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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삶과 문학이 생태환경과 공존하기 위하여서는
이선열 (시인,아동문학가)
인류의 가장 큰 고통은 무엇일까? 전쟁일까? 질병일까?
1347년 흑해에서 이탈리아 시칠리아 항구에 들어온 배 12척은 흑사병을 창궐시켜 세계적으로 1억명이 사망한 인류 최대의 희생에 이어 673년이 지난 올해 2월 빌게이트 예언대로 세계엔 COVID-19가 지구를 덮쳐 현재 1,000만명 감염되고 50만명이 사망하였다.
세계 77억인 일상을 옥죄이고 문화,무역,경제,정치는 물론 우리 영혼까지를 여지없이 피폭하고 인류는 전전긍긍하고 있다. 세계대공항을 능가하는 경제 위기가 도래했고, 경제타격,국제질서의 판도변경으로 새 테크놀리지 디커플링으로 새출구를 뚫어 이 난국을 뚫을 숙명이다.
우리는 IMF,미국발 서브 프라임모기지론,오일쇼크를 이겼듯 코로나19 팬데믹을 필히 이겨내야 한다.한편 문학분야는 나무와 숲과 바다,하늘,바람,산,갯벌 등 생태계의 모든 소재를 우리 실정에 맞춰 유형화 시켜 자연친화적으로 위축되지않고 돌파구를 친환경적으로 모색할 것이다.
우리 문학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문학이 꽃피웠듯 코로나19 이후를 어떻게 대처할것인가는 지금 우리의 가장 당면과제다.
문학은 무엇인가? 문학은 문학 혼자만의 산물이 아니고 인간 본성의 내재적 자유와 사상과 그 모든 것의 합일체일 것이다.
문학의 방향성,외연확대,소비성,독자층,문학의 확장성을 이야기하기 위해 다시 문학을 되짚어본다.
코로나 원인은 아직 불분명하지만 어쩌면 인간의 탐욕과 욕망이라는 전차가 만들어낸 것으로 신의 뜻을 거역한 것만은 분명하고 과학을 맹신적 배타적,만능해결책이라고 믿는 배신의 결과가 코로나로 이렇게 악마처럼 나타나 세계인을 떨게하는 게 아닐까?
이제 인간들은 뉴 노멀을 넘어 노멀로 이동하고 있다.
이제 4차 산업혁명에 불가피하게 합류하여 삶의 수단으로써 온라인 방향과 인쇼어링으로 전환이 불가피하다. 알리바바에게 사스가 있었듯 마켓컬리가 올해 Sell In시대가 도래되듯 문학을 포함한 모든 분야에서 언라인 플랫폼이 대세다.
역설적으로 오랜동안 인류가 생산을 멈추니 환경이 깨끗해졌듯, 중세 흑사병이 산업혁명을 가져왔듯,성장이 꼭 좋은 것이 아니다. 세상을 보는 눈이 반문명, 반성장,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룻소의 외침이 문학에도 적용되지않을까.
생각난다. 1700년대 룻소가 “자연으로 돌아가라”, 솔로우의 소설, 작품속 등장하는 순수, 친자연적인 작품들이 왜 중요한가? 이번 covid-19로 인해 자연의 소중함이 절대적이다.
역병으로인한 환경위기시대 문학가는 어떤 방법으로 환경위기를 지키며 삶의 질을 높여야하나 ?
이제 생태와 환경, 문학을 과학과 대립적으로 보지말고 연대하고 결합하는 제3의 생산적 이론을 만들어야한다.이는 문학인,예술가,사회과학자들의 몫이다. 그래야 이 골치아픈 코로나 19 시대를 극복할 수 있지않겠는가?
코로나-19시대 과학의 발달과 인간의 탐욕이 빚은 결과로 초래된 환경위기의 산물이라면 우리는 역설적으로 과거 원시시대, 농경시대, 기게적인 산업화 시대까지를 자연과 함께 삶을 유지해 오면서 이른바 공존의 그 시대에는 차라리 순수한 인간 중심적인 시대였을 것으로 구분지을 수 있을 것이다
사회구조가 적어도 코페르니크스,갈릴레오,뉴튼과 같은 기초과학이 지배하던 농경시대, 기계적인 산업화 시대까지의 발자취를 하나하나 더듬어본다.나는 다음과 같이 독백하며 자문자답해본다.
