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의 독서일지(2024.07.04~07.25)*
<7월 22일 월요일>
문학에서의 연민
그 어느 사회도 ‘가난한 자’를 눌러 이기지 못할 것이다.
어떤 이들은 타인의 어리석음, 허영, 악덕에 기대어 산다.
그러나 ‘가난한 자’는 애덕*으로 살아간다. 이 얼마나 숭고한 말인가.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 조르주 베르나노스
*애덕 : 타인의 애덕의 발현, 자비 덕분에 살아간다는 뜻. 바꾸어 말하면 상대방은 가난한 자의 존재
덕분에 애덕을 행하게 된다는 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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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아침의 단상(斷想)
미지(未知).
미지는 미래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현재에 세계에도 있다. 현재의 세계에 대해서도 잘 모른다. 우주가 처음 생성되었다는 우주의 기원에 대해서는 잘 아는가. 인류의 기원보다 한참 앞서는 우주의 기원이라는 과거에 대해서 아직 인간은 잘 모르고 있다. 인류의 기원도 과학의 원리로 유추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우주의 기원은 그마저 지금 가능하지 않다. 확실히 아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진리는 현재진행형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지금, 아는 것은 무엇일까. 안다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
왜소한 의식.
오천 년 전의 세계, 우리가 원시 문명(야만이라는 뉘앙스가 어느 정도 포함된)이라고 폄훼하는 그 시대에는 사람들이 저마다 건강하고 생기가 넘치는 우주를 저마다 마음속에 품은 채 우주와 합일감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은 어떤가. 우주는 이제 발달된 과학이 가르쳐 주는 캄캄한 어둠 속의 죽은 세계로 알려져 있다. 우리의 삶은 우주(생명체가 살 수 있다고 해도)까지는 아직 요원하고, 그렇지 않아도 작아서 좁고(그전에는 그 영역의 끝없음에 두려움을 느끼기까지 했던), 인류 역사가 진행되어 오며 그만큼 좁아진 지구 안에서 사람들은 이제 부와 권력만 탐하는 왜소한 의식의 세계로 전락했다고 한다. 19세기 초 영국 어느 학자의 말처럼 ‘과학에는 사상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라는 말이 가만히 떠오른다.
인심은 가난하던 그 시절이 오히려 좋았어요. 요즘은 각박해요.
인류의 황금시대는 다가올 미래가 아닌 지도 모르겠다. 오히려 황금시대는 먹고 사느라 바쁘게 모르고 지나친 그 시절 그 어느 곳에 있지 않을까. 그리고 최대 문명을 구가한다는 요즘 인류는 본능에만 충실한, 생존과 종족보존에만 모든 의식이 몰려있는 궁극적으로 아직 미명이지 않을까. 이성이라는 인간 최고 권능이 실은 인간 스스로를 자승자박하는 올가미이자 스스로 판 함정이지 않을까.
고층 아파트에 살아보니 하늘을 볼 시간이 많아서 좋다. 지금껏 살아오면서 본 하늘보다 더 많은 시간을 매일 바라보면서 살고 있다. 문득 아파트 저 밑에서 아이들의 즐거운 비명 소리가 들린다. 얘들은 걱정을 하지 않는다. 그 천진난만함은 얘들의 세계에게서만 볼 수 있다. 그것은 매일 쳐다보며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하늘과 같다.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함과 무구함의 세계. 자주 볼 수 없는. 그리고 그것은 그나마 우리 주변에서 얼마 남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이것조차 자연에서 동물이 소리 없이 멸종해가듯 멸절되어 가는 지도 모른다. 우리의 일상에서, 삶터에서 서서히…….
