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방[6517]고방[6517]취음선생(醉吟先生), 향산거사(香山居士) - 백거이(白居易)
백거이(白居易)
자(字)는 낙천(樂天)이고, 호는 취음선생(醉吟先生), 향산거사(香山居士) 등으로 불리었다
백거이는 문학 창작을 삶의 보람으로 여겼다.
그가 지은 작품의 수는 대략 3,840편이라고 하는데,
문학 작가와 작품의 수가 크게 증가한 중당시대라 하더라도 이같이
많은 작품을 창작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더구나 그의 작품은 형식이 다양하여
시가에서부터 산문작품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학형식을 망라했다.
백거이는 문학으로써 정치이념을 표현하고 독자의 감정에 호소하여 실제 행동에
옮기도록 하는 것을 문학활동의 목적으로 삼았다. 백거이는 800년 29세 때 최연소로
진사에 급제해 여러 관직을 거쳤으며, 75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감했다.
자는 낙천(樂天), 호는 향산거사(香山居士),
시호는 문(文). 허난 성[河南省] 신정 현[新鄭縣] 사람이다.
중당시대에는 과거제도가 효과를 거두어 그 시험에 통과한 진사 출신의 신관료집단이
진출하여 구문벌을 압도했는데, 백거이가 이 시기에 태어난 것은 그로서는 행운이었다.
백거이는 800년 29세 때 최연소로 진사에 급제했다.
이어서 서판발췌과(書判拔萃科)·재식겸무명어체용과(才識兼茂明於體用科)에 연속 합격했다. 그 재능을 인정받아 한림학사(翰林學士)·좌습유(左拾遺) 등의 좋은 직위에 발탁되었다.
〈신악부 新樂府〉·〈진중음 秦中吟〉 같은 풍유시와 〈한림제고 翰林制誥〉처럼
이상에 불타 정열을 쏟은 작품을 창작한 것도 이때이다.
808년 37세 되던 해에 부인 양씨(楊氏)와 결혼했다. 당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을 노래한
장편 시 〈장한가 長恨歌〉에는 부인에 대한 작자의 사랑이 잘 반영되어 있다.
811년 모친상을 지내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갔던 그는 814년 다시 장안(長安)으로 돌아왔으나,
태자좌찬선대부(太子左贊善大夫)라는 한직밖에 얻지 못했다. 게다가 그 이듬해에 발생한
재상 무원형(武元衡) 암살사건에 관하여 직언을 하다가 조정의 분노를 사 강주사마로 좌천되었다.
이 사건은 백거이가 관계에 입문한 이래 처음 겪은 좌절이었으며,
또한 그의 시심(詩心)을 '한적'·'감상'으로 향하게 한 계기가 되었다.
820년 헌종(憲宗)이 죽고 목종(穆宗)이 즉위하자 백거이는 낭중(郎中)이 되어
중앙으로 복귀했고, 이어 중서사인(中書舍人)의 직책에 올라 조칙(詔勅) 제작의
임무를 맡게 되었다. 그는 이같은 천자의 배려에 감격하여 국가의 이념을 천명하는 데 진력했다. 822년 이후 항저우자사[杭州刺史]·쑤저우자사[蘇州刺史]를 역임했다.
뤄양[洛陽]으로 돌아온 뒤에는 비서감(秘書監)·형부시랑(刑部侍郞)·하남윤(河南尹) 등의
고위직과 태자빈객분사(太子賓客分司)·태자소부분사(太子少傅分司)와 같은 경로직(敬老職)을 거쳤으며, 842년 형부상서(刑部尙書)를 끝으로 관직에서 은퇴했다.
한림학사 시절의 동료 5명은 모두 재상이 되었으나
백거이는 스스로 '어옹'(漁翁)이라 칭하며 만족해 했다.
이같은 성실하고 신중한 태도로 인해 그는 정계의 격심한 당쟁에 휘말린 적이 없었다.
백거이는 문학 창작을 삶의 보람으로 여겼다.
그가 지은 작품의 수는 대략 3,840편이라고 하는데,
문학 작가와 작품의 수가 크게 증가한 중당시대라 하더라도
이같이 많은 작품을 창작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더구나 그의 작품은 형식이
다양하여 고체시(古體詩)·금체시(今體詩:율시)·악부(樂府)·가행·부(賦)의 시가에서부터,
지명(誌銘)·제문(祭文)·찬(贊)·기(記)·게(偈)·서(序)·제고(制誥)·조칙·주장(奏狀)·책(策)·
판(判)·서간(書簡)의 산문작품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학형식을 망라했다.
