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가나안 신자와 초보 신학생
카페 가입하기
 
 
 
카페 게시글
성경묵상 나눔 설교자가 왜 자기 자신은 가르치지 않습니까?
장코뱅 추천 3 조회 341 25.01.11 07:32 댓글 32
게시글 본문내용
 
다음검색
댓글
  • 작성자 25.01.11 07:46

    첫댓글 초신자나 시간이 없는 분들은 포스팅 본문만 읽으셔도 충분합니다. 다양한 이해를 위해서 추가 설명이나 주석을 첨부하오니 참고해 주시면 나쁘지 않습니다.

  • 25.01.11 11:08

    네, 알겠습니다.

  • 작성자 25.01.11 07:47

    <호크마 주석>, 로마서
    ====8:13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 성도는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다(9절). 그러나 아직 '몸의 구속'(救贖)을 기다리면서 사는 존재이다(23절). 이 사실을 모르고 절망 가운데서 고민하다가 육신에게 져서 성도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는 것으로 판단하여 믿기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 버리는 것은 영원히 사망의 종노릇을 하겠다는 것이다. 지금 바울은 구원을 성도 자신의 노력이나 의지로 성취하려는 것을 경계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원리를 가르칠 준비를 하고 있다.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 최후 승리는 성도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얻게 해주시는 것이다. 엡 6:10-19에서 바울은 성도가 대적 마귀와 싸워 이길 수 있는 방법을 나열했는데, 그 중에 인간 스스로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모든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예비해 주신 것뿐이다. 만일 이러한 바울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본절을 인간의 노력과 연관지어 이해하면 쉽게 새로운 율법주의로 빠지게 된다. 오순절 성령의 역사뿐 아니라 교회사 전체에 있어서도

  • 작성자 25.01.11 07:47

    성령의 역사는 성도의 어떤 노력이나 의지 여하에 따라 나타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써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에 따라 나타났다. 그러므로 본절은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 머물 때에 당연히 주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 것이란 말씀을 인간의 노력과 행위의 차원에서 이해한다면 7:24과 같은 비참한 상태에 빠져 몸부림치게 될 것이다.

    =====8:14
    하나님의 영으로...하나님의 아들이라 - 성도는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자이기에 당연히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자이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의 사랑'(9절)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다. 예수께서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라고 가르치셨다. 성도는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이처럼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는다.

    =====8:16
    성령이 친히...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 본절은 성도가 '양자의 영'을 받은 사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성도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신분을 증명해 주고 있다.

  • 작성자 25.01.11 07:48

    즉 성도는 양자의 영을 받았을 뿐 아니라 양자의 영이신 성령으로부터 친히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하나님 앞에서 증거받는다. 이에 대해 칼빈(Calvin)은 말하기를 , "우리의 마음이 믿음으로 차 있을 때에만 우리의 입이 열려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데, 이것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에 역사하시고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거해 주시기 때문에 가능하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신하지 못하면 하나님께 바로 기도할 수 없으며 그와 같은 믿음은 헛것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 25.01.11 10:41

    @장코뱅 호크마가 칼빈의 설명을 잘 인용한 것 같습니다. 공감합니다.

  • 작성자 25.01.11 07:55

    <매튜 헨리 주석>, 유대인들의 자부심과 타락(로마서 2:17-29)

    본장의 뒷부분에서 사도는 보다 더 면밀하게 유대인에 대해 강론하는 가운데 그들의 주장과 허세 뒤에 숨어 있는 그들의 죄악이 무엇인가를 들춰내 보여 주고 있다. 먼저(13절) 율법을 듣는 자가 아니라 실천자가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얘기를 했는데 그는 이 위대한 진리를 여기서 유대인에게 적용하고 있다.

    Ⅰ. 그는 일단 그들의 주장을 인정하고(17-20절) 다음에 그들의 구체적인 자부심과 허세부리는 특권을 들어 설명하는 형식을 취하는데 그 이유는 자신이 저들의 주장을 알지도 못하면서 떠들어대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 주려는 뜻에서이다. 그보다 더 정통한 사람이 또 어디 있는가.

