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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편전쟁 시기 영국군의 상륙 모습을 묘사한 Thomas Allom의 삽화. 중국의 역사와 문화를 기록한 책 [China, The Scenery, Architecture, and Social Habits of That Ancient Empire]에 수록되었다.
중국은 아편전쟁(1840~1842)을 역사의 분기점으로 간주한다. 아편전쟁으로 인해 중국은 이전과 전혀 다른 세계 질서로 편입되었기 때문이다. 이전에 중국은 세계의 중심으로 자처하면서 영국과 무역을 통해 대규모 흑자를 유지했다. 영국은 늘어나는 무역 적자를 해소하기 위해 아편을 팔기 시작했고 이를 통해 금세 무역 적자를 흑자로 바꿀 수 있었다. 그러자 이제 청 정부가 아편 무역에 따른 무역 적자를 간과할 수 없게 되었다. 청 정부는 린저쉬(林則徐)를 광저우에 보내 아편 거래를 막게 했다.
이 과정에서 중국과 영국이 서로 물러설 수 없는 상황에 놓이자 아편전쟁이 발발하게 된 것이다. 전쟁에서 승리한 영국은 청과 난징 조약을 맺었다. 이로써 청은 영국에게 배상금을 지불하고 광둥(廣東), 샤먼(廈門), 푸저우(福州), 닝보(寧波), 상하이(上海) 등 5곳의 항구를 열어야 했다. 아편전쟁은 이후 근현대 역사의 분기점으로 작용할 만큼 큰 사건이었지만 당시 청 정부는 이 점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배상금을 지불하는 것은 한이 흉노에게, 송이 몽골에게 했던 것처럼 대대로 있던 일이고, 전장과 5곳의 항구는 정치의 중심 베이징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아편전쟁의 결과를 바라보는 관점이 왜 사람(인종)마다 크게 차이가 났을까? 청 정부는 아편전쟁의 패배를 역사상 수없이 있었던 사례 중의 하나로 보았다. 그리하여 한 번 패배했지만 뒤에 얼마든지 패배를 만회할 수 있으리라고 보았다. 반면 한족은 만주족의 청이 더 이상 외세를 물리칠 수도 없고 국정을 수습할 수 없으리라고 보았다.
상황 인식이 다르므로 해결책도 다를 수밖에 없었다. 전쟁의 패배를 단순히 낡은 무기와 신식 무기의 대결로 보면, 서양의 무기와 기술을 배우는 양무(洋務)만으로 충분할 수가 있다. 한편 패배를 사회제도의 차이로 보면, 기술의 도입을 넘어 사회 정치의 제도를 확 뜯어고치는 변법(變法) 차원의 개혁이 필요했다.
이렇게 보면 왜 아편전쟁이 역사의 분기점이 되는지 분명해진다. 아편전쟁의 영향을 크게 보든 작게 보든 이제 중국 사람들은 영국에게 패배한 현재만이 아니라 앞으로 어떻게 해야 제2의 패배를 막을 수 있을지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편전쟁이 현재만이 아니라 미래를 규정하는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이제 중국인들은 다시 자신들이 일궈냈던 역사 전체를 총체적으로 성찰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역사적 유산만으로 서양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을 물리치고 옛날의 영광을 되찾을 수 있을까? 아니면 역사적 유산을 폐기 처분하고 새로운 세계 질서의 중심으로 떠오른 서양의 문화 자산을 총체적으로 수용해야 하는가? 중국의 새로운 미래의 기획함에 있어 전자는 중국문화의 내재적 역량을 신뢰하는 입장이고, 후자는 서양의 문화 자산을 수입하는 입장이다. 전자는 중국의 역사는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문화적 자산을 풍부하게 담고 있으므로 굳이 서양의 문화에 도움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주장으로, ‘중국문화의 본위론’이라 부른다. 후자는 중국의 역사와 문화 자산을 부정하고 그것을 서양의 문화 자산으로 대체하자는 입장으로 전반서화론(全盤西化論)이라 부른다. 이 중에 전반서화를 대표하는 후스(胡適, 1891~1962)의 도전정신을 살펴보기로 하자.
