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부산여류시인협회/3월 특강/매창(梅窓 文學/漢文學)에 대하여
매창(梅窓 文學/漢文學)에 대하여
임화선
우선 이글을 통하여 매창보다 촌은 유희경을 먼저 만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몇 년 전 어떤 문학단체와 떠난 문학기행에서 남해 호구산 용문사에서 ‘촌은집책판’과 함께 대학에서 한 번쯤 들어본 이름, 촌은 유희경을 떠올리게 되었다. 이미 유희경을 만나면서 매창과의 만남은 필연이 되어 버렸다 ‘매창에 대하여’는 본회 회장을 역임하면서 특강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3월과 매화 그리고 매창과 촌은 유희경으로 이어지는 강의 주제로 삼았다. -예림曳林
천향(天香), 매창(梅窓), 향금(香今), 계생(癸生), 계랑(癸娘), 계랑(桂娘) 다른 표기 언어 梅窓 조선시대 1573(선조 6)-1610(광해 2) 조선중기의 기생 . 여류시인 대표작: 매창집, 추사, 춘원, 견회, 증취객, 부안회고, 자한 - 李梅窓의 墓 전북 부안군 동중리에 이 조선시대 기생이자 여류시인이었던 이매창의 묘가 있다. 전라북도 기념물 제65호.
- 생애 및 활동사항
본명은 이향금李香今, 자는 천향(天香), 매창(梅窓)은 호이다. 계유년에 태아났으므로 계생(癸生)이라 불렀다. 계랑(癸桹 또는 계랑桂琅)이라고도 하였다. 아버지는 아전 이탕종(李湯從)이다. 매창(梅窓 1573-1610)은 조선 중기 전북 부안의 기생이며 여류시인이다. 시를 잘 짓는다고 하여 시기(詩妓)라고 불렀다. 매창이 그의 정인(情人) 촌은(村隱) 유희경( 劉希慶 1545-1636)과 주고받은 연시는 오늘도 인구에 화자되고 있다. 시무과 거문고에 뛰어나 당대의 문사인 유희경(劉希慶).허균(許筠).이귀(李貴)등과 고유가 깊었다. 부안(扶安의 기생으로 개성의 황진이(黃眞伊)와 더불어 조선 명기의 쌍벽을 이루었다. 매창은 시조와 한시 58수를 남겼고 작품으로는『매창집』이 전한다.
부안에 있는 묘에 세운 비석은 1655년(효종 6) 부풍시사(扶風詩社)가 세운 것이다. 그의 문집『매창집』발문에 기록된 생몰연대가 정확하다. 그는 37세에 요절하였다. 유희경(劉希慶)의 시에 계랑에게 주는 시가 10여편 있다.『가곡원류』에 실린 “이화우(梨花雨) 흣날릴제 울며 쟙고 이별(離別)한 님”으로 시작되는 계생의 시조는 유희경을 생각하며 지은 것이라는 주가 덧붙여 있다.
《가곡원류(歌曲源流)》 1876년 고종 대의 위항시인이자 가객인 박효관(朴孝寬)과 그의 제자 안민영(安玟英)이 편찬한 856수의 시조 작품을 정리하여 편찬한 대표적인 가집. 김천택(金天澤)의 『청구영언(靑丘永言)』(1728년), 김수장(金壽長)의 『해동가요(海東歌謠)』(1763년)와 더불어 조선 후기 여항(閭巷) 가객들이 중심으로 엮어낸 3대 시조 가곡 가집으로 일컬어진다. *위항문학(委巷文學) 위항시인들의 인왕산 옥류동(玉流洞) 위항문학(委巷文學)은 조선 중기와 후기에 한성부에서 중인층이 주도한 문학 운동이다. 여항문학(閭巷文學)이라고도 한다. 위항문학 운동은 시사(詩社)를 조직하고, 공동 시집을 냈으며, 공동 전기(傳記)를 내 중인의 역사를 정리하였다는 특징이 있다. 중인의 상승 운동으로...... 허균(許筠)의『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에도 계생과 시를 주고받은 이야기가 전한다. 그리고 계생의 죽음을 전해 듣고 애도하는 시와 함께 계생의 사람됨에 대하여 간단한 기록이 덧붙여 있다. 계생의 시문의 특징은 가늘고 약한 선으로 자신의 숙명을 그대로 읊고 자유자재로 시어를 구사하는 데에 있다. 그의 우수한 시재(詩才)를 엿볼 수 있다.
