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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함수곤의 `한밤의 사진 편지` 원문보기 글쓴이: 함수곤
한밤의 사진편지 제1947호 (13/6/29/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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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들은 이야기가 가슴에 오래 남아 있는 수가 있습니다. 아마 아래 전해드리는 이야기가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좀 처럼 U자 걷기에 불참하지 않는 김소영 운영위원님이 뚜렷한 사유도 없이 제 9구간 걷기에 불참했었습니다.
나중에 김 위원님이 왜 불참했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유 속에서 국경을 초월한 일본 의사와 간호사들의 헌신적인 사랑 이야기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 깊은 감동을 받은 김 위원님의 부군 정진환 님의 감사 보은 일본 여행 이야기를 최근에 다시 듣게 되었습니다.
저는 김 위원님께 그 이야기를 글로 써서 보내줄 수 없겠느냐고 청탁을 했습니다.
저는 시력과 3차 신경통 때문에 우리나라 최고의 병원이라고 자부하는 큰 병원의 안과와 신경과에 정기적으로 찾아가 진료를 받고 있습니다.
그 병원에 진료를 갈 때 마다 느끼는 점이 많습니다.
그래서 김 위원님이 감동받은 일본 의사와 간호사들이 전혀 연고도 없이 입원한 낯선 외국인 환지를 위해서
밤을 새우며 최선을 다해 자신의 직무를 편견없이 수행한 이야기가 예사로 들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처럼 헌신적으로 치료해준 생명의 은인인 일본 의사들의 고마움을 잊지 않고,
선물을 사들고 보은 여행을 다녀온 김 위원님의 부군, 정진환 님의 의리와 아름다운 마음이 저에게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김 위원님에게 원고를 청탁했던 것입니다. 다행히 김 위원님이 이를 받아들여 좋은 원고를 보내주셨습니다.
김소영 위원님의 성의와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정진환 님의 건강과 내외분의 행복을 기원하면서 이 글을 회원님들께 전해드립니다.
끝으로 일본 미야자끼 병원의 담당 의료진 여려분의 아름다운 사랑과 헌신에도 경의와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함수곤 드림
<김소영 운영위원 글 전문>
宮崎病院의 고마운 분들을 찾아서
글 : 김 소 영(한사모 운영위원, soyoung213@hanmail.net)
여행이란 떠나기 전 설레는 마음으로 여행지에 대해 사전 공부를 할 때, 현지에서 새로운 모습을 보며 체험하는 즐거움에다 다녀와서 추억해 보면 세 번의 여행을 하게 된다. 그런데 지금 일본 여행준비를 하고 있는 남편은 여느 때와 좀 다른 설렘으로 만감이 교차하는 듯하다.
‘양주와 김은 면세점에서 사면되겠는데 김은 어떤 걸로 사지? 가방은 짧은 여행이라 작은 것도 되겠지... ’하며 이틀 후에 떠날 여행채비에 묘한 흥분의 기미가 엿보인다. 해외 여행길이 잦아지면서 또 나이 들면서 주량이 줄어들어서 면세점에서 양주 구입하는 일도 적어졌는데 양주를 사야겠다는 그의 속내를 알지 못했다.
이번 일본 여행은 관광이 목적이 아니라 고마운 분을 찾아가는 여행이라 그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으로 양주 선물이 적합하다는 생각을 해낸 모양이다.
김은 간호사들이 근무 중 식사할 때 먹도록 선물로 준비한단다. 아이 둘을 키우면서 과자 한 봉지 사 들고 퇴근할 줄 몰랐고 사십년을 함께 살아 온 동안 생일이나 결혼기념일이라고 받은 선물도 기억나지 않을 만큼 선물에는 인색한 그가 부산스럽다.
김은 면세점보다 동네 마트에서 사는 게 낫다는 나의 의견을 듣더니 귀찮다하지 않고 다른 동네에 있는 농협매장까지 가서 먹기 편하게 구운 도시락 김을 많이도 사 왔다.
지난 해 4월, 남편은 친구 몇 분과 함께 일본으로 여행을 갔었다. 이틀째 되는 날 밤, 나는 집에서 모처럼 나만의 달콤한 고독에 젖어 있었다.
갑자기 전화 벨이 울렸다. 일본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크게 놀라진 마세요.” 남편의 일본 여행에 동행했던 그의 친구 K님의 국제 전화 목소리는 바로 옆집인 듯 가까이 들렸다. 첫 말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뭔가 큰 일이 있음을 직감했다.
