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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1-9
시므온 지파가 얻은 기업 / 김덕복 목사
이 세상에 어떤 체제나 어떤 제도도 완벽한 것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리 좋아 보이는 제도라고 할지라도 그제도의 밝은 면이 있는 반면에 또한 어두운 면이 있기 마련인 것입니다. 자본주의체제는 자체의 모순으로 말미암아 필연적으로 몰락하고 유일한 대안은 공산주의라는 신념으로 수많은 혁명가들이 그 공산주의를 위해서 목숨을 걸었습니다. 그러나 20세기를 마무리하는 이 시점에서 볼 때 오히려 공산주의가 수많은 사람들에게 고통을 안겨다 주었던 체제요 제도였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또한 자본주의의 제도는 칼 맑스에 의해서 철저하게 비판받았지만 20세기를 마무리하는 이 시점에서 볼 때, 그래도 가장 지지 받는 하나의 제도로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자본주의제도도 수많은 모순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서 이 자본주의제도에 혜택을 누리는 자와 혜택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 사
이에 불평과 반대가 있는 그런 모순을 봅니다.
지난 몇주 동안 우리는 신창원이라는 한 탈주범에 의해서 우리 사회가 온통 소란스러운 경험을 했습니다. 인터넷에 들어가 보시면 "신창원을 지지하는 모임"이란 것도 생겨나 있습니다. 어떤 잡지에“신창원대 임창렬 누가 더 나쁜가?”이런 특집이 기사로 실려있는 것도 보았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 사회가 이만큼 병들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분명히 신창원은 한 사람의 강도였습니다. 그리고 탈주범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 엄청난 피해를 입혔던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가 신창원을 미화시키고 있습니다. 신창원의 궤변대로라면 불행한 가정 환경에서 태어난 사람이라 면 전부다 살인 강도가 되던지 사회 범죄자가 되었어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는 신창원과 같이 되지 않고 더 건전하게 더 밝게 이 사회를 위해서 기여하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음을 우리는 분명히 주시해야 되는 것입니다. 신창원에게 동정을 보내고 신창원을 미화한다는 것은 벌써 우리 사회가 병들어 있고 우리 자신들도 어느 만큼씩 병들어 있다는, 악에 대해서 우리 자신들이 경계심을 상실하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 기독교 윤리학적으로 봤을 때는 심각한 문제 속에 우리 자신들이 빠져있다는 겁니다. 인터넷에서는 무려60%정도가 신창원을 지지한다는 그런 통계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을 말해주고 있습니까?
성경을 보면 그곳에도 많은 제도들이 나옵니다. 심지어 우리가 이 여호수아서를 쭉 읽어 왔습니다만 여호수아서에서 볼 수 있는 제비뽑기도 땅을 나눌 때 제비뽑기를 해서 나누었던 하나의 제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리한 대안으로써 준 하나의 제도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제도로 말미암아서 문제가 생겨나는 것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볼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 어떤 제도도, 어떤 체제도 완벽한 것이 없고 단지 문제가 되는 것은 제도나 체제가 문제가 아니라 바로 그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 문제라는 것을 우리가 분명히 깨달아야 될 줄 생각이 됩니다. 많은 사람들은 어떤 환경이나 자기가 살아가고 있는 그 체제나 제도의 모순을 지적하면서 자기 자신의 잘못을 합리화하려는 그런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제도나 체제, 환경이 문제가 아니고 그 환경가운데 그 현장에서 내 자신이 어떻게 반응을 하느냐가 문 제라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되는 것입니다.
