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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평]
김월강의 시세계
자아 표현의 욕구와 구원을 위한 미의식
권대근
문학박사, 대신대학원대학교 교수
Ⅰ.
시가 삶에서 나온다는 점, 월강은 성실하게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점, 그렇기 때문에 월강은 아름다운 시를 쓸 수 있는 것이다. 월강 시의 존재 이유는 <시인의 말>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는 “저는 시를 쓰는 것이 행복합니다. 시를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얻고, 또 다른 자신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다. 모든 예술은 순수한 사상과 감정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동양시학에 의하면, ‘의잡불순’이란 게 있다. 의도가 잡스러우면 순수하지 못하다고 했다. 월강 시인은 시의 출발점을 순수에 두고 있어 시심이 든든하다. 표현 기술은 그 다음의 문제인 것이다. 그리고 문학의 사회적 기능도 무시할 수가 없다. 문학이 개인과 사회에 어떤 영향력을 끼치는가 하는 점이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 상업주의가 팽배하여 자본이 빈번하게 오고 가는 시대에 그 순기능과 역기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문학의 사명이라든지 문학인의 양식이 그 어느 때보다도 요구된다는 점을 간과하지 않을 수 없다.
위의 시적 관점과 사회적 요구를 전제로 해서 월강 제3시집 『차밭골 사랑』에 실린 시를 종합적으로 살펴봤을 때, 그의 시는 순수한 자아의 표현 욕구라든지 구원을 위한 미의식의 기반 위에서 성립된다고 하겠다. “두 번째 시집을 내고 나서, 저는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가진 능력은 아직도 부족하다는 것을, 그리고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라는 <시인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시인다운 시인이 되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냉정하게 판단한 뒤 이를 채우기 위한 또 다른 계획을 구상하는 일련의 과정은 대종사다운 성숙한 면모를 보여준다고 아니 할 수 없다. 시를 창작하는 과정은 광맥을 찾는 광산업자의 자세와도 같다. 광석을 추출하여 제련을 하는 것과 같이 잡다한 언어 가운데 시어를 찾아내어 생산적 상상을 통한 제련작업으로 시어를 조탁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Ⅱ.
‘보름달이 박덩이같이 희다. 벌판 끝에 바다가 그윽한 파도소리와 함께 우련한 밤 속에 멀다. 윤곽이 선명한 초막의 그림자가 그 무슨 동물과도 같이 스꺼멓게 능금밭 속까지 뻗쳐 있고 그 속에 능금나무가 잎사귀와 꽃이 같은 푸르스름한 빛으로 우뚝 솟아 있다. 달밤의 색채는 반드시 흰빛과 묵화빛만은 아니다. 달빛과 밤빛이 자내는 미묘한 색채, 자연은 이것을 그 현실의 색채 위에 쓰고 나타난다. 이것은 확실히 현실을 떠난 신비로운 치장이다. 그러나 달밤은 또한 신비로운 색채뿐이 아니다. 색채 외에 확실히 일종의 독특한 향기를 품고 있다. 알지 못할 그윽한 밤의 향기, 이것이 있기 때문에 달밤은 더한층 아름다운 것이다. 인류가 태곳적부터 가진 이 낡은 달밤, 낡았다고 빛이 변하는 법 없이 마치 훌륭한 고전과 같이 언제든지 아름다운 달밤’이라고 이효석은 노래하였다.
모파상은 <월광>에서 ‘어째서 신이 달빛을 만들었는가? 어째서 신은 이것들을 만들었을까? 밤은 잠을 자기 위해서, 의식을 잊기 위해서, 휴식을 위해서, 그리고 모든 것의 망각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라면 어째서 그 밤을 낮보다도 매력있게 하였으며, 여명보다도, 저녁놀보다도 한층 그리운 것으로 만들어놓았을까?’라면서 달빛의 신비를 찬탄하고 있다. 우리나라 금정산 자락 금어사 주지 스님인 월강 시인도 모파상 못지않은 달빛 예찬론자의 한 사람이다. 월강 시인의 시 <달, 열반의 얼굴>에는 달에 대한 흠모의 정이 잘 나타나 있다. 그는 ‘은은한 달빛 아래’에 들면, ‘잠시 고요해’진다고 고백하면서, 자신은 ‘달의 얼굴을 바라보며 내 안의 열반을 찾는다’고 설파하고 있다. 달에 대한 월강 시인의 흠모는 이 시 외에도 여러 시, 특히 <찻잔에 드리운 달>에 잘 나타나 있다.