여성적 정서를 읊은 것 중에 「추사(秋思)」.「춘원(春園)」.「견회(遣懷)」「증취객(贈醉客)」.「부안회고(扶安懷古)」.「자한(自恨)」등이 있다. 그는 가무.현금에도 다재다능한 예술인이다. 부안의 묘비석에 전한다. 1974년 그 고장 서림공원에 시비(詩碑)를 세웠다.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
문집으로 촌은집(村隱集) 3권이 전하며 그 밖의 저서로 상례초(喪禮抄)가 있다. 촌은집책판은 남해 호구산 용문사에 있다. 용문사는 고려 초기에 조성된 것이다. 유물로는 용문사 석불(높이 약 81cm)과 촌은집책판이 각각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38호, 제 172호로 지정되었다. 촌은집책판은 조선 인조때 학자인 유희경(劉希慶) 시집(詩集)『촌은집(村隱集)』을 간행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남해에는 금산보리암, 망운산 화방사, 호구산 용문사 3대 사찰이 있다.
상훈과 추모 - (유희경 劉希慶) 아들 유일민(劉逸民)의 원종(原: 작은 공을 세운 사람에게 주는 공신)으로 인하여 자헌대부한성판윤(資憲大부漢成判尹)에 추중되었다.
매창 묘 주변에는 매창 관련 시비 詩碑가 여러 개 있다. 매창의 정인 情人 유희경(1545-1636)이 쓴 시, 매창의 이화우 시조와 소매를 뿌리치며, 가을 등 . 허균의 만시, 이병기의 시비 등이 세워져 있다. 유희경의 시비부터 본다.
매창을 생각하며
娘家在浪州 (낭가재낭주) 我家住京口 (아가주경구) 相思不相見 (상사불상견) 腸斷梧桐雨 (장단오동우)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 보고 오동나무에 비 뿌릴 제 애가 끊겨라
*浪州낭주는 지금의 부안
1591년따뜻한 봄 날, 46세의 유희경은 18세의 매창을 부안에서 만난다. 당시에 매창은 시 잘 짓고 거문고 잘 타는 재주꾼 기생으로 서울에서도 잘 알려져 있었다. 매창이 처음 유희경을 만났을 때 그녀는 그가 서울에서 이름난 시인이라는 말을 듣고서 유희경과 백대붕 중에서 어느 분인지를 물었다. 유희경(劉希慶)과 백대붕(白大鵬)은 천민이지만 시를 잘 지어서 부안에서도 알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허균의 글 『성수시화(惺叟詩話)』에 나오는 유희경(劉希慶)과 백대붕(白大鵬)의 소개를 살펴보자.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이란 자는 천례(賤隷)이다. 사람됨이 청수하고 신중하며 충심으로 주인을 섬기고 효성으로 어버이를 섬기니 사대부들이 그를 사랑하는 이가 많았으며 시에 능해 매우 순숙(純熟)했다. 젊었을 때 갈천 임훈을 따라 광주에 있으면서 석천임억령의 별장 식영정에 올라 그 누각에 이전 사람들이 써 놓은 성(星)자 운에 차하여 댓잎은 아침에 이슬 따르고 / 竹葉朝傾露 (죽엽조경로) 솔가지엔 새벽에 별이 걸렸네 / 松梢曉掛星(송초효괘성)라 하니 송천 양응정이 이를 보고 극찬하였다. *잎엽(葉)기울경(傾)경 *나뭇가지 끝초(梢), 새벽효(曉),걸괘(掛) 백대붕(白大鵬)이라는 자가 있어 또한 시에 능했다. 일찍이 문지기를 했는데, 그의 동류(同類)들이 모두 그를 본받았다. 그의 시는 맹교(孟郊)와 가도(賈島)를 배워 고담(枯淡)하고 연약했다. 까닭에 권필은 만당(晩唐)을 배우는 사람을 볼 때마다 반드시 문지기체라고 일컬었으니 대개 그 연약함을 조롱하는 말이었다.
유희경은 매창을 처음 본 순간 연정을 느낀다. 그녀가 시도 잘 짓고 거문고도 잘 타서 보통 기생과는 다른 면모를 보였기 때문이리라. 그는 첫 인사로 다음 시를 읊는다. 남국의 계랑 이름 일찍이 알려져서 글재주 노래 솜씨 서울까지 울렸어라 오늘에야 참모습을 대하고 보니 선녀가 떨쳐입고 내려온 듯 하여라.
