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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 묵상글 들(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축일-전 존재로서 사는 삶.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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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전 존재로서 사는 삶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오늘 주님께서는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거라 하십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기 목숨'과 '목숨'을 구분하시는데
이어지는 말씀으로 보아 목숨이란 영원한 생명을 일컬음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시지만 요즘 심리학에서는
자기를 사랑하라고, 사랑하되 옳게 사랑하라고 합니다.
저도 이 얘기가 잘못된 말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사실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의외로 많고,
사랑하더라도 옳게 사랑하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자기 맘에 들지 않아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이 많고,
욕구를 들어주는 것을 사랑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래서 비만임에도 욕구를 억제하려 하지 않거나 억제치 못합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정말로 사랑하고 옳게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를 위해 자기 욕구를 희생하거나 욕망의 자신을 미워할 것입니다.
이것은 이런 것과 비슷한 이치입니다.
의사들은 나를 위해 나의 다리를 절단하라고 하고,
주님은 눈이 죄짓게 하거든 눈을 빼버리라고 하시는데
다리와 눈이 다 나의 눈과 다리이지만 나의 한 부분이기에
다리와 눈은 나이면서도 전 존재로서의 내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전 존재로서의 나를 살아갈 수 있어야 하고,
자기 목숨도 그리고 자기 목숨을 미워함도
이 전 존재라는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전 존재란 지체와 전체의 관계에서만 전 존재가 아닙니다.
시간과 공간의 차원에서도 전 존재이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나라는 존재는 지금 이승에서 뿐 아니라
미래 저승에서까지 살아야 할 존재이고 이것을 일컬어 영원이라고 하는데
이런 뜻에서 전 존재란 바로 영원의 존재입니다.
그러니까 영원이라는 것에는 '지금부터 영원히'라는 뜻도 있지만
'이승에서부터 저승까지'의 뜻도 함께 있는 개념입니다.
이승에서만 산다면 그 목숨은 영원한 목숨이 아니니 말입니다.
그리고 영원이라는 것은 시간과 장소 면에서의 확장일뿐 아니라
관계 면에서도 확장입니다.
오늘 주님 말씀에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한다"는
표현이 있는데 하느님만이 영원하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에
우리는 하느님께 이르러야만 영원한 생명을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관계의 확장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전 존재와의 관계로 그러니까 모든 피조물과의 관계로 확장됩니다.
그러니까 나의 전 존재가 모든 것이신 하느님 안에서 모든 존재와
관계를 맺고 같이 살아갈 때 같이 영원에 이르고 영원을 삽니다.
그러므로 이제 다시 앞으로 돌아가 잃어야 할 자기 목숨이 뭔지
정리하면 자기 목숨이란 이 세상에서 나만 살려는 목숨입니다.
저 세상은 생각지 않고 이 세상만 생각하는 목숨이요,
다른 목숨은 생각지 않고 자기 목숨만 생각하는 목숨이요,
그럼으로써 영원하시고 모든 것이신 하느님과 끈 떨어진 목숨입니다.
이런 자기 목숨을 잃음으로써 내 목숨이 한 알의 썩는 밀알이 될 때 자기도
다른 사람과 함께 하느님 안에서 살게 된다는 것이 오늘 주님 말씀이고
오늘 축일을 지내는 라우렌시오 순교자는 그 모범이라는 말씀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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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를 성대히 기념하는 오늘, 미사의 말씀은 나눔과 일치를 이야기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2코린 9,7)
라우렌시오 성인은 가난한 이들을 교회의 보물이라 불렀습니다. 성인은 사회와 교회의 도움을 받는 가난한 이들이, 단지 혜택을 받는 수혜자에 그치지 않고 오히려 사회와 교회를 성화하는 존재임을 알고 있었지요. 가난한 이에게 기꺼이, 기쁘게 미소와 마음과 손을 여는 이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하느님께서 이미 가난한 이들 안에 거처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모든 면에서 모든 것을 넉넉히 가져 온갖 선행을 넘치도록 할 수 있게 됩니다."(2코린 9,8)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은총으로 베풀어 주시는 모든 것은 결국 선행을 위한 것이라고 단호히 말합니다. 자신과 가족만 잘 살고 누리며 끝내는 허무한 소비재가 아니라 가난한 이들을 통해 하느님께 다시 되돌아갈, 길이 남을 열매가 되는 것이지요. 이 지혜를 일찌기 깨달은 이는 복됩니다. 그런데 이 귀한 깨달음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고"(요한 12,24)
밀알이 땅속에 묻혀 잘 썩으면 자기 자신의 형체는 사라지지만 다른 생명 여럿으로 변모됩니다. 하나의 생명이 여럿이 되는 셈이지요. 이 놀랍고 유쾌한 증식의 원리는, 그러나 한 생명의 죽음이 먼저 이루어지지 않고는 어렵습니다. 한 죽음이 여러 생명의 발화점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요한 12,25)
여기서 말하는 목숨은 본능적인 자기애와 이기심입니다. 나만, 내 가족만, 우리 편만 향하는 폐쇄적이고 편협한 차별적 욕망이지요. 이를 거스르는 것은 사실 본능을 거스르는 것이니 쉽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아는 지성과, 그분을 믿는 신앙과, 사랑이신 하느님을 닮은 사랑을 간직한 사람에게 가능한 축복이지요.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요한 12,26)
자기애와 이기심에서 죽을 수 있는 이에게는 엄청난 보상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바로 주님께서 계시는 곳에 그분과 함께할 특권이지요. 신앙인이라면 누구나 주님과 함께 머무르길 바라니까요.
"내가 있는 곳"
그런데 주님께서 계시는 곳은 가난한 이들 한가운데, 가난한 이들 안, 가난한 이들 곁입니다. 그러니 주님을 섬기는 사람은 동시에 가난한 이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또 가난한 이들에게 베푸는 이는 바로 주님께 바치는 것이지요.
이 지혜를 깊이 깨달은 라우렌시오 성인은 죽음 앞에서도 굴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는 죽음을 당하지만 썩은 밀알이 되어 "의로움의 열매"(2코린 9,10)를 길이 맺었습니다.