고요한 밤, 찻잔에 달이 드리웠네
차의 향기와 달빛이 어우러져
마음은 은은한 몽환에 잠기네
달빛은 차의 은은한 빛깔과 어울려
마음은 맑고 투명해지네
차의 달콤함과 달빛의 달콤함이 어우러져
마음은 달콤한 행복에 빠지네
찻잔에 드리운 달은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담은 것 같네
차와 달을 함께 마시며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느끼네
- <찻잔에 드리운 달> 전문
둥근 보름달이 꽃빛깔 같은 훤한 얼굴로 스님을 내려다보고 있다. 고요한 밤, 스님이 앞에 놓인 찻잔에 찻물을 부우니, 달빛은 고요한 미소를 짓는다. 월강 스님은 달빛이 눈처럼 하얗게 깔린 찻잔을 보며 몽환에 잠긴다. 차의 은은한 빛깔과 달빛의 달콤함이 어우러져 행복에 드는 장면이 한 편의 시로 수놓아져 있다. 찻잔에 드리운 달은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다 담았으니, 시인은 차와 달을 함께 마시며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었던 것 같다. 시적 화자의 자아와 세계 즉 달빛과의 동일성은 ‘달과 차’를 함께 마신다는 데서 드러난다. 달에 대한 시인의 미적 쾌감은 그 만남의 특별함에서 연유한 듯하다. ‘차의 향기와 차의 은은한 빛깔’ ‘차의 달콤함과 달빛의 달콤함’의 만남이 그러하다. ‘찻잔에 드리운 달은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담은 것’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시인은 현실 저쪽의 초월적인 세계, 즉 어떠한 사실이나 현실 이상의 본질적인 세계에 접근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이를 토대로 해서 시인은 차와 달을 함께 마심으로써 미적 주체가 된다.
이 시는 이 사물 간 만남의 축복에서 출발한다. '찻잔'과 ‘달’의 만남뿐만이 아니다. ‘차의 향기와 달빛’이 또 만나고, 이어서 ‘달빛이 차의 빛깔’과 만나게 된다. 대상과 대상의 연쇄적인 만남은 상승효과를 가져와서 주체를 감각적 주체로, 미적 주체로 변화시켜 나가고 있다. 이런 천상과 지상의 이질적인 것의 교합이 만들어내는 효과가 시어 배열에서 친화성을 가져와 시의 시각적인 맛을 더해준다. 그야말로 적재적소에 들어앉은 플로베르의 일물일어라고나 할까. 시인의 달빛에 대한 초월적 현상학적 사유가 서정적 비전에 힘입어 정서적 증폭 현상을 가져온다. 시인의 참신한 창조적 비유로 달은 미적 대상이 된다. 시 창작은 한마디로, 상상력으로 새 이미지를 창조하는 작업이다. 달의 관습적 이미지를 탈피하여,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담고 있는 그릇으로 빚어냄으로써, 시인은 이 시의 제재에 새로운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이 시는 '시는 상상력의 소산이다'라는 명제와 ‘시는 현실과의 미적거리에서 창조된다’는 시학원리에 딱 부합한다. 왜냐하면 달과 시인의 거리가 밀착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고요한 밤 달빛에 주목하는 시적 화자는, 달에 대한 관념이나 정서를 용기 도식화함으로써, 즉 사물로 치환함으로써 문학적 성취를 확보하고 있다.
