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주님을 사랑하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아멘.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로마서 강해 13번째 시간으로서 “행함이라는 아름다운 열매” 行いという良い実 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도 역시 본문을 앞뒤로 나누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 중에서 로마서 2장 6절~8절입니다.
로마서 2장 6절~8절
“6.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7.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8.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6.神は、一人ひとり、その人の行いに応じて報いられます。
7.忍耐をもって善を行い、栄光と誉れと朽ちないものを求める者には、永遠のいのちを与え、
8.利己的な思いから真理に従わず、不義に従う者には、怒りと憤りを下されます。
6.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대로 보응하시되
7.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8.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좇지 아니하고 불의를 좇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우리는 이 6절에 우선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항상 강조해오고, 그리고 주보 표지에도 적어드린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과 말씀과 행함입니다. 이 중에서 무엇 하나라도
빠지게 된다면 이는 올바른 신앙으로 자리를 잡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는 단순이 여기에 단순히 나열한 것이 아니라, 이 순서에도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선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모든 죄가 해결되었고, 지금 이 순간도 우리를 고아처럼
내버려두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우리를 지켜주시고 인도해주신다는 믿음을 갖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성경에 대한 지식을 알고 있고, 아무리 도덕적으로 그리고 세상적으로 뛰어난 행함이 있었다 하더라도 이와 같은 믿음이
없다면 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 믿음이 있으면 충분하냐 하면,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여기에 말씀, 즉 성경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는 성경말씀을
두 가지로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믿음의 관점으로 성경을 바라보는 사람들이요, 또 하나는 의심의 관점으로 성경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의심의 관점으로 성경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창세기 1장 1절부터 요한계시록 22장 21절까지, 여기는 이게 잘못되었다.
저기는 저게 잘못 되었다, 하고 지적을 합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성경책은 우리와 상관 없는 저 멀리
떨어진 외국의 역사나 전설이나 문학을 기록한, 쓸데없이 두껍기만 한 책에 불과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관점으로 성경을 바라보면 어떻게 됩니까. 벌써 성경 처음부터 은혜가 넘칩니다.
창세기 1장 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はじめに神が天と地を創造された。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아, 이 얼마나 멋진 말씀입니까. 우주물리학자들은 전 우주가 이른바 빅뱅, 우연히 일어난 대폭발로 인해서 우주가 시작되었다고
믿습니다. 이에 대한 여러 가지 근거를 제시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주장>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이신 성경에는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분명히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의지에 따라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기록합니다.
우리는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까. 그것은 창세기에 나오는 천지창조의 절차를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장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6일간에 걸쳐서 이 세상을 창조하십니다. 첫째 날부터 시작해서 다섯째 날까지 이 세상
모든 만물들을 창조하시고 마지막에 창조하신 것이 바로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을 마지막에 창조하신 이유는 사람이 중요하지 않아서입니까.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행사를
생각해보십시오. 그 행사가 시작하기 전에 많은 사람들이 그 행사를 준비합니다. 크고 작은 시설들을 만들거나 요리를 준비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럼 그 행사에서 가장 중요한 주인공은 언제 등장합니까. 그렇습니다. 가장 마지막에 등장하지요.