    1. 그들에게는 성문 율법과 하나님의 임재라는 특권이 있었다는 점에서 이들은 다른 민족과 구별된 특수한 민족이었다.

    (1) "유대인이라 칭하는 네가"하는 말은 족보상으로 보다는 허세에 불과하다는 의미를 강조한다. 이것은 아주 존경받는 칭호였다.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나왔으니 오죽이나 자랑스러웠겠는가. 그러나 정작 유대인이라 불리는 그 자들이야말로 인간 중에 가장 못된 놈들이었다.

  • 작성자 25.01.11 07:55

    지독한 부정이 최선의 가면 속에 비호를 받고, 많은 사탄의 회당이 스스로 유대인이라 자처하며(계 2:9) 독사의 자식들이 "아브라함을 가리켜 우리 조상"(마 3:7-9)이라고 떠들어대는 건 어제 오늘의 일만은 아니다.

    (2) "율법을 의지하며," 곧 율법을 책으로 가지고 있으며 회당에서 낭독하는 걸 자랑으로 여긴다는 말이다. 이들은 너무도 이 특권을 으시대는 나머지 그 말씀대로 살지도 않으면서 이 특권만으로 천국에 가기에 충분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마음 푹 놓고 율법을 의지한다는 것, 그 자체로서는 좋다. 그러나 거기에 교만, 태만 육적인 안도감이 따를 때 이거야 말로 영혼의 파괴가 아닐 수 없다. "여호와의 전"(렘 7:4), "벧엘을 의뢰하므로"(렘 48:13), "성산에서 교만하지 않게"(습 3:11), 외적인 특권을 보다 더 발전시켜 나가지 않고 거기에 안주해 버리는 일은 위험천만이 아닐 수 없다.

    (3) "하나님을 자랑하며," 여기서 우리는 최선의 것이 얼마나 곡해되고 오용될 수 있는가 하는 걸 볼 수 있다. 믿는 마음으로 겸손하게 감사하며 하나님을 자랑으로 여기는 태도야말로 모든 신앙의 뿌리요 요약이다(시 34:2; 사 45:25;

  • 작성자 25.01.11 07:56

    고전 1:31). 반대로 허황되게 교만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자랑하며 그의 이름은 형식적으로 들먹이는 일이야 말로 모든 위선의 뿌리와 요약이 아닐 수 없다. 영적인 교만은 모든 교만 가운데 가장 위험하다.

    2. 그들은 유식한 민족이었다(18절). "하나님의 뜻,"(to. qe,lhma) 곧 "그 뜻"을 "알고 있었다." 하나님의 뜻은 주권적이요 절대적이며 불가항력적인 뜻이다. 하나님의 뜻만이 유일무이한 뜻으로 남고 다른 모든 뜻이 거기에 녹아 합쳐질 때, 오직 그 때 가서야 온 세상은 바르게 될 것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실천사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있었다. 위선자에게 하나님의 뜻에 대한 지식이 풍부했다는 건 가능한 일이다. "지극히 선한 것을 좋게 여기며"(dokima,zeij ta. diafe,ronta) 바울은 그의 동역자들이 이러한 지경에 다달을 것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빌 1:10).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가를 분간할 줄 알게 되고"(새번역)(,VEij to dokima,zein u`ma/j ta. diafe,ronta), 이걸 두 가지 면에서 볼 수 있다.

  • 작성자 25.01.11 07:56

    (1) 그 하나는 "하나님에 관한 일"에 대한 풍부한 이해다. 이렇게 보면 "그대는 서로 다른 점들을 분별한다"는 뜻이 되어 선악을 구별하고, 귀한 것과 추한 것을 구별하며(렘 15:19), 불결한 것과 청결한 것을 분간할 줄 알게 되었다는(레 11:47) 식이 된다. 어떤 때는 선과 악이 너무 밀착되어 있어 분간하기 어려운 때가 종종 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율법의 모퉁이 돌을 손에 들고 있는 만큼 의심스러운 경우에는 머리카락도 쪼개어 볼 수 있을 정도로 분별력이 있는 것으로들 생각했다. 인간은 훌륭한 궤변가이면서 동시에 불량한 그리스도인일 수 있다. 곧 사변에는 정확하지만 그 적용에 있어서는 허술하고 제멋대로라는 말이다. 또는 ta, diafe,ronta)를 "논쟁"으로 볼 수도 있다(De Dieu). 인간은 종교 문제의 논쟁에 있어서는 실력자이면서 동시에 신의 능력에는 이방인일 수가 있다.

