으나, 전력 보급이 원활하지 않아 판매고를 올리지는 못했다.
내가 볼 때 한국은 ‘제례’의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침, 저녁으로 불단에 예배를 올리는 인도나 일본을 빼고 우리처럼 연중행사로 제례를 지내는 나라는 거의 없다. 중국 사람들도 우리만큼 조상에 대한 제사를 지내지 않는 것 같다. 그런데 제사를 지내면서 잘 못 알고 있는 것이 하나 있다. 제사상 차림에 ‘어동육서(魚東肉西), 두동미서(頭東尾西), 좌포우혜(左胞右醯), 조율이시(棗栗梨柿), 홍동백서(紅東白西)’가 그것이다. 유교의 전통으로 알려진 규칙이지만, 어느 경전과 예법서에도 없다. 이는 근대의 산물이다. 1960년대 〈가정의례준칙〉에서 처음 볼 수 있다. 고려시대 이전에는 불교국가로써 예법이 많았으나, 오히려 조선시대에는 이를 생략하거나 간소화했다.
여름 보양식으로 첫째로 꼽는 것에는 삼계탕이 있다. 1950년대 이후 〈계삼탕〉이라고 불리며 정착되었는데, 그전에는 닭이 귀하고 비쌌으므로 닭이 꿩고기보다 흔하지 않았다. 그때는 복날 개고기를 넣은 개장국을 즐겼고, 양반들은 개고기 대신 쇠고기를 넣은 육개장을 먹었다. 계삼탕에 인삼을 넣는 것도 1960년대 이후 냉장고 보급으로 생삼을 넣게 되었고, 그전에는 인삼가루를 넣었다. 삼계탕이 아닌 계삼탕이라고 한 것은 닭이 몸에 좋다고 인식했기 때문에 닭을 먼저 불렀기 때문이다.
‘전통주’하면 역사가 오래되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이 말은 1981년 처음 사용되었다. 그전에는 ‘토속주’또는 ‘민속주’라 불렸다. 1981년 10월 1일 88올림픽 개최지로 서울이 결정되면서 정부가 바빠졌다. 외국에 소개할 우리 술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는 일부 전통의 가양주(家釀酒)가 있었으나 면허받지 않은 밀주였다. 정부는 1982년 12월 22일 전통민속주 제조기법을 중요무형문화제로 지정하기로 의결하고, 집안에 있던 그것을 끌어냈다. 이어 문화재위원회에서 전국에 산재한 전통민속주 제조기법과 기능자를 조사하여 1차 12개 시도에서 46종을 지정했다. 문배주, 두견주, 교동법주 등 10종이 지정되었고 일반 술과 다른 개념의 ‘민속주, 향토술’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1896년까지는 우리에게 신정(新正)이란 없었다. 오직 ‘설’만 있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모진 민족의식으로 1985년 ‘민속의 날’이라는 이름으로 공휴일로 지정되었고, 1998년부터 ‘설날’로 지정되어 3일간 연휴가 시행됐다. 설날 먹는 음식으로는 떡국과 도소주(屠蘇酒)가 있다. 떡국은 메(밥)를 대신하고, 도소주는 음료를 대신했다. 여기서 소蘇는 소주의 소(燒)가 아니라, ‘악귀를 물리친다’는 뜻으로 후한 때의 명의 화타가 설날에 마시면 부정한 기를 피할 수 있다고 하여 만든 술로. 적출, 계심, 방풍, 도라지, 대황, 산초, 발계, 오두, 팥을 베주머니에 넣어 우물 밑에 걸어두었다가 설날에 꺼내 술에다 넣고 달인 다음 온 식구가 동쪽을 향해 앉아서 연장자부터 나눠 마셨다고 한다. 또한 그 찌꺼기는 우물에 넣어두고 물을 마시면 무병장수한다고 믿기도 했다.
맥주를 사발잔에 따라 마시면 맛이 없고, 포도주를 뚝배기에 따라 마시면 맛이 없다는 이야기는 이미 알려졌고 실제로도 경험해 볼 수 있는 일이다. 맥주와 사이다는 시원하게 유리잔에 따라 마셔야 제맛이다. 생각해 보면 술의 가짓수만큼이나 술잔도 다양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잔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술의 맛과 향이 바뀌고, 술 마시는 즐거움도 바뀔 수 있을 것이다. 전통주의 향과 맛도 제대로 느낄 수 있는 잔을 만들어야 할 때다.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변하듯이 술도 변해왔다는 것은 비단 이 책을 통해서 만은 아니다. 술을 사랑하고 좋아하는 만큼, 술을 아껴먹는 요령도 터득해야 하지 않을까. ‘물고기는 물과 싸우지 않고, 주당은 술과 싸우지 않는다.’는 말을 생각해 보면 정말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