“인류의 허파라는 숲, 숲은 누가 만들었을까?
씨앗이 자라 나무가 되고,나무가 모여 숲이 되고,오래전부터 산신령이 숲을 보호한다고 믿은 사람도 옛날엔 있었다한다.”
사람들이 나무를 심어 숲이 된게 아닐까?
“숲속에 사는 우리모두가 오랬동안 같이 만든거야,동물도 식물도,사람도 모두 숲의 주인이야.숲속을 걸어요.크게 숨을 들이키니 상쾌한 공기가 온몸을 펴져요.주위는 온통 나무숲이어요.숲이 잎의 초록색인 이유는 엽록소라는 색소가 초록빛을 띠기 때문이냐.”
“흙은 숲에서 자라는 식물에게 영양분과 수분을 공급해줘요. 미생물이 자라는 식물이 되지요
이끼는 공기중 수분을 흡수해서 숲이 마르지않도록 해요. 그늘진곳, 나무줄기 게곡의 바위에서 자라지요 낙엽은 흙은 덮고 흙의 수분이 날라가지않게 해요
미생물을 분해해서 숲의 영양분을 됩니다. 숲의 질서를 햇빛이 조절하지요.식물들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꽃이 피고 바람이 불면 꽃가루를 날려요 꽃향기도 씨앗도 바람을 타고 멀리 날라가지요 광합성,나무는 햇빛을 이용해서 뿌리에서 끌어올린 물과 나뭇잎 뒷면의 기공으로 빨아올린 이산화탄소로 영양분과 산소를 만들는 이것을 광합성이라고해요”
“그러면 숲의 모습은 어떤가요?
한낮의 숲은 활발합니다 .활기차지요
식물들은 햇빛이 비출 때 열심히 광합성을 하며 자라고 애벌레는 사각사각 나뭇잎을 부지런히갉아 먹어요
나비와 벌은 꽃을 찾아 이리저리 사란을 만들고 딱따구리는 따다닥 딱딱 나무를 쪼고 다람쥐와 청설모는 부지런히 나무를 오르고 때때로 노란 목도리 담비는 어린 새를 좇아 날렵하게 뛰어다니지요”
이처럼 우리는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를 생각하면서 몇가지 관점을 살펴보면, 인간은 자연환경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환경결정론과 또한, 인간이 자연환경을 극복하고 이용할 수잇는 환경 가능성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뭣보다도 인간과 자연은 동일하게 생태계를 구성하고 있으며,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 공생관계로 바라보는 생태학적 관점으로 우리 삶이 영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이는 인간 활동의 산물인 이른바, 문화라는 것을 자연환경에 더하여 인간은 그 영향속에서 생명을 유지하는 것일 것이다.
우주와 인간과 모든 생명들이 상호작용으로 필요한 존재물,서로 귀중하면서 바로 나의 귀중한 생명체가 되어 조화로운 상생관계인데, 이번 코로나 19같이 박쥐라는 세균덩어리 균을 달고 공생하면서 사는 매개물이 천상갑이라는 것과 인간이 연결시켜 그 비늘을 인간이 섭취되면서 우리가 알 수 없는 무서운 돌연변이 균으로 파생하여 전 세계를 인간이 이동하면서 전파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렇다면, 문학은 포스트코로나 시대 어떻게 전개될까?
우선 사회적 진단,사회적 현상을 들여다보면서 포스트 코로나 시대 문학의 방향성과 흐름을 가늠해본다.
한 사례를 들자면 , “전염성 질병의 진화”라는 책을 지은 미국 루이빌대 이월드(P W Ewald) 교수는 에이즈 바이러스가 극성을 부리던 무렵에 백신 개발비 일부를 투입, 콘돔과 주사기를 구입해 사람들에게 무제한 공급해 바이러스 전파를 차단하자는 '행동 백신' 정책 제안한 사례가 있다.
어쩌면 이런 사례가 크게 비난을 받을 일이 아닌지도 모르는데 망신을 당한 그 교수의 말이 지금으로서는 실험 대상일수도 있을 것이다.
바이러스는 우선 전파 경로를 차단하면 이미 감염시킨 숙주와 운명을 같이하여 전파력이 그리 크지 않다는 논리가 있듯, 의학계로부터 철저하게 외면당했다는데, 사실 말라리아 발병률을 가장 크게 낮춰준 게 대단한 치료제가 아니라 한낱 모기장이듯 그 대안은 아주 가까운 생활 주변에 있는 지 모른다.