    (2) 다음으로는 하나님에 관한 것들에 대한 풍부한 애착심이다. 종교에 뛰어난 점이 있다는 건 위선자들도 다 인정하고 든다. "율법을 보고 그것이 선하다"고 실제 동의까지도 한다. 그러나 그 동의는 육신과 지성의 정욕에 압도된 동의다 :

  • 작성자 25.01.11 07:57

    더 나은 걸 보면서 더 악한 걸 따라가노라(Video meliora probque Deteriora sequor)

    그리고 죄인들이 이렇게 인정하고 드는 걸 핑계로 내세우는 경우가 많은데 이거야말로 죄악의 처참한 악화가 아닐 수 없다. 이들은 이미 "율법의 교훈을 받아"(kathcou,menoj) 곧 "문답식으로 교육을 받아" 선한 것에 대한 지식과 애착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 단어는 유년시절의 교육을 의미한다. 일찍이 훌륭한 교육을 받는다는 것은 더없는 특권이자 장점이 아닐 수 없다. 유대인들이 힘써서 자녀들이 어릴 적에 교육하는 것은 일종의 습관이었으며 모든 내용은 "율법에서" 내온 것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에서" 소재를 얻어 자녀를 가르치는 데 열심이라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이제 다음 절을 보자. "율법에 있는 지시과 진리의 규모(모양)," 곧 겉모양만의 지식이요 진리라는 뜻이다. 헛된 변론에 의지하는 풍부한 지식이 있지만 자기 마음에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는 사람은 마치 구성이나 색칠에 있어 뛰어나지만 생명이 없는 그림과 마찬가지로 겉치레 지식에 머물고 만다. 겉치레 지식은 겉치레 경건을 낳을 뿐이다(딤후 3:5).

  • 작성자 25.01.11 07:57

    겉치레 지식에 머물고 만다. 겉치레 지식은 겉치레 경건을 낳을 뿐이다(딤후 3:5). 겉치레 지식은 인간을 속일 수는 있어도 마음을 꿰뚫어 보시는 하나님의 불꽃같은 눈은 그럴 수 없다. 겉모양이 능력의 수단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걸 잡고 늘어지는 자는 마치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와 같은 사람이다.

    3. 그들은 가르치는 자들이었다. 아니 그렇게들 자처하고 있었다(19,20절). "소경의 길을 인도하는 자……라고 스스로 믿으니."

    (1) 유대인 전체에겐 우선 이걸 적용해 보자. 유대 민족들은 스스로 흑암에 있는 불쌍하고 눈먼 이방인들의 길잡이로 자처하고 이걸 자랑으로 여기는 가운데 누구든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가지려면 자기들에게 오라는 식이었다. 그밖에 다른 모든 민족은 선한 것, 여호와께서 요구하시는 것을 배우려면 직접 신탁을 받은 이들에게 와서 배워야만 했다.

    (2) 그들의 랍비들, 율법학자들 그리고 지도층에 있는 자들에게 이걸 적용해 보자. 이들이야말로 특별히 남을 판단하는 자들이었다(1절). 이 자들은 수위 모세의 자리에 앉아 무식한 백성들이 그들에게 바치는 존경을 독차지하는 자들이었다.

  • 작성자 25.01.11 07:58

    사도는 이들의 기만과 멸시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가운데 이런 자들이 "소경의 인도자, 어두움에 있는 자의 빛, 어리석은 자의 훈도,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핀잔을 놓고 있다. 어리석은 자들을 깨우치고 어린애들을 가르치는 것도 다 좋지만 하나님을 떠나서는 이러한 교육이 성공할 수 없는 우리의 무지, 어리석음 그리고 무능력을 생각하면 거기엔 하나도 자랑할 게 없다.

