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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를 기억하라
성경본문 ; 느헤미야 4: 10-15
10. 유다 사람들은 이르기를 흙 무더기가 아직도 많거늘 담부하는 자의 힘이 쇠하였으니 우리가 성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하고
11. 우리의 대적은 이르기를 저희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가 저희 중에 달려 들어가서 살륙하여 역사를 그치게 하리라 하고
12. 그 대적의 근처에 거하는 유다 사람들도 그 각처에서 와서 열 번이나 우리에게 고하기를 너희가 우리에게로 와야 하리라 하기로
13. 내가 성 뒤 낮고 넓은 곳에 백성으로 그 종족을 따라 칼과 창과 활을 가지고 서게 하고
14. 내가 돌아본 후에 일어나서 귀인들과 민장과 남은 백성에게 고하기를 너희는 저희를 두려워 말고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주를 기억하고 너희 형제와 자녀와 아내와 집을 위하여 싸우라 하였었느니라
15. 우리의 대적이 자기의 뜻을 우리가 알았다 함을 들으니라 하나님이 저희의 꾀를 폐하셨으므로 우리가 다 성에 돌아와서 각각 역사하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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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의 지도아래 유대인들이 성벽을 쌓기 시작을 할 때, 주변의 이방민족들, 특별히 사마리아의 총독 산발랏과 암몬의 지도자인 도비야의 반대와 방해공작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그들의 공격에 대비하여 무장 경비원을 세우며 공사를 독려하여 드디어 예루살렘 도성이 성벽으로 둘려 싸이게 되었으며 성벽의 높이가 절반쯤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이제 공사가 절반정도 끝냈으니, 남은 기간동안 모두가 더 열심을 내어 일을 하면 될 터인데 공사가 순조롭게, 평탄하게만 진행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사탄은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사탄은 여러 가지 방법과 궤계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사역을 좌절시키려고 합니다. 이제 사탄은 낙심과 실망이라는 무기를 사용하여, 이 공사를 중단시키려고 했습니다. 거짓, 탐심, 정욕, 이기심, 미움, 분노, 질투등은 우리가 사탄의 무기임을 알기에 경계를 하지만 그러나 낙심과 실망은 사탄의 도구라고 흔히 생각하지 않기에 방심을 하게 됩니다. 사탄이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무기가 낙심과 실망입니다.
오늘 우리가운데에도 주님의 일을 행하다가 여러 가지 이유로 낙심되고 실망되어 사역을 포기하고 중단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유대 백성들은 성벽공사를 하는 도중 육체적인 피로로 인하여 좌절과 실망감을 맛보게 됩니다.
"유다 사람들은 이르기를 흙무더기가 아직도 많거늘 담부하는 자의 (흙과 돌을 짊어 나르는 사람) 힘이 쇠하였으니 우리가 성을 건축하지 못하리라"(10절).
처음 성벽을 쌓기 시작했을 때에는 모두가 힘을 내어 열심히 일을 시작했습니다. 일하는 사람들의 헌신과 땀과 노력으로 성벽이 절반쯤 올라가게 되었을 때 그들은 육체적으로 피곤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팔레스타인지역의 여름철 낮 온도는 섭씨 40이상으로 올라갑니다. 뜨거운 태양빛에서 하루종일 일하는 것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오랫동안 계속되었습니다. 게다가 이방민족이 언제 침입해 올지 모른다는 긴장감속에서 밤에 경비까지 서야만 했습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보초를 서느라고 몹시 지쳐있었습니다.
피곤하게 되자, 조그마한 흙더미도 큰 흙더미로, 조그마한 돌덩어리도, 큰 바위처럼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성벽을 쌓는 일에 대한 실망과 낙심과 포기하고 싶은 마음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우리가 등산을 할 때 한두시간이면 정상에 쉽게 오를 것으로 생각하여 산을 올라가는데, 3시간이 지났어도 산 중턱밖에 올라가지 못했습니다.