나에게 선약이 있으니 찌푸린 고운 얼굴을 고칠 수 있다네. 깊이깊이 비단 보자기에 감추어 두었다가 그리운 임에게 주고 싶어라.
첫 눈에 반한 두 사람은서로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기며 한껏 정을 주고받는다. 유희경의 문집 『촌은집(村隱集)』에는 그는 예학이 밝았기에 색을 가까이 안하였으나 그 때 처음으로 파계를 하였다고 적혀 있다. 아무튼 둘은 진하게 사랑을 나누웠다. 소위 천민 시인과 기생 시인과의 만남이다. 정이 서로 통하였으니 얼마나 몸과 마음으로 염정을 불태웠을까. 그런데 이 사랑은 짧게 끝난다. 곧 이별이 찾아온다. 이별을 하는 날 매창은 '이별하기 싫어서' 시를 짓는다.
이별하기 싫어서
東風一夜雨 (동풍일야우) 柳與梅爭春 (유여매쟁춘) 對此最難堪 (대차최난감) 樽前惜別人 (준전석별인)
하룻밤 봄바람에 비가 오니 버들과 매화가 봄을 다투네 이 좋은 시절에 차마 못할건 잔 잡고 정든님과 이별하는 일
동풍 불며 밤새도록 비가 오더니 버들잎과 매화가 다투어 피었구나. 이 좋은 봄날에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술잔 앞에 놓고 임과 헤어지는 일이지.
유희경(劉希慶)은 다시 서울로 돌아간다. 이듬해 1592년 봄에 임진왜란이 일어난다. 유희경은 의병활동을 하게 되었고, 전란은 둘을 상당기간 갈라놓는다. 두 사람 모두 서로를 못 잊어하고 그리워하나 만나지를 못한다. 매창(梅窓)과 유희경은 그 그리움을 편지로 주고받지도 못한 채 각자 詩로 남긴다.
이미 언급한바 같이 유희경(劉希慶)은 ‘매창(梅窓)을 생각하며’ 시를 짓고, 매창도 이화우(梨花雨) 시조 등 여러 시를 지어 유희경을 그리워한다. 매창이 이화우(梨花雨)라니 유희경은 오동우(梧桐雨)이다. 이화우 梨花雨 흩뿌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임 추풍낙엽 秋風落葉에 저도 날 생각하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이화우(梨花雨))라는 제목으로 널리 알려진 이 시는 매창의 여러 시 가운데 유일한 한글 시조다. 매창은 봄날 흩날리는 배꽃을 바라보고 이를 『이화우 梨花雨』라고 표현했다. 하늘이 준 재주가 아니고서야 나올 수 없는 표현이다. 비슷한 시기에 지어진 한시 한편이 더 있다.
'이별하기 싫어서'이다.
매창이 이러할진대 유희경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몸은 한양에 머물고 있지만 그의 마음은 늘 매창이 살고 있는 부안으로 달려간다.
매창은 유희경이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활동하는 등 나라에 공을 많이 세워 벼슬이 당상관까지 올랐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가 궁궐 바로 근처에 문화 사랑방 침류대를 짓고 이원익, 이수광, 신흠, 김상헌등 당대의 저명인사들과 잘 지내고 있다는소문도 함께 들었다.
또한 매창이 쓴 ‘임 생각’이란 시에도 그리움이 배어 있다.
임 생각
애 끓는 정 말로는 할 수가 없어 밤새워 머리칼이 반나마 세였구나. 생각는 정 그대도 알고프거던 가락지도 안 맞는 여윈 손 보소. 원래 이 시는 두 수 인데 매창공원의 시비에는 둘째 수가 적혀 있다. 여기에서 첫 수도 함께 살펴보자. 헤어진 슬픔이 너무 서러워 문 닫고 앉았노라니 비단 옷 소매에는 임의 몸내 없고 눈물 자욱만 얼룩졌네. 홀로 지내는 깊은 규방을 찾는 이 없어 고즈넉한데 저녁놀에 잠긴 뜨락 가득 가랑비가 내리네.
비 오는 저녁. 홀로 있으니 처량하고 쓸쓸하다. 임의 체취도 없고 눈물만 자욱하다. 그리워서 밤새 시름으로 뒤척이니 손가락도 헐거워졌다.