    Ⅱ. 그는 두 가지 면에서 그들을 자극하고 있다(21-24절).

    1. 그들은 자기들의 지식과 주장에 어긋나게 죄를 지었으니 곧 남에게 하지 말라고 가르친 그 짓을 자행하였다.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을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교육은 가정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사랑의 일부분이어야 한다. 물론 거기서 그쳐서도 안되는 일이다. "말만 하고 행치 아니하며"(마 23:3) 오히려 자기들의 가르침으로 쌓아 올린 것을 목숨을 걸고 무너뜨리는 게 바리새인들의 위선이다. 누가 자기도 믿지 않는 확신없는 자들을 믿겠는가? 규칙보다 모범의 지배력이 더 우세하다. 말씀의 진로를 가장 방해하는 자들은 실생활도 자신들의 교의를 번복하는 자들이다. 설교단에서는 설교를 그렇게도 잘 하는 사람이

  • 작성자 25.01.11 09:11

    강대상에서 나와 형편없는 생활을 하는 것도 딱하지만 이런 사람이 다시 강대상에 올라가는 걸 보는 것도 딱한 노릇이다. 그는 여기서 유대인들 사회에서 범람하는 세 가지 죄목을 특별히 들춰내고 있다.

    (1) 도둑질. 이것은 하나님의 율례를 전하는 자들에게 이미 시편에서 내려진 죄목이기도 하다(시 50:16, 18). "네가 도적을 본즉 연합하는도다." 바리새인들은 과부의 집을 삼켰다는 얘기도 있는데(마 23:14) 이것이야말로 도둑질 중에 가장 악독한 도둑질이 아닐 수 없다.

    (2) 간음(22절). 이것 역시 똑같은 죄인을 두고 저주하는 대목에 나온다. "네가 간음하는 자와 동류가 되며"(시 50:18), 특별히 율법학자들 중에 이러한 죄로 유명한 자들이 많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3) 교회 도둑질. 곧 특별한 법규에 따라 하나님께 바쳐진 거룩한 물건을 훔치는 것으로 우상을 멀리한다는 자들이 저지른 죄다. 바벨론 포로 이후로는 풀무불에 완전히 녹아 우상 숭배의 찌꺼기가 전혀 없이 훌륭하게 해 내던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 있어 또 반역적인 처사를 저지르고 만 것이다. 구약 교회 말기 현상으로 나타난 것이 그들이 하나님의 "십일조와 헌물"을

  • 작성자 25.01.11 09:12

    도둑질하여(말 3:8, 9) 착복하고 자기들 정욕에 따라 멋대로 사용한 일이 있다. 이 교회 도둑질이 우상을 멀리하라는 위장에 가리워져 있지만 이것은 우상 숭배와 맞먹는다. 남들은 정죄하면서 그와 똑같은 나쁜, 아니 더 악독한 일을 범하는 자들은 후일에 혹독한 결산을 받게 될 것이다.

    2. 그들은 자신들의 죄로 하나님께 욕을 돌렸다(23, 24절). 하나님과 그의 율법이 그들이게는 그렇게도 자랑하고 뽐내는 영광이었지만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과 율법에 불명예로운 존재들이었다. 이들은 밖에서 보는 사람들에게 그러한 일을 정당화시켜 주는 노릇밖에 하는 일이 없다. 남들에게 그런 일을 해도 되는구나 하는 추론을 내리도록 하는 것은 바로 저희들의 죄악이다. 이것은 다윗의 경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으니 "여호와의 원수로 크게 훼방할 거리를 얻게 하였다"(삼하 12:14)는 저주가 바로 그것이다. 똑같은 죄목을 사도는 저들의 조상들에게 돌리고 있다. "기록된 바," 여기서 그는 분명한 장절을 밝히지 않고 있는데 그 이유는 이미 율법을 알고 있는 자들을 상대로 하는 편지이기 때문이다(확신시키는 데 있어서는 성경을 알고 있는 자들을 상대로 하는 게 유익하다).