앞으로도 산정에 더 올라갈려면 3시간을 더 올라가야만 하는데, 몸은 피곤하고 지쳐있어 도중에 포기하고 싶은 생각일 들때가 있는 것처럼, 유대백성들 성벽을 쌓는 일은 절반가량 마쳤지만, 앞으로 절반을 더 쌓아올려야 할 것을 생각할 때 그들은 중도에 포기하고 싶은 낙심과 좌절감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게다가 이방족속들은 유대인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갑자기 쳐들어 와서 그들을 죽이고 공사를 중단시킬 계획을 꾸미고 있었습니다.
이방사람들 가까이서 사는 유다지파 사람들이 느헤미야에게 올라와서, 이방족속들이 사방에서 유대인들은 치려고 한다고 몇번이나 일러주었습니다.
그리하여 성벽을 쌓는 유대인들은 언제 적군이 쳐들어와 그들은 죽이려할지 모르는 심적인 긴장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칠 줄 모르고 항상 계속되는 노동으로 지쳐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싶은 실망과 좌절감, 낙심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10절을 다시 한번 읽어보면 "유대사람들은 이르기를 흙 무더기가 아직도 많거늘 담부하는 자의 힘이 쇠하였으니 우리가 성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예루살렘 성벽을 쌓던 유대인들처럼 오늘날 우리 가운데에도 주위 환경을 보고 "아직도"라고 말하며 절망해하며, 낙심과 실망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Hugh Downs은 행복한 사람이란 주변환경이 좋아서가 아니라 어떠한 자세와 태도를 가지고 사는 사람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행복은 어떠한 조건이 충족될 때 이루어 지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행복과 불행은 내가 선택하는 것입니다. 불행한 사람은 불행하게 살기로 선택을 한 사람이요, 행복한 사람은 행복하게 살기로 선택을 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오래 살 것인지 우리 스스로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는동안 얼마나 참된 삶을 사느냐는 나 스스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내 얼굴의 모양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얼굴의 표정은 우리 스스로 조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삶에서 환난과 고난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환난을 어떻게 통과하느냐는 나에게 달려있습니다.
우리는 사회의 부정적인 요소를 내 마음대로 조정할 수는 없으나,
내 마음속의 부정적인 요소는 우리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것입니다.
Barbara Johnson여사는 남편과 네명의 아들을 둔 평범한 주부였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해 식물인간이 되었습니다.
그후 5년사이에 셋째아들이 월남전투에 파견되어 3개월만에 18살의 젊은 나이에 전사했습니다.
그리고, 경찰 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기쁨에 가득차 있던 첫째아들이 음주 트럭에 치어 죽게 되었습니다.
또 얼마후에 가장 사랑하던 둘째 아들이 동성연애자가 되어 애인과 함께 집을 나가 소식이 없게 되었습니다.
존슨여사는 욥과 같은 시련을 당하면서 왜 나에게 이 불행한 일들이 하나도 아니고 소나기처럼 많이 부어지는가 생각하며 자신과 세상과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원망하고 불평해 보았자, 오히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더욱 비참해지는 자기자신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존슨여사는 자기의 운명과 필자를 탓하고 환경을 원망하기 보다는 주어진 삶의 문제에 대하여 긍정적인 자세를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주어진 상황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고 했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감사하는 적극적인 삶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그녀의 희생적이고 헌신적인 간호를 통해 식물인간이던 남편이 기적적으로 회복되는 기쁨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자기처럼 아들을 월남전에서 잃어버린 부모들을 돕는 기관을 만들어 그들을 향한 전화상담센터, 신문을 발간하는 등 봉사의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음주 운전자에 대한 더 엄한 벌칙을 가하는 입법개정운동을 벌리면서 자식을 교통사고로 잃어버린 부모를 돕는 기관도 설립하여 그들을 위하여 봉사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동성연애로 둘째 아들을 잃어버린 것에 절망하지 않고 동성연애자를 자녀로 둔 사람들의 중보기도회를 조직하여 함께 기도 네트워크를 설치하고 필요한 정보를 나누는 기관도 그녀는 만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존슨여사는 자기의 체험을 책으로 출판하여 미국에서 유명한 여류인사가 되었고 각처에 초빙를 받아 세미나 강사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동성연애자인 아들을 향한 존슨여사의 11년간의 기도가 응답을 받아 아들이 homosex의 삶을 청산하고 회개한후 예수님을 영접하고 가정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녀가 비관적으로 자기신세만 한탄하고 있었더라면, 이러한 기적의 일들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나, 그녀는 환경에 도전했고 믿음으로 일어나 승리하게 된 것입니다.
