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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 영화 이야기] 영화와 피칭
지난 10월 27일에 제4회 가톨릭영화제 사전제작지원 프로그램 공개피칭 심사위원을 맡게 되었다. 내년 가톨릭영화제의 주제인 ‘평등과 존중’의 의미를 담을 수 있는 영화를 선정하고 재정적으로 지원해주는 프로그램이다. 피칭(pitching)이란 감독이 자신이 만들고자 하는 영화에 대한 내용을 재정적으로 지원해줄 수 있는 제작자나 영화 관계자들 앞에서 소개하는 행위를 말한다. 일종의 프리젠테이션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 올해 심사위원으로는 영화 〈실미도〉 등 수많은 흥행 영화를 제작한 한맥문화기획과 씨그널픽쳐스의 김형준 대표님과 매일경제 대중문화 칼럼니스트 및 KBS1 교양프로그램 ‘부네스코위원회’ MC를 맡으며 경성대학교 연극영화과 전임교수로 활동 중인 배우 이인혜 교수님, 영화 〈숙희〉의 연출을 맡은 양지은 감독님, 국제미래학회 미래한류문화위원장과 한국방송비평학회 부회장인 홍익대학교 영상대학원 박장순 교수님이 수고해주셨다.
한국 영화계와 방송현장에서 유명하신 분들과 함께 심사할 자격은 없지만 가톨릭영화제라는 성격상 영화제작을 공부한 신부가 필요했기 때문에 심사위원이 되었다. 공개피칭 중에 그분들은 각 분야의 전문가로, 교육자로서 날카로운 질문을 감독들에게 쏟아냈다. 2년 전 겨우 영화학교를 졸업한 나는 그런 질문을 할 필요도 없었고 할 수도 없었다. 가톨릭사제로서 나는 이렇게 질문을 했다. “왜 인간이 평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나만의 느낌일까? 순간 심사장소의 분위기가 잠시 숨을 멈추는 듯했다. 아마도 그 질문을 들은 피칭하러 온 감독의 당황스러운 표정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날 참석한 대부분의 감독들에게 비슷한 질문을 했지만 비슷한 표정을 지었고 아무도 그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다. 심사를 마친 후 두 편의 선정작을 고르는 회의 중에 다른 심사위원들이 나의 질문을 듣고 ‘저 감독은 오늘 죽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일곱 명의 감독들이 피칭한 작품 주제와 내용이 ‘탈북자, 비정규직, 장애인, 코피노, 내부고발자와 다문화 가정’에 관한 것이었다. ‘평등과 존중’라는 단어에서 떠올릴 수 있는 주제들이다. 영화현장에서는 그런 것을 클리쉐이(cliché)라고 부른다. ‘뻔하고 상투적’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주제와 내용만이 상투적이라고 해서 그런 질문을 던진 것이 아니다. 주제가 ‘평등과 존중’인데 아무도 인간이 왜 평등해야 하는지, 왜 인간은 서로를 존중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과 대답이 작품 속에 전혀 들어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조금 과한 생각일지는 모르지만 나는 그날 그 감독들이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들의 영화의 주제로 선택한 우리 사회에서 불평등과 무시를 당하고 있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이용하고 있다고 느꼈다.
나는 수업시간에 똑같은 질문을 학생들에게 던진다. “왜 인간은 평등해야 하는가?” 대부분 학생들이 “인간이잖아요, 인간은 당연히 그래야 하니까요.”라며 너무 당연한 것을 질문한다는 식으로 반응한다. 그러면 나는 다시 ‘인간이 뭔데?’라고 질문한다. 대부분이 아니라 모든 학생들이 대답하지 못한다. 초·중·고등교육 12년을 받았지만 이런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질문을 들어본 적도, 고민해본 적도 없는 것이다. 『사피엔스』를 써서 주목받고 있는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인간에 대해 이렇게 서술한다. ‘자유, 평등…생물학에는 그런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유전학적 차이가 존재할 뿐이다…자유와 평등은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다.’ 즉 무신론(無神論)적 진화론(進化論; 하느님은 존재하지 않으면 오직 생물학적 진화만이 존재한다고 주장)에서는 인간의 자유와 평등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진화론에서는 인간 사회에서 벌어지는 불평등과 차별은 당연한 자연의 법칙일 뿐이다. 그러나 인간의 본질을 진화론에서 찾는 많은 사람들이 모순적으로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주장하는데 적극적인 경우가 많다.
인간이 자유와 평등을 누려야 하는 이유는 인간의 본질이 ‘영혼’이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고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그 무엇이 모든 인간의 본질일 때 생물학적 환경적인 차이를 넘어서 모든 인간이 자유와 평등을 누릴 권리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본질이 ‘영혼’이라는 것은 하느님의 존재를 받아들일 때만 설명될 수 있다.
2017년도 이제 한 달을 앞두고 있다. 예년처럼 올해도 다사다난(多事多難)했다는 표현을 영화의 클리쉐이(cliché)처럼 쓸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올해는 우리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큰 변화가 있었다. 작년에 제기된 국정농단이라는 정치적, 사회적 이슈는 전국을 들끓게 했고 결국 올해 5월 새로운 정부가 출범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촛불을 들었고 또한 반대로 태극기를 들었으며 아직까지도 정치적 공방은 이어지고 있다. 놀라운 것은 서로 완전히 다른 주장을 하고 있는데 내용은 ‘평등, 인권, 존중’ 등 인간의 가치를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 중에 과연 몇 명이 ‘왜 인간은 평등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진지하게 했으며 답을 가지고 있을까? 인간의 본질에 관한 질문과 고민이 없다면 그것은 한낱 자신의 정치적, 사회적 이익을 위한 투쟁일 뿐이다. 우리는 신앙인이면서도 각자의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시각에 매몰되어 신앙인으로서의 본질적인 질문과 고민에서 멀어져 있는 것은 아닐까? 12월에 쓰는 글에 클리쉐이한 마무리이지만 한 해의 마지막에 다른 그 무엇이 아니라 하느님 앞에 자신의 삶과 의미에 대해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야 할 때인 것 같다.