후스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공간에서 특수한 학문 여정을 보냈다. 그는 안후이성 출신이지만 10대 중반에 상하이에서 량치차오(梁啓超)의 계몽주의 사상을 접했고 십삼경(十三經) 등 고전에 대한 고증학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그가 1910년에 유학시험에 합격하여 1911년 19세의 나이로 미국의 코넬대학에서 수학하다가 1915년에 컬럼비아대학으로 옮겼다. 그 이후에 1917년 귀국하기 전까지 그는 듀이를 만나서 실용주의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후스는 특수한 학문의 여정을 거치면서 이전과 다른 학문 방법론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학문 방법이 어디에서, 어떤 책에서, 누구에게서 배운 것인지 스스로 질문을 던졌다. 그는 자신의 방법론을 ‘회의’에서 찾은 것이다.1)
“나는 나의 문화생활에서부터 일상생활 중의 모든 이론, 기록, 사실에 대해 조금의 의심이라도 있으면 이에 대해 비판을 가해 증명 혹은 반증명을 시도해보았다. 이러한 것은 모두 나의 회의론적 경향 때문이었을 것이다.”
남다른 회의 정신으로 인해 후스는 니체의 “모든 가치를 다시 평가하자!”(transvaluation of all values)라는 기치를 수용하여 역사적 유산 또는 전통의 자산을 총체적으로 재분류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세 가지 원칙을 제시했다.
첫째, 습속으로 전해오는 제도와 풍속에 대해 “이러한 제도가 지금 존재할 가치가 있는가?”라고 물어야 한다. 둘째, 고대로부터 이어지는 성현의 교훈에 대해 “이러한 말씀이 오늘날에도 유효한가?”라고 물어야 한다. 셋째, 사회적으로 모호하게 공인된 행위와 신앙에 대해 “여러 사람이 공인하는 것도 틀릴 수 있지 않은가? 다른 사람이 이렇게 한다고 해서 나도 이렇게 해야 하는가? 이것보다 더 좋고 더 합리적이고 더 유익하여 달리 할 수 있는 길이 없는가?”라고 물어야 한다.2)
오늘날의 시점에서 보면 후스의 회의와 재평가는 그다지 불온하지도 위험하지도 과격하지도 획기적이지도 않다. 하지만 중국 고전의 절대적 권위가 아직 살아 있고 정부가 그 권위를 공인하는 상황에서 회의와 재평가의 요구는 혁명적인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전에는 고전의 진리가 개별적 자아에 비해 초월적 지위에 있었지만, 후스의 선언으로 인해 개별적 자아가 고전의 진리를 검증하게 되었다. 즉 고전의 진리와 개별적 자아의 역관계가 뒤바뀌게 된 셈이다.
후스는 중국 고전과 역사적 유산이 과거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현재에도 살아남을 가치가 저절로 주어진다고 보지 않았다. 즉 살아남아야 할 것과 그렇지 않을 것이 구분되어야 한다고 본 것이다. 후스는 이를 ‘국고정리(國故整理)’로 부르며, 이 정리 작업을 귀신 잡기에 비유했다.3) “나는 한 점 숨김없이 솔직하게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한다. 나는 ‘낡은 종이 더미’ 속에 수많은 귀신이 들어 있고, 이들이 사람을 잡아먹고 헷갈리게 하고 해치는 피해는 파스퇴르가 발견한 병균보다 더 심각하다고 믿는다. 나는 스스로 보이지 않는 병균을 죽일 줄 모르지만 보이는 ‘요괴 때려잡기[捉妖]’와 ‘귀신 잡기[打鬼]’를 해야 한다.”4)
이상에서 살펴본 후스의 회의 정신, 국고정리, 귀신 잡기는, 그가 송명 성리학보다는 청의 고증학 전통 위에 서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후스의 학문 방법은, 주관적인 의견이 아니라 의심할 수 없이 확실하고 객관적인 ‘불역지칙(不易之則)’을 찾으려고 했던 대진(戴震)의 문제의식과 맞닿아있다.