일본에서 함께 저녁식사 하다말고 구급차로 이동하여 응급처치를 마친 후 한숨 돌리고 나에게 전한 목소리, 애써 진정하는 모습이 직접 눈으로 본 듯 환했다.
위험한 고비를 넘겼다며 걱정 말라지만 통화가 끊어진 휴대폰도 나처럼 숨을 멎고 있었다.
출발 할 때 감기 기운이 조금 남아있는 상태였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떠난 게 화근이었다.
급성 폐렴증세인데 응급 처치하여 위급한 상황을 넘겼으니 빠른 시일 내에 가족 두 사람이 일본의 병원에 와 달라는 것이었다.
가족이라면 그 사람과 나 뿐인데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 동행할 사람이 생각나지 않았다. 출가한 두 딸이 있지만 당장 집을 떠날 형편이 못되니 어찌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라곤 하지만 생각을 할수록 머릿속은 헝클어진 실 뭉치로 가득했다.
한참을 정신 놓고 있는데 문득 제부가 생각나서 급히 전화했다. 이 야밤에 외간남자에게 웬 전화냐며 너스레를 떤다.
농담처럼 받아 넘기던 제부가 중한 현실임을 알았는지 내일 아침에 보잔다. 어떻게 일을 해결해야겠단 생각은 손톱만큼도 나지 않고 그냥 밤을 하얗게 샜다. 그러나 영원히 그 밤이 새지 않기를 바랐다.
새벽이 되니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저 목 놓아 울었다. 소리 내어 통곡하고 나니 두려움은 좀 누그러들었지만 여전히 일의 진전은 없고 멍한 바보가 되어 앉아있을 뿐이었다.
무엇이든 의논할 사람이 그이인데 어찌하란 말인가. 소식을 들은 동생이 정신 차리고 가방을 꾸리라며 전화로 나무란다.
일본에서 2주일 정도 간호할 생각을 하라는 말에 놀라긴 했지만 쿵쾅대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일러준 대로 짐을 챙겼다.
동생이지만 여러 가지 인생경험을 많이 한 사람이니 한 번도 큰일을 당해보지 않은 언니보다 낫다며 시키는 대로 하란다. 설움이 목울대를 짓눌렀다. 소식 접한 후로 물 한 모금도 삼키지 못한 입엔 마른 침도 없었다.
14:1이나 되는 환율에 열 올리며 환전도 하고 경비가 얼마나 될지 예상하지 못하니 VISA카드도 챙겼다.
일본 담당 의사가 주문한 평소 복용하고 있는 약 내용을 번역하여 FAX로 보내고 나니 반나절이 지났다.
병원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니 소소한 게 많았다. 사람 사는 게 여기나 거기나 다 그렇겠거니 생각하고 보호자인 나를 위한 간편식으로 컵라면과 햇반, 커피, 간식도 좀 챙겼다.
즐거운 여행 준비라면 얼마나 좋을까하며, ‘성인용 기저귀’를 준비하라며 임시 보호자인 K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네? “네~~ ”
단 두 마디 말로 대화를 끝낸 내 몸은 순간 경직되고 말았다. 그렇게 심하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는데 도대체 어떤 상황이란 말인가. 환자의 상태에 대해 물어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상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 다음날 병원(縣立宮崎病院 현립 미야자키 병원) 이 있는 일본 규슈의 미야자끼행 직항이 있어 다행이었다.
비행기에 탑승하려는데 두 딸이 생각났다. 큰 딸은 어린 두 아이 치다꺼리에 정신이 없을 테고 그나마 전화를 받을 수 있을 둘째에게 상황을 전하니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왜 이제 전화하느냐고 하지만 미리 알게 된들 어찌 할 건데, 걱정 끼치기 싫은 에미 맘을 헤아리지 못하지,
눈 아래로 펼쳐지는 푸른 바다가 아득히 눈에 들어왔다. 정신도 아득했다. 내가 어디로 가고 있다는 것도 잊고 그저 끝없이 넓은 바다 위를 날아가고만 싶었다. 비행기가 땅에 내려앉지 말기를 바랐다. 엄청난 현실을 만나고 싶지 않았다.
한 시간 20분이 빨리도 지나 넓디넓은 태평양을 바라보고 있는 일본 미야자끼 공항에 닿았다.
‘미야자끼현립병원’까지 이삼십 분 남짓한 거리에 45,000원이다. 과한 택시요금에 화가 치밀었다.