[일상 속 영화 이야기] 좋은 영화
좋은 영화를 만들고 싶은 것은 모든 감독들의 바람일 것이다. 좋은 영화란 무엇일까? 무엇이 좋은 영화를 만드는 것일까? 흥미로운 소재와 탄탄한 이야기, 캐릭터에 맞는 배우들의 연기와 감독의 개성 있는 연출력, 아름다운 영상을 담아내는 카메라 팀, 감각적인 편집과 효과적인 음악 등 좋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많은 조건들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다 하더라도 단 하나의 조건이 빠지면 좋은 영화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바로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공감’이다. 자기 혼자만 보기 위해 영화를 만드는 감독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화가 보여주는 이야기가 관객들의 공감을 얻어낼 수 없다면 다른 모든 조건들이 갖추어져 있다 하더라도 생명력을 얻지 못한다. 영화제작수업 때 각자의 시나리오에 대해 발표하고 그에 대해 선생님과 동료들의 피드백(feedback)을 받은 것에 많은 시간을 보내게 하는 이유는 자신이 만들고자 하는 영화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 일으키는 이야기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이브 더 캣!』(Save The Cat!, 2005)을 쓴 시나리오 작가 블레이크 스나이더(Blake Snyder)는 커피를 기다리는 줄에 서 있으면서도 뒤에 있는 사람에게 자신의 시나리오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며 피드백을 얻으라고 했다. 그만큼 관객들의 공감을 얻어내기 위해서, 즉 좋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 사람들의 피드백은 필수조건이다.
한 달 전, 일본에 있는 아키타 국제교양대학으로 출장을 갔다. 북해도에 위치한 아키타현은 도쿄에서 신칸센 열차로 4시간이나 걸리는 작은 지방 도시인데 이 대학은 시내 중심가에서도 차로 30분이 걸리는 시골에 있다. 방문했을 때는 눈이 엄청나게 내리고 있었는데 학교를 벗어나 길을 잃으면 얼어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마저 들 만큼 소위 말해 ‘깡촌’이었다. 그런데 이런 벽촌의 작은 대학이 일본 명문대인 도쿄대학과 와세다대학을 제치고 몇 년째 1위 자리를 지키고 있고 일본의 많은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우리나라를 비롯해 전 세계의 많은 학생들이 들어오고 싶어 해서 화제가 되고 있다. 일본 전역 대학 취업률 1위, 취업률 100%로 유명하지만 정작 학교 당국도 취업을 강조하고 있지 않으며 학생들도 취업을 위해 입학한 것이 아니라고 자신 있게 대답한다. 이유는 단 하나 교육 콘텐츠 때문이다. 현대사회가 원하는 종합적이고 사고력과 창의력, 그리고 깊은 교양에서 비롯되는 문제해결 능력을 갖춘 인재를 기르는 교육 콘텐츠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교육 콘텐츠를 위해 학교에서는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수업에 대한 냉정한 피드백이다. 해마다 학생들에게 수업평가를 하게 하는데 정년이 보장된 교수라도 수업에 대한 학생들의 피드백이 좋지 않을 경우 연봉이 삭감될 수 있다. 얼마 전 비슷한 이야기를 우리나라 교수님께 했다가 이런 제도가 교육자들을 자본주의적 무한경쟁에 내모는 것이라고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정작 그러한 제도 속에 있는 아키다 국제교양대학의 교수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수업을 듣는 학생들의 피드백은 당연한 권리이며 이를 통해 자신의 수업에 대한 준비와 질이 계속 발전하고 있다고 말했다.
영화는 계속 변화하고 발전해나가고 있다. 이는 과학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이루어지게 된 영화제작기술의 변화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의 소재와 이야기의 구성, 감독들의 연출 기법과 배우들의 연기도 전부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변화와 발전의 직접적인 원인은 ‘관객들의 변화’ 때문이다. 관객들의 변화는 공감의 변화를 의미한다. 변화된 시대에 변화된 관객들의 공감을 얻어내지 못한 영화는 외면당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좋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 감독들은 자신의 아이디어와 철학에 갇혀 작품을 만들 것이 아니라 관객들이 어떤 이야기를 보고 듣고 싶어하는지, 어떤 이야기에 공감을 하는지 끊임없이 피드백을 얻어야 한다. 피드백을 통한 변화와 발전은 영화에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미래 교육학자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의 피드백과 사회의 변화를 무시한 채 마치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백성들의 고통이나 국제 정세의 변화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명나라에 대한 신의를 저버려서는 안된다는 자세로 자신의 안이한 수업방식을 학문적 순수성으로 변명하고 버티는 교육자들이 아직도 얼마나 많은가. 많은 대학생들이 어렵게 들어와 많은 돈을 지급하면서 다니고 있는 대학에 회의를 느끼고 이탈하는 이유는 교육 콘텐츠가 그들의 공감을 이끌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키타 국제교양대학에서 ‘학생만 생각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이야기를 서로 나누었다. 학생들의 인기에 영합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의 공감을 얻어내는 것이, 취직이 잘 되는 자연계열학과 하나 없이 그것도 특정 전공도 없는 일본의 작은 지방대학의 성공비결이었다. 영화 역시 천문학적 자금으로 제작되었다고 해서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투자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의 공감을 이끌어 내 성공하는 예를 적지 않게 볼 수 있듯이 우리 시대의 교육, 사회, 그리고 우리 교회도 변화하는 시대에 변화하는 사람들의 피드백에 귀를 기울일 때, 그래서 공감을 얻어낼 때 좋은 변화와 발전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일상 속 영화 이야기] 그냥 영화
방학이 되어 오랜만에 친구신부와 영화관에 갔다. 웹툰이 원작인 한국영화였다. 판타지 장르였는데 유명한 배우들이 출연했고 특수효과도 좋았다. 원작을 보지 않았기 때문에 얼마나 원작을 잘 살렸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다. 다만 클라이맥스 부분에 이르렀을 때 한숨을 쉬며 혼잣말을 했다. “또 울어?” 소방관이 죽어 저승으로 가면서 일어나는 내용의 이 영화는 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군대비리, 소외계층의 고통 등을 다루면서 결국 마지막에는 가족 간의 사랑으로 관객들을 울리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영화를 본 관객들에게서 감동의 눈물을 이끌어내는 것은 쉬운 일도 아니고 잘못된 것도 아니다. 그러나 장르에 관계없이 같은 방식으로 전개되는 것은 그리 좋은 방식이라고 보기 어렵다.