하지만 차이도 있다. 그는 오늘날 하나의 단어로 쓰이는 ‘증거(證據)’의 의미를 둘로 구분했다. 증(證)은 사실과 원칙에 의거하여 연역처럼 전제에서 결론을 끌어내거나 귀납처럼 원인에서 결과를 추론하는 것이다. 이러한 증은 과학적 방법으로 서양 근대의 산물이다. 중국의 윤리는 경전의 권위에 의존할 뿐 증이 없다.[有據而無證]5) 후스는 자신의 학문 방법이 청의 고증학에 바탕을 두지만 그것에 과학적 방법이 부족하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후스는 듀이를 통해 실용주의를 만났고, 실용주의에서 고증학과 통하는 길을 찾기도 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후스가 절대적 진리 또는 영원한 진리를 부정하게 됐다는 점이다. 실용주의는 진리를 일종의 가설로 대체한다. 가설은 잠정적이며 일시적 안내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 가설이 실제 상황을 해결하거나 유효한 것으로 밝혀지게 되면 타당성을 확보하게 된다.6)
중국은 역사적 유산과 전통 문화를 ‘천경지의(天經地義)’, 즉 영원한 진리로 간주해왔다. 후스는 그러한 진리를 가설들 중의 하나로 취급했다. 이것이 바로 ‘국고정리’와 ‘귀신 잡기’로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후스는 진리를 가설로 전환한 뒤에 두 가지 유명한 논의를 펼쳤다. 첫째, 학문의 과제를 ‘문제(問題)’와 ‘주의(主義)’로 구분한 뒤에 “문제를 많이 연구하고 주의를 조금 이야기하라!”(다연구사문제多硏究些問題, 소담사주의少談些‘主義’)라는 기치를 내걸었다. 둘째, 진리가 가설로 바뀌게 되었다면 문제는 가설을 어떻게 세우느냐에 달려 있다고 주장했다.7)
“실용주의도 하나의 주의이다. 하지만 실용주의는 단지 하나의 방법이고 단지 문제를 연구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그 방법은 세심하게 사실을 수집하고 대담하게 가설을 세우고 세심하게 실증하는 것이다. 모든 주의와 모든 학술은 하나같이 참조하는 자료이고 암시적인 자료이고 증명을 기다리는 가설일 뿐 결코 영원한 교설이 아니다. 실용주의는 구체적 사실과 문제를 중시하기 때문에 근본적인 해결을 승인하지 않는다. 그것은 다만 조금씩 조금씩 이루어지는 진보를 승인하므로 ―한 걸음씩 현명한 지도가 일어나고 자발적인 실험이 이루어진다― 진화론이다.” (實驗主義自然也一種主義, 但實驗主義只是一個方法, 只是一個硏究問題的方法. 他的方法是: 細心搜求事實, 大膽提出假設, 再細心搜求實證. 一切主義, 一切學理, 都只是參考的材料, 暗示的材料, 待證的假設, 絶不是天經地義的信條. 實驗主義注重在具體的事實與問題, 故不承認根本的解決. 他只承認那一點一滴做到的進步, ―步步有智慧的指導, 步步有自動的實驗,― 才是眞進化.)
이 구절은 중국 근대의 수많은 문장 중에서 가장 널리 읽힌 글 중에 하나이다. 실로 공자 이래로 20 00여 년 간 절대적 권위를 누려왔던 전통과 역사, 도통과 진리를 한 방에 날려버리는 쾌거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중국 근대인이 앞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를 밝혀주는 불빛이라고 할 수 있다. 특별한 내용은 없지만 무엇을 어떻게 문제로 삼고 그것을 어떻게 연구해야 하는지 그 방향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1910년대에 근대적 학문 분류에 따라 ‘중국철학사’ 저작이 나오기 시작했다.8) 이러한 지적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중국 고대의 사상이라고 하면 복희(伏羲), 신농(神農), 황제(黃帝), 요(堯), 순(舜), 우(禹), 탕(湯)의 이야기를 떠올리던 시대였다.