1수와 2수가 시간적으로 그리고 외로움과 그리움의 강도가 점점 진하여지면서 연결되어 있다. 이렇게 매창은 유희경을 너무나 못 잊어 한다. 그리고 한 사람 만을 사랑하겠노라고 다짐한다. 어쩌면 열여덟 순정을 처음 바친 이가 유희경이었으니 그랬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기생이 절개를 지킨다는 것은 참 아이러니하다. 뭇 남성들에게 웃음과 재주 그리고 몸을 주는 것이 조선의 기생 아닌가. 소위 수청을 들어야 하는 것이 기생의 본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지조를 지킨다. 아무에게나 몸을 주지는 않는다. 뭇 남성들이 매창의 인기에 매료되어 술 한 잔 하고 잠자기를 원하였으나 매창은 그 때 마다 잘 뿌리친 것이다.
취한 손님에게
취한 손님이 명주저고리 옷자락을 잡으니 손길을 따라 명주저고리 소리를 내어 찢어지네. 명주 저고리 하나쯤이야 아까울 게 없지만 임이 주신 은정까지도 찢어질까 그게 두려울 뿐이네 또 이수광의 <지봉유설>에도 매창이 절개를 지킨 일화가 전해진다. 어느 선비가 매창을 유혹하여 보려고 사랑 시 戀詩를 보내었다. 그런데 매창은 이렇게 시를 써서 정중히 거절을 하였더니 그 선비가 떠나갔다. 평생 동쪽 집에서 밥 먹고 서쪽 집에서 잠자는 것을 배우지 않았네요. 매화 창문에 달그림자 비낌을 사랑할 뿐 글깨나 하시는 분께서 나의 그윽하고 한가한 뜻을 미처 알지 못하여 지나가는 구름을 잘못 가리키는 일이 부질없이 많답니다. 1,2구는 매창은 그렇게 동가식서가숙 , 헤프게 정 주지 않는 여인이라는 뜻을 나타낸다. 매화 창문은 바로 그녀의 호이다. 그리고 그녀는 달그림자에 비껴 있는 것을 사랑할 뿐이다. 3.4구는 글깨나 하시는 분이 저의 절개와지조를 잘못 알아서 지나가는 구름을 가리키며 비가 들어 있는 줄 잘못 짚어서 운우지정을 나누자고 즉 같이 잠 자자고 하는 것은 부질없음을 넌지시 일러준다.
두 사람이 헤어진 지 16년이 흘렀다. 1607년에 둘은 다시 만나게 된다. 당상관이 된 유희경이 전라감영이 있는 전주에 잠깐 내려왔던 모양이다.
이 때 매창의 나이 34세 유희경은 62세이었다. 퇴물에 가까운 매창과 회갑을 넘긴 유희경은 열흘간의 진한 사랑을 한다. 너무 늦게야 매창을 다시 만나고는 옛날부터 임 찾는 것은 때가 있다 했는데
시인께선 무슨 일로 이리도 늦으셨던가. 내 온 것은 임 찾으려는 뜻만이 아니라 시를 논하자는 열흘 기약이 있었기 때문이요.
다시 만났을 때 쓴 유희경은 이렇게 읊는다. 매창도 옛일을 더듬으며 화답한다. 옛일을 더듬으며
임진 계사 두 해 동안 왜적들이 쳐들어 왔을 때 이 몸의 시름과 한이야 그 누구에게 호소하리까. 거문고 옆에 끼고 외로운 난새의 노래를 뜯으며 삼청동에 계실 그대를 서글피 그리워했지요.
매창의 시에서 삼청동은 유희경劉希慶이 사는 동네이다. 지금의 청와대 근처이다. 유희경은 궁궐 가까이에 침류대를 지어 놓고 당시의 저명인사들과 사교를 하였다. 다시 만난 이들은 버젓이 드러내놓고 부안 읍내를 활보하고 다녔다. 당상관인 유희경(劉希慶)이 매창을 나귀에 태우고서 폼 나게 다녔다. 내소사, 직소폭포, 개암사, 채석강, 곰소등 변산 반도의 좋은 곳은 다 구경하고 다녔으리라. 계랑을 놀리며 버들 꽃 붉은 몸매도 잠시 동안만 봄이라서 고운 얼굴에 주름이 지면 고치기 어렵다오. 선녀인들 독수공방 어이 참겠소. 무산에 운우의 정 자주 내리세
무산의 운우. 운우지정 雲雨之情은 구름도 되고 비가 되기도 하는 무산의 선녀가 초나라 왕과 동침을 하여 황홀경에 이르는 중국의 고사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나 이런 진한 사랑도 열흘 만에 끝난다. 유희경(劉希慶)이 다시 서울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별하는 날 매창(梅窓)은 정말 이별하기가 싫었다. 첫 이별은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할 수 있지만 두 번째 이별은 만날 기약이 없는 것이다. 더구나 30대 중반의 퇴기, 지는 매화 꽃 매창이기에 더욱 그랬으리라.