"잘 되어라, 후하게 꾸어 주는 이!"(화답송)
시편 저자는 가난한 이에게 넉넉히 꾸어주는 이를 의인이라 부릅니다. 주님께 인정받는 의로움은 율법을 지킴으로써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얻어지지요. 이 세상에 가난하게 오셔서 가난한 이들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는 나눔의 기회를 놓치지 않습니다. 이 나눔이 주님과의 영원한 일치로 가는 디딤돌이고 징검다리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천재지변과 코로나19 감염병으로 우리나라 뿐 아니라 온 세상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질병과 실직, 사랑하는 이와 삶의 터전을 잃고 아파하는 이웃이 망연히 하늘만 바라보며 울부짖고 있습니다. 이웃의 고통 앞에서 내 일이 아니라 다행이라고 가슴을 쓸어내리기엔 너무 미안하고 죄스럽기까지 합니다. 우리 모두가 이 세상을 이 지경까지 만든 공범이기 때문입니다.
너나할 것 없이 어려운 시대에 넉넉치 않을 줄 압니다만, 그저 주변을 한 번 둘러봐 주시고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는 활짝 편 손을, 위로가 필요한 이에게는 따스한 공감과 격려를, 영적 지지가 필요한 이에게는 아낌없이 기도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함께 연대하고 나누는 가운데 우리는 이미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나눔으로 주님과 일치를 이룬 여러분 모두, 축하드립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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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 이병우 루카 신부님.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12,24)
신앙은 역설(逆說,paradox)입니다.
역설이란, '겉으로 보기에는 명백히 모순되고 부조리하지만, 그 속에 진리를 담고 있는 표현'을 말합니다.
'신앙의 역설의 원조'는 '십자가에 달리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고 그분의 제자들인 사도들과 수많은 성인들과 순교자들과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라우렌시오 순교 성인이 그런 예수님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신앙의 역설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헌금'에 대한 말씀인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이렇게 말합니다.
"적게 뿌리는 이는 적게 거두어들이고 많이 뿌리는 이는 많이 거두어들입니다."(2코린9,6)
오늘 복음의 말씀인 요한12,24의 말씀과 25절의 말씀 역시 우리가 죽어야 살 수 있다는 신앙의 역설을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요한12,25)
어떤 사람들은 내가 죽어야 한다는 말에 짜증을 내기도 합니다. 부활신앙인데 왜 자꾸 죽는 얘기만 하냐고.
부활의 절대적 전제가 죽음이고, 죽음 없는 부활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신앙의 절대적 본질인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라우렌시오 성인은 교회의 보물을 다 바치라는 황제의 명령을 거부하고, 이를 가난한 이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고, 대신에 죽음을 기쁘게 받아들이는 역설의 삶을 사셨습니다.
뜨거운 석쇠 위에서 순교하시면서도 "이제 잘 익었으니 나를 뒤집어 주시오. 이제 다 익었으니 잡수시오."라고 말하는 역설을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도 역설의 삶을 삽시다!
내가 살고, 우리 모두가 함께 살기 위해 내가 먼저 죽는 역설의 삶을 삽시다!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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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
2코린토 9,6ㄴ-10
요한 12,24-26
이 사람들이야말로 진정한 우리 교회의 보물입니다!
라우렌시오 부제는 초세기 교회 식스토 2세 교황님의 충실하고 정직한 비서이자 관리인이었습니다.
교회가 박해 당하고 있었던 아주 어려운 시기였지만 낙천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던 그는
기쁜 마음으로 교황님을 보필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교회에 대한 박해가 점점 심해지던 어느날 교황 식스토 2세는 지하 무덤에서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다가 현장에서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당시 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는 지체 없이 교황님에게 사형선고를 내렸으며 교수형에 처했습니다.
교황의 오른팔 격이었던 라우렌시오를 폭군이 그만 둘리 만무했습니다.
난폭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교활하기로 유명했던 발레리아누스는 라우렌시오 부제를 살살 설득하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황제는 교회의 재산들, 특히 금으로 된 성작, 성반들이 탐이 났던지 교회의 보물들을 모두 모아 자신에게 바치면 아무 일 없을 것이라고, 그리고 앞으로 이러저러하리라고 장밋빛 청사진을 보여주며 회유책을 제시했습니다.
라우렌시오는 그렇게 하겠으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답변합니다.
그 답변 이후 라우렌시오 부제는 엄청 바빠졌습니다.
당시 관리하고 있는 교회 재산, 보물, 귀중품, 기타 등등 가치 있는 모든 것들을 박박 긁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모두 다 나누어주었습니다.
부모 없이 굶기를 밥 먹듯이 하고 있던 고아들에게 뭉칫돈을 하나씩 쥐어줬습니다.
남편을 여의고 한숨만 쉬며 살아가던 여인들에게는 금으로 된 성작을 건네며 팔아서 생활비에 보태라고 말했습니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폭군이 가만히 있을 리 만무합니다.
길길이 뛰면서 라우렌시오 부제를 당장 끌고 오라고 명합니다.
‘모아오라는 교회의 보물들은 다 어디 갔냐.’고 묻는 황제의 질문에 라우렌시오 부제는 천사 같은 미소를 지으며 웃었습니다.
그리고 주변에 둘러서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들이야말로 진정한 우리 교회의 보물입니다.”
그 말에 황제는 완전히 뚜껑이 열렸습니다.
황제는 얼마나 화가 났던지 사형 도구로 빨갛게 달궈진 초대형 석쇠를 택합니다.
그리고 라우렌시오의 옷을 벗겨서 석쇠위로 올라가 누우라고 재촉합니다.
그 순간에도 우리 라우렌시오 부제는 유머감각을 잃지 않습니다.
활짝 웃으면서 제가 알아서 할테니 황제님께서는 조금만 인내심을 가져달려고 하면서 한 마리 굴비처럼 달궈진 석쇠위로 올라가 눕습니다.
라우렌시오는 석쇠위에서 누운 채 지글지글 익어가는 자신의 육체를 바라봐야만 하는 극한 상황 앞에서도 그리도 당당했다고 합니다.
오히려 긴장으로 벌벌 떨고 있는 사형 집행관을 향해 죽기 일보 직전에도 이런 농담을 건넸답니다.
“한쪽은 다 익은 것 같으니 이제 좀 뒤집어주실래요?”
라우렌시오 부제의 이 모습을 묵상하면서 후대에 아우구스티누스 성인께서는 이런 명언을 남기셨습니다.