1. 시므온과 시므온 지파
오늘 우리는 여호수아 19장 1절∼9절의 말씀을 통해서 시므온지파가 얻은 기업에 대해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본문을 보시면 시므온지파가 얻은 기업은 다른 이스라엘의 열한 지파가 얻은 기업에 비해서 두 가지의 특징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는 다른 지파는 제비를 뽑아서 땅을 분배를 했을 때 그 땅의 경계를 성경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디에서 어디까지, 어디에서 어디까지가 어느 지파의 땅이다.”이렇게 분명히 경계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므온지파의 땅을 분배하는 과정 속에서는 어디에서 어디까지라는 경계가 없습니다. 그 다음 두 번째, 1절을 보시면“둘째로 시므온 곧 시므온 자손의 지파를 위하여 그 가족대로 제비를 뽑았으니 그 기업은 유다 자손의 기업 중에서라.”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주 이상한 현상이 발견됩니다.
이미 유다 지파가 기업지로 받은 땅속에, 유다지파의 땅 안에 있는 그 성읍들을 이 시므온 지파가 지금 기업으로 분배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지파의 기업분배와는 전혀 다르게 땅을 분배받는 그런 모습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 시므온이라는 사람과 시므온지파에 대해서 좀 더 알아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시므온이라는 사람은 레아와 야곱 사이에 태어난 둘째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야곱의 둘째 아들이었습니다. 이 야곱이라는 사람은 열두 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이 열두 명의 아들은 야곱의 네명의 아내에게서 태어난 아들들이었습니다. 이 레아라는 한 아내를 통해서 야곱은 여섯 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그 중에서 둘째 아들이 시므온이라는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므온은 성품이 다른 아들들과는 달았습니다. 똑같이 레아의 태를 통해서 태어났고 야곱의 아들이었지만 이 시므온은 어릴 때부터 굉장히 성격이 포악했고 잔인했었습니다. 그리고 인간적인 질투심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네 명의 아내에게서 열두 명의 아들들이 태어났으니 그 아들들이 사이에 갈등이 얼마나 심했겠습니까? 그리고 첫째 아내 레아에게서 태어난 둘째아들 이 시므온은 자기 어머니가 아버지로부터 사랑 받지 못한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여섯 형제들이 요셉이나 베냐민처럼 다른 형제들보다 아버지에게 사랑 받지 못한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로 말미암아서 아버지에 대해서도 불만이었고 자기가 처해있는 그 형편과 처지, 가정환경에 대해서도 불만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라헬이 낳은 요셉과 베냐민에 대해서는 굉장한 시기심과 미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이 들판에서 양을 칠 때 자기가 미워하고 시기하던 요셉이 아버지의 심부름을 오게 되었습니다. 그때 들판에서 양을 치다가 요셉이 저 멀리서 오는 것을 보고서 이 시므온은“그를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우리가 말하기를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먹었다하자. 그 꿈이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가 볼 것이라.”라고 합니다. 자기가 미워했던 배다른 형제를 여기에서 잡아죽이자는 것입니다. 죽여서 구덩이에 처넣어 버리자는 겁니다.
얼마나 잔인합니까?
그 미움이, 그 마음속에 분노가 가득차있던 그런 자였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그 형이었던 르우벤이 그를 말려서 요셉을 죽이지 않고 묵어서 물이 마른 샘속에 던져 넣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스마엘 장사꾼들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요셉을 팔아먹었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서 요셉은 파란만장한 그런 경험을 통해서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었고 그의 형들은 가뭄이 들어 양식이 떨어져서 애굽에 이제 양식을 구하러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이들의 모습을 본 요셉은 이들이 자기를 팔아먹은, 자기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었던 형들인 것을 알고 자기동생 베냐민을 데려오게 하면서 이 시므온을 인 질로 붙잡고 있는 것을 우리는 창세기에서 볼 수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시므온은 자기 누이 디나가 강간을 당했을 때 세겜 사람들을 아주 잔인하게 학살을 했던, 세겜 사람들을 속이고 기만은 하면서 학살을 했던 그런 전력을 가졌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이 시므온이라는 아들 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을 겁니다. 다른 애들은 그래도 부모 말에 순종도 하는데 이놈의 자식은 어떻게 된 판인지 아버지에게 대들고, 다른 형제들을 미워하고, 사람들을 죽이고, 살인하고 그래서 야곱은 시므온을 아주 깊이 책망을 하기도 합니다.