“일본 특파원들이 서울에 와서 해야 하는 ‘일’이 영화관 가는 거예요. 정치·외교적 소재를 다룬 영화가 많아서 이슈를 따라잡으려면 영화를 봐야 한다는 얘기죠.”라고 말한 서울주재 일본특파원의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이 기사처럼 대부분의 한국영화는 장르와 관계없이 사회적인 요소를 포함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회고발 영화가 아닌 사극, 멜로, 심지어 판타지 영화까지도 현재 사회의 문제를 소재로 삼고 그것을 통해 이야기를 전개시킨다. 왜? 관객들이 한국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정치, 사회문제에 대해 관심이 매우 높은 편이다. 사회 부조리에 대한 분노, 평등에 대한 갈구 등 다양한 요소들이 영화에도 반영된다. 그렇다면 가까운 일본은 어떠한가? 일본영화는 한국처럼 모든 장르에 사회적인 문제를 투영시키지 않는다. 대체로 개인의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이 반영된 영화가 많다. 대지진처럼 자연재해에 대한 공포가 일상처럼 늘 따라다니는 그들에게 사회적인 문제에 대한 고민보다는 삶과 죽음에 대한 문제가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각 나라의 영화는 그 사회의 역사와 문화에서 탄생하고 주로 그 나라 관객들을 위해 소비되기 때문에 그 자체의 성격은 비난의 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한쪽 방향으로만 지나치게 제작될 경우 영화의 질을 떨어뜨리고, 특히 대부분의 영화에 사회성을 반영하는 한국영화의 경우 정치적, 사회적 이슈를 위한 도구로 전락할 수 있다. 한국의 정치, 외교적 기사를 쓰기 위해 현장이 아닌 영화를 필수적으로 봐야 한다는 그 일본 특파원의 말은 우리나라에서 영화라는 것이 정치와 사회에 의해 이미 도구가 되어버린 것처럼 외국인들의 눈에는 비쳐진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한때는 한국 산업화를 위해 일하던 세대를 그리는 내용의 영화가 한참 만들어지더니 요즘은 독재정권에 항거하던 세대에 관한 내용의 영화가 쏟아져 나온다. 상업영화 제작에 평균 4년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고 들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전혀 적용이 되지 않는 것처럼 정부가 바뀌면 바로 제작이 된다. 또한 특정 감독, 배우들의 연출, 출연 횟수에서도 확연히 차이가 난다. 영화, TV 드라마에서 정부정책을 반영한 내용들이 마치 PPL(product placement : 영화나 TV에서 특정상품을 소품으로 등장시켜 광고하는 기법)처럼 등장하는 것을 볼 때마다 창피해서 얼굴이 화끈거린다. 정치인에 관한 영화도 마찬가지다. 영화 ‘철의 여인’(The Iron Lady, 2011 제작)은 영국의 여성총리였던 마가렛 대처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지만 전혀 미화하지 않고 있다. 이 영화의 감독 필리다 로이드는 “이건 정치 영화가 아니다. 마가렛 대처의 정치적 색채나 정책의 옳고 그름이 아니라 남자만 있는 세상에서 여성 혼자서 느껴야 하는 고립과 고독감, 즉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만나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 그 인물의 삶을 영화적 시선에서 해석하는 것이다. 정치적 성향이 어느 쪽이든 간에 지지하는 특정 정치인을 종교수준으로 미화 하려는 한국의 영화들과는 확연히 차이가 있다. 미국의 경우에도 영화가 정치적 사회적 영향을 반영하지만 정치권이 바뀌었다고 해서 우리나라처럼 대놓고 전체적인 방향을 바꾸지는 않는다.
영화의 시작은 특정집단의 이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일반대중들을 위한 것이었다. 다른 예술이 그러한 것처럼 인간이 자신의 삶 안에서 의미를 찾고 의식을 높이는 도구이다. 영화 속에 드러나는 정치, 사회적 요소들은 그러한 목적을 위한 것일 뿐이다. 만약 영화를 정치적 사회적 도구로 이용한다면 그것이 어떤 내용이더라도 영화가 아니라 ‘프로파간다(propaganda, 특정집단을 위한 조직적 선전활동)’ 일 뿐이다. PPL이 아니라 이제 정말 그냥 영화를 볼 수 있는 지혜롭고 성숙한 한국 사회가 되길 바란다.
[일상 속 영화 이야기] 식스 센스
요즘 영화 스토리 전개에 있어서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결말로 관객들을 놀라게 하는 ‘반전(Surprise ending)’은 아이러니하게도 이제는 그리 놀라운 것이 아니다. 그만큼 반전으로 결말을 맺는 영화들이 많아졌다. 그러나 1999년에 제작된 ‘식스 센스(The Sixth Sense, M. 나이트 샤말란 감독)’ 이전만 해도 충격적인 반전의 결말을 보여준 영화는 거의 없었다. 지금처럼 여러 종류의 영화를 동시에 즐길 수 있는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없던 시절에 ‘식스 센스’를 보기 위해 줄을 길게 서 있던 사람들에게 영화를 보고 나온 사람이 ‘브루스 윌리스가 귀신이야.’라고 외치고 도망가서 사람들을 허탈하게 만들었다는 농담이 있을 만큼 당시에는 반전 결말로 엄청난 인기를 모았다. 이후 제작된 수많은 반전 영화를 보았지만 아직까지 ‘식스 센스’에서 느꼈던 반전의 전율을 준 영화는 없었다.
