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책
분리, 모험, 성장의 이야기
김지은
1. 『엄마 없이 보낸 일 년』(다샤 톨스티코바, 배블링북스 옮김, 도서출판 산하, 2016)
낯선 곳에서 양육자와 떨어져 지내는 이야기는 어린이 독자를 몇 가지 방향에서 사로잡는다. 우선 독자는 주인공이 모르는 사람들과 상상 밖의 일을 겪을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설렌다. 더불어 평온하던 일상이 흔들릴 것이라는 불안함 때문에 주인공과 함께 울렁거리기도 하는 것이다. 방학에는 적당히 과장된 모험담이 탄생하기도 한다. 르네 고시니의 동화 『꼬마 니콜라의 여름방학』(문학동네, 1999)에서는 니콜라가 물보라 섬으로 떠나기 위해 배를 타는 장면이 다음과 같이 그려진다.
“나는 약간 실망했다. 배가 너무 작았기 때문이다. 선장 아저씨는 베레모를 쓰고 있었는데, 얼굴이 커다랗고 빨갰다. 내 상상처럼 금실이 달린 제복은 입고 있지 않았다. 방학이 끝나고 학교에 가면 친구들한테 자랑하려고 했는데……. 하지만 상관없다. 꾸며내서 이야기하면 되니까 말이다. 뭐 어때?”(39면 중에서)
설렘, 불안, 모험과 성장은 매력적이다. 방학 동안 어린이가 가족과 분리되는 동화가 꾸준히 사랑받는 데는 이런 이유가 있다. 김선정의 동화 『방학 탐구 생활』(문학동네, 2013)은 방학의 모험을, 이소은의 동화 『잃어버린 겨울 방학』(소년한길, 2003)은 방학의 불안을 다룬다. 크리스티네 뇌스틀링거의 『여름방학 불청객』(양철북, 2011)은 방학 중 교환학생의 등장으로 주인공의 갑갑한 삶에 균열이 생기며 성장하는 이야기다.
『엄마 없이 보낸 일 년』도 두 번의 방학과 분리의 경험을 담은 작품이다. 엄마 아빠가 이혼한 이후 다샤는 엄마,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 모스크바에 산다. 러시아 부조리 시에 대한 박사학위 논문을 쓰느라 바빴던 엄마는 학위를 마친 다음 직장을 얻자마자 일 년간 미국 시카고로 떠나게 된다. 다샤를 데려갈 수 없는 형편이라서 다샤를 외할머니에게 맡긴다. 다샤는 엄마 없이 일 년을 보내야 하는데, 그 기간에도 방학 동안에는 모스크바가 아닌 낯선 곳에서 지내야 한다. 그래서 이 작품은 엄마가 없는 모스크바, 여름방학 동안 머문 근교의 휴양지, 겨울 방학에 갔던 뮌헨, 엄마가 돌아온 모스크바로 공간이 바뀌며 진행된다.
작품의 시간적 배경은 1991년 전후로 러시아가 개혁과 개방을 하는 과정에서 진통을 겪고 있던 무렵이다. 그래서 엄마가 있는 시카고와 주인공이 있는 모스크바의 심리적 거리는 더 멀다. “엄마가 서방인 미국에 있다.”라는 사실이 더 아득한 일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시시각각 변하는 당시 모스크바의 정치적 변동 정황이 작중에 등장하고 단절된 다샤의 위기의식도 높아진다. 어린이가 놓인 사회·정치적 맥락을 보여 줌으로써 주인공의 성장에 또 다른 의미를 더한다. 작품에는 고르바초프, 보리스 옐친 등 당시 정치인의 실명이 등장한다.