창세기49장을 보시면 이 야곱이 죽으면서 자기 아들들에게 전부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을 합니다.
“너는 이런 이런 축복을 받아라, 너는 이런 이런 축복을 받아라.”쭉 축복을 하는데 유달리 이 시므온에게는 축복대신 저주를 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이 시므온에게 이렇게 저주를 합니다.
“그들이 그 분노대로 사람을 죽이고 그 혈기대로 소의 발목에 힘줄을 끊었음이로다. 그 노여움이 혹독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요. 분기가 맹렬하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내가 그들을 야곱중에서 나누며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라.”
여기 야곱 중에서 나누고 이스라엘 중에서 흩으리라는 말은 야곱의 이름 야곱의 후손인 열 두지파 중에서 흩어지고 그 지파중에서 소멸되어지는 역사를 말하는 것입니다. 나중에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이 야곱의 저주가, 야곱의 예언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성취되는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렇게 자라나고, 이렇게 전투적이고, 잔악하고, 포악하던 이 시므온에게는 아들이 여섯 명이 있었습니다.
그의 아들은 여무엘과 야민과 오핫과 야긴과 소할과 사울 이런 아들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가나안 여인의 소생이었던 사울 조차 이 시므온 족속의 족장이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이런 잔인한 모습, 아버지의 이런 배신하는 모습, 아버지의 이런 불순종한 모습, 아버지의 불 신앙적인 모습, 아버지의 이런 음란한 모습 이런모습을 보고 자라났던 여섯 아들은 그 아버지의 기질을 그대로 몸에 익히게 되는 것입니다.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400년이상 종살이를 하다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옮겨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애굽을 벗어났던 이스라엘 족속들이 시내산 아래에서 전체 인구조사를 시행했습니다. 그때 애굽에서 나왔던 사람들 가운데 20세 이상의 장정들만 603550명이 개수가 되었습니다. 이제 38년이 지나고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는 그 모압 평지에서 다시 인구조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각 지파별로 인구조사를 하게 되었는데 그때 집계된 인구조사가 601730명으로 밝혀졌습니다. 자 여기에서 이스라엘의 전체인구는 험난한 광야생활 40년을 거치면서 물론 정확한 시간을 38년입니다만 광야생활을 거치면서 전체 이스라엘인구 장정들의 감소된 수가 1820명이 감소되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기록을 보면 하나의 놀라운 사실을 우리가 발견을 할 수 있는데 본래 이 시므온 족속들은 자손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전 지파 가운데 제일 작은 지파에 속했습니다. 그들이 애굽에서 벗어나올 때는 특별히 20세 이상 장정들만 인구가 59300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애굽을 거쳐나와서 38년 광야 생활을 끝마무리 짓는 시점에 왔을 때 그들의 인구가 얼마나 줄었는가 하면 22000명이 줄었다는 겁니다. 이스라엘 전체 인구는 1820명밖에 안 줄었는데 이 시므온 지파의 인구는 22000명이나 줄었습니다. 기가 막히지 않습니까?
열두 지파 가운데 다섯 지파는 인구가 줄었습니다. 그리고 일곱 지파는 인구가 늘어났습니다. 그 중에서 이 시므온 지파의 인구가 이스라엘의 열두지파 가운데 가장 많이 감소가 된 것을 보게됩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그런데 여러분 민수기의 기록들을 보면 이 시므온 지파가 이렇게 줄어들 수밖에 없던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민수기 25장에 보면 바알브올이라는 사건이 발생을 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서 이 시므온 지파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배신하고 모세에게 반기를 들고 이방여인들과 더불어서 음란하면서 우상숭배를 합니다. 그로 말미암아서 하나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아 염병이 들어서 하루에 24000명이 죽어 가는데 그 중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실 이 시므온 지파의 사람들이었다는 겁니다.