  • 작성자 25.01.11 09:12

    그러나 사도행전 52장 5절 에스겔 36장 22, 23절 그리고 사무엘하 12장 14절 아닌가 한다. "하나님께 이름과 칭송의 대상이어야 할 저들이 오히려 그에게 수치와 욕이 된다는 건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가르치는 자들의 가장 큰 죄는 그들의 교직에 의해서 하나님과 그 신앙에 돌려지는 불명예가 아닐 수 없다. "너희로 인하여……훼방을 받는도다." 곧 너희의 잘못과 무절제가 화근이라는 얘기다. 너희 자신에게 오는 욕은 하나님에게 이어지며 너희가 받드는 신앙이 손상을 입는다는 얘기다. 가르치는 자들에게 신중하게 행동하라는 좋은 본보기가 아닐 수 없다(딤전 6:1).

    Ⅲ. 그는 이러한 죄목을 탈피하고자 하는 데 있어서 그들의 입장이 불충분하다는 점을 주장하고 있다(25-29절). "네가 율법을 행하면 할례가 유익하나" 이 말은 곧 순종하는 유대인들은 이 순종의 보상을 잃는게 아니라 이방인보다 더 명확한 순종의 준칙을 가지고 참다운 유대인 구실을 하는 가운데 이걸 얻게 된다는 얘기다. 하나님께서는 공연히 율법을 주시고 할례를 정하신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이 의식이 폐기되기 전의 유대 국가에 해당하는 말이다.

  • 작성자 25.01.11 09:13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할례가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갈 5:2). 그러나 여기서 그는 유대주의를 고집하고 있는 자들을 상대로 얘기하고 있는데 만약에 그들이 유대주의 법률과 규칙대로 살기만 한다면 거기서 혜택을 받겠지만 그러나 그렇지 못한다면 "네 할례가 무할례가 되었느니라. 다시 말해서 네 유대인으로서의 지위도 아무런 도움이 못된다는 얘기다. 아니 너는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들보다 의롭다함을 받지 못할 것이요 오히려 더 밝은 빛을 받고도 죄를 지은 까닭에 그만큼 더 가중한 벌을 받을 것이다." 성경에 보면 무할례자를 가리켜 "부정한 자"(사 52:1)요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엡 2:11, 12)이라는 낙인을 찍고 있는데 악독한 유대인들은 바로 이런 식으로 처리되고 말 것이다(렘 9:25, 26 참조). 이것을 좀 더 구체적을 설명해 보자.

    1.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들이 이미 자기들에게 있는 빛대로 살기만 한다면 유대인과 동일한 입장에 서게 된다는 걸 그는 보여 주고 있다. 곧 "무할례자가 율법의 제도(의, 흠정역)를 지키면(26절), 율법을 온전히 지키면(27절)" 하는 말이 바로 그들이 타고난 빛의 규법대로만 성실하게 살며 율법의

  • 작성자 25.01.11 09:13

    알맹이를 실천한다면 바로 유대인들과 다를 게 없다는 얘기다. 어떤 이들은 이걸 율법에의 완전 순종이라고 보는 가운데 이런 식으로 해석한다. 곧 "이방인들이 만약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만 있다면 그들도 유대인이나 마찬가지로 의롭게 될 것이다"고. 그러나 이 말은 이방인 가운데 일부 사람들이 이미 다다를 수 있었던 그러한 순종으로 보인다. 고넬료의 경우가 이 점을 명백히 해 준다. 그가 비록 이방인이요 무할례자였지만 그러나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였"기에(행 10:2) 그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던 것이다(행 10:4). 물론 그러한 예는 얼마든지 있다. "그런즉 무할례자가 율법을 지키면" 하는 대목에 이르러 그는 이런 얘기를 하고 있다.

    (1) 곧 할례받은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받아들이셨다. " 그 무할례를 할례와 같이 여길 것이 아니냐," 할례는 유대인에게 있어서만 명령된 의무이지 다른 모든 세상에 있어서도 이것이 칭의와 구원의 필수 조건은 아니었다.