저녁 어스름 길을 걷다
한 골목길로 들어섰네
달빛거리라는 이름이
마음이 끌렸네
조그만 식당 하나
시락국밥 콩나물비빔밥
빈대떡 부추전
서민들의 코끝을 감싸네
달빛은 그 거리를 비추며
희망의 빛을 안겨주네
힘든 하루를 마치고
여기서 쉬어가는 사람들
달빛은 그들의 마음에
잠시나마 휴식을 주고
희망을 불어넣어주네
달빛거리는 희망의 거리였네
- <달빛 거리> 전문
본래 시는, 자동화 습관화된 지각을 지연시켜, 세계를 자아화함으로써 생성되는 것이다. 저녁 어스름 길을 걷다가 한 골목길로 들어섰는데, 월강 시인은 ‘달빛 거리’라는 이름에 이끌려 시심을 놓는다. 정녕 ‘달빛 거리’라는 이름 때문이었을까. 이름보다도 스님의 마음을 잡아 당겨 시를 써보라고 부추긴 것은 조그마한 식당에서 발견한 ‘시락국밥’과 ‘콩나물비빔밥’ ‘빈대떡’ ‘부추전’ 등 서민들과 가까운 음식메뉴였던 것이다. 시인은 이런 메뉴들이 ‘코끝을 감싸네’라고 표현하며, 친근함을 표하고 있다. 시인은 구체어를 활용하여 이 시의 구조를 서경적으로 구축하고 있다. 관찰자의 눈을 통해 인지한 이미지를 묘사하기 때문에 서경적 구조는 사실적인 장면을 제시한다. ‘시락국밥’과 ‘콩나물비빔밥’ ‘빈대떡’ ‘부추전’ 등은 가시권의 이미지로 독자가 직접 눈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서경적 구조는 이미지를 구현하는 가장 기본적인 묘사의 양상이다. 그 이유는 시가 우리 삶의 국면을 다루는 것이니만큼 대다수의 묘사가 우리 삶의 사실적 풍경을 근간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묘사의 대상으로 주변의 익숙한 것들을 선택했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대상이 전부 익숙한 것이지만, 서민이나 민초와 친숙한 것이라는 데 의의가 있다. 이 시에서 중요한 진술은 ‘달빛은 그 거리를 비추며 희망의 빛을 안겨주네’라는 부분이다. ‘거리’가 누구나의 거리가 아니라 ‘힘든 하루를 마치고 여기서 쉬어가는 사람들’이 드나드는 거리였던 것이다. 시적 화자가 달빛 거리에 주목하고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는 ‘달빛은 그들의 마음에 잠시나마 휴식을 주고 희망을 불어넣어주네’라는 시구에서 찾을 수 있다. 그의 시는 치유시학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월강 시인의 시는 쉽게 읽혀지고 이해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월강 시인의 시가 쉽게 쓰이지 않는다. 그는 달빛을 받으며 거리를 걸으면서 고급스러운 시어를 꼭 찾겠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난다. 길가 작은 식당에서 만난 서민 메뉴를 통해 어려운 이웃의 아픔을 먼저 생각하는 까닭이다. 그렇지만 그의 시에는 메타포의 원리에 의한 간접적 정서 표현이 두드러진다. ‘달빛 거리는 희망의 거리였네’라고 하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직설적인 날것의 감정 표출을 자제하고 있다. 그 이유는 자신의 시를 ‘생각하는 시’로 전환하고자 하는 데 있다.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고요한 숲속 길
나뭇잎을 적시는
빗방울소리에 귀 기울이니
새소리도 어우러져
은은한 음악처럼
행복한 마음이 피어오른다
빗방울은
마치 연꽃 봉오리 터지듯
내 마음을 열어준다
새소리는
마치 연인들의 속삭임처럼
내 마음을 어루만져준다
- <비 내리는 산책길> 전문
서양에서는 우경의 미를 잘 생각지 않는 것 같으나 동양 사람들은 그런 미를 잘 감상한다고 러트는 <풍류한국>에서 말했다. ‘논과 골짜기에 내리는 비의 묘한 모습뿐만 아니라 먼 산을 안개와 같은 비 속에서 보면 어떤 신비스러운 가치가 생기는 모양이다. 산속으로 들어가면 비로 씻은 듯이 분위기가 아름다워진다.’고 하면서 영국 사람들이 이러한 생각을 갖지 못하는 이유를 영국에서는 비가 추운 계절에 주로 오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과연 그럴까? 그런 이유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비는 김진섭의 말대로 모든 사람들에게 대하여 하나의 위안이 되고 하나의 신뢰할 만한 벗이 되는 것이다. 시적 화자인 월강에게는 말할 필요가 없다. 금정산 금강공원 산 속에 있는 암자에서 듣는 빗소리는 시내에서 듣는 빗소리와 사뭇 다를 것이다. 그 빗소리는 숲속 길 나뭇잎을 적시는 소리인 것이다. ‘은은한 음악처럼’ ‘마치 연꽃 봉오리 터지듯’ ‘마치 연인들의 속삭임처럼’ 등의 직유는 월강 시의 멋과 맛을 더해준다.