그러나 영화는 유령들이 보인다는 아이의 상담 심리사였던 ‘브루스 윌리스’가 유령이었다는 반전으로 놀라움과 공포심만을 일으키려 했던 것이 아니라 ‘유령’이라는 캐릭터가 상징하는 존재가 우리 삶 안에도 있었다는 것을 우연한 계기를 통해 알게 되었다. 유령이 보인다는 아이 ‘콜 시어’(할리 조엘 오스먼트)는 유령에 대해 이렇게 묘사한다. “자꾸 유령이 보여요. 보통 사람처럼 걸어 다녀요. 자기들이 죽은 줄도 몰라요. 보고 싶은 것만 봐요. 자꾸 이것저것 부탁해요.” 영화 ‘식스 센스’에서 가장 중요한 캐릭터는 ‘유령’이다. 유령은 이야기의 모티브가 되고 내용을 전개시키며 놀라운 반전의 결말을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주인공 아이가 했던 유령에 관한 묘사는 그 영화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를 드러낸다. 『축척의 시간』을 쓴 서울대학교 이정동 교수는 한 방송사의 강연에 출연해서 이 영화에 드러난 유령의 이미지를 자신이 경험한 에피소드를 통해 소개했다. “어느 CEO가 자필로 간곡히 저에게 강연을 부탁해서 갔는데 정작 강연 자리에 CEO는 나타나지 않았고 알고 보니 본인 방에 있었습니다. 강의가 끝나고 인사하러 방에 들어간 저에게 그 CEO가 ‘우리 직원들이 이 교수님의 강의를 듣고 반성이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저는 ‘아~바로 이 지점이 문제구나. 유령은 자신이 유령인지 모르는구나.’라고 느꼈습니다.” 즉 권위적 리더십만 강조하고 자기 인식이 부족한 리더가 바로 영화에서 말한 유령 같은 존재라는 것이다. 경영진을 제외하고 모든 구성원 계층에서 경영진의 리더십을 글로벌 최하 수준으로 평가하는 것은 권위적 리더십만 강하고 자기 인식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정동 교수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 내가 밖에 있는 유령 같은 리더들을 비난만 할 것이 아니라 동시에 나 자신에게 물어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사순이다. 회개(悔改)의 시간이다. 회개의 출발은 ‘자기 인식’에서 비롯된다. “너 어디 있느냐?”(창세 3,9)는 아담에 대한 하느님의 물음은 맹목적인 뉘우침과 고침이 아니라 지금 나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즉 삶과 세상을 보는 나의 시각을 스스로 되돌아보는 것이 진정한 회개의 출발임을 알려주신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스스로를 되돌아 볼 수 있을까? 조용히 하느님과 자신만의 시간을 가지는 것은 필수적이다. 그렇지만 ‘삶이 곧 기도’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우리 삶 안에서 말씀하신다는 뜻이다. 즉 타인에게 ‘물어 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산업현장의 유령 같은 리더들은 물어보지 않는다고 한다. 이미 코앞에 있는 4차 산업혁명시대를 준비한다고 하면서 그 시대를 살아 갈 세대와 그 시대를 이끌어 갈 사람들에게 물어보지 않는다. 그리고 산업화 세대의 방식으로 주문한다.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라, 빨리, 실수 없이, 6개월 내에.’
거울을 보지 않고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듯이 타인에게 물어보지 않는 사람은 스스로를 되돌아 볼 수 없다. 그러므로 물어보지 않는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즉 ‘교만’이라는 죄에 갇힌 유령이 되고 만다. 하느님 앞에서,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냉정하게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새로운 부활의 삶을 준비하는 시간이 돌아왔다. 나는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 공동체에서 영화 ‘식스 센스’에 나오는 유령처럼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자꾸 이것저것 주문만 하는 것은 아닌가? 물어보라. 내가 ‘유령’은 아닌지.
[일상 속 영화 이야기] 입소문
졸업작품으로 단편영화가 아니라 영화 ‘예고편(Trailer)’을 제작했다. 20분 남짓의 단편영화를 제작한 동료들과 달리 장편 시나리오를 쓴 나는 졸업한 후 제작자들에게 보여줄 예고편이 필요했다. 시나리오는 완벽하게 완성되지 않았지만 이야기의 주요 포인트와 캐릭터, 그리고 흥미를 끌 만한 장면 위주로 촬영을 진행했다. 졸업작품을 상영했을 때 같은 반 동료가 “내 친구가 네 작품을 보더니 장편으로 만들어지면 꼭 보겠다고 하더라.”며 격려해주었다. 내심 좋았지만 내가 작품을 잘 만들었기 때문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모든 예고편은 재미있기 때문이다. 선생님들도 작품을 준비할 때 나에게 해주었던 공통된 조언은 ‘자극(Intrigue : 영화를 보도록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예고편의 주된 목적은 스토리를 전부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들이 영화를 보러 오게끔 자극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고편은 관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재미있는 장면으로 구성이 된다. 그러다보니 액션영화인 줄 알고 보러갔는데 정작 액션은 그 예고편에 나오는 것이 전부인 황당한 경우도 많다. 이런 경우를 요즘 ‘낚였다.’라고 표현하는데 개봉 초반에 잠깐 관객이 몰리다가 이내 발길이 끊긴다. 그러나 유명한 배우도 없고 엄청난 예산을 쓰지도 않았고 대대적인 홍보조차 할 수 없었던 영화들이 초반에는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그 영화를 보고 온 사람들이 주위 사람들에게 적극 추천하면서 엄청난 흥행을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흥행 역주행’이라고 불리는 이러한 현상은 바로 ‘입소문’ 덕이다.
대학 홍보실에 들어와 처음 일을 시작할 때 젊은이들의 흥미를 끌 만한 홍보영상을 만들고 사람들의 주목을 끌면서도 학교 이미지를 높여줄 광고 디자인을 제작하기 위해 많은 고민을 했다. 그때 어떤 분이 이런 조언을 해주셨다. “아무리 광고를 멋지게 잘해도 학교 내 구성원이나 주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평가를 이길 수는 없습니다.” 즉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해서 광고를 한다고 해도 실제로 현장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이 주위에 좋지 못한 평가를 하면 자칫 허위광고처럼 인식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영화의 ‘입소문’처럼 광고 또한 이미지와 컨텐츠가 일치할 때 제대로 된 파급력을 가질 수 있다는 이 조언은 언제나 좋은 지침이 되고 있다.