존슨여사는 "인생에서 고통은 피할길이 없으나, 그 고통 때문에 비참하게 되는 것은 나의 선택에 달려있다"고 주장합니다.
혹시 우리 가운데 고통과 문제가 아직도 산더미처럼 쌓여있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까?
지금은 너무나 괴롭다 할지라도 우리가 믿음안에서 인내하며, 포기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전진하면 새로운 세계가 우리앞에 전개될 것입니다.
행복과 불행은 상황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선택하는 것 입니다.
유대백성들이 육체적으로 피곤해 있으며 이방민족의 침략의 위험때문에 심리적으로도 불안해 하고 있을 때 느헤미야는 어떠한 조치를 취하였습니까?
가족단위, 종속단위로 모이게 했습니다.
느헤미야는 공사를 잠시 중단시켰습니다.
백성들은 육체의 피로를 회복하고 정신적인 긴장을 풀수 있는 휴식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활줄도 풀어 줄때가 있어야지, 계속 활줄을 잡아 당긴다면 활이 부러진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육제적인 긴장과 피로를 회복시킬수 있는 휴식이 필요합니다.
열왕기상 18장에보면 엘리야는 갈멜산에서 850명의 바알과 아세라 우상신을 섬기는 거짓 예언자들과 대결하여 그들을 다 진멸시켰던 위대한 선지자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아합왕의 아내, 이세벨의 복수를 피해 광야로 120 miles이나 먼거리를 피신하다가 그만 너무 지쳐 그는 로뎀나무아래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이제 더 바랄것이 없습니다.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그리고서 그는 나무아래 누어 잠이 들었습니다. 한참후에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일어나 먹어라"하였습니다.
엘리야가 일어나 보니 이제 막 불에 구운 빵 하나와 물 한병이 머리맡에 있었습니다. 그는 그것을 먹고 마신 다음 다시 누웠는데, 여호와의 천사가 또 와서 그를 어루만지며 말했습니다.
"일어나서 좀 더 먹어라. 네가 갈길이 너무 멀다."
엘리야는 일어나, 먹고 마시고, 힘을 얻어 40일동안 밤낮으로 걸어서 하나님의 산인 시내산에 도착했습니다.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도 피곤하고 지쳤을 때, 실망에 빠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기까지로 원했지만 충분한 휴식과 식사를 통해 힘을 다시 얻었던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모든 사역자들에게 작업을 잠시 중단하고 휴식을 취하게 했는데, 이제부터는 가족과 지파가 서로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함께 모여 일하도록 했습니다.
사랑하는 가족끼리, 친척과 함께, 지파끼리 함께 일할 때 힘과 용기가 솟아나게 됩니다.
적이 쳐들어와도 가족과 친족이 흩어져 있는것보다 함께 있으면 대적과 더 효율적으로 싸울 수 있습니다.
미국 프린스톤 대학의 세계적인 종교 사회학자인 Robert Wuthnow교수는 최근 미국 교회안에 조용한 혁명이 일어나고 있는데 그것은 소그룹제도의 확산이라고 말합니다.