앞으로 일본에서의 생활비를 생각하니 걱정이 앞섰다. 병원 현관에서 맞아주는 남편친구 K님을 보는 순간 왈칵 눈물이 났다.
위급한 상황에 대처해 지켜주신데 대한 고마움을 앞서 어찌하여 내 남편이 그 지경이 되었는지 원망 섞인 내 심정을 대변한 건 눈물뿐이었다.
“많이 안정되었습니다.” 그 말을 믿은 게 잘못임을 입원실에 들어서는 순간 알았다.
쇠막대에 주렁주렁 매달린 주머니가 대여섯 개, 덩치 큰 기계가 방에 가득했다. 기계는 연신 꼬불꼬불 푸른색의 선을 토해내고 의미를 알 수없는 숫자들이 모두 자기를 봐 달란다.
팔과 손등, 사타구니에 연결되어있는 호스하며 얼굴에 쓴 산소마스크가 중환자임을 알려주었다. “어, 왔어?”
힘없이 누워있는 그는 낯선 사람이었다. ‘어찌하다 이 지경이...’ 란 말을 속으로 삼켰다. 대소변도 누워서 하고 있는 형국에 더 말이 나오지 않았다.
며칠 후 출발하는 대망의 국토걷기 연례행사로 몸과 마음이 최고조의 컨디션으로 들떠있던 내가 하루 사이에 심신이 깊은 늪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무던히도 기다렸던 새봄과 함께 아름다운 서해안 길을 석양을 안고 걸어보리라, ‘한반도 U자걷기’의 즐거운 여정을 고대하며 꿈에 부풀었던 마음을 접고 수양하는 마음으로 병원생활을 시작했다. 빨리 포기 할 수 있는 것도 좋은 능력이라 생각되었다.
모든 생물은 환경에 적응하며 살게 마련이라고 하지만 물 설고 말 설은 낯선 이국 땅에서 아무 소리 없이 지낼 수밖에 없었다.
움직일 때마다 삐걱대는 간이침대에서 잠을 자고, 매일 샤워하지 않고도 버틸 수 있고, 몇 날을 정보와 소식을 단절하고도 살 수 있으니. 자동 로밍이 되어야 할 휴대폰조차 먹통이 되어 세상과 단절된 채 나는 철저하게 홀로의 삶이었다.
일주일 가까이 되니 얼굴 덮은 큰 마스크가 제거되고, 미음부터 시작하여 죽으로 식사를 하면서 환자는 점차 사람행세를 하게 되었다.
일본인 담당 주치의와 간호사들의 극진한 보살핌으로 눈에 보이게 건강이 호전되었다.
가까운 이웃나라의 언어를 익히지 못한 무지로 불편함이 많았지만 어눌한 영어와 한자, 또 손짓 발짓에다 그림으로도 그려가며 소통할 수 있는 작은 지혜가 있음에 감사했다.
오십을 갓 넘어 모이는 일본 주치의 姬路大輔 선생님은 퇴근도 하지 않고 토요일과 일요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환자를 지켜 주었다.
작은 숨소리에도 신경을 써 주었고 소통이 어려운 답답한 보호자인 나에게 정성을 다해 설명을 해 주었다. 짧은 영어지만 의사의 친절한 설명에 대강은 알아들을 수 있었다.
더 젊은 의사는 주로 한자와 그림까지 그려가며 상황을 친절하고 자상하게 알려주었다.
간호사들의 고운 미소와 아름다운 마음씨에 낯선 일본이 내 나라보다 따뜻했다. 줄을 그려대던 기계의 수치가 조금이라도 좋아지면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나보다 더 좋아했다.
간호사들은 출입문에 종이학 7마리를 만들어 걸고 매일 만지며 마음속으로 빌어주었다. 나의 소망에 비길 수 있으랴만 빨리 쾌차하라는 간호사들의 소망이 담긴 색색의 종이학이 참 소중하게 여겨졌다.
상태가 많이 좋아지고 마음에 여유가 생기니 입원실이 간호사실 바로 앞인 이유도 알게 되고 휴게실도, 식당도, 다른 입원환자들도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무섭고 두려웠던 병원이 낯설지 않음은 환자가 회복되고 있어 그러했지만 일본인 특유의 친절함과 자상함이 나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의사나 간호사, 환자, 보호자, 등 지나치는 사람들은 모두가 서로 인사를 나누며 한 가족처럼 대하는 그들, 그새 나도 일본인이 되어버렸다. 일본은 미워했는데 일본인은 미워할 수가 없었다.