접촉 금지, 도피, 전 국민 행동 백신 접종...자발적 자가 격리가 현재로서는 유일한 답일 것이다.세상이 먹고 살기 위해 사회가 유지되는 데 필요한 최소 인력만 남겨두고 나머지 국민은 모두 2주간 완벽한 사회적 거리를 유지한다면 어떨까? 그러면 코로나 바이러스는 더 이상 새로운 사람에게 옮아가지 못한다. 증상이 나타나면 병원에 격리해 치료하고 접촉 여부를 추적하면 환자는 현격하게 감소하고 한번 리셋(reset)하고 가면 안전한 사회를 만들 수 있지 않겠는가?
코로나19로 인해 사회현상에서 빈부 격차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고한다.요즘 부자들은 혼잡한 도심을 떠나 한적한 시골 별장으로 피난을 가고 아예 요트를 타고 육지를 떠나거나 무인도를 통째로 빌리는 외국 부자도 있다고한다. 그러나 이는 결코 현명한 처사가 될수있을까? 코로나 바이러스는 쥐나 공기가 아니라 사람이 옮기고 병원은 무인도가 아니라 도심 한복판에 있다.
이처럼 코로나19는 우리에게 가르치는 교훈이 있다.애덤 스미스의 '국부론'(1776)이전 17년 전에 출간된 '도덕감정론'(1759)이란 책이 발간되었다는데 만약 그 도덕 이론을 받아들였다면 어떨까?아마 자본주의는 지금보다 더 인간적이지않았을까? 2012년에는 철학자 마이클 샌델의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그리고 얼마 전에는 새뮤얼 보울스의 '도덕경제학'이 번역돼 나왔다. 그동안 시장이 무자비하게 밀어낸 도덕을 이제 경제학이 되찾아야 한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보울스 교수가 얼마전 온라인 강의 'CAC 글로벌 서밋 2020'에서 팬데믹과 기후 위기 상황에서 도덕경제학의 중요성에 대해 인간의 모든 행위에 가격을 매기는 '야수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도덕적 무관심과 이기심이 점점 더 기승을 부릴 수밖에 없다고 갈파했다. 코로나19는 역설적이지만 하나님의 새로운 삶의 방법을 제시하는 게 아닐까? 우리에게 선한 시민이 선하게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라고 요구하는․․․․․․․
그래서 나는 위에서 이야기한 이유가 있듯,문학의 방향을‘코로나 19’에서 찾아볼수있다고 생각한다. 논리 전개가 사실 조심스럽긴하다
‘코로나 19’는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문학인으로서 그 질문에 반드시 나는 이렇게 답하고 싶다.
코로나 19가 집중적.집단적으로 창궐한 지역은 세계의 강대국, 부를 독점하고 있는 온대 벨트에 소재한 나라라는 점과 문명의 이기가 많고 인간의 왕래가 심한 미국을 비릇한 서구 여러나라와 일본 등이라는 사실이다.
어쩌면 자본주의가 지금 방식으로는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을 코로나가 보여 준 것이아닐까?
신자유주의가 나오고 지난 70-80년 동안 사회주의 기획경제와 경쟁을 해 오는 과정에서 역사적,실증적 구체적으로 자본주의, 신자유주의는 이겼고 승리의 결과를 즐기고 발전을 하고있는 것이다. 90년대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동유럽 사회가 붕괴되고 자본주의 시장 경제가 사회주의 기획경제보다 우리들 자유혼을 만족시켜주고, 끝없는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켜 준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문학은 어떤가? 사회적 동물인 인간으로서 문학을 하는 우리에게 우리 영혼도 이미 사고의 방향과 문학의 프레임, 문학의 파라다임이 이미 물질문명적 자본주의화 되지않았다고 볼 수 있을 것인가? 앞으러 이런 식으로 코로나가 직면하지않았다면 문학 또한 자본주의 적이 된다는 것, 야수가 된다는 것,인간의 피폐는 증가한다는 사실이다.