그동안 미국교회는 교회의 시설이 좋아, 어린이들은 물론 성인들을 위한 교회학교가 참 잘 되어 왔습니다. 특히 남침례교회같은 교단은 교인수를 교회학교에 출석하는 사람이라야 교인으로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주일날 교회에서 모이는 교회학교보다, 주중에 사람들이 어느 가정집이나, 사무실, 병원, 아니면 교회안에서 3-12명의 사람이 함께 말씀과 기도와 사랑을 나누는 소그룹에 참여하는 사람이 더 많아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소그룹에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너무나 자기중심적인 이기적인 사회에 살고 있으며, 많은 결혼이 이혼으로 끝나고 있고, 10명중에 7명의 사람들이 자기의 고향을 떠나서 다른 지역에서 살고 있으며, 역사상 과거 어느때보다 사람들이 외로움을 느끼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실상 위성TV, CABLE TV, VCR, PC 등의 첨단기계의 발달로 인하여 우리는 더욱 더 이웃과 고립되고 있으며, 다른 사람들과 상호간에 맺는 시간이 점점 적어지는, 방랑자들이 모인 사회가 되어가고 있기에, 사람들은 소그룹안에서 가족같은 사랑, 친구간의 우정, 하나님의 사랑을 맛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물질이 풍요로운 사회에서 우리는 영적으로 더욱 더 궁핍해지고, 배고픔을 느끼기에 소그룹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받기로 원하기 때문입니다.
소그룹이 실상 가족과 같은 지지를 해 줄 때 가정이 다시 회복되기도 합니다.
소그룹안에 어느 누가 실직하게 되면, 이것이 소그룹에 속한 모든 사람들의 문제가 되어 모든 사람이 그 실직한 형제의 직장알선을 위해 함께 기도하고, 함께 직장을 탐색하는 것입니다.
소그룹안의 어느 형제나 자매가 이혼하려고 하면, 이것은 소그룹안의 모든 사람의 문제가 되어 그 가정을 위하여 서로 중보기도하며 원만하며 화해케 하려고 합니다.
제가 알고 있는 어느 장로님은 마땅한 직장이 없는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미국에 이민을 간 후 그분은 기드온 모임에 속해 있었습니다. 서로 기도를 나누는 시간에 이 장로님이 자기가 직업을 잃어버림으로 가정에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기에, 장로님의 직장을 위하여 기도해 달라고 요청을 했습니다.
그 후 그 장로님이 속한 기드온의 모든 미국 회원들은 그 장로님의 직장을 위하여 탐색하며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기드온에 속한 모든 미국인들이 열심히 이 분의 직장을 찾았습니다. 몇 개월후에 그 장로님은 General Dynamics 이라고 전투기들을 생산하는 유명한 군수산업체에 취직이 되었습니다.
소그룹에 속한 사람들은 초대교회의 성도들처럼, 그들의 믿음과 기도, 그들의 염려와 두려움, 그들의 기쁨과 슬픔, 사랑과 우정을 함께 나눔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힘과 원동력을 얻게 됩니다.
소그룹은 선교면에서도 효과적입니다.
불신자가 교회에 나오는 것이 쉬운일이 아닙니다.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수백명 또는 수천명이 모이는 교회에 나온다는 건 어려운 일입니다. 가족의 반대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친구집에서 모이는 소그룹 성경공부반에는 마음의 부담없이 쉽게 참석할 수 가 있는 것입니다.
21세기의 교회는 가정의 역할을 할수 있는 이러한 소그룹제도가 더욱더 성장해 나갈것이라고 종교사회학자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실상 예수께서도 세계를 향한 선교를 위해 12제자로 선택하여 소그룹을 형성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사랑과 교제는 소그룹의 형태안에서 이루워 질수 있습니다.
Howord Synder는 소그룹을 "교회안의 교회"라고 말한바 있습니다. 고회안의 소그룹이 잘 모이고 성장해 나갈 때, 교회가 건강하게 성장해 갈수 있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성벽쌓는 일에 흩어져 있던 사람들에게 휴식을 주며 가족단위로, 부족단위로 요즈음 말로 말하면 소그룹 단위로 모여 힘과 용기를 얻어 함께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도록 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심리적인 두려움과 육체적인 피곤으로 인한 좌절감에 빠져있는 백성들에게 그들이 성벽을 쌓는 목적을 다시한번 제시했습니다.
14절 맨 마지막에 보면 "너희 형제와, 자녀와, 아내의 집을 위하여 싸우라"고 말하며 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도록 격려했습니다.