부활의 소식은 ‘입소문’으로 시작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죽음처럼 로마인들, 유다인들이 함께 모인 공개적인 장소에서 당신의 부활을 드러내지 않으셨다. 예수님의 시신에 향유를 발라드리기 위해 새벽부터 찾아온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부활을 드러내셨고 그녀는 사도들에게 달려가 이를 전한다. 예수님의 부활은 ‘입소문’으로 전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사도들 앞에 실제로 나타나시어 그것을 증명하셨다. 만약 입소문이 거짓이었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졌을 것이다. 부활에 관한 입소문이 지속된 것은 진실된 체험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체험은 입소문으로 전해지고 또 다른 부활체험으로 이어지면서 교회를 형성하고 예수님의 부활이 진리임을 전해주고 있다.
한국 가톨릭교회는 불과 얼마 전까지 한국 사회 내에서 타종교와 비교하여 가장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불교, 개신교에 비해 절대적으로 열등한 신자 비율이지만 신자가 아닌 사람들에게 높은 호감도를 유지해왔다. 한국 근대화 역사에 있어서 가톨릭의 역할이 매우 큰 작용을 했기 때문이지만 이미지도 무시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유럽의 문화적 유산, 교황청, 성직자, 수도자 등 색다른 이미지는 사람들에게 신비함과 매력적인 이미지로 작용했다. 그러나 이미지와 컨텐츠가 상반될 때 오는 괴리는 돌이킬 수 없는 불신(不信)으로 이어진다. 이제는 모든 정보들이 공개되다시피한 시대를 살고 있고 이는 우리를 많은 부분에서 지탱시켜 주던 이미지의 종말을 뜻한다. 더 이상 성직자의 검은 긴 수단자락이, 수도자의 베일이 주는 이미지가 한국교회를 지켜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외면할 수 없다.
지금 교회를 통해 매년 전해 내려오는 부활은 입소문이다. 그 입소문 안에 담겨진 그리스도의 부활이 각자의 체험으로 증명될 때 살아있는 신앙이 된다. 우리가 세상의 수많은 거짓된 이미지 메이킹의 일부로 오해받지 않도록 신앙과 더불어 각자의 삶이 진실 된 컨텐츠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일상 속 영화 이야기] 소통과 협업
영화현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함께 일을 한다. 사람들은 각자의 역할에 따라 팀에 속해 있고 그 팀들은 감독을 중심으로 협업(協業, Cooperation)을 통해 영화를 제작한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소통(疏通, Communication)이다. 감독은 배역에 관해 배우와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고 촬영감독으로부터 ‘장면(Scene)’ 묘사에 대한 의견을 들어야 한다. 촬영감독은 조명감독과 소통해야 원하는 장면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이외에도 음향팀, 의상팀, 소품팀, 분장팀 등 수많은 팀들이 각자의 역할을 서로 연결시켜야 한 장면, 한 장면이 만들어져 연결되고 촬영을 마칠 수 있다. 촬영 이후에도 편집팀, 음악팀, 마케팅팀 등의 작업을 통해 영화가 완성되고 대중에게 전해진다. 영화에 있어서 소통과 협업은 끝이 없다. 만약 팀들 간에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협업은 불가능하게 되고 불의의 사고로 이어질 수 있으며 결과는 참담해진다. 그러나 소통과 협업은 단순히 이론이나 규정을 통해 배우는 것이 아니라 직접 경험을 통해 배울 수 있다. 필자가 공부했던 학교는 ‘실행하면서 익힌다.(Learning by doing)’는 모토 아래 6학기 동안 계속 프로젝트 방식의 수업을 진행했다. 그곳에서 배운 것은 영화를 만드는 지식뿐만 아니라 작업을 해나가면서 수많은 갈등과 화해를 거듭하며 소통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었다. 영화도 스토리지만 영화를 만드는 과정도 갈등, 배신, 그리고 화해가 펼치지는 하나의 스토리다.
대학에서 일하다보니 현대의 교육흐름과 방식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진다. 몇 년 전부터 방송매체를 통해 끊임없이 들려오는 4차 산업혁명은 교육 분야에도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각자의 분야에서만 일을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전혀 다른 분야와 소통하고 협업하는 시대가 되어가고 있다. 예를 들어 수업도 교사가 학생에게 일방적으로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온라인을 통해 선행학습을 한 후에 수업시간에는 토론을 통해 익히는 ‘거꾸로 학습(Flipped learning)’으로 점점 변화하고 있다. 지난해 인도네시아에 있는 대학들을 방문했을 때 프로젝트 수업을 통해 전혀 다른 학과들이 소통과 협업을 통해 학문을 익히는 세계적인 흐름의 방식을 이미 채택해서 교육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세계적인 추세라고 해서 우리 대학에 바로 적용하기는 힘들다는 것을 절감했다. 왜냐하면 단순히 해외의 새로운 교육방식을 벤치마킹(Benchmarking)하는 수준이 아니라 새로운 패러다임(paradigm, 어느 한 시대 사람들의 견해나 사고를 지배하는 이론적인 틀이나 개념)을 변환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소통과 협업이 가능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해야 한다. 그러나 새로운 패러다임은 우리 신앙에 있어 새로운 것이 아니며 이미 우리 안에 존재하고 있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는 수직적인 구조일까? 수평적인 구조일까? 구약에서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는 수직적인 구조로만 이해되었다. 창조주와 피조물, 완전자와 불완전자의 공식만이 진리로 이해되어 왔던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는 하느님과 인간의 새로운 관계설정의 사건이다. 창조주께서 피조물인 인간의 육신을 취하시고 무한자가 유한자인 인간처럼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은 하느님과 인간의 수평적 관계를 드러낸다. 하느님 나라의 완성에 대해서도 예수님께서는 수직적 관계에서 해결하려고 하지 않으신다. 유다인들이 생각했던 모든 것을 한 번에 해결해 줄 수 있는 슈퍼맨 같은 메시아가 아닌 하느님과 함께 소통하며 함께 해결해 나가는 수평적 관계에서 진행하신다. 그래서 제자들을 뽑으시고 교회를 이루시고 지금까지 하느님 나라를 향해 우리와 함께 일하고 계신다. 하느님과 인간의 소통과 협업은 수평적인 관계설정에서 시작된 것이다.
