혀 외 4편
백지
사람들의 입속에 사는 나는
붉은 빛깔의 연체동물이다
입안 아래쪽에 있는 길고 둥근 살덩어리
맛을 느끼며 소리를 내는 구실을 한다*
뼈가 없어 유순해 보이지만 다혈질이라
달면 삼키고 쓰면 뱉기도 한다
내 몸속엔
달콤한 과즙과 세 치의 칼날이 있다
과즙은 향기로운 독주 같아서 부드러운 입술을 탐하기도 하고
칼날은 날뛰는 말과 같아서 사람들의 다치거나 죽기도 한다
사람들은 나를 두려워 한다
내 몸속에 뭔가 있음을 확실히 아는 것 같다
그래서 그들 목구멍 깊숙이 나를 묶어두고
이빨 울타리를 만들어 영영 가둬버렸다
나는 붉은 동굴에 갇힌 영원한 무기수다
*네이버 지식백과 설명글 인용
여름 울음
방충망에 매미 한 마리 붙어 운다
말복 지나고 처서 지나고
한차례 소나기 지나간 오후
목청껏 울면
죽은 엄마가 돌아올 것만 같아서
나도 저렇게 운 적이 있다
언니는 신던 스타킹을 내 입속에 쑤셔 넣었고
그럴수록 나는 더 악다구니를 쓰며 울었다
매미도 알았을까
울음도 숨 고르기가 필요하다는 걸
매미 소리 잦아들면
나도 꺽꺽 울다가 잠이 들었다
언니에게서 엄마 젖 냄새가 났다
자고 나니
방충망에 매달려 울던 매미는 없고
시든 울음만 허물처럼 붙어 말라가는 오후
여름에도 발목이 시리다는 엄마가
절룩절룩
울음을 끌고 가고 있다
표정 없는 악몽
차에 치여 죽은 고양이가
밤새 할퀴었다
도대체 머리맡에 뭘 두고 잔 거야?
헤드라이트 불빛과
네 눈빛이 부딪힐 때를 기억해
고가도로 위를 쳐다보고 섰다
사다리를 놓아도 올라갈 수 없는
손바닥 차양을 하면 얼굴을 가릴 수 있는
아무도 나의 표정을 읽지 않았다
무표정한 사람들이 모이고 흩어졌다
흩어지는 뒷모습에 침목이 매달려 갔다
침묵할 수 없어서
변기 물을 자꾸 내리는 버릇이 생겼다
- 그만해 제발! 아파, 아프다고
멍은 왜 붉거나 초록일까
멍든 채로 잠들 수 있을까
무표정한 고양이 이모티콘이 도착한다
- 잘 자~ 내꿈 꿔!
숨바꼭질
성주군에서 배회 중인 박영자씨(여, 76세)를 찾습니다
꽃무늬 몸빼바지, 검정 운동화, 파마머리, 155cm, 45kg
폭염 속 주문하지 않은 사람 찾는 문자가 배달되고
주문 배달되지 않는 잔치국수를 찾아 읍내로 갔다
꼭꼭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잔치국수집 간판을 찾아
폭염경보 발효된 이차선 도로를 늘어진 면발처럼 기웃거리는데
아싸, 꾀꼬리, 로얄, 차차차, 써니, 향기, 물결소리, 에이스...
국수 위 고명처럼 맛깔스러운 가요주점 간판들
개발 중인 산업단지도, 소문난 관광지도 아닌 시골 읍내에 가요주점이 즐비하다니
국수 다싯물 속 멸치처럼 입이 쩍 벌어져 삼거리를 지나는데
참외 농사 풍년이던 작년 여름
주머니 두둑했던 동네 영감들이 자주 들락거렸다고
스마트해진 마을 이장에게 일자리 뺏긴 확성기가
삼거리 전봇대에 젖은 국수처럼 매달려 복화술 벌인다
올해는 고추 농사가 풍년이라는데
꽃무늬 몸빼바지, 파마머리 영자씨는 어디 숨어 고추 말리고 있나?
못찾겠다 꾀꼬리!
꽃집이 있는 정문
30년 된 낡은 아파트에 매일 아침 생기를 불어 넣어주는 건 정문 앞 빨간 현관문 꽃집이다.
새빨간 현관문 옆에는 풍성한 초록 치마를 입은 여인초와 가슴 넓은 몬스테라가 손가락을 좍 펴고, 오가는 이들을 반기고 있다 문 안으로 들어서면 앙증맞은 아이비가 아기손 같은 이파리를 흔들고 옹기종기 모여 있는 트리안이 밤새 들어온 소식을 바람과 함께 퍼 나르며 분주하다.
-어머, 오늘 예쁜 아이들이 많이 들어왔네요~
갓 들여온 수국이 수군대며 두리번거리는 동안, 베고니아가 연분홍 볼터치를 하고 도도한 장미는 빨간 립스틱을 바른다 하얗게 안개가 피어오르는 모퉁이에는 누굴 기다리는지 꽃기린이 목을 길게 빼고 서 있고 거울 앞 수선화가 제 미모에 넋을 잃고 흔들린다.
오늘 미국에서 아들 내외가 온다는 103호 노부부가 꽃집에 들렀다 집안 곳곳에 밴 축축한 세월의 냄새를 내보내고 싶었을까 비었던 장바구니에 찬거리 대신 형형색색 꽃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꽃집이 있는 정문을 지나 회색 콘크리트벽 녹슨 울타리 속으로 한 평 가웃 꽃밭을 안고 들어가는 노부부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진다.
: 2023 『애지』신인문학상 등단, 애지 문학회 회원, 다락헌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