“라우렌시오의 비결은 영성체였습니다.
그 힘으로 그는 그토록 혹독한 고통도 웃으며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이 한 세상 살아가면서 빨갛게 단 화덕 위에 올라가는 고통을 당하지는 않지만 다양한 고통과 십자가 속에서 살아갑니다.
갖은 역경과 시련이 매일 다가옵니다.
그 모든 인생의 부정적인 경험을 기쁜 마음으로 웃으면서 견뎌내고 극복할 수 있는 비결은
바로 영성체입니다. 미사입니다.
기도생활이며 영성생활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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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 전삼용 요셉 신부님.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
2코린토 9,6ㄴ-10
요한 12,24-26
고행과 자기 학대의 차이점
신자 중에서 가끔은 용하다고 인정받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영성이 높아서 많은 사람이 찾아가, 기도도 청하고 예언도 듣고 치유와 가르침도 받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분들은 대부분 외모가 비슷합니다.
생김새가 비슷하다기보다는 풍기는 이미지가 비슷합니다.
일단 화장을 하지 않습니다.
예쁘게 보이려는 마음까지 주님께 봉헌했다는 것입니다.
머리는 흰머리와 검은 머리가 반반 섞여 있습니다.
전혀 꾸미지 않고 그냥 고무줄 하나로 묶고 다닙니다.
옷도 생활 한복과 같은 멋을 낼 필요 없는 수수한 것을 좋아합니다.
그리고 아주 오래 성당에 앉아 있거나 엄청난 시간을 기도와 성경 필사 등에 투자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분들이 가치 있는 고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학대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고행은 좋은 것일까요?
예수님은 40일 동안 광야에서 세속-육신-마귀와 싸우기 위해 단식하시며 고행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고행은 좋은 것이고 꼭 필요한 것입니다.
고행이 없는 종교는 없습니다.
그런데 고행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리면 그것은 자기 학대일 뿐입니다.
인도에 70년 이상 음식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프라흘라드 자니’입니다.
그는 하늘의 기운을 마시며 산다고 말합니다.
그는 어린 시절 여신의 축복을 받아 신비한 능력을 갖추게 된 이후로 음식을 입에 대지 않고
살아왔다고 주장합니다.
여신 때문인지 그는 여성의 모습처럼 분장하고 다닙니다.
그가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자 인도 국방연구개발기구(ORDO)는 2010년 15일 동안 병원에서 그를 관찰하였습니다.
사람이 15일 동안 물을 마시지 않고는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 30명의 의료진이 카메라와 CCTV를 통해 그를 살펴본 결과 정말 그는 음식과 물을 먹고 마시지 않았습니다.
물론 화장실에도 간 적이 없습니다.
놀란 의료진은 15일 뒤, 자니의 장기와 뇌, 혈관 등을 검사했으나 그 수치가 모두 정상인의 안전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습니다.
뇌의 상태는 25세 젊은이의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밝혔습니다.
DRDO는 그를 더 연구하면 군인들이 전장에서 음식물 없이 견디거나 재난 상황에서 고립된 사람들이 오래 버틸 수 있도록 하는데 보탬이 되는
의학적 성과가 나올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습니다.
이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가능하더라도 아무런 가치가 없습니다.
이런 수행은 그저 자기 학대에 불과합니다.
고매한 스승 밑에서 수행하던 제자가 스승에게 달려왔습니다.
“스승님, 드디어 제가 물 위를 걸어서 강을 건널 수 있게 됐습니다.”
그러자 스승이 말했습니다.
“애 많이 썼구나. 그런데 이 강을 건너는 뱃삯이 얼마더냐?”
“20루피입니다.”
스승이 말했습니다.
“너는 20년 동안 그 고생을 하고 20루피를 번 것이니라.”
이런 이야기도 있습니다.
거의 경지에 오른 제자 하나가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스승님, 어떻게 하면 하늘을 날 수 있습니까?”
스승이 답했습니다.
“하늘을 나는 일은 새들에게나 맡겨 두세나.”
왜 스승들은 이런 시도를 하는 제자들을 칭찬해주지 않을까요?
그런 일을 하려는 목적이 자기 영광을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저도 유학 가서 신학생 때 고행을 한답시고 밥도 안 먹고 잠도 안 잤습니다.
그러나 결국 음식을 먹을 때는 폭식을 할 때도 있었고, 잠은 수업시간에 잤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은 그저 고행 자체로 자신이 특별하다고 느끼려고 하는 자기 학대에 불과합니다.
자기 학대는 자기만족을 위함입니다.
그러나 고행은 사랑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고생을 말합니다.
마치 내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찍으면 반드시 거쳐서 가야 하는 길이 있는데, 그 목적지가 사랑이라면 그 반드시 거쳐 가야 하는 길이 고행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를 죽이는 일은 고행입니다.
그러나 그 고행이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함이 아니면 자기 학대가 되는 것입니다.
이웃을 위해 오히려 얼굴을 예쁘게 꾸미고 머리도 예쁘게 단장하고 슬픈 일이 있더라도 웃는 모습을 보여주며 배가 불러도 필요하면 더 먹어주기 위해 당하는 고통이 바로 고행입니다.
어머니가 가족을 위해 맛있는 반찬을 만드는 것이 고행인 것입니다.
한국의 방송국이 ‘프라흘라드 자니’를 찾아간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15일 단식 당시의 기록을 상세하게 살폈습니다.
그랬더니 샤워하러 들어가기 전에는 방광에 소변이 가득 차 있다가 샤워한 후에는 그 소변이 싹 빠져버린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샤워 물을 마시고 그때 소변을 보았던 것입니다.
훈련되면 음식 없이 40일 이상 사는 것은 어렵지는 않다고 합니다.
자니씨는 자신의 영광을 위해 고생한 자기 학대의 삶을 산 것뿐입니다.
반면 오늘 축일을 지내는 성 라우렌시오 부제는 황제가 원하는 재물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그 덕분으로 자신은 불로 달궈진 석쇠에 구워지는 고생을 하였으니 그것은 정말 고행입니다.
그것은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기도하는 것도,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도, 몸을 조금 괴롭히는 것도 그것이 이웃을 더 사랑하기 위한 열매의 목적이 아니면 상은커녕 평생을 자기에게 자기가 속은 삶을 살 수도 있습니다.