민수기 25장 14절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죽임을 당한 이스라엘 남자는 곧 미디안 여인과 함께 죽임을 당한 자의 이름은 시므리니 살루의 아들이요 시므온 인의 종족의 두령이었더라.”
시므온 지파의 우두머리라는 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모세에게 반역을 시도하고 그리고 우상숭배하고 이방여인을 끌어들여서 음란한 짓을 저질렀습니다. 그로 말미암아서 이 시므온 지파가 엄청나게 저주를 받고 그 광야에서 염병으로 죽어야 되었던 것입니다. 이일이 있고 난 뒤에 이스라엘은 광야생활을 다 청산하고 요단강만 건너가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모세가 마지막 임종을 앞에 놓고 이스라엘의 각 지파들을 축복합니다. 야곱이 과거에 창세기 49장에서 자기의 열두 아들을 놓고 축복했던것처럼 모세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 무려 200만 정도 되는 엄청난 많은 수의 사람을 앞에 놓고 각 지파별로 축복들을 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신명기 33장을 보면 다른 지파는 다 모세가 축복을 하면서 이 시므온 지파는 축복을 하지 않고 그냥 지나가 버리는 겁니다.
왜 그랬을 까요?
학자들에 따라서는 여기에 대해서 뭐 이런저런 이론들이 있습니다만 모세가 이 시므온
지파를 열두 지파가 축복 받는 그 자리에서 열한 지파는 다 축복을 받았는데 이 시므온 지파는 축복을
상실하고 있다는 겁니다.
광야를 헤쳐나가면서 모세에게 하도 속을 썩이고 애를 먹이니까 모세가“두고보자. 이놈 자식.”이랬다가 마지막에 축복을 안 했다. 뭐 이런 시시한 소리도 합니다만 모세는 그런 치사한 지도자는 분명히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후의 행적까지 전체를 보면 이 시므온 지파가 축복 받지 못할 짓을 계속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늘 불순종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본문 말씀을 보면 1절에“둘째로 시므온 곧 시므온 자손의 지파를 위하여 그 가족대로 제비를 뽑았 으니 그 기업은 유다 자손의 기업 중에서라.”그랬습니다. 얼마나 기가 막힙니까? 앞에서 지난번에 땅을 돌아보러 한 지파에 3명씩 보내고 지도를 그려서 일곱 등분으로 나눠오라고 그랬는데 오늘 땅분배의 과정을 보면 앞에 지파가 받았던 땅이 아닌 다른 땅을 받아야 하는데 이 사람들은 유다지파에 속한 땅을 분배받고 있다는 겁니다. 기가 막힌 장면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다시 말씀 드리지만 환경이 문제가 아니고, 제도가 문제가 아니고, 체제가 문제가 아니고 바로 내 자신이 서있는 그 삶의 자리에서 순간순간 내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서 내 인생이 이렇게도 전개되고 저렇게도 전개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명히 인정을 해야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 믿음의 사람들은 내가 서있는 그 삶의 자리에서 순간순간 하나님 앞에 긍정적으로 최선을 다하는 결단을 하고 거기에 맞추어서 살아야 될 줄로 생각이 됩니다.
여러분 똑같은 레아라는 어머니에게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똑같은 야곱이라는 편애하는 아버지 밑에서 자라났습니다. 그리고 똑같은 집안에서 자라났던 유다와 이 시므온을 우리가 비교를 해 보시기 바랍니다.