소통과 협업은 상부조직이 하부조직에게 내리는 지침이나 캠페인 구호 같은 수직적 전달방식이 아닌 ‘수평적인 구조’ 안에서 발생한다. 리더(Leader)와 멤버(Member)는 수직적인 지배구조가 아니라 수평적인 역할구조로 이해되어야 소통과 협업이 가능하다. 영화현장이나 교육현장에서뿐만 아니라 이제 모든 사회구조가 소통과 협업을 요구받는 시대, 그 해답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우리에게 당신의 육화와 죽음을 통해 보여주셨음을 기억하며, 먼저 교회와 신앙인들이 실행할 수 있었으면 한다.
[일상 속 영화 이야기] 짬짜면
한국 영화와 드라마의 수준은 이제 세계에서 인정받는다. 미국 전문케이블 방송에 나오는 영화 수준의 드라마를 보면서 ‘언제 우리는 저런 걸 만들 수 있나?’라고 했는데 10년도 지나지 않아 같은 수준의 영상미를 구현해내고 있다. 그러나 단순히 영상미만 발전했다고 해서 한국 영화나 드라마의 수준이 높아졌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스토리의 구성력이 과거에 비해 매우 치밀해졌다. 치밀해진 이유는 장르에 맞게 일관성을 가지고 전개되는 스토리 때문이다. 과거의 한국 영화와 드라마는 장르가 달라도 전개는 거의 같았다. 액션 장르든 법정 장르든 정치 장르든 어떤 장르에 상관없이 남녀 주인공 간의 사랑이 반드시 나와야했다. 감독들이 장르에 맞지 않는 억지스러운 멜로를 빼려고 해도 흥행을 걱정하는 제작자들의 압력으로 어쩔 수 없이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이에 비해 일본 영화는 아이디어도 좋았지만 장르에 맞는 치밀한 구성과 전개로 좋은 평을 받았다. 미국의 영화나 드라마 역시 장르 자체에 집중한다. 미국의 인기 드라마 ‘슈츠(SUITS)’를 한국판으로 리메이크한 드라마 ‘슈츠’에 출연하는 주연배우가 “법정 장르 자체에만 집중할 수 있어서 좋다.”고 한 것은 억지스러운 멜로나 신파가 예전에는 그만큼 많았다는 뜻으로도 읽혀진다. 대한민국 사람들이 연애에 안달난 사람들도 아닌데 왜 이렇게 멜로 장면을 많이 넣으려고 고집했을까? 아이디어도 스토리도 좋아서 아주 좋은 작품으로 제작될 수 있을 것 같지만 흥행할 수 있는 대중적인 안전장치를 두고 싶었던 것이다. 영화에 있어서 흥행은 투자자와 제작에 참여한 모든 이들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그렇게 제작된 영화들이 큰 성공을 거두지도 못했고 결국 관객으로부터 외면을 받았다. 어쩌면 중국음식점에 가서 짜장면도 먹고 싶고 짬뽕도 먹고 싶은 마음처럼 이것도 저것도 아닌 ‘짬짜면’(짬뽕+짜장면) 같은 영화들이었다. 짬짜면은 기발한 아이디어라기보다는 이것도 저것도 결정하지 못하는 우리의 망설임을 잠시 정당화시켜주는 어정쩡한 결과물이 아닐까? 이런 짬짜면 같은 일은 영화에서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안에서도 흔히 일어난다. 새로운 시대에 맞는 창조적이고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요구하지만 정작 그 아이디어가 살아남을 수 없는 기존의 시스템은 포기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 시스템에 맞게 다시 만들어 오라고 한다. 혁신도 하고 싶고 기존의 시스템도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것은 온고지신(溫故知新, 옛 것을 익히고 새 것을 안다.)이 아니라 두 가지 다 누리고 싶은데서 나온 어리석은 욕심이다. 그리고 이러한 욕심은 우리의 신앙마저도 잘못된 길을 걷게 한다.
하느님의 뜻과 세상 욕망의 논리 사이에서 오는 갈등은 평생 우리 신앙인들의 십자가이자 운명이다. 이러한 갈등 자체가 죄가 되는 것은 아니다. 성경 안에 등장하는 신앙의 선배들은 그러한 갈등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있다. 이러한 갈등 앞에서 가장 나쁜 선택은 ‘짬짜면 신앙’이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으련만!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갑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뱉어 버리겠다.”(묵시 3,15-16)는 말씀은 하느님과 욕망 두 가지 모두를 누리고 싶은 비겁하고 어정쩡한 선택 앞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해답이다. 물론 뜨거운 신앙이 하나의 신심을 고집하고 “돌격, 앞으로!”를 외치면서 그런 갈등 따위는 없다고 주장하는 위선적인 신앙은 아니다. 겸손하고 신중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찾아가면서 그 과정 안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두려워하지 않고 신앙의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은총을 구하는 것, 그것이 참 신앙이다.
‘짬짜면’, 음식으로서의 선택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우리 삶과 신앙 안에서는 선택하지 말아야 할 메뉴이다.
[일상 속 영화 이야기] 송새벽의 내 탓이오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서 십년 전에는 천재감독으로 불리었지만 지금은 청소 일을 하고 있는 ‘박기훈’(송새벽 역)이 자신의 연기력 때문에 영화제작이 중단되어 버린 줄 아는 여배우에게 그때의 일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장면이 나온다. “십년 전에 너랑 찍던 그 영화. 찍으면서 알았어. 망했다…큰일났다. 찍어서 걸면 100% 망하고 난 재기도 못할 것 같았어… 그래서 네 탓하기로 한 거야. 내가 구박하면 할수록 네가 벌벌 떨면서 엉망으로 연기하는 거 보면서 안심했어. 더 망가져라. 그래서 이 영화 엎어지면 내가 무능한 게 아니라 쟤가 무능해서 그렇다.”