무슨 정상회담이 있어요. 그러면 대통령이나 총리가 며칠 전부터 나와서 자기들이 요리도 하고 카펫도 깔고 그러나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요. 다른 사람들이 다 준비를 해 놓으면 제일 마지막에 도착한 다음에, 그 다음에 다른 사람들이 준비해놓은 것들을 이용하기도 하고
요리를 먹기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도 마찬가지지요. 마지막 여섯째 날에 사람을 창조하시고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창세기 1장 28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神は彼らを祝福された。神は彼らに仰せられた。「生めよ。増えよ。地に満ちよ。地を従えよ。海の魚、空の鳥、地の上を這うすべての生き物を支配せよ。」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다른 생물들을 창조하셨을 때에는 땅을 정복하라거나 생물들을 다스리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오직 사람을 창조하시고는
사람에게 이 모든 권한을 주셨던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말합니까. 그렇습니다. 이 천지창조는 바로 사람을 위해서 만드신, 사람을 위에
예비해주신, 사람에게 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주시기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어떤 분들은 이렇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래, 처음에 세상을 지으셨을 때에는 아담과 하와에게 주시기 위해서 만드셨을지는
모르지만, 그게 나를 위한 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비약이 심한 것 아니야? 혹시 그런 생각이 드시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런 생각을 가지신 분들을 위해 성경은 놀랍게도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에베소서 1장 3절~6절
“3.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の父である神がほめたたえられますように。神はキリストにあって、天上にあるすべての霊的祝福
をもって私たちを祝福してくださいました。
すなわち神は、世界の基(もとい)が据えられる前から、この方にあって私たちを選び、御前に聖なる、傷のない者にしようとされたのです。
神は、みこころの良しとするところにしたがって、私たちを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ご自分の子にしようと、愛をもってあらかじめ定めておられました。
それは、神がその愛する方にあって私たちに与えてくださった恵みの栄光が、ほめたたえられるためです。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이는 참으로 놀라운 말씀 아닙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언제 택하셨다고요? 그렇습니다. 창세 전에 택하셨다고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이제 벌써 2020년도 12월입니다만, 올해 초에 계획했던 일을 여러분께서는 어느 정도 이루어놓으셨습니까. 아이고, 원래는 이러이러한
계획도 있었고 저러저러한 계획도 있었지만 코로나다 뭐다 하는 것 때문에 어쩌고저쩌고…. 예, 그렇습니다. 충분히 이해하지요.
우리 인간은 1년 계획? 아니요. 하루 계획도 제대로 하지 못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 그러니까
아담과 하와는 고사하고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기 전부터 우리를 계획하시고 우리를 택하시고 우리를 부르신 계획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성취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성경을 보시면 창세기 1장 1절부터 은혜가 넘쳐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자, 그리고 마지막에 있는 것이 <행함>입니다. 아무리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성경 말씀을 통해서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는 하지만
여기에 행함이 없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되고 맙니다.
행함이라고 하는 것은 열매입니다. 열매라고 하는 것은 그 나무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열매라고 해서 다 같은 열매가
아닙니다. 열매에는 좋은 열매도 있고 나쁜 열매도 있습니다.
마태복음 7장에서 예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7장 17절~20절
“17.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18.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19.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20.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良い木はみな良い実を結び、悪い木は悪い実を結びます。
良い木が悪い実を結ぶことはできず、また、悪い木が良い実を結ぶこともできません。
良い実を結ばない木はみな切り倒されて、火に投げ込まれます。
こういうわけで、あなたがたは彼らを実によって見分けることになるのです。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예수님 말씀에 의하며 불에 던져지느냐 아니냐의 구분은 오로지 <아름다운 열매를 맺었느냐 아니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나무가 좋은
나무면 당연히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되지만, 아무리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싶어도 나무가 나쁘면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본문말씀에서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이 행함을 기준으로 해서, 선을 행하는 사람과 불의를 따르는 사람을 판단하시고
보응을 하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오늘 말씀 후반부를 보시도록 하겠습니다.
로마서 2장 9절~11절
“9.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10.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
11.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
9.悪を行うすべての者の上には、ユダヤ人をはじめギリシア人にも、苦難と苦悩が下り、
10.善を行うすべての者には、ユダヤ人をはじめギリシア人にも、栄光と誉れと平和が与えられます。
11.神にはえこひいきがないからです。
9.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게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10.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
11.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니라
여기서는 악을 행하는 사람과 선을 행하는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시고, 이와 같은 행함에 따라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환난과 곤고가 있을
것이요, 선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부분은 우리가 그리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가 있겠지요.
하지만 이 말씀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일들이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라고 기록합니다.
이 말씀을, 아, 그래. 이런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첫째로 이스라엘 사람한테이고, 둘째로는 그리스 사람한테로구나……라고만 끝난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유대인도 그리스인도 아닌 한국사람이나 일본사람한테 있어서 이 말씀은 상관이 없다는 뜻인가요?