다샤의 엄마가 미국행을 결심하고 비행기를 타던 날의 이별 장면은 애잔하고 아름답다. 누군가 먼 길을 떠나면 환송하는 이들이 조용히 둘러앉아서 가는 사람의 행운을 빌어 주는 것이 러시아의 풍습이다. 그러다가 떠날 시간이 되면 그중 가장 나이가 많은 사람이나 어린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길을 열어 주어야 한다. 나이가 많은 할머니와 어린 다샤는 서로 그 역할을 결심하지 못하고 망설인다. 그 무렵 러시아의 젊은 여성이 아이를 남겨 놓고 자신의 뜻을 펼치기 위해 미국으로 가는 일이 어떤 무게를 지니는지 생각하게 하는 장면이다. 엄마 없는 첫 방학에 다샤는 생소한 휴양지에 방문하게 되고 그곳에 있는 사이 모스크바에서는 커다란 쿠데타가 일어난다. 전화도 연결되지 않는 휴양지에서 다샤는 미국에 있는 엄마를 걱정하고, ‘둥지를 틀고 있는 작은 새의 울음소리’를 떠올리며 정치적 격변기의 불안을 잠재우려 애쓴다.
심상치 않은 불안을 바탕에 깔고 있지만 다샤의 이야기는 산뜻하다. 여름 휴양지에서 만난 선배 페챠를 사랑하게 되고, 페챠가 다니는 학교에 진학하고 싶어 온 힘을 다해 시험을 준비하지만 낙방한다. 엄마가 주고 간 테이프에 담긴 목소리를 듣고 외로움을 견디면서도 혼자 목표를 세우고 스스로 도전하는 사람이 되어 간다. 겨울 방학 무렵에는 뮌헨의 생경한 극장에서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보며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에게 반하고, 처음으로 누텔라를 맛보고 놀란다. 작가는 다샤를 통해 개혁개방 시기 러시아의 어린이들이 느꼈던 엇갈리는 감정을 입체적으로 보여 준다.
일 년간의 분리를 끝낸 다샤는 엄마와 재회하지만 새로운 모험 앞에 서게 된다. 방학은 늘 개학으로 이어지며 작은 분리의 경험은 큰 변화의 예고편이 된다. 어린이가 혼자 있다는 것은 동화에서 매우 흥미로운 설정이다. 우리 동화에서도 방학에 관한 더 다채로운 이야기들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2. 『개가 전해 준 쪽지』(게리 폴슨 지음, 정희성 옮김, 탐, 2011)
게리 폴슨의 작품을 ‘숨은 책’ 코너에 쓰기에는 이 작가가 너무나 잘 알려진, 위대한 작가여서 고민했다. 1931년생인 그는 뉴베리상을 세 번이나 수상했고, 그중 1987년 작인 『손도끼』(사계절, 2001)는 우리 독자들이 해외 청소년 문학의 대표작으로 기억하는 작품이다. 게리 폴슨은 지금까지 200권이 넘는 작품을 썼는데, 국내에서는 뉴베리상을 수상한 『겨울방』(문학과지성사, 2001)을 비롯해 대부분의 작품이 절판된 상태다. 문학성에 비해 큰 호응을 못 받은 것이다. 성장의 반려자 또는 조력자가 제거된 상태에서 잔혹한 세계와 어린 인물이 직접 맞서는 이야기는 국내 독자들이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것일까. 독자는 좀 더 부드럽고 다정한, 양의 방향이 강화된 듯한 비현실적인 성장을 원하는 듯하다. 그러나 청소년의 현실을 들여다보면 게리 폴슨의 인물들이 겪은 경험 못지않은 황량함 속에 내동댕이쳐진 경우가 적지 않다.
90세를 눈앞에 둔 작가는 그 자신이 험난한 성장의 증언자이기도 하다. 게리 폴슨은 “나는 양육자가 없으며 오직 스스로 나를 키웠다.”라고 말한다. 부모는 지독한 알코올중독자였고, 집안은 끔찍했다. 집보다 안전한 바깥이 있으면 그곳이 어디든 가야 했다. 그가 살아남기 위해 몸을 누인 헛간, 주차장, 거리, 무너져 가는 건물의 지하실, 숲의 빈터는 모두 작품의 배경이 되었다. 게리 폴슨의 주인공들은 방치되었거나 고립되어 있다. 혼자 비행기에 오르고 사냥을 하고 자연의 위력에 맞선다. 『손도끼』의 주인공 브라이언이 이혼한 아빠를 만나러 가기 위해 탑승한 비행기에서 하필이면 조종사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 버린 것은 우연이 아니다. 브라이언은 끝이 보이지 않는 대삼림 속에서 54일의 사투 끝에 살아남는데, 이는 작가 자신의 유년기를 축약한 인물이다. 그에게 가족이자 친구가 되어 주었던 것은 이름이 새겨진 공공도서관의 독서 카드와 책밖에 없었다. 도서관 지붕 아래에서 느꼈던 유일한 안온함의 경험이 역경 속에서도 그를 작가로 만들었다.