밀알은 썩어야 하지만 반드시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 썩어야 합니다.
그 열매란 나의 고생으로 이웃이 더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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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 새벽을 열며.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 빠다킹신부님.
‘삽질하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삽으로 땅을 파거나 흙을 떠내는 것을 ‘삽질하다’라고 말하지만, 아마 다른 의미로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헛된 일을 한다는 의미로, 별 성과가 없이 삽으로 땅만 힘들게 팠다는 데서 유래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의미인 헛된 일을 의미하는 삽질을 참 많이 하는 우리가 아닐까요? 저 역시 삽질을 참 많이 했습니다. 야구선수가 되겠다고 야구부에 들어갔던 적이 있고, 기타리스트가 되어 보겠다고 방학 내내 기타만 쳤던 기억이 있습니다. 컴퓨터 프로그래머, 바리스타 등등 새로운 것을 배우려고 노력했지만,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합니다. 새로운 것에 쏟아부은 돈과 노력을 생각하면 분명히 삽질했습니다. 그러나 정말로 삽질로 끝난 것일까요?
별 성과가 없는 것 같지만 분명히 재미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재미난 일을 하면서 재미난 인생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 이 분야에 대한 지식을 갖추게 된 것도 내 삶에 또 다른 의미가 되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어떤 것도 의미 없는 삽질은 없습니다. 실패에도 큰 의미가 있는 것처럼 의미를 찾아가는 삶 안에서 나의 소중한 삶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씨앗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으면 땅에서 새 생명으로 싹이 터, 본디 그것을 낳은 식물의 본성을 드러낸다는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실제로 당신의 몸으로 그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자 교회가 무수한 밀알로 싹이 터서 성체라는 생명의 빵으로 구워졌으며, 그 빵을 받아 모시는 우리 안에서 몇 곱으로 늘어났습니다.
죽음 자체로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이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음을 교회의 역사를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죽음으로 이제까지의 모든 일이 의미 없음으로 바뀌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사람이 생명을 잃고 얻음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리스어에서 ‘생명’이라는 낱말은 영혼을 가리킵니다. 자신의 영혼을 사랑하는 옳은 방법과 그른 방법이 있습니다. 우리가 죄 안에서 자기 영혼을 사랑한다면 그것은 그른 방법이고, 하느님의 모습 안에 있는 영혼을 사랑한다면 제대로 사랑하는 것이 됩니다. 결국, 자신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 하느님 안에서 하느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삶, 주님을 섬기고 주님을 따라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섬김의 길은 우리를 영광의 길로 이끌어줍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 ‘삽질’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세상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 ‘삽질’이 됩니다. 그렇다면 어떤 영광을 드러내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할까요?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2코린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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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누는 일을 이 다음으로 미루지 마라. 이 다음은 기약할 수 없는 시간이다(법정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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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본성은 어떤가요?
고스톱을 치다 보면 상대방의 성격을 알 수 있다고 말하더군요. 그런데 고스톱보다 더 정확하게 사람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함께 등산을 가보라고 하더군요. 등산을 통해 그 사람의 본질을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등산의 어려움 속에서도 남들을 위해 얼마나 배려하는지를 보고, 또 중간에 포기하는지 끝까지 가는지를 보고, 어렵고 힘들수록 자신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부정적인 말을 얼마나 많이 하는지도 봐야 한다고 합니다.
결국, 위기에서 자기 본성이 나옵니다. 그래서 위기가 기회가 될 수 있다고 하나 봅니다. 내 본성을 통해 새로운 기회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위기를 피하지 않고, 오히려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본성을 더욱더 성장시킬 수 있는 시간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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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님처럼 사랑하는 사람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사랑은 희생입니다. 참 사랑은 상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할 줄 압니다. 결코 자신의 안위만을 챙기지 않습니다. 그 사랑은 헌신과 봉사에로 열려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목숨을 내어주심으로써 사랑과 봉사의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이는 어리석고 무모한 자기희생이 아니라 숭고하고 고결한 자기 비움과 자기 내어줌의 결과”(함께야).였습니다. 예수님의 열매는 바로 하늘아버지 품속에 당신을 온전히 묻으신 결과입니다. 예수님의 죽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그리고 더 높은 가치 때문에 욕구를 충족시키는 삶이 아니라 의미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이 힘있게 들려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오늘 기억하는 라우렌시오 성인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 한 알이 밀알이 되신 분입니다.“로마 교회의 부제직을 수행하고 거기에서 거룩한 피의 봉사자로 일하다가 마침내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피를 흘렸습니다"(성 아우구스띠노). 그는 모진 박해를 예상하고 교회의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으며 교회의 재산을 탐내는 총독에게 가난한 사람들을 모아 데려가서“이들이 교회의 진정한 보물이다.....나는 주 하느님을 경배하며 그분만을 섬기니, 네 잔인한 고초를 두려워하지 않는도다.”하며 믿음을 증거 하였습니다. 결정적으로 총독이 라우렌시오를 불타고 있는 장작더미 위에 눕혔는데 오랫동안 고통을 겪은 후 "모든 것이 잘 구워졌으니, 뒤집어서 잡수시오!" 하고 말했답니다. 바로 그 믿음의 씨앗이 오늘 우리에게 신앙의 열매로 주어진 것입니다. 과연 “순교자의 피는 믿음의 씨앗입니다”(성 예로니모).
“봄에 씨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적게 뿌리는 사람은 적게 거두고 많이 뿌리는 사람은 많이 거둡니다”(2고린9,6). 사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일을 하시기 위해 세상에 뿌려진 작은 씨앗들입니다. 허락된 시간, 능력, 재능, 물질등 우리가 가진 것, 소유한 것이 무엇이든지 자신을 버리고 하느님의 뜻을 먼저 찾을 때 그것을 몇 갑절로 늘려 주셔서 열매를 풍성히 맺게 해 주실 것입니다. 주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는 데 어찌 열매가 풍성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눈물로 씨 뿌리던 이들, 환호하며 거두리라. 뿌릴 씨 들고 울며 가던 이, 곡식 단 들고 환호라며 돌아오리라”(시편126,5-6).