아닙니다. 그렇게 읽으면 그야말로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성경을 그냥 우리와 상관 없는 저 멀리 떨어진 외국의 역사나 전설이나
문학을 기록한, 쓸데없이 두껍기만 한 책 취급을 하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성경은 단순한 역사나 허황된 전설이나 흥미만을 주는 문학이 아닌, 지금도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이 유대인이나 헬라인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이를 알기 쉽게 말씀 드리자면 유대인과 이방인, 유대인과 비유대인이라는
구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유대인의 시초는 아브라함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순종한 믿음의 조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에 있는
그 아브라함의 계보는 이삭과 야곱, 그리고 다윗 왕을 거쳐서 마침내 예수님으로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유대인은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받았으며 사도행전 때까지만 하더라도 믿음은 그들의 전유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한 후에 성령님께서 우리와 함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복음은 유대인의 전유물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전파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우리 중에서는 먼저 믿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요, 나중에 믿음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에서의 직분이 높은 분도 있을
것이요, 낮은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면 먼저 믿은 사람들이 축복을 먼저 받을 수는 있을지 몰라도, 반대로 심판도 먼저 받을 수가 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선을 행하여야 한다고 되어 있고, 오늘 본문 마지막 11절에 의하면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게 과연 무슨 뜻일까요.
시간 관계상 오늘은 한 가지 이야기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는 우리가 잘 아는 선한 사마리아인에 대한 이야기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누가복음 10장 29절~37절
“29.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30.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しかし彼は、自分が正しいことを示そうとしてイエスに言った。「では、私の隣人とはだれですか。」
イエスは答えられた。「ある人が、エルサレムからエリコへ下って行ったが、強盗に襲われた。強盗たちはその人の着ている物をはぎ取
り、殴りつけ、半殺しにしたまま立ち去った。
たまたま祭司が一人、その道を下って来たが、彼を見ると反対側を通り過ぎて行った。
同じようにレビ人も、その場所に来て彼を見ると、反対側を通り過ぎて行った。
ところが、旅をしていた一人のサマリア人は、その人のところに来ると、見てかわいそうに思った。
そして近寄って、傷にオリーブ油とぶどう酒を注いで包帯をし、自分の家畜に乗せて宿屋に連れて行って介抱した。
次の日、彼はデナリ二枚を取り出し、宿屋の主人に渡して言った。『介抱してあげてください。もっと費用がかかったら、私が帰りに払います。』
この三人の中でだれが、強盗に襲われた人の隣人になったと思いますか。」
彼は言った。「その人にあわれみ深い行いをした人です。」するとイエスは言われた。「あなたも行って、同じようにしなさい。」
이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인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가로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여기에 주된 등장인물들은 네 사람을 꼽을 수가 있습니다. 첫째는 제사장이요 둘째는 레위인이요, 셋째로 사마리아 사람이요, 넷째로
강도를 만난 사람입니다.
강도를 만난 사람은 거의 죽은 것 같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다시 말해서 아직 죽지는 않았지만, 자기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그대로 내버려두면 분명히 죽게 될 사람이라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죽게 된 사람은 유대인인지 이방인인지 기록이 없습니다. 어쩌면 상처가 너무 심해서 구분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는지도
모르지요. 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과 잠시 뒤에 말씀 드리겠습니다.
자, 여기에 등장하는 제사장과 레위인, 사실 제사장도 레위인이긴 합니다만, 이 제사장과 레위인으로 상징되는 인물은 무엇이냐 하면,
첫째로 세상에서 존경 받는 사람들이요, 둘째로는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이요, 셋째로는 지식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특별히 레위 지파는 출애굽 이후에 제사장 직분을 비롯해서 하나님의 성전을 관리하는 직분을 맡아왔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이른바 사회적으로 지도층에 해당되는 사람들이었고, 그리고 당연히 하나님 말씀의 율법에 대해서도 많은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반면에 사마리아 사람은 어땠습니까. 유대인과 사마리아인과의 관계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구절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 9절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そのサマリアの女は言った。「あなたはユダヤ人なのに、どうしてサマリアの女の私に、飲み水をお求めになるのですか。」ユダヤ人はサマリア人と付き合いをしなかったのである。
사마리아 여자가 가로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을 대단히 차별했었습니다. 상종하지 않았다. 서로 교제하는 일이 없이 경멸을 해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 이와 같은 제사장과 레위인과 사마리아인. 그런데 그들이 이 유대인인지 이방인인지 모르지만 거의 죽어가는 사람을 발견했을 때
그들의 반응은 분명하게 차이가 났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둘 다 피하여 지나갔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지나갔을까요. 그냥 귀찮아서요? 아니면
제사장이나 레위인들은 원래 나쁜 사람들이라서요?