새소리도 함께 어우러지니, 은은한 음악이 되어 시인의 마음을 행복하게 해주고, 마음이 행복해지니, ‘빗방울은 마치 연꽃 봉오리 터지듯’ 시인의 마음을 열어준다. 새소리는 마치 연인들의 속삭임처럼 시인의 마음을 어루만져 주게 된다. 비 오는 날의 현실이나 그 느낌이 시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음악이 있는 산책길의 풍경을 정말 시적으로 잘 형상화한 ‘비 내리는 산책길’을 걸어본 기억을 되살리게 된다. 마음의 평화를 진열하기 위해 비가 내리는 산책길 속으로 들어온 빗소리는 음악이 흘러나오는 길이다. 활시위처럼 팽팽한 표정의 시인은 비 내리는 풍경을 매의 눈으로 잘 포착하고 있다. 시인은 빗방울로 소리효과를 잘 나타내고 있으며, 새소리와 빗방울 소리의 결합으로 의미효과를 잘 구축하고 있다. 소리가 마음으로 연결되어 치유성을 나타냄으로써 현실 이상의 것을 추구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그림자 하나 오래 오래 달무리 속으로 걸어가고 있었다.’는 결구는 달빛 산책의 행복을 잘 그려내고 있다고 하겠다.
우람한 노송에
능소화가 아름답게 피어오르네
폭염과 장마철의 장대비를 맞으면서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네
그 모습은 마치
온갖 시련과 고통을 견디며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는
인생의 한 모습과도 같아라
능소화처럼
우리도 굳세게 살아가자
어떠한 어려움 가운데서도
아름다운 인생의 꽃을 피워내자
- <능소화 앞에 차 한잔 바치고> 전문
금강공원 금어사에 명물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키 큰 소나무 둥치를 타고 꼭대기까지 올라가서 꽃을 피우는 능소화다. 시적 화자는 우람한 노송의 몸에 기대어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능소화를 ‘온갖 시련과 고통을 견디며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는 인생의 한 모습’과도 같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 근거로 드는 것이 ‘폭염과 장마철의 장대비’다. 능소화는 어떤 폭염에도 장마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역할을 다한다는 것이다. 이 시의 교훈성은 ‘능소화처럼 우리도 굳세게 살아가자’ ‘어떠한 어려움 가운데서도 아름다운 인생의 꽃을 피워내자’는 구호에 있다. 이 시는 3연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1연은 시련 속에도 불구하고 피는 능소화이고, 제2연은 그 모습이 인생을 닮았다는 것이며, 마지막 연에서 시적 화자는 우리도 능소화처럼 아름다운 인생을 꽃피우자고 노래하고 있다.
시인은 능소화를 불굴의 의지를 가진 사람으로 형상화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왜 시인은 능소화를 보고 그런 상상을 했을까. 한 줄 시에는 시인의 시력과 시야가 압축되어 있다. 사물과 사태, 삶과 세계의 핵심을 치고 들어가는 직관력은 물론이고 직관한 내용을 최소한의 어휘로 형상화하는 솜씨, 장악력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월강 시인이 말하는 ‘폭염’과 ‘장대비’는 온갖 시련을 의미한다. 시는 원래 ‘문단 의장’을 지향해야 하는 법이다. 이 시는 3연이란 짧은 길이에 깊은 뜻을 담았던 것이다. 바슐라르가 아름다운 나무가 아닌 ‘고통받는 나무일 때 고통이 한층 더 깊은 것으로 우리에게 느껴’진다고 했던 것처럼 감상적 인식이 전달하는 단편적인 아름다움을 배격하고 있다. 이 시의 묘미는 내용보다도 ‘능소화 앞에 차 한잔 바치고’란 제목에 있다. 좋은 제목이 좋은 시를 만든다는 걸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밤하늘에 떠오른 달은
고요히 그 자리를 지키네
아름다운 둥근 얼굴은
마치 열반에 드신 부처님 같네
세상의 모든 근심을
다 잊은 듯한 그 모습
고요한 빛은
마음의 평화를 전하네
달은 열반의 얼굴이네
번뇌와 고통으로부터
벗어난 그곳