하나의 밀알을 심는 것은 열매를 희망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풍성한 열매를 맺기 원하면 그만한 정성과 사랑으로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그리고 밀알이 땅속에 묻히면 죽어서 싹을 틔우게 됩니다. 만약에 씨앗이 땅속에 묻히길 거절한다면 아마도 새한테 먹히거나 짐승한테 밟혀 으깨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묻혀야 합니다. 밀알이 땅속에서 사라지는 것은 없어짐을 뜻하지 않고 생명을 낳기 위하여 뿌리를 내림을 뜻합니다. 사실 죽는다는 것은 곧 새롭게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얻기를 원하는 만큼 심어야 합니다. 얻기를 원하는 만큼 죽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요한12,2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는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야 하고 결국 그리하면 아버지 하느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함께해 주시고 또 영광스럽게 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감당하고 있는 모든 일상의 삶을 기왕이면 밀알의 삶이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순명으로 하면 주님의 일이 되고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내일일 뿐입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사랑하면 ‘내 나라’가 만들어지고, 예수님처럼 사랑하면 ‘예수님의 나라’가 만들어집니다. 사실 예수님을 섬기는 사람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며, 예수님처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한 알의 밀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할 만큼 했다고 생색을 내지 말고 끝까지 항구하시기 바랍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영광스럽게 해 주시는 그날까지 결코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말고 최선에 최선을 다하는 기쁨을 차지해야 합니다.
지금은 미약하게 보일 지라도 풍성하게 해 주시는 주님을 믿고 밀알의 두려움을 극복하십시오.“하느님은 당신의 호의에 따라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시어, 의지를 일으키시고 그것을 실천하게도 하시는 분이십니다”(필리2,13). 그러므로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이 받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2코린 6,1).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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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2,24-26: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높이실 것이다
로마의 일곱 부제 중의 한 분이신 성 라우렌시오(+258)는 교황 식스또 2세의 부제였다. 성인이 모시던 교황께서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성인은 매우 슬퍼하였다. 이 모습을 본 교황은 라우렌시오 역시 삼일 안으로 당신의 뒤를 따를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라우렌시오는 사형을 당할 때 석쇠 위에서 불에 태워져 순교하셨다. 이 성인의 순교를 통하여 로마가 회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성인의 문장은 석쇠이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24절) 고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말씀하신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자신이 없어져야 한다. 여기서는 죽는 것으로 표현했지만, 사실은 자신이 모두 없어지고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죽는다는 표현은 지금까지의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습을 모두 버린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는 거기에서 풍성한 결실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을 없이 하는 것은 새로운 모습의 내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께서는 계속해서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며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25절) 라고 하신다.
복음에서 죽는다는 표현이 많이 나오는데 그것은 우리의 육체적인 생명을 죽이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신앙인이기 때문에 대 사회적으로 소금과 누룩의 역할을 하기 위하여, 그리고 나의 이웃을 진정으로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기 위하여 많은 경우에 나 자신을, 나의 의지를, 나의 고집을 죽이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사도 바오로의 표현대로 묵은 나를, 하느님의 뜻에 역행하여 세상의 뜻을 따라가는 나를 죽이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조류를 역행하는, 거슬러 사는 사람들이다.
그것이 어렵고 되지 않는 것은 내가 세상을 거슬러 살고 또 거기에 죽는 것을 견뎌낼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항상 우리는 첫발을 내딛기를 망설이고, 과감히 내딛지를 못하기 때문에 항상 제자리에 서 있는 경우가 많다. 신앙인이든 다른 사회에서나 내가 여기에 멈추어 앞으로 나가지 않는다면 죄를 짓지 않을 수는 있겠으나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에게 뒤처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어쩌면 공동체의 일치 대열에서 자신을 이탈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26절) 라고 하신다. 나를 죽이는 삶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고 영광을 하느님 안에 있음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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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 한상우 신부님.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
밀알 하나가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 24)
생명은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에
있습니다.
죽어야 살고
죽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낮아져야
행복하고
낮아져야
비울 수 있습니다.
밀알이
죽지 않고서는
뿌리를 내릴 수
없는 생명의
역설입니다.
하나의 죽는
밀알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삶을
기억합시다.
열매는 언제나
새로운 삶의
변화이며
실천입니다.
이기적인
자아가 죽지
않고서는
하느님의 뜻을
결코 행할 수
없습니다.
실천하지 않고서는
믿음의 길이
될 순 없습니다.
죽고 비우고
내려놓는 것이
신앙의 기초이며
생명의 신비입니다.
생명의 신비는
하느님께 바치는
겸손으로 더욱
풍요롭습니다.
순교는 날마다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진
십자가의
승리입니다.
참된 믿음은
반드시 열매를
맺을 것임을
믿습니다.
열매와
십자가는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사랑임을
믿기에 십자가와
함께 하느님께
영광을 드립니다.
생명은
십자가와 함께
사랑하는 것입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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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 /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의 묵상
라우렌시오 성인은 로마의 일곱 부제 가운데 한 사람으로, 258년 발레리아누스 황제가 그리스도교를 박해할 때 순교하였습니다. 성인의 순교에 대한 교회의 전승이 있습니다.
식스토 2세 교황이 미사를 드리다가 발각되어 사형에 처하여졌는데, 라우렌시오에게 “사흘 뒤 너도 나를 따르게 될 것이다.”라고 예언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재산을 관리하던 성인에게 로마 총독이 교회의 보물을
황제에게 바치라고 협박하자, 사흘간 말미를 달라고 한 뒤 모든 보물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실제로 사흘 뒤에 라우렌시오는 가난한 이들을 데리고 나타나 바로 이들이 교회의 보물이라고 말하였고, 이에 격분한 총독은 석쇠 위에 눕혀 구워 죽이는 형벌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성인은 오히려 형리들에게 “자! 한쪽은 다 익었으니 나 좀 뒤집어 주시오.” 하였고, 마지막에는 법관을 향하여 “이제 다 익었으니 잡수시오.”라고 말하며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오늘의 독서와 복음 모두 재물과 생명에 대한 너그러운 자세를 통하여 라우렌시오 성인의 삶을 분명하게 밝혀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즐겨 사용하시던 씨앗의 비유로 뜻밖의 수확을 말씀하시며, 당신의 희생으로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됨을 강조하십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바오로 사도도 가난한 성도들을 돕는 일의 요점을 말하며 씨앗과 수확의 비유를 듭니다.