2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
-조르주 베르나노스 지음/정영란 옮김
지금 이 소설을 읽는 묘미
-그는 특히 자신이 몸담고 사는 거친 환경 때문에 고통을 받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와 비슷한 청년들이 흔히 그렇듯 그도 도시로 나가 자리 잡을 꿈을 꾼다. 그의 글씨체는 반듯하다. 그러나 말이다! 종류는 다르다지만 대도시의 거친 환경도 내가 보기에는 여전히 위험하다. 그것은 아마 보다 은밀하게 작용하면서도 보다 전염력이 강할 것이다. 마음 여린 사람은 그런 덫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법이다. (p126)
‘1936년 발표’로 되어있는 작품연도로 보건대 1930년대 전후의 당시 프랑스 사회는 지금 한국 사회처럼 시골에서 도시로 젊은 청년들의 이동이 빈발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대부분의 시골이 지닌 열악한 작업환경(거친 환경)과 도시가 지닌 덫과 같은 욕망(은밀하면서도 전염력이 강한, 마음이 여린 사람은 좀체 빠져나오기 힘든) 탓일 게다. 글씨체가 반듯한 젊은이처럼 순진하고 순수한 시골 청년들은 특히나 영혼이 상처받기가 쉽고 고향의 시골 살이 같이 예전의 순수함으로 다시 돌아오기가 어렵다는 의미다. 신부는 자기가 맡고 있는 시골 본당의 젊은이들이 지역에 남아 삶을 이어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별로 먹는 것도 없는 나의 식사 습관과 내가 내놓는 빨랫감도 많지 않아서 그녀로서는 시간이 남아돈 게 사실이다.) 그녀는 신통찮은 일에 자기 자신을 투자하기 싫다는 소리를 덧붙였다. (p127)
1930년대 당시 프랑스 사회는 시골이라도 아무 허드렛일이라고 닥치는 대로 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하층 계급의 노동자들조차 자의식이 형성되어 자신의 삶과 성장에 많은 관심을 보이는 ‘자기애(自己愛)’적인 삶을 추구했던 모양이다.
-좋은 성적에 대한 상을 나눠주는데 그 아이가 상본을 받으러 제의실로 들어왔다. 그 아이의 고요하고 침착한 눈 속에서 나는 내가 고대했던 연민을 발견한 것만 같이 느껴졌다. 내 두 팔이 저절로 그를 잠시 둘렀고 나는 그 아이의 어깨에 머리를 대고 바보처럼 울고 말았다. (p129)
앞으로 계속 읽어나갈 이 소설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라는 작품에 나오는 신부는 마음이 아주 여리고 감수성이 짙은 성품의 사제가 틀림없다. 자신이 사역을 맡은 시골 본당 교구 내의 가난하고 억압을 받는 지역주민에 대한 연민이 그의 일기장에 계속 언급되고 있다. 특히, ‘가난’을 대하는 당시 여러 계층·계급의 다양한 양상이 드러나고, 아울러 경험 많은 선배 신부들의 신앙과 교리 속에서 생각하는 ‘가난’에 대한 여러 의견도 함께 나타난다.
-“비록 그대가 하느님과의 열락에 취했을 때라도 만일 어떤 병든 이가 국 한 그릇 달라고 청하면 제7천국¹에서 내려와 그가 청하는 것을 주라.”라고 하지 않으셨나. (p133)
*¹ : 최고의 천국
이 작품을 선택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먼저 작가가 기독교 가톨릭 사제의 삶에 정통해서 많은 자료조사와 탐구를 집필 전에 선행했을 것이고, 서구에서는 이제 사양길에 접어들었다고 하나 아직 우리나라에서는 현재진행형인 가톨릭 신앙생활의 다양한 모습과 그 깊이에 대해 작품 속에서 보다 긴밀하게(소설은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장점이 있다) 알고자 함이었다. 우리는 흔히 기독교에서 자주 언급하는 ‘천국’이라고 하면 하나뿐인 ‘천국’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본문 언급에서 나오듯이 ‘제7천국’이 있다하면 ‘천국’에도 각기 다른 여러 등급의 ‘천국’이 존재하며, 보다 구체적인 개념을 떠올릴 수 있는 ‘천국’이 가톨릭 교리에 있다는 의미로 소설 작품을 읽기 이전과 다른, 기독교세계의 ‘천국’에 대한 구체적 개념이나 이미지에 대해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