    (2) 곧 그들의 순종이 율법의 법조문을 가진 유대인들의 불순종을 더욱 악화시키고 말았다. "판단치 않겠느냐." 곧 "의문과 할례를 가지고 율법을 범하는"

  • 작성자 25.01.11 09:14

    너를 저주하는 데 합세하지 않겠느냐? 하는 식이다. 여기서 명심할 게 있다. 육적인 율법학자들에게 있어서 율법은 한갖 법조문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은 그저 하나의 기록으로 읽고 지나칠 뿐이요 율법의 지배를 받지 않는 자들이다. 그들은 법조문과 할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죄를 범한 게 아니라 그걸 등에 업고 더더욱 죄를 짓는 가운데 마음이 굳어져 버렸다. 외적인 특권을 선용하지 못할 ? 그건 오히려 당사자들에게 폐가 되고 만다. 오히려 그 혜택을 받으며 승승장구 으시대지만, 그대로 살지 못하는 저들을 저주하게 된다는 얘기다.

    2. 그는 이어 진정한 할례를 묘사하고 있다(28, 29절).

    (1) "대저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식의 할례가 할례가 아니라." 이것은 외적인 규칙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 자체로서는 하나도 나쁠 게 없는 것들이다. 여기서 뜻하는 것은 이것만이 우리를 천국으로 데려 가는 데 충분한 것으로 알고 그것만 붙잡고 늘어지며 의지하는, 그리고 그대로 산다는 이름만 가졌지 실제 생활은 동떨어진 삶을 경계하는 것이다. 이러한 "유대인"은 하나님에게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인정을 받지도 못하며 율법의 의도를

  • 작성자 25.01.11 09:14

    따른 것으로 쳐 주지도 않는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일을 행하는 것이다(요 8:39, 40).

    (2)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할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보시는 것은 마음이요, 우리가 그에게 받아들여지도록 하는 것은 마음의 할례다(신 30:6 참조). 이것이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이니(골 2:11, 12) 곧 "육적(죄의, 흠정역) 몸을 벗는 것"이다. 따라서 할례는 우리의 주체인 영혼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그것도 그 할례의 창시자인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성취되는 것이어야 한다.

    (3) 이에 대한 칭찬은 겉 모양만 보고 판단하는 "사람에게서가 아니오 다만 하나님에게서니라." 곧 하나님께서 손수 이 성실을 인정하고 거기에 면류관을 씌워 주실 것이다. 왜냐하면 "여호와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럴 듯한 핑계와 수작이 인간을 속일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겉모양을 꿰뚫고 실상을 보시는 하나님께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 이것은 기독교에도 마찬가지다. 표면적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이 아니요 표면적 육신의 세례가 세례가 아니라 오직 이면적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인이며

  • 작성자 25.01.11 09:15

    세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한 것이다. 그 칭찬이 사람에게서가 아니요 다만 하나님에게서이다.

  • 25.01.11 10:55

    @장코뱅 겉치레 교육과 교회 도둑질에 대해서까지 신랄하게 지적을 하는 예리한 분별이 있습니다.

  • 작성자 25.01.11 09:38

    <칼빈 주석: 로마서>

    2:21.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바울이 지금까지 유대인들과 관련해서 열거한 특권들을 그들이 거짓 것으로 만들어 버리지 않고 진정으로 지니고 있었더라면, 그들은 그 특권들로 말미암아 당연히 영광을 얻었을 것이지만, 그런 것들은 심지어 불경건한 자들에 의해서도 소유되고 악용될 수 있는 중립적인 성격의 특권들이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는 참된 영광을 얻을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바울은 그들이 단지 그런 것들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만을 의지해서 자랑하고 교만해진 것을 책망하고 비웃는 것에서 만족하지 않고, 그들이 자랑하는 것들을 거꾸로 그들의 수치스러운 행실을 뚜렷이 부각시키는 데에 활용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주신 비할 데 없이 귀하고 소중한 은사들을 무익한 것으로 만들어 버릴 뿐만 아니라 자신의 악으로 말미암아 더럽히고 부패시키는 자들은 심한 수치와 모욕을 당하는 것이 합당하기 때문이다. 어떤 조언자가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는 지혜롭지 않고 오직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만 지혜롭다면, 그는 뭔가 잘못된 조언자이다.