“적게 뿌리는 이는 적게 거두어들이고 많이 뿌리는 이는 많이 거두어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땅에 떨어진 씨앗입니다.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자기 목숨을 사랑하기보다 미워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미워한다는 것은 거저 받은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움켜쥐고만 있던 손을 펴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의 권고가 라우렌시오 성인의 삶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구체적으로 다가옵니다.
“그가 가난한 이들에게 아낌없이 내주니, 그의 의로움이 영원히 존속하리라.”
-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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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신앙 안에서 죽음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이 생에서의 모든 것이 끝나고 단순히 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인에게 죽음은 하나의 문을 통과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낸 사람, 이웃을 사랑한 사람, 주어진 사명에 충실했던 사람은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그런 분들을 성인과 성녀로 공경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영광만을 위해서 산 사람, 이웃에게 상처를 준 사람, 회개하지 않았던 사람은 어둠의 세상에 머물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 또한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기를 전구하고 있습니다. 한 달 전입니다. 평생 군인으로 살았던 분이 하느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최장수 시장이었던 분이 하느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삶의 길이 언제나 영광과 행복이었던 사람은 없습니다. 때로 양심을 속이기도 했고, 때로 갈등과 번민을 겪기도 했습니다. 이 생에서의 공과 허물은 묻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생에서 가장 뛰어났다는 사람도 하느님 나라에서는 가장 작은이보다 못하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들 또한 천상에서 빛나는 별이 될 수 있도록 주어진 하루에 충실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교회는 성 라우렌시오 부제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로마의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박해자들이 교회의 보물을 바치라고 하자 라우렌시오 부제는 교회의 재산을 남몰래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뒤 그들을 박해자들 앞에 데려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이들이 교회의 재산입니다.” 이에 분노한 박해자들은 라우렌시오 부제를 불살라 처형하였습니다. 라우렌시오 부제는 순교하였지만 교회는 성인으로 공경하고 있습니다. 그의 죽음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냈기 때문입니다. 라우렌시오 부제에게 교회의 보물은 화려한 건물, 진귀한 그림, 황금이 아니었습니다. 가난한 사람, 굶주린 사람, 외로운 사람, 병든 사람이 교회의 보물이었습니다. 후배 신부님도 비슷한 일을 하였습니다. 코로나19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교우들에게 1,000불씩 나누어 주었다고 합니다. 취지에 공감한 교우들 중에서 도움을 주신 분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지금 굶주리고, 지금 헐벗고, 지금 아픈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주님께 해 드린 것이라는 가르침을 실천하였습니다.
‘울지마 톤즈’에 이어서 ‘부활’이 개봉하였습니다. 울지마 톤즈는 이태석 신부님의 삶을 기억하는 영화였습니다. 아프리카로 건너가서 복음을 전한 이야기입니다. 나병환자들의 발에 맞게 신발을 만들어 주었고, 꿈이 없는 아이들에게 음악을 통해서 희망을 전해 주었습니다. 신부님은 건강이 악화되어서 하느님의 품으로 가셨고, 톤즈의 아이들과 교우들은 신부님을 기억하며 고마워하였습니다. 부활은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썩었지만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영상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신부님의 강론을 들었던 학생들, 신부님과 음악을 함께 했던 학생들, 신부님과 정이 들었던 학생들의 이야기입니다. 신부님과 함께 했던 학생 중에는 의사, 약사, 공무원이 많았습니다. 지금 의대에 다니는 학생도 40명이 넘는다고 합니다. 남수단의 교과서에도 이태석 신부님의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비록 신부님은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180여명의 제자들은 신부님의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제자들 모두 이태석 신부님께서 보여주신 희생의 길, 사랑의 길, 나눔의 길을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부활’이라고 영화는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과 먹을 양식을 마련해 주시는 분께서 여러분에게도 씨앗을 마련해 주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여러 곱절로 늘려 주시고, 또 여러분이 실천하는 의로움의 열매도 늘려 주실 것입니다.” 참된 부활의 삶은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병든 이들과 함께 사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을 도와주는 것입니다. 겸손하게 살아가며,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주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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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 / 이수철 신부님.
비움의 여정 - 참나(眞我)의 삶 -
‘어떻게 죽어야 하나?’ 물음은 바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는 물음으로 직결됩니다.
누구나 때로 심각하게 묻는 질문이기도 합니다. 특히 주변에서 계속 이어지는 죽음을 대할 때 마다 떠오르는
물음입니다. 얼마전 세상을 떠난 노 사제에 대한 일화도 때때로 생각납니다.
“4년만 더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니 4개월만 더 살았으면, 4일만 더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말한후 다음 날 돌아가셨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많이 살아도 죽음에 직면해서 는 너무 짧은 인생인듯 생각되여
더 살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일 것입니다.
며칠전 장익 주교님 장례미사에 참석했던 수도형제와 주고 받은 대화입니다.
-“은퇴 주교님은 물론 여러 노 사제들이 참석했는데 얼마 남지 않은 자신들의 삶에 대해, 또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겠네요. 나이 순으로 서있는 모습들이 흡사 죽음을 향해 줄을 서 있는 듯이 생각되네요.
오늘은 너, 내일은 나, 이런 순서로 말입니다.
장례미사에 참례한 분들은 숙연한 분위기에서 죽음 준비에 대해 많이 생각했겠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베네딕도 성인 말씀대로 ‘날마다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사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날마다 비움의 여정에 충실하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비워가는 삶이 참나의 삶입니다.
날마다 자기를 비워가는 ‘무아無我의 삶’이 역설적으로 바로 ‘진아眞我의 삶’임을 깨닫습니다.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삶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무아의 삶이자 진아의 삶
이겠습니다. 하루하루 모든 삶을 ‘비움의 계기’로 삼는 것입니다.
비워도 비워도 끝없는 비움의 여정은 비움의 주님을 닮아 참나가 되어가는 여정입니다.
결국은 내 문제로 직결되며 답은 자기비움에 있음을 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바로 오늘 복음이 ‘어떻게 살아야 하나?’에 대한 답입니다.
언젠가 갑자기의 선종이 아니라 날마다 비우는 삶으로 죽음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씨뿌리는 삶, 나누는 삶, 주는 삶, 보살피는 삶, 섬기는 삶 등 모두가 자기를 비우는 ‘이타적利他的 삶’으로
모아집니다. 부단히 모으고 쌓는 집착의 삶이 아니라 부단히 버리고 비우는 ‘이탈離脫의 삶’입니다.