2. 유다 지파가 보여준 미덕
유다는 야곱의 넷째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첫째아들 르우벤도 둘째아들 시므온도 셋째아들 레위도 다 하나님의 축복과 아버지의 축복에서 제외가 되었고 넷째 아들인 유다가 이스라엘의 열두지파 가운데 장자권을 상속받고 가장 축복 받은 한 지파가 되는 것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보게 되는 것입니다. 똑같은 한 뱃속에서 낳은 아들이었습니다. 한 아버지에서, 한 집안에서... 그런데 유다는 넉넉하게 받았고 그 넉넉한 것을 자기 형 시므온 후손들에게 물려주고 있는 장면을 보게됩니다. 이 유다 지파는 바로 예수님이 탄생한 지파였고 이스라엘의 왕통이 이어져 내려갔던 지파였습니다. 이 지파는 영적인 축복과 물질적인 축복을 함께 받았던 지파였습니다. 여러분 큰아들이었던 르우벤은 간통사건으로 장자권을 상실했습니다.
둘째아들 시므온과 셋째아들 레위도 세겜에서 학살 사건으로 말미암아 장자권에서 제외가 되었습니다. 세 형들이 전부다 장자권을 상실했을 때 이 넷째 아들인 유다가 그 장자권을 상속받았습니다.
그리고 유다는 자식의 축복을 받아서 애굽의 그 힘든 종살이를 하면서도 많은 자녀들을 낳았고 애굽을 떠나올 때 가장 큰 지파가 되었고 광야 생활을 하면서도 무려 얼마가 늘었는지 아십니까? 시므온 지파는 삼만명이상의 사람들이 감소되었지만 유다 지파는 그 힘든 광야 생활을 통해서 이만명 이상의 장정들이 불어났다는 겁니다. 그만큼 힘있는 지파가 되었고 힘있는 민족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런 변명을 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뭐 IMF다 불황이다 그러니까 우리 자신들이 이런 불황 때 안되는것은 당연하다고 이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리고 내 자신이 거기에 편승해서 내 자신을 합리화시키고 변명하고 핑계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성경을 보시면 시므온 지파는 불황을 만났고 광야의 험난한 생활을 통해서 완전히 그 지파가 찌그러들고 말았습니다.
그 반면 유다지파는 그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고 헤쳐나가면서 더 번성하고 번성해서 엄청난 축복을 받았던 사실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불황이라고 모든 사람이 다 망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불황일 때를 만날 때 우리가 믿음으로 담대하게 살아간다면 이 불황의 때는 우리의 삶에 역전을 할 수 있는 새로운 계기가 된다는 것을 우리 자신들이 알아야 될 줄 믿습니다. 어려울 때,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우리 너무 기죽지 말고, 주저앉지 말고, 포기하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더 담대하게 더 용기를 가지고 더 믿음을 가지고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가 광야를 헤쳐나가면서 유다 지파가 더 담대하게 광야 생활을 통해서 힘을 얻었던 것처럼 우리 자신들이 어려울 때 더 힘을 얻고 용기를 얻고 더 번성하는 축복을 받아 누려야 될 줄 믿습니다.
땅을 분배받을 때도 이 유다 지파는 시므온 지파하고 달랐습니다. 시므온 지파를 포함한 일곱지파는 슬슬 뒤로 빠지는데“아이고 골치 아프다. 지금 우리가 칠년 반동안 죽을 판 살 판 힘이 다 빠졌는데 또 싸우고 땅을 빼앗아야 하나. 이거 도저히 안되겠다.”이렇게 슬슬 뒤로 다 빠질 때 유다 지파에 속한 갈렙은“이 산지를 나에게 주옵소서. 헤브론 산지 이 산지를 나에게 주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이 유다 지파 사람들은 긍정적이고 진취적이고 개척자 정신이 충만했던 사람들로 뭉쳐져 있었습니다.
여러분, 가정 분위기가 말입니다.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진취적이고 역동적인 그런 분위기의 집안이 있는 반면에
서로 불평하고 서로 원망하고 서로 탓하고 서로를 그냥 비난하는 그런 집안도 있습니다.
그 집안의 분위기는 가장이 바꿔야 합니다.