한국사회가 이렇게 자살율이 높고, 불평등이 높은 것은 자유시장주의 체제로 재벌과 빈부격차가 크기 때문일 것이다. 유럽의 경우는 250년동안 이를 억제하기 위하여 여러 통제 수단을 통해 이끌어 온 역사가 있지만 우리는 그렇지앟다는 데 있다.
신자유주의는 고삐도 풀고, 재갈도 풀어헤치고 마음대로 행하고 있다. 그 결과 신자유주의 30년 동안 특히 한국에서 높은 자살율, 산재사망율은 23년간 세계에서 일등을 기록하고 있다.이천 화재사고와 대구 지하철 사고 등에서 보듯 이것은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자본이 극단적으로 노동을 착취함으로써 생겨난 필연적인 것이다. 2,000년 이후에 지난 20년 동안 산재사망한 숫자가 4만명이 넘고 1년에 2,000 명 넘게 죽은 것은 사실은 분명 비극이고 자본주의, 재벌 중심, 정치적 보수주의자들의 정책 승계등이 그 한 원인일 것이다.
이것은 한국의 정치구조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95% 이상의 의원이 자유시장경제를 지지하고 있다.이것이 핵심 문제이다.
그 다음 문학이 관심을 가져야할 것이 바로 생태의 문제이다. 자전거는 달리다가 서게 되면 넘어지게 되어 있다. 이유 없이 물건이 넘쳐나도 끊임없이 만들어내야한다. 마치 자전거처럼 돌아다녀야 한다. 무조건적으로 생산을 해 내야 한다. 멈추는 순간 자본주의는 무너지는 체제이다. 이게 가장 큰 문제이다. 필요없는 것을 소비하고 많이 파는 것이다. 개성이 없고 파브로프의 개처럼 침을 흘리며 시장이 내던지는 상품 앞에서 끊임없이 달려드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 문학인도 대체로 그 이상적 소비자에 가깝다. 우리도 모르게 소비기계로 길들여진 것이다. 모든 것이 자연의 변형이요, 자연을 파괴,그 과정에서 수많은 부산물이 나오고,환경을 오염시키는 것이다.
또하나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이 있다. 혁신을 너무 좋아하는 것이다. 진보에 대한 지나친 낙관론, 이것은 한국사회를 지배하는 특징이다. 미국도 비슷한 데 유럽에서는 더 이상 인류가 지속할 수 없다는 경고가 나오고 22세기는 우리에게 오지 않는다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지금 살고 있는 우리가 최후의 인류가 될 것이다. 최근에 나온 책 “2050 거주 불능, 지구” 그 책에 의하면 30년 밖에 남지 않았다. 더 이상 살 수 없다는 것이 통계적으로 나와 있다. 이것이 구조적으로 잘못되어 있는 것이다. 과잉생산 자본주의가 문화에 기생하여 끊임없이 자연을 침탈하면서 인간에게 소비 허위욕망을 조작해 내서 소비기계로 만들어 가는 일련의 매카니즘, 이것이 포스트 코로나19 시대 자연 생태와 함께 우리 문학이 눈을 뜨고 이 시대를 살아야한다 .
한가지 역설적인 것은 많은 나라들이 ‘코로나19’로 셧다운에 들어가자 , 놀랍게도 하늘이 파랗게 돌아왔다는 사실이다. 공장은 쉬고 , 원유 생산은 줄고 , 자동차가 멈춘 덕분에 매연으로 몸살을 앓던 하늘이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왔다는 데서 나는 우리 문학의 가능성은 여기서부터 새롭게 시작되지않을까하고 생각해본다.
휴업과 재택근무로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지고 가족간 대화가 늘어나고 서로를 이해하는 시간이 늘어났고 , 이전에는 모르고 살아온 자신을 조용히 돌아보는 여유가 만아졌다는 사실이다. 자본주의 시대 돈보다 가족의 소중함,보다 삶이 넉넉해진 여유에서 원인을 찾듯이 말입니다.
공장이 멈춰도 잘들 살아가고 있다. 소득이 감소해도 잘 살고 있다 . 삶의 규모를 줄어들어도 작은 수입에서 안락과 행복을 찾는 법을 배워야 듯 우리 문학은 어때야할까? 문학이 포스트 모더니즘 이후 욕망이라는 잔치, 욕망과 허세라는 전차의 소비 잔치에 빠져 지구를 얼마나 망쳐왔는가?