그러할 때 15절 중간이후에 보면 "우리가 다 성벽에 돌아와서 각각 역사하였는데"라고 했습니다.
"사역자들의 절반은 일하고 절반은 갑옷을 입고, 힘과 방패와 활을 가지고 경계를 섰습니다. 짐을 나르는 사람들도 한 손으로는 짐을 나르고 다른 한손으로는 무기를 잡고 일했습니다. 성벽을 쌓는 이들은 저마다 허리에 칼을 차고 일을 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나팔수는 느헤미야 곁에 항상 있게 하여 유사시에 나팔수가 나팔을 불면 모든 백성들이 그 소리나는 곳으로 함께 모이도록 했습니다. 또 공사기간 중 성밖에 사는 사람들도 성안에 들어와서 살게 했습니다".
느헤미야 자신도 밤에 옷을 벗지 않고 항상 무기를 휴대했고, 백성들이 물을 길러 갈때에도 무기를 휴대케 했습니다.
요한 웨슬리는 기도할 때에는 모든 일이 하나님께 달려있기에, 하나님께 전적으로 기도했다고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역을 행할 때에는 모든 일이 나에게 달려있는 것처럼 열심히 수행했다고 합니다. 느헤미야는 항상 기도하는 기도의 용사였습니다. 그러나 모든일이 나에게 달려 있는 것처럼 열심히 최선을 다해 사역자들을 격려하고 동기부여를 하며 하나님의 거룩한 공사를 이끌어 갔던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우리들도 모든일이 하나님에게 달려있기에, 기도할 때에는 미온적으로, 소극적으로 기도하지 말고,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생명을 걸고 하나님과 씨름했듯이 우리들도 뜨겁게 전심을 다해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기도를 통해 분별한 후에는 모든 일이 나에게 달려있는 것처럼 열심히 최선을 다해 일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낙심하고, 실망하며, 두려워하고 있는 백성들에게 느헤미야는 무엇보다도 14절에 보면 "너희는 저희를 두려워 말고 지극히 크시고 두려우신 주를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성벽을 쌓는 사역자들은 흙더미와 돌덩어리와 뜨거운 햇빛, 언제 침략해올지 모르는 이방민족만 바라보고 있었기에 그들은 실망하며 낙심의 수렁에 빠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그의 백성들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이 흙무더기, 이 돌무더기, 그리고 적군들과 너희 자신에게만 눈을 돌리고 있다. 이제 주님께로 너희 시선을 맞추어라. 위대하시고 두려우신 하나님, 영원하시고 전능하신 우리 하나님을 바라보자"라고 말합니다.
불신앙은 문제를 실제보다 크게 만들어 보이게 하지만, 신앙은 위대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영국의 유명한 설교자 스펄전 목사님에게 어느 젊은 신학생 한명이 찾아와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습니다.
목사님도 낙심할때가 있습니까?
그러자 스펄전 목사님은 놀라운 답변을 주었습니다.
나는 지나간 20년간은 한 번도 낙망해 본적이 없네. 나는 그동안 하나의 중요한 신앙의 원리를 내 삶에 적용하고 있지. 그 원리란 계속하여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라네, 나는 하루에 15분도 주님을 생각하지 않고 지나간 일이 없네. 그때 이후로 나는 낙망을 모르고 살아왔네. 그렇습니다. 우리가 낙심하기를 원하면 나자신만 바라보면 됩니다. 우리가 패배하기를 원하면 과거만 바라보면 됩니다. 우리가 산만해지기를 원하면 주변만 바라보면 됩니다. 우리가 불안하기를 원하면 앞만 바라보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받기를 원하면 위만 바라보면 됩니다. 그렇습니다. 구원은 하나님께로 부터 온다고 했습니다.
성도여러분,
우리들에 실망하고 낙심하고 포기하고 싶을때마다 주님을 바라봅시다.
영원하시고 두려우신, 위대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영원토록 사랑하시며 그의 자녀 삼아주시는 하나님만을 바라보시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