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릴리로 가라
막 16:6-7
본문의 배경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날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세 여인이 안식 후 첫날 곧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 주일 새벽에 향품을 가지고 예수님이 장사되신 무덤으로 향합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주신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입니다.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입니다.
본문의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입니다(막6:3). 살로메는 예수님의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입니다.
이 세 여인이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 몸에 향품을 바르려고 예수님의 무덤으로 걸음을 재촉합니다.
우리나라는 장례를 치룰 때 시신의 냄새를 중화시키기 위해 향을 피우듯이,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은 장례를 치루면서 시신에 향기 나는 기름을 부패한 냄새를 중화시킵니다.
그런데 이 세 여인은 이미 장례가 끝난 후에 향품을 가지고 예수님이 계신 무덤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 만큼 예수님에 대한 그리움과 헌신적 신앙의 모습을 읽을 수 있습니다.
이 세 여인이 이른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에 가면서 걱정합니다.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줄까?”
왜냐하면 무덤을 막고 있던 돌은 여인들이 옮기기에는 너무도 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막상 무덤 앞에 도착하니, 무덤을 막고 있던 커다란 돌은 벌써 굴려져 있었고, 무덤은 활짝 열려 있었습니다.
너무 놀란 세 여인은 혹여 누가 예수님의 시체를 훔쳐갔을까 급히 무덤 안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무덤 안에는 있어야할 예수님의 시체는 없고, 한 흰옷 입은 청년이 앉아 있었습니다. 마태복음은 그 흰옷 입은 청년을 천사라고 합니다(마28:5-7). 흰옷 입은 청년이 말합니다.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 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하는지라”(막16:6,7)
그리고 마가는 장면을 바꿉니다. 그러나 마태는 이후의 장면을 좀 더 자세히 언급합니다.
자신들이 보고, 들은 사실을 제자들에게 알려주려고 급히 무덤을 나와 달려가던 여인들에게 예수님께서 친히 나타나셨습니다.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 할새, 예수께서 그들을 만나 이르시되 평안하냐 하시거늘 여자들이 나아가 그 발을 붙잡고 경배하니,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마28:9-10)
이 두 장면에서 공통의 말씀을 있습니다.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이미 예수님께서 마지막 만찬을 마치시고 감람산 겟세마네 동산을 향하여 가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살아난 후에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리라.”(막14:28)
이러한 말씀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질문이 무엇입니까? 왜? 하필? “갈릴리로 가라”고 하셨을까? 왜? “갈릴리에서 만날 것”이라고 말씀하셨을까?
첫째 : 제자들을 만남의 장소
마태복음 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시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마4:18-22)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어부에게 그물을 버린다는 것은 어부로서의 생명을 버리는 것입니다. 게다가 부친과 배를 버린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에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 만큼 예수님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지극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비단 어부인 제자들만의 모습은 아닙니다.
마가복음 2장에 가면 세관에 앉은 세리 마태를 부르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 세리 마태는 세리에게 있어서 모든 것인 세관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릅니다(막2장). 그 장소가 어디입니까? 가버나움입니다. 가버나움은 갈릴리에 있는 마을입니다.
다른 제자들 역시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렇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를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예수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그곳에 어디입니까? 갈릴리입니다. 갈릴리는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있어서 첫사랑의 장소요, 제자로서의 부르심을 받은 소명의 장소입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곳입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커다란 기대를 합니다. 어부로서 배를 버리고, 그물을 버리고, 심지여 부친까지 져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 그들에게 커다란 믿음의 모습을 기대하게 되지만 그 기대는 곧 무너지고 맙니다.
마가복음은 16장으로 되어 있는데, 예수님께 부름 받은 이후의 제자들의 모습은 거의 매장마다 실망스런 모습을 읽을 수 있습니다.
둘째 : 첫사랑의 회복의 장소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찾아오십니다. 갈릴리에서 그물질을 하던 제자들, 그러나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찾아 오셔서 “그물의 배 오른 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그 말씀 따라 그물을 오른 편에 던졌더니 153마리의 물고기를 잡습니다.
무엇을 연상하게 합니까?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처음 부르실 때의 모습입니다.
특별히 베드로를 처음 부르실 때에 밤새도록 고기를 잡으려 했으나 잡지 못한 그에게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으라.”는 말씀에 의지하여 그대로 했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잡았습니다.
그 때의 일을 상기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 모습 가운데는 이런 이야기가 숨어 있습니다.
“베드로야 이 갈릴리에서 우리가 처음 만나지 않았니. 바로 여기가 내가 너를 부른 부름의 장소요. 네가 나를 사랑한다는 고백의 장소가 아니니. 이제 일어나 처음 사랑을 회복하고 부르심의 모습을 회복하거라.”
그리곤 묵묵히 예수님 곁에 앉아 아침 식사를 한 후에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요21:15-17)
이 말씀은 베드로의 모습을 책망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첫사랑을 회복시켜 주시는 것이고, 베드로만 아니라 모든 제자들의 처음 사랑을 회복 시켜 주는 것입니다.
결국 처음 사랑을 회복한 제자들은 오순절이후 예수님께서 처음 부르신 부르심처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됩니다.
그리고 사도 요한 외에는 모든 제자들이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합니다.
그렇게 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처음 사랑을 회복하였기 때문입니다. 회복한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처음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영적 애씀이 있었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말하기를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딤전4:7)고 말씀합니다.
셋째 : 나의 갈릴리
그럼 우리의 갈릴리는 어디입니까? 처음 신앙 생활하던 곳입니까? 처음 예수님을 믿었던 곳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만나시겠다는 말씀은 갈릴리라는 장소를 통하여 처음 사랑을 회복케 하심이 목적이었습니다.
우리가 돌아가야 할 갈릴리는 장소적인 개념이 아닙니다. 우리의 갈릴리는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그 뜨거운 마음을 어디서 회복해야 합니까?
제자들에게 갈릴리는 고기를 잡던 바닷가였다면, 우리에게는 갈릴리는 내가 예배하며 섬기는 교회와 사역입니다.
내가 신앙 생활하는 이 교회를 통해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마음이 회복되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 마음을 유지하기 위한 영적 애씀이 내가 예배하며 섬기는 교회에서 있지 않는다면 어디서 그 마음을 회복하시겠습니까?
어디에서 처음 사랑을 유지하겠습니까? 우리의 갈릴리는 바로 이 곳 내가 신앙 생활하는 교회이며 나의 사역에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