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알고 계신 것 같습니다만, 만약에 그 사람들에게 당시 왜 그랬냐고 우리가 물어볼 기회가 있다면, 그 사람들은
뭐라고 말할까요? 어쩌면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내가 귀찮아서라고? 내가 나쁜 사람이라고? 아니야. 나는 율법을 제대로 지키기 위해서 그렇게 했단 말이오.”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이 말씀이 좀 이상하게 들리시나요? 자기기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그 사람을 내버려두고 피해서 갔다고
말한다면 의아해하실지도 모릅니다만, 저는 나중에 이 사람들을 만나보게 되어서 물어본다면 10중 8, 9는 이렇게 말할 것 같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율법에 무슨 말이 있기에 제가 그렇게 생각하냐 하면, 민수기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민수기 19장 11절
“사람의 시체를 만진 자는 이레 동안 부정하리니”
死人に触れる者は、それがどの人のものであれ、七日間汚れる。
사람의 시체를 만진 자는 칠 일을 부정하리니
민수기 19장 13절
“누구든지 죽은 사람의 시체를 만지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지 아니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막을 더럽힘이라 그가 이스라엘에서 끊어질 것은
정결하게 하는 물을 그에게 뿌리지 아니하므로 깨끗하게 되지 못하고 그 부정함이 그대로 있음이니라”
死人、すなわち死んだ人間のたましいに触れ、身の汚れを除かない者はみな、主の幕屋を汚す。その者はイスラエルから断ち切られる。その者は汚れを除く水を振りかけられていないので汚れていて、その者の中になお汚れがあるからである。
누구든지 죽은 사람의 시체를 만지고 스스로 정결케 아니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막을 더럽힘이라 그가 이스라엘에서 끊쳐질 것은 정결케 하는
물을 그에게 뿌리지 아니하므로 깨끗케 되지 못하고 그 부정함이 그저 있음이니라
자, 봐라. 그 때 그 사람은 죽었는지 아닌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내가 지금 제사장이고 레위인인데, 만약에 그 사람이
죽었는데 그 사람을 만졌다면 내가 부정하게 되어서, 제사장이나 레위인으로서 해야 할 일들을 못하게 되지 않느냐. 그래서 내가
지나쳤는데 그게 뭐가 문제냐……이렇게 반론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어땠습니까. 그가 이와 같은 율법을 알았는지 몰랐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망설임이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차별을 당하고 냉대를 당했던 사마리아 사람은 오히려 그를 보고 불쌍하게 생각해서 치료를 해주었는데, 그런데 자세히
보면, 단순히 치료만 해준 것이 아닙니다.
누가복음 10장 34절~35절
“34.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そして近寄って、傷にオリーブ油とぶどう酒を注いで包帯をし、自分の家畜に乗せて宿屋に連れて行って介抱した。
次の日、彼はデナリ二枚を取り出し、宿屋の主人に渡して言った。『介抱してあげてください。もっと費用がかかったら、私が帰りに払います。』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고
이튿날에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가로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부비가 더 들면 내가 돌아 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여기서 자기 짐승에 태워서 주막으로 갔다는 것은, 둘이 탔다기 보다는 그 사람을 짐승에 태우는 대신 자기는 걸어갔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거기까지 데리고 갔을 뿐만 아니라 거기서도 돌보아주었대요. 그러니까 간호를 정성껏 했다는 뜻이겠지요.
이 사람의 친절을 거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이 사람도 자기 볼일이 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떠나야 했었는데, 그냥 떠나는 것이 아니라
그 주막 주인한테 돈을 줍니다. 그리 큰 돈은 아니에요. 두 데나리온이라고 하면 지금 돈으로 대략 10만원 정도가 될 것입니다. 그
정도 돈을 주면서 이 사람을 돌보아주라고 하고, 만약에 돈이 더 들게 되면 자기가 돌아오는 길에 그 돈까지도 갚아주겠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 사마리아 사람의 행동을 보면 어떻습니까. 물론 아주 선행을 베풀었습니다. 착한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좀
과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까.