바로 이래야 진아의 삶이요 무지의 삶에서 지혜의 삶으로의 전환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줄 것이다.”
주님을 섬김이 바로 주님을 따름입니다.
막연한 섬김이 아니라 한결같이 주고 나누고 버리면서 비움의 여정에 충실하면서 주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비움의 여정을 통해 주님을 섬기면서 날로 주님을 닮아가는 우리들입니다.
필리비서 찬미가 한 대목이 비움의 모범이신 주님의 참 모습을 보여줍니다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립2,7-8).
비움(케노시스)의 여정은 그대로 순종의 여점, 섬김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하루하루 섬김과 순종의 삶을 통해 자기를 비워가는 삶입니다. 성인들의 삶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오늘은 258년경 순교한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입니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란 말도 있듯이 죽어 떨어져 많은 열매를 맺어 교회를 참으로 깊고 풍요롭게 한
순교 성인들입니다.
성인에 대한 감동적인 일화를 소개합니다.
로마의 집정관이 교회의 보물을 바치라 했을 때 보물 모두를 처리하여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준후 이들을,
즉 병자와 고아와 과부들을 데리고 집정과 앞에 선 다음, “이 사람들이 교회의 보물입니다.”
말했다는 일화입니다.
이어 석쇠 위에 눞혀져 불에 구워져 순교했다 합니다.
성인은 로마와 여러 도시의 수호성인이면서 가난한 사람, 요리사, 소방관의 수호성인이기도 합니다.
교회 미술에서 성인을 상징하는 문장은 순교 도구였던 석쇠입니다.
성 암브로시오가 성인을 찬양했고 성 아우구스티노도 성인의 순교에 대해 다음같이 언급합니다.
“그는 주님의 식탁에서 주님을 받았기에 그 보답으로 자기 자신을 주님께 제물로 바쳐 드렸습니다.
생활에서 그리스도를 사랑했고 죽음에서 그리스도를 본받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 더욱 주고 나누고 버리고 비우는 섬김의 삶에 항구함으로
주님을 닮게 합니다. 적게 뿌리는 이는 적게 거두고 많이 뿌리는 이는 많이 거두어 들입니다.
그러니 씨뿌리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날마다 나눔과 비움의 삶에 항구하며 충실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렇게 주님과 형제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모든 은총을 넘치게 주실 수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 코린토 서간에 나오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결국 모든 것이 은총입니다.
우리가 나눔과 줌의 섬김의 삶에, 비움의 삶에 항구할 수 있음도 주님의 넘치는 은총 덕분입니다.
주님은 참으로 끊임없이 자기를 비우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아버지께서도 그를 존중하고 사랑하십니다.
저에겐 ‘비움의 찬가’처럼 산책때 마다 흥겹게 부르는 노래가 또 하나 있습니다.
‘금강’대신 ‘수도원’이나 ‘불암산’을 넣어도 그대로 통합니다.
-“금강에 살으리랐다 금강에 살으리랐다 운무 더불고 금강에 살으리랐다
홍진에 썩은 명리야 아는 체나 하리오.
이몸이 스러진뒤에 혼이 정녕 있을진대 혼이나마 길이길이 금강에 살으리랐다.
생전에 더럽힌 마음 명경같이 하고자.”-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비움의 여정에, 끊임없이 나누고 주는 씨뿌리는 삶에 항구하고
충실할 수 있게 하십니다. 하여 우리 모두 참나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이래야 마지막 비움인 죽음도 아름답게, 품위있게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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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 이영근 신부님.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성 라우렌시오 축일)
연일 장마 비가 계속 옵니다. 김수환추기경의 “우산”이란 글을 떠올려봅니다.
삶이란 우산을 펼쳤다 접었다 하는 일이요.
죽음이란 우산을 더 이상 펼치지 않는 일이다.
성공이란 우산을 많이 소유하는 일이요.
행복이란 우산을 많이 빌려주는 일이고, 불행이란 아무도 우산을 빌려주지 않는 일이다.
사랑이란 한쪽 어깨가 젖는데도 하나의 우산을 둘이 함께 쓰는 것이요.
이별이란 하나의 우산 속에서 빠져나와 각자의 우산을 펼치는 일이다.
연인이란 비오는 날 우산 속 얼굴이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요.
부부란 비오는 날 정류장에서 우산을 들고 기다리는 모습이 가장 아름다운 사람이다.
비를 맞으며 혼자 걸어갈 줄 알면 인생의 멋을 아는 사람이요.
비를 맞으며 혼자 걸어가는 사람에게 우산을 내밀 줄 알면 인생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다.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건 비요. 사람을 아름답게 만드는 건 우산이다.
한 사람이 또 한사람의 우산이 되어줄 때, 한사람은 또 한사람의 마른 가슴에 단비가 된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다음, 축제를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온 헬라인들이 예수님 뵙기를 청합니다. 그러자 이를 알리는 필립보와 안드레아에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때가 왔음을, 곧 “인자가 영광스럽게 될 시간이 왔습니다.”(요한 12,23)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대체 어떤 힘이 이 밀알을 죽음으로 밀어붙일 수 있을까? 묘하게도 죽음으로 밀어붙이는 그 힘은 생명력입니다. 생명의 힘이야말로 밀알을 죽게 할 수 있는 힘입니다. ‘죽을 수 있는 힘’, 그것은 살리기 위해 죽을 수 있는 힘입니다. 죽어야 살기 때문입니다. 결국, 살리기 위해 죽을 수 있는 힘이 생명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밀알이 땅에 떨어져야 하고, 죽어 묻혀야 하고, 묻혀 사라져 자신이 없어져야 하고, 그러고서야 비로소 생명의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그러니 죽음의 고통은 생명을 드러내기 위해서 꼭 필요합니다. 곧 죽음의 고통은 자기를 벗게 하는 사랑의 다른 이름이요, 새 생명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요한 12,25)
여기에서, 셈족의 언어관습에서 “미워하다”라는 단어는 “사랑하다”라는 말과 관련하여 쓰여서 “덜 사랑하다”, “지고의 가치로 여기지 않다”라는 의미를 뜻한다고 합니다. 이 대비를 통해서,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당위성을 말해줍니다. 곧 땅에서의 ‘죽음’이 생명의 끝이 아니라, ‘참된 생명’(“영원한 생명”)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이 바로 참된 실재를 보존하는 길이며, 미래에 대한 신뢰와 의탁, 곧 영원한 생명에 대한 개방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요한 12,26)
이는 ‘섬긴다는 것’과 ‘따른다는 것’의 긴밀한 연관성을 말해줍니다. 누군가가 따른다고 말하면서 따르는 그를 섬기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따름이 아닐 것입니다. 또 섬긴다고 말하면서 그를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도 진정한 섬김이 아닐 것입니다. 곧 그분을 따라나섰다고 해서 그분을 따르는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따라 나서서 그분을 섬길 때라야 진정 따르는 것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우리의 성소의 길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분을 따라 나서기는 했지만, 여전히 그분을 섬기지 않고 여전히 ‘따라 나선 자신’을 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곧 집과 가족을 떠나는 왔지만 ‘떠나온 자기’를 아직 떠나지는 못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인자가 영광스럽게 될 시간이 왔다.”(요한 12,23)고 알립니다. 그리고 ‘당신을 섬기는 사람은 당신을 영광스럽게 할 그 죽음의 길에 함께 있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그분의 죽음의 길에 함께 할 때 비로소 우리는 ‘당신을 따르는 것’이 됩니다.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앗과 먹을 양식을 마련해 주시는 분께서 여러분에게도 씨앗을 마련해주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여러 곱절로 늘려주시고, 또 여러분이 실천하는 의로움의 열매도 늘려 주실 것입니다.”(2코린 9,10).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요한 12,26)
주님!