가장이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진취적인 생각을 가지고 어려울 때일수록 더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가족들을 격려하고 용기를 주고 이렇게 하면서 바꿔야 합니다. 가장이 집에 들어와서 그냥 막 행패부리고 자기 부인이나 두들겨 패고, 욕하고, 자식들에게 막 저주를 퍼붓고하는 그 런 집은 생동감이 넘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 믿음의 가정들은 바로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집안입니다.
그 믿음의 집안의 가장은 가장대로, 주부는 주부대로, 자녀들은 자녀들대로, 자기역할을 잘 맡아 하면서 서로 격려하고 용기를 주고 희망을 부어 주면서 진취적인 생각, 긍정적인 생각, 개척자적인 생각 이런 생각을 가지고 가정을 새로 일으켜야 합니다. 지금 유다 지파 사람들이 바로 이랬습니다.
그런데 시므온 지파 사람들은 못된 짓만 찾아 했습니다. 배신하고 불순종하고 서로 욕하고 서로 저주하고 악담하고 그러니까 자꾸자꾸 찌그러들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우리는 여기에서 보게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남을 탓하는 습관을 가지면 절대 축복 받지 못합니다.
“내 탓이요.”라고 하는 사람은 축복 받을 수 있는 사람이지만
“너 탓이요.”라고 하는 사람은 항상 변명거리를 찾아서 그 변명거리 뒤에 자기 자신을 숨기고, 자기 자신을 도피시키고, 자기 자신을 비겁하게 합리화시키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절대 성공할 수 없습니다. 신앙적으로도 바로 설 수 없고 세상 삶에서도 그 사람은 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버릇들을 어디에서 배우는지 아십니까? 바로 아버지들에게서 배우는 겁니다. 자녀들이 아버지에게서 이런 버릇을 배워서 사회 나가서 써먹고 사회 나가서 패배하고 실패합니다. 그래서 우리 믿음의 가정은 이러한 가정의 분위기를 아버지를 통해서 또는 어머니를 통해서 바꾸어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유다 지파가 속한 땅의 일부분인 성읍들을 받아서 그냥 살다가 나중에 역사속에 사라져가는 시므온 지파의 그런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 반면에 유다지파는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그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도도히 흐르는 축복의 물줄기를 따라서 그 가문에 이스라엘의 역대 왕들이 태어나고 이스라엘의 역대 역사가 전개되는 그리고 결국에는 그 가문을 통해서 그 집안을 통해서 이 세상을 구원할 메시야가, 예수그리스도가 탄생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 이 유다지파는 형제들을 위해서 자기 것을 내어놓았습니다. 이 시므온 지파가 자기 땅에 잠식해 들어왔을 때 강력하게 반대하고 밀어내지 않고 자기들 성읍에 들어와서 그냥 살도록 다 허용을 했습니다. 인간은 내가 많이 가지면 많이 가질수록 더 탐욕속에 우리 자신이 찌들어 들어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지파는 넉넉한 그들의 소유속에 시므온 지파를 불러들여서 그들이 함께 살 수 있도록 배려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과 더불어 연합해가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을 인정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들과 나누는 삶을 살았고 내가 가지고 있는 이 땅덩어리, 내가 가지고 있는 이 소유는 나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것으로 다른 지파와 더불어 사는 삶의 태도를 가졌습니다. 시므온 지파는 빌붙어 살았던 지파였습니다. 그러나 유다 지파는 자기의 가진 것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주었던 그런 지파였습니다.