  • 작성자 25.01.11 09:38

    그러므로 바울은 유대인들이 그토록 자랑스러워했던 것들이 사실은 그들에게 수치와 욕을 가져다주는 것들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2:24.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 때문에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 도다.

    나는 바울이 이 인용문을 이사야 52:51 아니라 에스겔 36:20 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사야서의 해당 대목에는 이스라엘 백성을 책망하는 말씀이 하나도 나오지 않는 반면에, 에스겔서의 해당 장에는 책망의 말씀들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이 구절을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의 논증으로서 다음과 같은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선지자가, 당시의 유대인들이 포로로 잡혀감으로 인해서 마치 하나님이 그들을 자신의 보호 아래 두었으면서도 결국 그들을 지킬 수 없었다는 듯이 이방인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이 조롱을 당하셨다고 그들을 책망한 것이 합당한 일이었다고 할 때, 오늘날 너희의 악한 삶으로 인해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사람들 가운데서 모독을 당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께 얼마나 큰 수치와 모욕이 될 것인지는 너무나 분명한 일이다." 나는 그런 견해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지만,

  • 작성자 25.01.11 09:39

    다음과 같은 좀 더 단순한 해석이 더 나은 것으로 보인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여겨지고, 그들의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을 새기고 다니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쏟아지는 온갖 욕들은 그대로 하나님의 이름 위에 쏟아지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런 까닭에, 그들이 짊어지고 다니는 하나님의 이름이 그들의 악한 행실로 말미암아 사람들 가운데서 욕을 먹을 수밖에 없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은 자들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욕되게 하며 돌아다닌다는 것은 정말 기괴한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은혜를 적어도 그들이 그런 식으로 되갚아서는 안 되었다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 25.01.11 11:02

    @장코뱅 유대인들이 이마에 하나님의 이름을 새기고 다녔다는 것은 어설픈 종교심으로는 독실한 듯 보이지만 영적으로는 매우 무모한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된 행위로 인해서 하나님의 이름이 모독 당하는 그 참람한 죄책을 어떻게 감당합니까?ㅠㅠ

  • 25.01.11 16:39

    @노베 네, 공감합니다.

  • 25.01.11 10:34

    뭔가 사이다 같은 시원함과 교인 모두를 포함하여 성화와 회개를 강조하는 무거움이, 모두 들어 있는 좋은 묵상입니다.

  • 25.01.13 15:29

    공감합니다!

  • 25.01.11 11:30

    목회자뿐만 아니라 교회에서 남들을 가르치고 이끄는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갖게 해주는 좋은 묵상입니다.

    함부로 선생이 되거나 하려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자기 자신이 성령으로부터 친히 가르침을 받고 경건의 훈련을 쌓아 확실한 성화의 증거들을 가지지 못한다면 오히려 위선자가 되어 영적으로 치명상을 입게 될 것이라는 걸 경고하고 있군요. 가만히 있는 것보다 오히려 화를 입게 되는 이치가 있다는 것을 잘 이해를 해야겠습니다. 이 말씀은 사실 굉장히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설교자를 무사로 비유한다면 끊임없이 검도를 연마해서 실력을 갖춘 자가 살아남고 그러지 못하면 적에게 공격당하여 치명상을 입을 수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자신이 먼저 겸손하게 배우고 익히지 않으면 저렇게 멸망의 길로 갈 수 있겠네요. 많은 목회자와 교회 리더들의 타락과 위선자로 발전해가는 현상들이 그리 이상한 것도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조심해야겠군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 25.01.11 14:56

    충격적이라는 의견에 공감합니다. 그리고 코람데오님이 댓글에서 제공하신 추가적인 분별에서 저도 통찰을 얻어 갑니다.

  • 작성자 25.01.11 16:35

    좋은 댓글에 공감합니다.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