물론 여러분과 같이 자비심이 많은 분들께서는, 아니 그렇게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 정도는 해줘야지 하고 생각하실지는
모릅니다만, 저처럼 좀 인정머리가 없는 사람이 보기에는, 아니, 그냥 뭐, 치료해주기만 하면 됐지 않나?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한테
그렇게 자기가 희생까지 해가면서 돌보아주어야 하나? 너무 좀 지나친 것 아니야? 그런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 39절~42절
“39.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42.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しかし、わたしはあなたがたに言います。悪い者に手向かってはいけません。あなたの右の頬を打つ者には左の頬も向けなさい。
あなたを告訴して下着を取ろうとする者には、上着も取らせなさい。
あなたに一ミリオン行くように強いる者がいれば、一緒に二ミリオン行きなさい。
求める者には与えなさい。借りようとする者に背を向けてはいけません。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말라
이 말씀은 무엇입니까. 어떤 악한 자가 너를 죽도록 패는 것이 아닌 그냥 뺨 한 대 때리는 정도의 피해를 줬다면 네가 그냥 넘겨줘라.
새 옷도 아닌 네가 지금 입고 있는 속옷을 빼앗으려고 소송까지 벌이려고 한다면 차라리 네가 입던 겉옷까지 줘버려라. 억지로 오 리,
그러니까 한 2킬로 정도, 걸어서 30분 정도 가게 할 정도로 수고를 강요한다면, 차라리 4킬로 정도, 걸어서 1시간 정도 수고를 더
해줘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도 있습니다.
레위기 19장 18절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あなたは復讐してはならない。あなたの民の人々に恨みを抱いてはならない。あなたの隣人を自分自身のように愛しなさい。わたしは主である。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그러나 이 비유에 등장하는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시체를 만지지 말라는 율법은 알았으나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은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무리 그들이 좋은 집안에 태어나서 많은 지식을 알았다 하더라도, 거기에 걸맞은 행함이 없다면 이처럼 아무런 소용이 없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도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큰 돈이나 자기 인생을 희생하거나 한 것은 아닙니다. 자기 대신 이 사람을
짐승에 태우고 조금 걸었을 뿐입니다. 그 사람을 위해서 몇 개월이나 몇 년을 간호한 것이 아니라 하룻밤만 돌보아주었습니다. 그리고
주인에게 돈 몇 만원 정도만 주었을 뿐입니다.
이는 대단히 큰 돈을 들이거나 많은 시간이나 수고를 들여서 한 것이라기 보다는, 굳이 말하자면 조금 과한 행함을 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 눈으로 보면 조금 과한 행함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제사장이나 레위인보다도 이 사마리아 사람을 더욱 높이셨다는 것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흥미로운 점은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이 강도를 만난 사람에 대해서는 그가 유대인인지 사마리아 사람인지, 돈이 많은
사람인지 가난한 사람인지, 지위가 높은 사람인지 낮은 사람인지 또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나이가 많은 사람인지 젊은 사람인지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을 돕는 데에 있어서 이와 같은 것을
생각하지 말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 사람의 외모, 그러니까 그 사람의 배경이나 성별이나 나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어려움을 겪고 있고 우리가 도울 수 있다면 돕는
것부터 하라고 말씀하고 계신 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마태복음 3장 9절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あなたがたは、『われわれの父はアブラハムだ』と心の中で思ってはいけません。言っておきますが、神はこれらの石ころからでも、アブラハムの子らを起こすことができるのです。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유대인들이 자기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는 자존심이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자존심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야고보서 4장 10절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主の御前でへりくだりなさい。そうすれば、主があなたがたを高く上げてくださいます。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우리가 아무리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우리를 높이려고 해 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우리 스스로를 높이려고 하면 오히려
하나님이 우리를 낮추실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행함으로써, 우리의 조금 과한 행함, 조금 지나친 행함으로써 우리 이웃을 섬길 때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여주십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이웃을 섬기고, 믿음과 말씀에 의한 행함이라고 하는 아름다운 열매를 맺음으로 인하여, 주님으로부터
높임을 받고, 창세 전부터 우리를 위해 예비해주신 크나큰 축복을 모두 받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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