여러분, 시므온 지파의 시므온이라는 첫 번째 조상은 자기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축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시므온 지파 사람들은 배신과 반역을 통해서 지도자 모세에게서 축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오늘 19장을 보시면 이 시므온 지파는 유다 지파의 땅을 기업으로 받아서 유다 지파속에 섞여 살아갑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가 몇 백년 흘러갑니다. 그런데 이 시므온 지파의 사람들은 배신의 기지가 있었고 반역의 기지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솔로몬 아들대에 와서 남북으로 쪼개어 집니다.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단이 되어질 때 이 시므온 지파는 당연히 유다지파에 속해 있어야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보면 이 시므온 지파는 유다 지파를 배신하고 요셉의 지파에 붙어버립니다. 그리고 북왕국에 속한 한 지파가 됩니다. 그리고 북왕국의 여러 곳에 흩어져 살고 수백 년의 역사가 흐르면서 이 시므온 지파는 이름도 없이 역사속에서 사라져 버리는 불행한 한 지파인 것을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환경과 처지에서 어떻게 반응하느냐 그리고 그렇게 잘못된 성품과 심성들이 어떻게 전수되어져 내려갔느냐 하는 것에 대해 우리는 참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았던 가난의 유산, 무지의 유산, 또 여러 가지 성품이나 기질상의 그런 유산들이 있을 줄 압니다.
내가 받은 그 잘못된 유산들은 나의 당대에서 깨끗이 청산하고 이제 하나님 앞에 구원받은 백성으로써, 하나님 앞에 새생명으로써 우리의 새로운 역사를 이루어 나가는 주인공들이 되어야 될 줄로 생각이 듭니다.
탈옥수 신창원의 아버지가 아들이 하도 애를 먹이니까 경찰에 연락을 해서 잡아가도록 만들었다고합니다. 만약에 아버지가 좀 더 아버지로서의 책임감을 느끼고 그 아들을 부둥켜안고“야 임마, 이게 바로 내 탓이다.”이렇게 눈물을 흘리면서 그 아들을 잘 양육했더라면 아마 신창원은 그 머리와 그 능력을 제대로 긍정적으로 발휘해서 굉장히 우리 사회에 도움이 되는 그런 일을 할 수도 있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는 경찰에 연락을 해서 자기 아들을 잡아넣도록 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자기 아들을 저주한 아버지와 다를 바가 없었다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 여러분 자녀들이 아무리 애를 먹여서 두들겨 팰 때는 두들겨 패고 쥐어박을 때는 쥐어박더라도 자녀들을 저주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한국의 부모들 가운데 자녀들에게 막말하고 저주하는 부모들이 꽤나 있습니다.
특별히 달동네 같 은데 가보면 삶이 힘들어서 고달픈데 자식이라도 좀 제대로 커줘야 하는데 이놈의 자식이 제대로 안 커 준단 말입니다. 그러면 막“이 빌어먹을 놈, 이 벼락맞아 죽을 놈, 어떤 놈”하면서 막 자식들에게 저주를 퍼붓는 부모들이 있습니다.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그 부모의 저주를 받으면서 자라난 자녀들이 심성이 바로 성장되겠습니까?