영화를 만들어 본 사람이라면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장면이다. 영화를 공부할 때 비슷한 일이 있었다. 반 친구의 작품에 함께하게 되었는데 배우의 연기가 감독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몇 번이나 다시 촬영했지만 결국 감독이 만족하지 못했다. 촬영 후 감독을 한 친구가 배우의 연기력에 대해 답답해했다. 하지만 감독도 학생이라 연기지도가 초보였고 시나리오도 훌륭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더구나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외국인이 미국인 배우를 상대로 연기지도를 하기에는 제약이 굉장히 많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배우의 연기력만을 탓하는 외국인 학생 감독의 모습이 참 민망하게 보였다. 영화에서 우리가 보는 인물은 감독이 아니라 배우이기 때문에 연기력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 연기는 배우가 홀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배우가 역할에 몰입할 수 있도록 감독이 그 캐릭터에 대해 충분히 이해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감독을 디렉터(Director, 연기 지시를 하는 사람)라고 하고 배우를 엑터(Actor, 행동을 하는 사람)라고 한다. 배우가 연기를 못하는 것이 단순히 연기자의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은 캐릭터에 맞는 연기자를 선발하고 자연스럽게 그 인물이 되도록 하는 것은 감독의 역량이기 때문이다. 결국 연기에 대한 책임도, 영화에 대한 책임도 감독에게 있다. 만약 감독이 그 영화에 대해 책임지려 하지 않을 때 어떤 배우도, 어떤 촬영 팀도 그를 따르지 않으며 더 나아가 어떤 제작자도 그에게 일을 맡기지 않는다.창세기는 죄의 시작이 ‘교만’이었고 그 교만은 ‘남의 탓’으로 이어졌다고 우리에게 전해준다. 선악과를 따먹은 후 ‘너 어디 있느냐?’는 하느님의 물음에 아담은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 다.”라고 하고 하와는 “뱀이 저를 꾀어서 제가 따 먹었습니다.”라고 대답한다.(창세 3, 9-13) 내 탓은 없다. 결국 함께 살고 있는 사람의 탓이고 유혹한 뱀의 탓이다. 우리 인간은 이렇듯 책임을 회피하고 싶어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한다. 미사를 찬미와 감사의 기도가 아니라 ‘내 탓이오.’로 시작하는 이유는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단절이 교만과 남의 탓에서 비롯되었음을 고백하며 아직도 그러한 자세로 하느님과의 관계를 약화시키며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를 살펴보는데 있다.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우리는 늘 남의 탓만 하며 살고 있지는 않은가? ‘나의 아이디어와 의도는 좋은데 사람들이 그것을 알아주지 못한다. 나는 열심히 하려고 하는데 내 마음을 몰라준다. 다른 사람들은 적극적이지 않다.’며 나의 책임에 대한 무게를 타인에 대한 편견과 무시로 위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도 내 마음을 모를 때가 있는데 어떻게 사람들이 내 의도를 다 알 수 있겠는가? 그렇기에 목적이나 취지의 정당성만 강조하는 것은 아닌지, 나의 생각과 말과 행위를 타인들이 합리적이라고 납득할 수 있는 것인지를 되돌아 보아야 한다. 나의 의도는 좋았는데 상대방이 그것을 알아주지 못했다는 생각은 결국 내가 다 옳다는 ‘교만’에서 비롯된 것이며 결과에 대한 책임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행위로 이어진다. 이럴 때 신앙은 위선이 되고 삶의 모습은 민망해진다.‘내 탓이오.’ 하느님과 나, 나와 사람들의 관계를 지켜주는 신앙의 자세, 삶의 자세이다.
[일상 속 영화 이야기] 휴(休)
영화를 공부하게 되면서 영화를 볼 때 불편(?)해진 것이 있다. 예전에는 영화를 특별한 의도를 가지거나 목적 없이 재미있게 보았다. 영화를 보면서 골치 아픈 평가보다는 내가 봐서 좋아하면 충분했다.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영화를 보면서 배우들의 감정에 빠져서 웃기도 하고 울기도 했고 한동안 스토리에 푹 빠져 살았다. 어릴 때는 로봇 태권 V를 보고 나오면 발차기를 하고, 이소룡 주연의 영화를 보고 나오면 용돈을 털어 쌍절곤을 사서 휘두르다가 몸에 멍이 들기도 했다. ‘어른’이라는 타이틀이 붙고 나서도 일본에 가서 “오겡끼데 스까~”를 외친 것은 철이 없다기보다는 영화 ‘러브레터’에 푹 빠졌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고 싶다. 그런데 영화제작을 공부하고 나서는 영화를 보면 제작과정을 먼저 생각하게 된다. 영화 장면 밖에 있는 제작진들, 촬영, 조명, 음향, 미술 그리고 후반부 작업까지 머릿속에 떠올라 영화에 온전히 몰입하는데 방해가 될 때가 있다. 그 동안은 재미있는 스토리와 배우들의 연기, 아름다운 영상을 통해 현실의 피곤함과 어려움들을 잠시 잊고 몸과 마음의 휴식을 가졌는데 공부가 되다보니 휴식의 비중이 많이 줄어버렸다. 방학 때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물어보았다. 계획이 없는 학생이 단 한 명도 없었다. 대부분 토익준비, 회화공부, 아르바이트라고 대답했다. 어떤 친구들은 서너 개나 되는 계획을 말하기도 했다. 나는 “방학인데 좀 놀지?”라고 했다. 가르치는 사람에게서 “놀아라.”는 말을 듣는 게 처음이었는지 모두 황당해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학교들이 여름에 수업을 하지 않는 것은 교실에 앉아 수업을 듣는 것이 적절하지 않기 때문이며 방학이란 여가활동과 휴식을 통해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는 시간, 충전의 시간이라고 말해주었다. 단 한 번도 방학을 하는 이유와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도 없었고 더구나 노는 방학을 보낸 적이 없는 학생들이 안타까웠지만 이는 학생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는 ‘쉬는 것’, ‘노는 것’에 대해 일종의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먹고 살기 힘든 시절에 정부의 주도 아래 경제성장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일을 했고 전 세계에서 주목받는 결과를 이룬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게 열심히 일한 것은 인간으로서 최소한 누려야 할 의식주 문제의 심각한 상황을 극복하고 나아가 많은 사람들이 여유 있는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어느 정도 경제발전을 이룬 현재에도 휴식과 여유에 대해 부정적인 시각이 우리 사회 안에 존재한다. 그러한 시각은 사람들을 의심하고 감시하는 행위로 이어지고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일에 대한 의미를 퇴색시킨다. 사람들은 상사에게 보이기 위한 겉치레 행위에 집중하게 되고 그러한 분위기가 형성되면 공동체는 더 이상 발전할 수 없다.바이올린을 보관 할 때는 온도와 습도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연주 이외의 시간에는 줄을 풀어놓는 것이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만약 계속 줄을 감아놓은 채로 보관하거나 줄이 팽팽한 상태로 장기간 보관하면 다음 연주 때 음이 맞지 않고 브리지가 휘거나 앞판이 주저앉게 된다고 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의심하고 감시하고 나사처럼 조이면 다음 일을 할 수 없고 사람들의 마음은 돌아서며 공동체는 주저앉게 된다. 쉴 수 있어야 한다. 쉬도록 해주어야 한다. 쉬는 것은 죄가 아니다. 영화를 보고 시답지 않은 비판을 하는 것보다는 잠시 스토리에 빠져 배우들의 마음이 되어보는 것, 그래서 잠시 현실을 잊고 휴식하는 것, 그것이 가장 좋은 영화관람 방법이다.