또한 그는 훌륭한 친구를 많이 사귀었는데, 친구들과 서로 주고 받은 시문에는 친애의 정이 물씬 배어 있다. 특히 원진(元稹) 및 유우석(劉禹錫)과의 사이에 오간 글을 모은 〈원백창화집 元白唱和集〉과 〈유백창화집 劉白唱和集〉은 중당시대의 문단을 화려하게 장식한 우정의 결실이라 일컬어진다.
그의 여러 작품 가운데에는 정치이념을 주장한 것도 있고 자신의 감정을 표현한 것도 있는데, 모두 평담한 언어로 알기 쉽게 표현되었으며, 시에 봉급의 액수까지 언급하는 등 매우 당당했다.
때문에 평이하고 속되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그것은 비상한 노력과 식견에 의해서 달성된 것이었다. 그는 1편의 시가 완성될 때마다 노파에게 읽어주고 어려워하는 곳을 찾아 고치기까지 할 정도로 퇴고(推敲)를 열심히 했다. 백거이가 자신의 시문에 일상어를 유효적절하게 구사한 것도 그의 표현을 간명하게 한 큰 이유 중의 하나이다.
그가 일상어를 사용한 것은 구어문학(口語文學)을 추구했기 때문이 아니다. 문언(文言)의 전통을 이어받으면서도 구어를 자신의 언어 속에서 활용하려 했을 따름이었다. 또한 그는 어휘를 매우 신중하게 선택했다. 고금문학(古今文學)에 나타난 어휘를 천지(天地)·산천(山川)·인사(人事)·조수(鳥獸)·초목에 이르기까지 1,870개 부문으로 분류하여 〈백씨육첩 白氏六帖〉 30권을 펴냈다. 이 책을 통해 그가 어휘를 선택하고 그 의미를 확인하는 데 얼마나 많은 노력을 들였는지 알 수 있다.
이백(李白)·두보(杜甫)·한유(韓愈) 등 백거이와 이름을 나란히 하는 시인의 작품에는 송대 이래 많은 주석서가 있는 데 반해, 〈백씨문집 白氏文集〉에는 그러한 주석서가 없는 것 또한 특기할 만하다.
종래의 주석서는 난해한 말에 관한 출전을 찾아내어 설명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으나, 백거이의 작품에는 이러한 주석서가 필요없었던 것이다.
백거이는 문학을 2가지의 차원에서 이해했다. 그는 초기에 왕자(王者)의 정치이념은 문학에 의해서 표현되는 것이며, 동시에 그것이 위정자를 움직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한 생각은 이상에 불타던 젊은시절의 작품에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신악부서 新樂府序〉에서 "글은 임금·신하·백성·만물을 위해 짓는 것이지 글을 위해 짓는 것이 아니다"라고 선언했다. 글을 쓰는 사람은 본래 천하의 정치에 책임을 져야 하고, 그 작품은 백성의 뜻을 군주에게 전달함과 동시에 정치의 옳고 그름을 풍유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시경 詩經〉이야말로 이같은 문학의 본질을 잘 나타낸 작품이며, 후세 특히 육조(六朝) 이후의 문학은 기교만을 중시한 나머지 본래의 이념을 상실했다고 비판했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809년에 완성된 통렬한 풍유시 〈신악부〉 50편을 비롯하여 〈백씨문집〉에 수록된 100분야에 대한 '판'(判)과 75편의 '책'(策), 200편의 〈한림제고〉, 233편의 〈중서제고 中書制誥〉 등에 잘 나타나 있다. 백거이가 지은 '조'(詔)·'칙'(勅)·'제'(制)·'고'(誥) 등은 한림학사들에게 〈육전 六典〉보다도 더 존중받았다. 〈육전〉은 칙명에 의해 편찬된 것으로 당대 관계에서 최고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당시 글을 짓는 궁극적인 목적은 천자 대신 천자의 세계관과 이념을 그에 걸맞는 전아(典雅)한 문장으로 표현하는 것이었고, 조·칙·제·고 등은 그 주요한 서술형식이었다.
칙명을 받아 그러한 글을 짓기 위해서는 정확한 식견과 웅장한 필치를 지녀야만 했다. 뛰어난 작가는 '대수필'(大手筆)이라 하여 커다란 영예를 부여받았는데, 백거이는 그중 한 사람이었다.
백거이는 문학으로써 정치이념을 표현하고 독자의 감정에 호소하여 실제 행동에 옮기도록 하는 것을 문학활동의 목적으로 삼았다. 그러나 815년 강주사마로의 좌천과 목종의 죽음은 그에게 큰 좌절을 안겨주었으며, 이를 계기로 정치 문학으로부터 탈피하여 인생의 문학을 추구하게 되었다.