함께 있는 이를 존중하게 하소서!
함께 있는 이를 업신여기지 않게 하소서!
당신께서 함께 있는 저를 결코 무시하지 않으시듯,
저 역시 곁에 있는 형제를 종중하고, 함께 있는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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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진 모세 신부님.
또다시 급성 심근경색증 때문에 ......
입원해서 심장 혈관 수술 받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잠시 강론을 중단합니다.
2020. 8. 9.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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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묵상과 기도: 이재을 신부님
성 라우렌시오는 스페인 우에스카에서 태어났습니다. 로마교회 일곱 부제 중 수석부제였습니다. 그의 임무, 부제의 임무는 교회 재산을 관리하고 가난한 이들을 구호하는 일이었습니다. 로마 발레리우스 황제의 박해때, 제국의 관리들이 교회 재산을 바치라고 하자, 그는 가난한 이들과 빈민들에게 재산을 나누어 주고, 박해자들 앞에서 그들을 관리에게 데리고 가서 "이들이 교회의 보물, 재산입니다." 하였습니다. 제국의 박해자들은 라우렌시오 부제를 불에 태어 순교하게 하였습니다. 258년의 일이었습니다. 라우렌시오 부제는 가난한 이들이 재산임을 알려 주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씨앗도 주시고, 먹을 양식을 주셨습니다. 모두에게 그렇게 해 주셨습니다. 내게 주신 모든 것 그분의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
지난시간 돌아봄
지난 시간 걸어온 시간과 길을 회상합니다. 나 자신을 깊이 바라봅니다.
-. 3분 동안. 주님을 바라봅니다.
-. 지난 시간의 각 현장을 되돌아 가서 봅니다. 나와 사람들. 활동, 곧 만남, 대화, 행위를 구체적으로 바라봅니다.
-. 사랑과 진리, 허물과 잘못, 부정과 거짓을 보며, 나의 복음적 생활을 묵상합니다. 회개와 함께 묵상합니다.
-. 지난 모든 일과 만남에 감사하며, 그 결과를 감사의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말씀 묵상
형제 여러분, 적게 뿌리는 이는 적게 거두어들이고 많이 뿌리는 이는 많이 거두어 들입니다. 저마다 마음에 작정한 대로 해야지, 마지 못해 하거나 억지로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모든 은총을 넘치게 주실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언제나 모든 면에서 모든 것을 넉넉히 가져 온갖 선행을 넘치도록 할 수 있게 됩니다. ...
씨 뿌린사람에게 씨앗과 먹을 양식을 마련해 주시는 분께서 여러분에게도 씨앗을 마련해 주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여러 곱절로 늘려 주시고, 또 여러분이 실천하는 의로움의 열매도 늘려 주실 것입니다. 2코린 8,6-1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요한 12,24-26
-. 성경 말씀을 1독, 2독을 합니다. 1독은 소리내어, 2독은 마음으로 읽습니다.
-. 3분 동안 묵상. 마음 깊이 와 닿는 말씀. 메시지를 묵상합니다.
-. 메시지 말씀, 그 말씀의 내용으로, 주님께 기도로 봉헌합니다.
실천하기
라우렌시오 부제는 제국의 박해자들이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려 했을 때, 시간을 달라고 하고는 교회 재산을 많은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부제는 교회의 재산 관리를 담당하였습니다. 그는 교회의 재산은 가난한 이다.'라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심판의 판결 기준을 굶주린이 목마른 이 헐벗은 이 나그네 된 이 감옥에 갇힌 이들에게 해 준 것을 말씀하셨습니다(마태 25장). 기꺼이 가난한 이들에게 다가가고 또 그들을 돌보는 이, 그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실상 지금껏 나와 가족, 주위의 모두에게 씨를 뿌릴 씨앗을 주시고, 먹을 양식을 마련해 주시는 분은 하느님 그분이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씨앗을 마련해 주시고,그것을 여러 곱절로 늘려 주십니다. 그것으로 의로움의 열매를 늘려 주시게 하십니다.
가지고 있는 씨앗과 창고를 열어 기꺼이 나누고 돌보고 도와주는 그런 주님의 제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마치기
성모송 영광송으로 마무리 기도 합니다.
이재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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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을 옮김
묵상글 옮기는 과정 중 아래 부분이 어느 신부님 글 중에서 빠진 것 같습니다.
발견 하시면 댓글로 알려 주세요
저도 몇 번 급하게 찿아 봐서 인지 아직 발견을 못해서 먼저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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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은 생명을 위한 죽음이었습니다. 진정한 생명을 위하여 감당한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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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의 쾌유를 위하여 기도합니다.
전에도 한동안 신부님 강론이 안올라오길래 걱정했었어요...
꼭 쾌유하시길 빌어요
기도드립니다
신부님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평화와 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