[일상 속 영화 이야기] 사운드 가이
영화 촬영 현장에는 많은 사람들이 일을 하고 있다. 예를 들 어 두 사람이 대화하는 장면의 경우 시청자들은 마치 두 명의 배우만 존재하는 것처럼 느끼지만 실제로는 수많은 사람들이 카메라 앵글 밖에서 그 장면을 위해 일을 하고 있으며 역할에 따라 각 팀의 성격이 구분된다. 그 중 현장에서 가장 조용하지만 그의 말 한마디로 촬영준비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사람이 바로 ‘사운드 가이(Sound guy : 현장에서 녹음을 담당하는 사람)’다. 사운드 가이는 영화에서 배우들의 목소리와 촬영 현장의 음향을 담는 역할을 하는데, 조감독은 촬영을 시작할 수 있는지 사운드 사이에게 먼저 확인한다. 사운드 가이가 “사운드 롤링(Sound rolling : 녹음 시작을 알리는 소리)”이라고 말하고 그 다음 카메라 감독이 “카메라 롤링(Camera rolling : 촬영 시작을 알리는 소리)”이라고 신호하면 몇 번째 장면과 촬영 횟수를 알리는 슬레이트를 치고 감독이 배우들에게 연기를 시작하라는 신호로 “액션”을 외친다. 촬영 중에는 모두가 숨을 죽이지만 그 중에 서도 사운드 가이는 헤드폰에 온 신경을 집중시키면서 배우들의 목소리, 현장의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모든 팀이 배우들의 연기에 시선을 모으고 있을 때 촬영현장 한구석에서 가만히 눈을 감고 배우의 목소리와 현장의 음향에 귀를 기울이는 그들이 가끔 구도자(求道者)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는 ‘보이는 이야기(Visual story)’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아름다운 영상미는 영화에 있어 핵심적인 요소이기에 많은 관심을 가진다. 그러나 아무리 화려하고 아름다운 영상이라도 음향을 제거하면 아무런 감흥을 느낄 수 없다. 새가 지저귀는 장면에서 새소리가 들리지 않거나 배우들이 대화를 하는데 목소리가 들리지 않고 자막으로만 내용을 보면 그 영상의 의미가 제대로 전달될 수 없으며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한다.차라리 소리와 음악으로만 이루어진 라디오 드라마가 오히려 사람들에게 더 잘 전달될 것이다. 이처럼 듣는다는 것은 보는 것에 의미를 부여한다.
“쉐마 이스라엘!(이스라엘아 들어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백성들에게 전할 때 맨 먼저 외치는 소리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말씀하신 뒤에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고 하신다. 수많은 기적의 징표들을 눈으로 확인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성경은 “들어라.”고 한다. 병든 이들을 치유하시고 마귀를 쫓아내고 풍랑을 잠재우는 기적의 징표를 사람들은 보지만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또 다른 징표를 끊임없이 요구한 것은 그 안에 담겨진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기도도 마찬가지다. 원하는 바를 하느님께 기도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 원망하고 불평한다. 그러나 그 기도 안에서 주님은 하느님이 아니라 나 자신이다. 내가 원하는 바를 말하고 계획이 이루어지기만을 원한다. 하느님을 주님이 아니라 알라딘에 등장하는 램프의 요정 ‘지니’로 전락시킨다. 내가 지금 기도하는 대상이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시라면 먼저 그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분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때, 그래서 내 가 하느님이 될 때 우리는 바리사이와 율법 학자들처럼 기도하는 위선자가 되며 마치 자신의 뜻이 하느님의 뜻인양 착각하여 자신과 이웃, 그리고 교회 공동체를 분열시킨다.
촬영의 시작이 사운드 가이의 외침에서 이루어지지만 마무리 또한 그러하다. 촬영을 마친 뒤 현장의 소리를 1분 정도 담아야 하기 때문인데 사운드 가이가 “룸 톤(Room tone)”이라고 외치면 감독은 물론 모든 작업팀이 숨소리도 내지 않고 가만히 침묵을 지킨다. 그때 촬영 현장에 흐르는 고요함은 모든 작업팀을 하나로 일치시키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사운드 가이가 온 마음을 기울여 고요히 현장의 소리를 담아내듯 우리 또한 기도의 순간에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사운드 가이가 될 때 분명 그 기도는 나와 이웃, 그리고 우리 교회를 하느님과 일치시키고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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