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내용은 보도된 뉴스를 바탕으로 각색된 추리소설입니다.
탕-.
무거운 침묵을 깨고 형사 팀장 오정우가 서류철을 테이블 위에 던졌다. 매캐한 담배 연기로 가득 찬 취조실 안, 의자에 앉은 남자는 초조한 듯 손가락을 얽어매고 있었다. 국내 최대 반도체 기업의 수석 데이터 분석가, 김민준이었다.
“김민준 씨. 당신이 넘긴 건 단순한 설계도가 아니야.”
정우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남자를 쏘아보았다.
“이커머스 왕국이라 불리던 쿠팡의 개인정보 유출 사건, 그리고 호남권 800조 반도체 투자 철회 압박 파동. 이 전혀 달라 보이는 두 사건의 이면에는 동일한 ‘설계자’가 있어. 그리고 당신은 그 설계의 핵심 데이터를 제공했지.”
민준이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에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전… 그저 의뢰받은 대로 시뮬레이션을 돌렸을 뿐입니다. ‘인간의 행동 패턴과 거대 권력의 압박’에 대한 상관관계 분석이요.”
정우는 수첩을 펼쳤다. 사건의 타임라인과 단서들이 촘촘하게 적혀 있었다.
“시작은 쿠팡의 정보 유출 사건이었지.” 정우가 나직하게 읊조렸다.
“당시 온 세상이 뒤집어졌어. 민심은 흉흉했고 사람들은 ‘탈팡’을 외치며 토종 플랫폼인 G마켓과 11번가로 대거 이동하는 듯 보였지. 범인도 쿠팡이 몰락할 거라 예상했을 거야. 하지만 수사 결과는 정반대였어. 소비자들은 며칠 만에 고스란히 복귀했지. 왜냐고?”
민준이 체념한 듯 중얼거렸다.
“…습관과 편리함 때문입니다. 로켓배송과 멤버십이라는 족쇄가 이미 소비자들의 일상을 완벽하게 지배하고 있었으니까요. 인간은 분노하지만, 당장의 삶을 흔드는 불편함 앞에서는 결국 눈을 감아버린다는 것. 그게 제 데이터의 첫 번째 결론이었습니다.”
“그래. 범인은 그 심리적 취약점을 정확히 꿰뚫어 본 거야. 인간은 시스템에 종속되면 아무리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스스로 빠져나오지 못한다는 증명. 그리고 그 증명은 고스란히 다음 타깃으로 이어졌지.”
정우가 화이트보드에 ‘호남 800조’라고 적힌 글씨를 탁탁 쳤다.
“삼성과 SK가 호남에 던진 800조 원의 거대한 청사진. 지역 균형 발전이라는 대의명분은 완벽해 보였어. 하지만 바로 그때, 바다 건너 미국에서 ‘100% 관세 폭탄’이라는 협박장이 날아들었지. 자국 땅에 공장을 짓지 않으면 숨통을 끊겠다는 경고. 이 타이밍, 우연일까?”
민준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범인은 쿠팡 사태에서 얻은 확신을 매크로(거시) 시장에 적용한 겁니다. 이커머스 소비자들이 편리함 때문에 플랫폼을 바꾸지 못했듯, 한국 반도체 기업들 역시 거대한 미국 시장이라는 ‘현실적 필요성’ 앞에서 결국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는 계산이었죠. 800조의 명분은 거대한 외압 앞에서는 한낱 종이호랑이에 불과하다는 걸 알고 있었던 겁니다.”
마지막 퍼즐: 사라진 물, 그리고 ‘진짜 범인’
정우는 품 안에서 위성 사진 한 장을 꺼내 민준의 코앞에 밀어 넣었다. 붉게 타들어 가는 호남 영산강 줄기와 메마른 들녘의 사진이었다.
“하지만 범인이 간과한 가장 치명적인 단서가 이 안에 있어.”
민준이 사진을 바라보며 눈을 커다랗게 떴다.
“이건…?”
“반도체 클러스터가 들어서면 하루에 수십만 톤의 초순수가 필요해. 범인은 천문학적인 자본의 움직임과 글로벌 정치 역학 관계만 계산했지, 정작 그 땅에 흐르는 ‘물’과 ‘사람들의 일상’이라는 가장 원초적인 변수를 데이터에서 빼버렸어. 첨단 산업의 불빛에 눈이 멀어, 농업용수가 메말라 죽어가는 지역 주민들의 삶을 지워버린 거지.”
정우가 의자를 당겨 앉으며 민준과 눈을 맞췄다. 취조실의 시계 소리가 유난히 크게 째깍거렸다.
“이커머스 소비자들이 편리함의 덫에 걸려 타협했을지 몰라도, 생존이 걸린 지역 백성들은 달라. 물이 마른 들녘에서는 반도체도 피어날 수 없으니까. 미국의 압박이라는 거대한 그림자 속에서도, 우리가 찾아야 할 진짜 해답은 저 메마른 강줄기를 살리는 ‘진짜 균형’이야. 자, 김민준 씨.”
정우가 볼펜 뚜껑을 딸깍 열었다.
“이 완벽해 보이는 설계 뒤에서 호남의 젖줄을 말려 죽이려 한 자, 자본과 압박이라는 무기로 한국을 뒤흔든 그 ‘설계자’의 진짜 이름을 대.”
민준의 입술이 마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창밖으로 리드미컬하게 들려오는 타워크레인의 웅웅거림이, 마치 거대한 사건의 진실을 예고하는 서막처럼 취조실 안을 무겁게 채워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