그것이 바로 열반이라네
은은한 달빛 아래
나는 잠시 고요해지네
달의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내 안의 열반을 찾는다네
- <달, 열반의 얼굴> 전문
무엇보다도 이 시는 견자를 창조해 보여주는 동시에 일상의 바람직한 깨달음의 모습을 한국적인 사유 체계에 맞는 귀납법적 추론에 의해 직조하고 있다는 데 그 특징이 있다. 밤하늘에 떠오른 달은 ‘고요히 그 자리를 지킴’으로써 ‘마치 열반에 드신 부처님’ 같다는 인식이다. 아름다운 둥근 얼굴은 우리네 삶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자한 부처님의 모습을 강하게 유추해 볼 수 있게 한다. 이 시의 압권은 ‘세상의 모든 근심을 다 잊은 듯한 그 모습’ ‘고요한 빛은 마음의 평화를 전하네’다. 이 시가 공감을 주는 까닭은 모든 사람이 갖게 되는 보편적인 진리가 여기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시인이 어떤 사물을 지각하고 그 사물에 대한 느낌을 시적으로 표현하고 싶다는 외적 사물인식과, 어떤 관념을 시적으로 표현하고 싶다는 욕구 충족을 위해 사물을 끌어 들이는 내적 사물인식이 잘 맞아떨어진 것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부분은 ‘번뇌와 고통으로부터 벗어난 그’ 지점이 열반이라는 것이다.
사실, ‘세상의 모든 근심을 다 잊은 듯한 그 모습’은 심층심리 내면에 저장되어 있는 내면의식의 분출이므로 시창작의 동인과 인과적 관련성을 부인할 수 없다. 시를 쓰고 싶은 의지와 동기화로부터 이미지를 변주하고, 시어를 변용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능력은 월강 시인의 시적 역량을 가늠하게 한다고 하겠다. '자리를 지키는 것'과 ‘둥근 얼굴’이란 시구는 열반의 개념을 쉽게 이해하게 하는 것으로써 불교적 진리를 절묘하게 간파한 것이다. ‘달의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내 안의 열반을 찾는다네’는 열반의 경지에 들고자 하는 스님으로서의 불심을 최대로 극대화한 표현이라고 하겠다. 모난 데 없는 둥근 형상은 열반의 모습을 의미한다. 시인은 신앙의 꽃을 피우는 불도의 길에서 범인들이 닿아야 할 열반의 경지를 찾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공원 정문 옆에 우뚝 선
시계탑은 하루 종일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보네
아이들의 웃음소리,
연인들의 속삭임,
노인의 슬픈 표정
모두 시계탑의 눈에 담기네
시계탑은 만남의 장소
사랑하는 사람과의 약속,
친구들과의 즐거운 시간
시계탑은 그 모든 순간을 함께하네
시계탑은 시간의 증인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공원의 상징
시계탑은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네
- <공원 시계탑> 전문
시는 관조의 미학 위에 피는 꽃이다. 시인은 공원시계탑을 돌아보며, 시계탑-되기에 도전한다. 지금까지의 시가 시적 화자의 입장에서 대상을 관찰하는 입장이었다면, 이 시는 시점과 관점을 바꾸어 대상의 주체가 되어 사물을 관찰하는 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 ‘연인들의 속삭임’, ‘노인의 슬픈 표정’이 담긴 이 삶터를 만남의 장소로 치환함으로써 시인은 시계탑을 서민들의 생활공간으로 만들어 시민과 친숙한 시계탑의 시로 완성한다. 현실을 보다 정직하게 바라보는 리얼리즘적 방법으로 접근해서 서정적인 형상화에 성공하고 있다. 이 시에서 핵심이 되는 시정신은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이라는 시구와 ‘시계탑은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네’라는 어구다. ‘자리를 지킨다’는 가치는 월강 시의 핵심 가치를 표방한다고 할 정도로 여러 시에서 많이 노출된다. ‘시계탑은 그 모든 순간을 함께하네’라는 대목에서 미적 목적을 위한 월강 시인의 관찰자로서의 시적 화자-되기의 변신이 신선한 충격을 주고 있다.