자기 부모와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분노를 키우면서 살아갑니다. 성인이 되었을 때 사회의 이탈자가 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우리 자녀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을 품어주고 자녀들을 혼낼 때도“이 복받을 놈”이렇게 욕이라도“이 빌어먹을 놈”이것보다는“이 복받을 놈”이렇게 할 수 있는 부모가 되었으면 하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자녀를 향한 축복이 부모들에겐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자녀들을 저녁에 한번씩 불러놓고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축복을 하시기 바랍니다. 큰 자녀들도 좋고 청년이 된 자녀들도 좋습니다. 아버지가 자녀의 머리에 손을 얹고 축복하는 것은 이스라엘의 가장 아름다운 전통입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아름다운 전통이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축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이 시간부터 여러분들은 여러분 자녀들 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빌어주는 그런 부모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여러분들이 물려받았던 여러분 선배들로부터 물려받고, 여러분 부모들로부터 물려받았던 정말 부정적인 모든 요소들을 내
속에 품고 전전긍긍하지 말고 이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해방된 자로써 다 청산하고 하나님 앞에 새로운 자로 새로운 피조물로써 그리스도 앞에서 받은 이 축복을 자녀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빈곤과 무지와 가난, 또 잘못된 성품들 이것이 한 가정이라는 테두리 속에 서 계속 악 순환 될 수가 있습니다. 내 속에 열등감의 요소들을 다 제거하고 좀 더 새로운 그런 모습으로 우리 자신들이 세워지기를 바랍니다. 제가 아주 습관처럼 이야기 하는게 있는데 여름철이 되면 하늘 에서 똑같이 비가 억수같이 내립니다. 남아시아 지역에는 몬순기후의 영향을 가장 강하게 받습니다. 그래서 유럽에는 없는 장마철도 있고 태풍이 있습니다. 이것이 지나가면 많은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도 3,40년 전에는 여름철이 지나가고 나면 수많은 사람이 죽었고 온 국토에 수마가 할퀴고 지나간 자국이 남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가 경제개발 5개년 계획, 국토 종합 개발계획 이런 것을 수립하면서 전국 곳곳에 다목적 댐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이 댐을 막으면서 우리 나라가 비로소 물을 관리하는 능력을 배양했고, 물을 관리하는 기술을 습득하게 되었습니다. 때로는 어떤 댐의 물은 공업용 수로, 어떤 댐의 물은 농업용수로, 어떤 댐의 물은 음용수로 이렇게 사용을 하면서 하늘에서 쏟아지는 물을 관리하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제가 처음 독일에 갔을 때 이 사람들이 어떻게 이렇게 치산 치수를 잘했는가 그것이 참 부러웠습니다.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이 유럽을 여행을 하면 그 사람들이 정 말 얼마나 치산치수를 잘하는가를 느낄 수가 있습니다. 하늘에서 똑같은 비가 쏟아지지만 물을 관리할 능력이 있고, 지혜가 있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에게는 그 물이 하나의 축복의 소낙비가 됩니다.
그러나 물을 관리할 능력이 없고, 물을 관리할 준비가 안 되어있고, 지혜가 없는 사람들에겐 하늘에서 쏟아지는 모든 비는 그들의 삶을 파괴하고 할퀴고 지나가는 저주의 소낙비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 야 합니다.
여러분, 내가 어떤 환경에 태어났느냐, 내가 어떤 부모를 만났느냐, 내 형편과 처지가 어떻느냐 그것 때문에 매일 신세타령하고, 부모 원망하고, 형제 원망하고, 저주하고, 악담하고 이 세상 뒤집어져야 된다고 그렇게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문제가 해결될 수 없습니다. 비록 내가 고달픈 삶을 살고, 비록 내가 못난 부모를 만났고, 내가 지금 어려운 환경속에 놓여있고 여러 가지 여건은 다른 사람보다 좋지 않지 만 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새로운 피조물이기 때문에, 내가 이것을 믿음으로 긍정적으로 반응하고 이것을 헤쳐나가겠다는 의지와 자신만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내가 서 있는 이 자리에서 지금까지의 모든 저주스러운 것을 축복으로 전환시켜주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믿어야 될 줄 믿습니다. 지금까지 우리 자신들은 어땠습니까? 어쩌면 시므온의 후손들같이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시므온의 후손 시므온의 지파처럼 살 것이 아니라 유다 지파 사람들처럼 유다지파의 후손들처럼 축복의 주인공이 되어서 우리의 불리한 여건, 불리한 환경, 불리한 형편과 처지 이것을 유리한 것으로 바꾸는, 뒤집어 놓는 그런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지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모든 이세상의 제도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법과 제도를 넘어서 사랑의 원리로 형제를 끌어안았고 그들의 모든 것을 양보하는 미덕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의 주인공이 되었던 것을 기억합니다.
우리 한밭교회에 속한 모든 믿음의 사람들, 믿음의 가정이 바로 유다 지파가 받아 누렸던 이 축복을 받아 누리는 축복의 주인공들 이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