장경(長慶) 4년(824) 목종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친구 원진에 의해 〈백씨장경집 白氏長慶集〉 50권이 편찬되었다. 당시 백거이의 나이는 53세였으며 '장경'은 목종의 죽음과 동시에 새로이 바뀐 연호였다. 따라서 〈백씨장경집〉은 죽은 천자의 후한 대접을 그리워함과 동시에 자신의 인생에서 새로운 전환점을 기념하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10년 후인 835년 백거이는 60권본의 〈백씨문집〉을 강주 둥린 사[東林寺]에 봉납했고, 이듬해 65권본을 뤄양의 성선사(聖善寺)에, 3년 후 67권본을 쑤저우의 남선사(南禪寺)에 봉납했다.
842년 이전의 50권 이외에 '후집'(後集) 20권을 정리하고 이어서 845년 5권의 '속후집'(續後集)을 편찬함으로써 합계 75권의 '대집'(大集)을 완성했다. 846년 8월, 75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감했다.
*<시평>
流麗平易, 풍자가 뛰어남
시 제재와 형식이 다양
고체시(古體詩)·금체시(今體詩:율시)·악부(樂府)·가행·부(賦)의 시가에서부터,
지명(誌銘)·제문(祭文)·찬(贊)·기(記)·게(偈)·서(序)·제고(制誥)·조칙·주장(奏狀)·
책(策)·판(判)·서간(書簡)의 산문작품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학형식을 망라함
언어가 평이하고 통속적으로
詩魔,詩王 등으로 불리고,
일본에서는 詩神으로 불림.
*<백거이에게 문학이란? 목적>
문학으로써 정치이념을 표현하고 독자의 감정에 호소하여
실제 행동에 옮기도록 하는 것을 문학활동의 목적으로 삼음.
그러나 815년 강주사마로의 좌천과 목종의 죽음은
그에게 큰 좌절을 안겨주었으며,
이를 계기로 정치 문학으로부터 탈피하여 인생의 문학을 추구하게 됨.
*李白이 죽은 지 10년, 杜甫가 죽은 지 2년 후에 태어남
집안은 가난한 관리 집안
5세 때부터 시짓는 법을 배우고 15세 때 주위 사람을 놀라게 하는 시재를 보임
800년 29세에 최연소 진사(進士)에 급제
32세에 황제의 친시(親試)에 합격,
《장한가(長恨歌)》는 그 무렵 지음
807년 36세로 한림학사가 되었고, 이듬해에 좌습유(左拾遺)가 되어 유교적 이상주의의 입장에서 정치 ·사회의 결함을 비판하는 일군의 작품을 계속 써냈다.
《신악부(新樂府) 50수》(805)는 이 시기의 대표작.
811년 40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이듬해에 어린 딸마저 잃자
인생에 있어 죽음의 문제를 깊이 생각하게 되었고 불교에 관심을 갖음
814년 태자 좌찬선태부(左贊善太夫)에 임용되었으나,
이듬해에 일찍이 사회를 비판하는 그의 시가의 대상이 되었던
관료들로 인해 九江의 司馬로 좌천
816년 45세에 그 곳에서 《琵琶行》을 지음
818년 忠州刺史
822년 杭州刺史
여기 항저우의 아름다운 풍광과 문학적 지기(知己)로 元拂과 만나
《백씨장경집(白氏長慶集)》(50권, 824)을 편집함.
825년 蘇州刺史
827년 중앙 (秘書監에 임명됨
829년 58세가 되던 해 낙양에 영주하기로 결심,
河南府의 장관과 후일 太子補導官이라는 명목 직책에 자족하면서
시와 술과 거문고를 삼우(三友)로 삼아 ‘취음선생’이란 호를 쓰며 유유자적하였음
831년 원진 등 옛친구들이 세상을 떠나자 낙양 교외의 룽龍門의 절을 자주 찾고
그 곳 향산사(香山寺)를 보수 복원하여 ‘향산거사’라는 호를 쓰며 불교에 심취함.
문학에 대한 충동도 번뇌로 보여서 참회하는 입장에서 ‘광언기어(狂言綺語)’의 문집인
《유백창화집(劉白唱和集)》 5권, 《백씨문집(白氏文集)》 60권을,
다시 65권, 67권을 834∼839년에 걸쳐 마음의 증표로서 연고 있는 사찰에 봉납함.
842년 71세 때 刑部尙書의 대우로 퇴직
《백씨문집》은 70권에 이름 불교탄압정책을 풍자하는 작품을 씀
75권의 전집을 완성한 이듬해 생애를 마침.
작품: 《백씨장경집》 75권 가운데 71권이 현재 전함
50권은 원진이 만들고 후일 나머지 25권을 본인이 만듦
*장경은 목종 사후 바뀐연호
《백향산시집》 40권
현존하는 작품수 3,840여 수
〈元白唱和集〉 〈劉白唱和集〉
*기타 : 고사성어를 모은 《백씨육첩사류집(白氏六帖事類集)》 30권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