후스는 [중국고대철학사]를 서술하면서 먼저 방법론을 설명하고, 이어서 [시경]을 중국철학의 발생 시대로 다룬 후 바로 노자와 공자의 사상으로 넘어갔다. 다른 내용을 보지 않고 이것만으로도 쇼킹할 만한 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후스는 강의 당시부터 저항에 부딪쳤다. “노자, 공자로부터 시작하여 중국철학사를 강의하던 첫날 거의 강당 안에 있던 학생들의 항의 기세를 일으키게 할 뻔하였다.”9) 차이위안페이(蔡元培)는 [중국고대철학사]의 서문에서 이 책의 특징을 증명의 방법, 요점을 찌르는 수법, 평등의 관점, 계통적 연구로 꼽았다. 이어서 그는 노자와 공자로 시작하는 후스의 철학사 서술을, “곁가지를 싹둑 자르고 끊어버리는” 절단중류(截斷衆流)로 평가했다. 즉 후스가 중국 민족의 철학 사상 발달사가 아니라 중국 고대 철학자의 사상 발달사를 기술하려고 했기 때문에 과감한 선택이 가능하다고 보았다.(위의 책, 10~11쪽)
후스는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에 학생들로부터 항의를 받을 만한 철학사를 강의하고 책으로 출간하게 되었을까? 우리는 그 대답을 [중국고대철학사] 제1편 서론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는 철학사 서술의 목적을 세 가지로 제시했다. 첫째, 옛날과 지금 사상의 연혁과 변천을 분명히 하는 명변(明變)이다. 이로 인해 철학자의 공통점만이 아니라 차이점도 주목을 받게 되었다. 둘째, 사상 변천의 원인을 탐구하는 구인(求因)이다. 개인의 재능, 사회적 상황, 사상 학술의 영향을 따져서 변화를 설명해내야 한다. 셋째, 개별 사상가의 가치를 평가하는 평판(評判)이다. 이 평가는 주관적 평가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는 작업이다.(위의 책, 3~5쪽)
명변, 구인, 평판은 후스가 철학사를 서술하는 목적이자 기준이었다. 이것은 도통론에 따라서 철학사를 이단과 정통의 대결로 보는 신통기식 서술이나, 사승 관계에 따라 학맥을 나열하는 학안(學案)식 서술과 다르다.
이어서 후스는 철학사의 자료를 선별하는 다섯 가지 원칙을 제시했다. 첫째, 저자와 역사적 연대가 일치하느냐를 따지는 사실(史實)이다. 둘째, 용어가 특정한 시대의 용례와 부합하는지를 살피는 문자(文字)이다. 셋째, 글쓰기가 특정한 시대의 사례와 부합하는지를 살피는 문체이다. 넷째, 텍스트의 주장이 체계를 갖추고 모순되는 점이 없는지를 따지는 사상(思想)이다. 다섯째, 앞의 네 가지가 텍스트 안에서 근거를 찾는 내증(內證)이다. 다른 책에서 근거를 찾는 것이 방증(旁證)이다. 방증이 때로는 내증보다 더 결정적인 근거를 제시할 수도 있다.(위의 책, 19~24쪽)
후스는 철학사의 세 가지 목적과 자료를 선별하는 다섯 가지 방법을 통해 이전의 도통론과 학안에 따른 철학사와 격을 달리하는 [중국고대철학사]를 서술할 수 있었다. 지금 와서 보면 후스의 주장과 [중국고대철학사]는 이미 상식이 되었거나 과거가 되었다. 하지만 1910년의 시공간에서 후스의 [중국고대철학사]는 철학사를 근대적으로 기술한 최초의 저작이라는 평가를 들을 만했다.’
시간이 지났다고 해서 후스의 도전과 공로가 결코 희석될 수는 없다. 그가 새로운 철학사 서술을 위해 도전하고 분투했던 노력을 제대로 평판할 때 우리는 또 다시 새로운 시대에 어울리는 철학사 서술을 위한 첫걸음을 뗄 수 있을 것이다. 아직 1910년대의 시공간에서 혁명적 의의를 지닌 후스의 [중국고대철학사]만큼 2010년대의 시공간에서 혁명적 의미를 지닌 ‘철학사’는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아직 후스의 책을 읽어야 하는 것이다. ‘중국철학사’하면 펑유란(馮友蘭, 1894~1990)을 떠올리는 우리 시대의 지적 풍토라면 더욱이 펑유란을 넘어서기 위해서라도 후스를 읽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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