이 시에 있어서 시인은 역사적 자아이면서 동시에 서정적 자아다. 시인은 공원의 시계탑을 보면서 만남을 약속하는 사람들을 상상적으로 그려내면서 시절을 과거로 되돌리고 있다. 시계탑의 시계를 보며 약속시간을 지켜나갔던 옛사람들을 생각하면서 그는 공원 정문 앞 시계탑에 주목한다. 어떤 형태로든 시계탑은 사람들에게 약속은 지켜야 한다는 것을 전달하고 싶은데, 시인은 그 의도를 포착, 시계탑에 관찰 주체의 자격을 부여한다. 사람과 시계탑의 관계를 전도함으로 해서 이 시는 문학적 성취를 확보하는 데 성공하고 있다. 서민에 대한 시인의 애착이 정서의 도피를 통해 시계탑으로 구체화된 점은 높이 평가해야겠다. 시는 변용의 미학이 빛나야 된다. 마지막 연에 시계탑이 ‘증인’ ‘상징’ 등으로 구상화되고 있어 시적 긴장을 준다. 시계탑에 대한 의미부여가 과거를 소환한 것이다.
세상의 모든 모양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둥근 마음이라 하네
세상은 날카로운 모서리로 가득해
사람들도 날카로운 말들로 서로를 찌르네
그런 세상에서 둥근 마음을 지키려면
날카로운 모서리를 둥글게 갈아야 하네
날카로운 말 대신 부드러운 말을
날카로운 행동 대신 따뜻한 행동을
그러다 보면 어느새 내 마음도 둥글어져
세상도 둥글게 보이겠지
세상의 모든 모서리들이
둥글게 변해버린다면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 <둥근 마음> 전문
시를 통해 자기의 모난 삶과 존재를 확인하고 그것을 확인하는 동시에, 삶의 모난 각도에서 벗어나고 싶은 독자가 있다면, 감히 이 시를 권한다. ‘세상은 날카로운 모서리로 가득해’ ‘사람들도 날카로운 말들로 서로를 찌르네’라는 대목에 주목하면, 이 시는 자본주의 산업사회의 특징인 비정함을 잘 드러내고 있다. 비가시성의 관념인 ‘비정함’을 구체어로 가시화하면서, 문학적 성취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다. ‘날카로운’이란 형용사는 여기서 모난 형상으로 은유되어 있다. ‘날카로운 말 대신 부드러운 말을’ ‘날카로운 행동 대신 따뜻한 행동을’ 등의 대립되는 어구를 적시하여 모난 이미지를 둥근 이미지로 변용하면서, 시인은 세상의 모든 날카로운 모서리가 둥근형으로 변하기를 바란다. 모난 것 하나라도 둥글게 해서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고자 하는 월강 스님의 작가정신이 잘 드러난 시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은 ‘둥근’이라는 모양을 재료로 하여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고자 한다. 아름다운 세상 만들기는 월강 시인의 시적 프로젝트다. ‘둥근 마음’이 환기하는 의미와 ‘부드러운 말’과 ‘따뜻한 행동’이란 이미지가 결합되어 세상은 둥근 모습의 이미지를 갖는 것이다. 선명한 동그라미 형상의 시각적 이미지는 부드럽고 따뜻한 정서를 잘 감각화함으로써 시의 품격을 유지하고 있다. 월강 시인의 세상 아름답게 만들기 프로젝트에는 ‘둥근’이란 형용사가 많이 쓰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적재라는 말이다. 전체 시가 현실인식의 치열성을 보이면서도 방법론과 기교의 다양한 층위에서 만족할 만한 성과를 보인다는 것은 그만큼 시를 쓰면서 제작성에도 심혈을 기울인다는 말이다. 시에는 신기성과 모호성 그리고 어떠한 대상을 지향하는 의식 내용으로서의 표상성이 있어야 하는데, ‘둥근’과 ‘모난’은 부드러움의 성질과 날카로움의 성질을 동시에 공유해서 대립적인 가치를 전해준다고 하겠다.