문학은 그래서 그 방향성이 달라져야한다. 물질에서 얻어지는 행복이
아닌 새로운 정신적 가치의 행복이 있다는 문학성,그 방향성이 필요한게 아닐까?
소득 3만 달러라지만 우리는 여전히 배고프고 불행하다고 외치고 있다. 물질만능주의,욕망, 지위, 명예로 아우성치고 있다. 내게 돌아올 부를 대기업이 몽땅 빼앗아갔다고 지금도 분노하고 있지않은가?
물질에서 벗어나지 않고는 나의 불행이 너 때문이라는 식의 사고에서 나와 당신은 우리 모두는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유기체적 공간 세상에서 나 홀로 존재하는 것 같지만 나를 둘러싼 가족과 이웃과 국가와 세계와 긴밀한 관계 속에 존재하므로 우리는 타인을 배려하고 질병 감염의 고통이 즉,나의 고통이면서 우리가 사는 지역 공동체 전체의 고통이 될 수 있다는 것도 터득했듯, 문학 또한 휴메니즘, 가족주의, 인류애, 자족하는 마음가짐이 중요한 문학의 방향성이지않겠는가?
박쥐에게서‘코로나 19’ 바이러스가 비롯됐다는 설로 보아 생태계를 비트는 일을 말아야 합니다 . 에볼라 바이러스,메르스도 생태계와 관련이 있으며 인류가 겪어보지 못한 치명적인 바이러스는 짧은 주기로 연이어 인류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
생태계를 위협하는 것 중에 국가가 국력을 구실로 행하는 출산 장려 정책이 있습니다 . 45 억 명이 적정선이라던 지구 인구는 이미 77 억
을 넘어섰습니다 . 밀림이 사라지고 북극의 얼음이 녹아내리는 것도 과다한 인구가 저지르는 생태계 파괴입니다 . 지구는 출산 억제를 하소연하는데 국가는 출산을 강요하다시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상식이라 했던 것들 , 아기는 낳고 , 소비는 미덕이고 , 부는 행복을 가져다주고 , 지구오염을 목도하면서도 경제는 성장해야 한다는 논리는 이제는 상식이 아닙니다 . 비정하지만 '코로나 19'가 이를 아프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진실 같은 가짜 상식을 부정하고 새로운 참 진실을 찾아나서는 일이야말로 진정 문학이 가야할 길이라 생각합니다 . ‘코로나19’는 우리에게 수많은 가능성과 과제를 던져놓았습니다
자, 문학은 이 과제에 하나하나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음은 문학 평론가이자 시인이며 소설가인 최재봉의 글을 소개하고자한다. 우리 문학이 포스트 코로나시대에 대한 해답이 될 것이고 사회 진단적인 시사점이기 때문이다.
코로나19가 일상을 장악하면서 알베르 카뮈의 소설 <페스트> 판매가 급증했다고 한다.
이 작품은 여러 논자들의 칼럼에서도 즐겨 인용되곤 한다. 1947년에 처음 발표된 이 소설 속 상황이 그만큼 이번 사태와 유사하고 그로부터 우리가 얻을 교훈도 여전하다는 뜻이겠다. 문학의 힘을 새삼 느끼게 된다.
<페스트>는 알제리의 도시 오랑에 페스트(흑사병)가 번지면서 도시가 폐쇄된 가운데 이 질병에 맞서 싸우는 인간 군상의 이모저모를 그린 소설이다 . 특히 의사 리외를 비롯한 의료진과 자원봉사자들의 헌신이 감동적이다. 그런데 리외가 의사이면서 동시에 이 소설의 화자라는 사실에는 충분한 주의가 기울여지지 않는 듯하다 .
<페스트>는 1940년대의 어느 해 4월 중순부터 이듬해 2월까지 벌어진 상황을 그린다.
소설 도입부는 이 작품을 “연대기”로 표현하며, “연대기의 서술자”가 “어떤 우연으로 인하여 얼마만큼의 진술 내용들을 수집할 수 있는 입장이 되었”기 때문에 “역사가로서의 과업을 수행하게 된 것”이라고 소개한다.
그 서술자의 정체는 소설이 진행되는 내내 감추어져 있다가 말미에 가서야 그것이 의사 리외라는 사실이 공개된다. <페스트>라는 “연대기”를 쓰게 된 과정과 연유가 곧 소설 <페스트>를 이룬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재귀적 형태를 띤다.
