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부성에서 접대용까지
예전에는 자기보다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나 남녀간에 서로에 대하여 마음에도 없는 빈말로 칭찬을 늘어놓는 것을 일컬어 아부한다는 말을 자주 사용하였다. 이 아부라는 것은 사전적 의미로 '남의 비위를 맞추기 위하여 아양을 떠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 말을 자신의 소신을 펼치지 못하고 다른 사람에게 이끌려 다니는 사람을 비꼬아서 하는 말로 주로 사용하여 왔다. 또한 자존심이 없어서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예스맨'을 칭하는 말로도 썼다.
어떤 사람이 자기를 칭찬하는 말을 들으며 기분이 좋으면서도 '아부하지 마'라는 말로 농담을 하였고, 그 말을 들은 당사자는 사뭇 진지하게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뜻의 변명 같은 것을 하곤 하였다. 서로 마주 보는 가운데서 이런 말을 하면 사이가 좋은 것이고, 뒤돌아 서서 제 3자와 이야기하면서 하는 경우는 흉을 보는 것으로 인식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부라는 말의 의미는 별로 좋은 의미가 아닌 것만은 틀림없다.
아부와 비슷한말로는 '아첨'이라는 말이 있다. 아첨이란 말은 '남의 환심을 사거나 잘 보이려고 알랑거리는 것'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사전은 풀이한다. 역시 아부와 마찬가지로 자기의 뜻과는 달리 생존을 위하여 또는 보다 좋은 것을 얻기 위하여 상대방에게 듣기 좋은 말만을 골라서 하는 말과 행위를 뜻한다. 아첨은 어떤 면에서 보면 아부보다 한 단계 높은 것이다. 아부는 그냥 좋은 말을 늘어놓고 상대방의 마음을 자신에게로 돌려놓으려는 것이지만 아첨은 아부에 한술 더 떠서 허리를 굽실거리고 낯빛을 상대방의 기분에 맞추려 노력하는 것까지를 포함한다.
어떤 사람은 아부로 출세를 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그 아부 때문에 흉물로 인식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인간관계를 가지는 가운데 아부나 아첨은 믿음에 금이 가게 한다는 사실이다. 누구나 아부하는 사람을 좋아하면서도 그 사람에 대하여 완전한 믿음을 주지는 않는 것이 보통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를 하는 사람이나 관직에 있는 사람, 기업의 중역인 사람 등은 아부나 아첨을 수시로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아부나 아첨에 깊게 물들어 있어서 자신의 위치나 상황까지 망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요즘에는 아부라는 말 대신에 접대라는 말을 많이 쓴다. 일전에 한 친구를 만나서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 그 친구의 애인이 무척이나 아름답다는 말을 내가 한 적이 있었다. 물론 농담이지만, 그 친구의 대답은 "그거 접대용 발언 아니야?" 라는 반문이었다. 그 말을 들으며 나는 한동안 그 말의 의미를 해석하기 위하여 머뭇거렸다. 그러자 그 친구는 "야, 농담이야 농담"이라고 웃어 넘겼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 말의 뜻은 아부하는 것 아니냐는 의미로 이해되었다.
아부란 말 대신에 접대용이란 말이 생겨나게 된 것은 우리 사회의 변화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무력의 시대에서 공업과 생산의 시대로, 여기서 다시 기술과 서비스의 시대로 바뀌면서 3차 산업인 마케팅이 중요해졌다. 더불어 마케팅에 관계하는 사람들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영업, 혹은 판매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중요하게 부각되었다.
이들은 물건을 팔기 위하여 고객이라는 대상의 마음을 읽고 적절한 해결책을 안겨 주며 판매를 확대하는 첨병 역할을 한다. 영업 팀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그래서 인간관계를 중시하고 고객의 마음에 모든 것을 맞추려는 행위에 무척이나 익숙해져 있다. 그래서 이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칭찬에 인색하지 않다. 상대방의 장점을 찾아내서 이해시키고 공감을 얻기 위하여 고객의 마음에 드는 말을 자주 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손해를 보지 않는 범위 내에서 상대방이 잘났건 못났건 간에 한껏 치켜세우는 일을 자연스럽게 한다. 그러기 위하여 술집이나 여자들을 이용하여 접대라는 것을 하는데 돈이 생기는 일이면 비굴하게 무릎도 꿇는 경우가 많다.
아마도 접대용이란 말은 이러한 사회의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아부나 아첨이란 말보다는 더 세련된 표현으로 인식되고 있다. 접대부라는 말이 주는 비천한 것도 있긴 하지 고객을 편하게 해 주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포괄적으로 의미하는 접대는 과거나 현대를 론하고 필수 불가결한 일임에 틀림없다. 요즘에 아부나 아첨과 비슷한 의미로 쓰이는 것 어색하지 않은 것은 그만큼 우리 사회도 상업화 내지는 비지니스화가 되었다는 것을 의한다.
제품을 팔기 위하여 고객에게 좋은 말을 골라서 설득하는 적극적 의미의 접대용 언사들이 일상적인 언어생활에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을 보면서 이런 생각이 든다. 아부나 아첨, 그리고 접대는 모두 사람의 마음을 사기 위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부나 아첨은 좀 더 인간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접대라는 것은 알게 모르게 어떤 물질적인 것을 매개체로 하여 형성된 것 같아 보인다. 아부나 아첨은 어딘지 모르게 풍자적이고 은유적인 반면에 접대는 직접적이고 직유 적이란 느낌이 드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아마 아부나 아첨이란 말이 인간적이고 접대는 좀 비천하고 비인간적인 냄새가 짙게 드리워지기 때문은 아닌가 한다. 접대용이란 말이 유행어가 된 지금 무엇이 올바른 언어 습관이고 잘못된 습관인지를 가려내려는 것은 아니지만 점점 더 잃어 가는 인간성의 상실을 맛보게 되는 씁쓰름한 느낌으로 지우려 해야 지울 수가 없다. 하나씩 미풍양속을 잃어 가고 인간적인 우의가 물질적인 우의로 바뀌어 가는 것도 그렇고 사람을 사고 파는 물질적인 것과 좀 더 가까이 놓고 본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좀 우스꽝스럽더라도 아부나 아첨이란 말이 접대용이란 말보다 자연스럽게 들렸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 본다. 비록 욕심일지 모르지만 말이다.
1996. 5. 27 月山 康吉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