푸르른 여름, 햇살 아래
싱그럽게 피어났던 우리
이제 찬바람 불어오는 가을
대지의 품으로 돌아가려 하네
한줄기 햇살에 나부끼며
바람에 흔들리며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이별의 인사를 나누네
“그동안 고마웠어”
“너와 함께한 시간은
내게 소중한 추억이 될 거야”
어디서든 “행복하게 살거라”
“다음에 또 만나자”
낙엽은 석양빛을 안고
대지의 품으로 드러눕네
그리고 새로운 생명의 시작을
기약하며 잠이 들어버리네
- <낙엽들의 인사말> 전문
시인은 감각을 통해 자아를 포함한 세계와 만나고, 독자는 감각을 통해 시와 교감하는 사람이다. 이런 경우 시가 현실과 지나치게 밀착됨으로써 현실과 문학의 미적 거리 조정에 실패하여 결국 미학성은 배제되고 현실만 생경하게 드러날 수 있는 것이지만, 월강 시인은 가끔 인문학적인 사유를 통해 인간중심주의에서 이탈하여 사물의 발신음에 귀 기울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따라서 이 시의 성공은 낙엽의 말에 있다고 하겠다. 무엇보다도 월강 시인의 시는 현실감각과 관련 있는 표층구조와 새롭게 보기 차원의 관점과 관련이 있는 탈중심주의 구조가 동기화를 탄탄하게 구축하고 있는 장점이 있다. 시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데 묘미가 있다. 시인은 ‘낙엽의 인사말’에서 뭔가를 찾아내려고 한다. 바로 ‘윤회의 비밀’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에 또 만나자’의 상징성과 그 뒤를 이어 전개되는 자연의 이법을 감지하게 된다. 관심을 갖고 주의 깊게 살펴보면, 숨겨진 것을 눈치챌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결말부에서 가서 시적 화자는 시점을 다시 주체로 돌려놓는데, 이는 ‘인사말’에 기인한다고 하겠다. 인사는 상호작용이기 때문이다. ‘낙엽은 석양빛을 안고 대지의 품으로 드러눕네’ 그리고 ‘새로운 생명의 시작을 기약하며 잠이 들어버리네’라는 마지막 연은 은유의 입체적인 효과에 힘입어 독자에게 윤회의 진리를 전해준다. 이 시는 윤회에 대한 단순한 생각을 우리로 하여금 체계적으로 하도록 만든다. 사고의 질을 높인다. 인간의 감정 양식에 질서를 주고, 문화창조에 지속적이면서 체계적으로 이바지한다. ‘새로운 생명의 시작’이라는 말이 월강 시인의 시를 통해 의미화가 되지 않았더라면 ‘윤회’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 의미가 쉽게 다가올 수 있을까. ‘대지의 품으로 돌아가려 하네’에서 일어나는 사색과 사유는 윤회라는 개념의 폭과 높이와 깊이를 잴 수 있게 한다고 하겠다. 시적 화자는 언제나 깨어 있는 마음의 눈으로 보는 존재다. 그러나 육안은 사물의 겉만 볼 수 있다. 시는 시각으로부터 출발했지만, 이제 시는 저 왜곡되어 있는 시각과 맞서 싸워야 한다.
Ⅲ.
자연은 상징과 암호로 말한다고 휠타이는 말했다. 자연은 신의 계시적인 언어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자연은 그 모든 진리를 각각 그 자신 속에 간직하고 있다. 자연에는 신의 속성이 내포되어 있으므로 자연을 벗 삼는 것은 신과 벗 삼는 것과 같고 자연과 대화하는 것은 신과 대화하는 셈이 된다. 종교인은 신의 대리자이기도 하다. 이러한 견해에 입각해서 보게 될 때 자연을 벗 삼은 월강 스님의 많은 시편들은 호방할 수밖에 없고 소박할 수밖에 없으며, 격조가 있을 수 있을 수밖에 없다. 월강은 자연을 스승으로 쓰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 것 같다. 많은 시편들에 나타나는 것은 인간은 자연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사상이다.
앞서 소개한 여러 시편들에서 자연과 인간이, 대상과 주체가 둘이 아닌 초탈한 경지에서의 물아일체로 한가로운 정서를 누렸다면 또 한편으로는 고요한 밤의 애상을, 달빛 하에서는 고요함의 극치를, 선시 같은 시에서는 안심입명의 경지를 맛보게 된다. 여기에는 속인들이 범접할 수 없는 어떤 정밀한 차원의 품격을 생각하게 된다. 월강 시인의 세 번째 시집은 현실적 사물에 관심을 두고 있어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월강의 시는 비교적 난해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이미지도 선명한 편이다. 독자의 상상력이나 해석 방식에 따라서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여지는 그렇게 넓지 않다. 월강 시의 한 특징은 거의 의도하는 바를 짚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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