언제 다시 찾을지 모르는 나에게 회원으로 등록토록 하여 호텔비 절약에 도움을 준 호텔직원,
또 치유중인 남편이 좋아지길 바란다며 나를 안타깝게 바라보며 위로의 눈빛으로 나를 반겨주던 호텔뷔페식당 직원들의 몸에 베인 친절함도 잊을 수가 없다.
9층 병실에는 환자나 보호자가 거의 보이지 않아서 별로 좋은 병원이 아니며 적자경영으로 보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보호자가 상주하는 사람은 나 혼자뿐이고 가족들은 잠시 면회하고 다녀가며 남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을 하지 않는 그들이기 때문에 병실은 적막강산처럼 조용했다.
방문객과 만날 수 있는 층별 휴게실에는 공중전화기와 신문, 잡지가 조금 마련되어 있고 음식을 먹을 수 있는 휴게실에는 전자렌지와 냉 온수를 공동으로 이용하며, 전철역에 있는 보관함 모양의 작은 냉장고는 개인이 빌려서 사용해야하고,
TV를 보려면 1층 휴게실까지 가야하는 등, 우리나라의 병실에 비하면 불편한 게 많지만 차츰 몸에 익히고 나니 모든 게 합리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입원실에 가전제품이 없다는 것은 전자파 문제와 함께 절전하는 모습은 배워야 할 일이었다.
호텔에서 편히 잘 수 있는 호사스러움이 미안해서 환자 침대 곁에서 자려고 하니 간이침대와 이부자리를 개인으로 빌려야 했다. 환자복도 바꾸어 달라니까 세탁비를 지불하란다.
그러다 보니 모든 생활이 절약하고 검소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식당에서 식사를 하면서 우동을 주문하면 당연히 딸려 나오는 단무지도 따로 주문해야 하고, 감질나게 나온 음식을 보고 ‘우리나라 좋은 나라’ 라고 외쳤는데 몇 날을 지내고 보니 경제대국 일본이 된 이유를 알게 되었다.
넘치게 많은 밥상의 음식이 자연환경 파괴는 물론 흘러 나가는 돈이 아까운 걸 느끼지 못하는 우리들은 그들의 현명함을 배워야할 일이었다.
15일째 되는 날, 귀국해도 된다는 승낙을 받는 순간, 눈물이 핑그르르 돌았다.
다시 살아났다는 안도감과 그동안 최선을 다해 정성껏 치료해준 일본의 담당의사와 간호사들의 사랑과 헌신, 친절에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 용솟음쳤다.
그 순간 고마움에 답하는 방법은 진정으로 고마운 마음 전하며 한 사람 한 사람을 포옹하는 이별식 뿐이었다.
2주 이상 최선을 다해준 그들의 눈에도 굵은 이슬이 맺혔다. 꼭 다시 와서 아름다운 미야자끼를 관광하라며 잡은 손을 놓지 못하던 천사들....
일본의 미야자끼 병원이 자신을 살려 주었다고 생각하는 남편, 자신으로 인해 깨져버린 여행을 다시하면서 고마운 이들을 찾아가 보려는 남편의 모습이 애틋하게 보인다.
고마운 친구K님 부부와 네 명이 함께 갈 참이었는데 경비를 모두 남편이 부담하겠다고 하니 폐가 된다며 극구 사양하는 부인 때문에 오붓하게 남자 둘만의 여행으로 계획이 수정되었다.
지난봄의 악몽대신 아름다운 여행을 하리란 나의 소망은 접어야했다.
환자가 잠든 사이 짬짬이 시간 내어 쏘다녔던 시가지가 눈에 선했다.
가슴 답답할 때 찾아 나섰던 오요도 강도 여전히 유유히 흐를 테고 강변 둔치 토끼풀꽃 틈에 핀 분홍빛 자운영도 그때처럼 곱게 피어있겠지.
내년엔 나 혼자라도 다녀올까 싶다. 미야자끼를 사랑하게 된 나를 어찌하면 좋을까, 그리고 미야자끼 병원의 그 고마운 분들을 잊을 수 없다.
토셀리 / 세레나데 / 페리 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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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함수곤의 `한밤의 사진 편지` 원문보기 글쓴이: 함수곤
첫댓글 잘 읽었어요. 애태우셨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 합니다. 그 고마움을 잊지 않고 감사하는 일도 아름답게 보이네요. 감사합니다. 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