『개가 전해 준 쪽지(Notes from the dog)』(2009)는 부모가 이혼 소송 중인 매슈와 ‘버섯처럼 폐쇄적인 성격을 가진’ 중학생 핀이 주인공이다. 외톨이를 자청한 핀은 여름 방학 동안 대화를 나누는 사람의 수를 열 명으로 제한한다는 계획을 세운 상태다. 아무하고도 말을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옆집에 머무르게 된 대학원생 누나 조해나 잭슨을 만나면서 계획이 틀어진다. 조해나에게는 머리카락이 없었는데, 항암 치료 중이었기 때문이다. 유방암 환자인 그는 의사에게서 암에 걸렸다는 말을 들은 뒤, 단 1초라도 살아 있으면 그것은 암을 이겨낸 것이므로 자신은 암과 싸워 이긴 사람이라고 담담하게 말한다. 매슈와 핀은 조해나의 부탁으로 정원 관리를 돕게 되고, 세 사람은 끈끈한 우정을 쌓는다.
세계와 담을 쌓았던 핀은 투병 중에도 명랑한 조해나를 지켜보면서 결국 사람들 사이에 출구가 있음을 깨닫는다. 조해나의 부모는 오랫동안 외국의 교환학생들을 거두는 하숙집을 운영했는데, 그들은 정이 들면서 모두 가족과 다름없는 사이가 됐다. 세계 각국에서 온 조해나를 응원하는 사람들이 언니이고, 이모, 삼촌이며 그들의 관심과 사랑이 조해나를 살리고 있었다. 소심한 핀은 어쩔 수 없이 많은 사람과 손을 잡고 함께 뭔가를 도모하게 되는데, 이것이 생각보다 어렵지 않고 든든한 일이라는 것을 느낀다. 조해나는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이어서, 암 연구소 설립 기금 모금을 위한 달리기를 기획하고 핀과 매슈에게 도움을 청한다. 조해나의 열정을 사랑하는 핀과 매슈는 온 힘을 다해 그를 돕고, 그해 여름 조금씩 다른 사람으로 성장해 간다.
제목처럼 핀이 키우는 개 딜런은 가끔 어디선가 쪽지를 하나씩 물어 오는데, 그 쪽지에 적힌 글귀는 이 작품의 주제를 상징한다. 특히 ‘가족은 네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라는 쪽지는 가족의 해체를 앞두고 새로운 가족을 찾아 나가야 하는 매슈나 고립을 자처하던 핀에게 큰 울림을 준다. 도서관만 오가던 책 중독자 핀의 아빠도 마음을 열고 조해나를 둘러싼 모든 사람이 대안적 가족을 만들어 간다. 이 작품은 청소년이 느끼는 미래에 대한 불안이 얼마나 큰지, 그 불안을 잠재울 수 있는 동력은 무엇인지 고전적인 방식으로 알려 준다. 간혹 지금의 감수성과 맞지 않는 번역어들이 눈에 걸리지만, 암 환자를 대상화하지 않는 건강한 시선, 가족 제도에 대한 열린 태도만큼은 지금까지도 배울 점이 많은 탄탄한 작품이다.
김지은 199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화 「바람 속 바람」이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아동청소년문학을 연구하면서 평론과 서평을 쓰고, 여러 대학교에서 아동문학을 강의하고 연구하고 있다. 좋은 어린이책을 읽고 소개하는 일을 즐기는 사람으로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