어쨌든 리외가 기록자가 되기로 한 까닭을 설명하는 소설 말미의 문장은 감동적이다.
“입 다물고 침묵하는 사람들의 무리에 속하지 않기 위하여, 페스트에 희생된 그 사람들에게 유리한 증언을 하기 위하여, 아니 적어도 그들에게 가해진 불의와 폭력에 대해 추억만이라도 남겨놓기 위하여, 그리고 재앙의 소용돌이 속에서 배운 것만이라도, 즉 인간에게는 경멸해야 할 것보다는 찬양해야 할 것이 더 많다는 사실만이라도 말해두기 위하여, 지금 여기서 끝맺으려고 하는 이야기를 글로 쓸 결심을 했다 ” (김화영 옮김, 1998년 책세상 판)
이 문장은 문학의 본질과 역할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담고 있다.
문학은 발언이며 증언이고 추억이라는 것,인간의 존엄성과 가치에 대한 찬양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페스트> 화자인 리외의 이런 생각은 카뮈 자신의 견해라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리외를 통해 개진되는 카뮈의 목소리는 중국 소설가 옌롄커가 <한겨레>에 기고한 글 ‘역병의 재난 앞에서 너무나 무력하고 무능한 문학’으로 이어진다. 옌롄커 자신 이 글에서 <페스트>를 언급하고 있거니와, 이 글은 코로나19와 같은 심각한 사태 앞에서 문학과 문학인이 제 역할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반성을 담았다.
“전쟁이나 역병의 재난이 닥쳐왔을 때가 작가들이 기꺼이 ‘전사’가 되거나 ‘기자’가 되어야 할 때이고 그들의 목소리는 총성보다 더 멀리 울려 퍼질 것 ”이라고 옌롄커는 쓴다.
그런데 “중국문학의 문제점은 (…) 작가들이 무엇을 써야 하는지 뻔히 알면서도 절대로 쓰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고 그는 일갈한다. “문학이 무능하고 무력한데 작가들은 이런 무능과 무력에 대해 사유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신들의 펜과 목소리, 권력으로 부조리와 죽음과 통곡의 악보를 만들어 찬미의 시를 노래하고 있다”며, 이것은 “문학을 문학이 아니게 하는 일”이어서 “작가들 스스로 문학의 회자수(사형집행자)가 되고 있다”고까지 통매한다. 한국문학이라고 해서 이런 지적에서 자유로워 보이지는 않는다.
<페스트>는 2차 대전과 나치 독일의 프랑스 점령에 대한 알레고리로 흔히 해석된다.
그러나 말 그대로 전염병 또는 그것이 상징하는 인간의 취약한 실존적 조건을 다룬 소설로 읽어도 무방하다고 생각한다. 코로나19 시대에 우리가 이 소설을 다시 찾는 까닭이 바로 거기에 있을 것이다. 페스트와 코로나19 같은 재앙에 맞서 문학과 문학인이 무엇을 해야 할지에 관한 카뮈와 옌롄커의 말을 가슴에 새기며 이 소설의 마지막 문장을 다시 읽어 본다.
“페스트균은 결코 죽거나 소멸하지 않으며, 그 균은 수십년간 가구나 옷가지들 속에서 잠자고 있을 수 있고, (…) 아마 언젠가는 인간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가져다주기 위해서 또다시 저 쥐들을 흔들어 깨워가지고 어느 행복한 도시로 그것들을 몰아넣어 거기서 죽게 할 날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재봉 평론가의 위 글을 읽으면서 나는 이렇게 생각해본다.“팬데믹에 갇힌 우리 인류는 스스로에게 질문해야 한다.우리는 언제부터 ‘눈먼 자들의 도시’에 살기 시작했을까?”라는 간절하고도 치열한 질문을 해야한다.사라마구의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는 시력이 사라지는 전염병이 도시를 무차별적으로 휩쓸면서 도시 전체가 아비규환으로 변해가는 지극히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작가가 ‘눈먼 자들’ 속에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않는 인물을 만들어 그로 하여금 눈먼 자들이 할 수 없는 역할을 우리 인간은 어떻게 대처하고, 문학은 문학환경생태를 어떻게 어떤 방법으로 문학 생명체를 보여줄 수 있는가?하는 질문에 답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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