別恨
明宵雖短短 (명소수단단) 今夜願長長 (금야원장장) 鷄聲聽欲曉 (계성청욕효) 雙瞼淚千行 (쌍검누천행) 이별하기 싫어서 임 떠난 내일 밤이야 짧고 짧아지더라도 임 모신 오늘 밤만은 길고 길어지소서. 닭 울음소리 들리고 날은 곧 새려는 데 두 눈에선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네.
매창은 유희경이 자기를 서울로 데리고 올라가 주길 바랬으리라. 그러나 유희경은 예를 지키는 점잖은 인물인지라 기생을 서울로 데리고 가지는 못하였다. 다정이 병이고, 이별이 병이 되었을까. 매창은 병들어 몸져눕는다. 병들고 시름겨워 독수공방 외로워 병든 이 몸에게 굶고 추워 떨며 사십년 길기도 하여라. 인생은 살아야 얼마나 산다고 가슴속에 시름 맺혀 수건 적시지 않는 날 없네.
당시 梅窓은 노류장화(路柳墻花 : 길가의 버들과 담밑의 꽃은 누구든지 쉽게 만지고 꺾을 수 있디는 뜻, 妓生을 意味함)랄수 있는 기생 신분이다. 마음에 이어 몸마저 상한 매창이 남긴 단장시 한편이다.
相思都在不裡 (상사도재불리) 一夜心懷半絲 (일야심회반사) 欲知是妾相思苦 (욕지시첩상사고) 須試金環減舊圍 (수시환감구위)
말은 못했어도 너무나 그리워 하룻밤 맘 고생에 귀밑머리 희어ㅆ어요
소첩의 맘고생 알고 싶으시다면 헐거워진 이 금가락지를 좀 보시구려
유희경(劉希慶)과 헤어진 3년 뒤인 1610년 여름에 그녀는 쓸쓸히 죽는다. 유희경(劉希慶)에게 죽음을 알리지 않는 채 그녀는 애지중지하던 거문고와 함께 이곳 봉덕리 공동묘지에 묻힌다. 뒤늦게 매창(梅窓)의 죽음을 안 유희경(劉希慶)은 조용히 슬퍼하며 그의 문집에 만 시(詩)를 남긴다. 매창의 죽음을 슬퍼하며
맑은 눈 하얀 이에 푸른 눈썹 계랑아 홀연히 뜬 구름 따라 너의 간 곳 아득하다. 꽃다운 넋 죽어서 저승으로 갔는가. 그 누가 너의 옥골 고향 땅에 묻어주리 정미년에 다행히도 다시 만나 즐겼는데 이제는 슬픈 눈물 옷을 함빡 적시구나.
매창집과 촌은집
매창(梅窓, 1573~1610)은 부안이 자랑하는 여성 시인으로, 한평생 부안을 사랑하며 살았다. 조선시대에는 매창 말고도 많은 기생이 있었고, 그 가운데 시를 잘지은 기생도 여러 명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이 고향을 사랑하며 지은 시가 많지는 않다.조선시대 여성 시인 중 허난설헌, 옥봉, 운초, 삼의당, 송설당, 오효원 등의 여성 시인이 있었지만 이 가운데 매창 만 자신의 고향을 사랑해 여러 편의 시를 지었다. 가족이 아닌 고향 사람들이 시집을 출판해준 것도 매창 뿐이다. 매창이 고향 부안을 사랑한 것처럼, 고향 부안 사람들도 매창을 사랑해서 시집을 출판해 주었고, 또 필사해 읽었다.현재 전하는 목판본 '매창집'은 부안 개암사에서 찍었는데, 그 발문에 제작과정이 설명되어 있다.'계생(桂生)의 자는 천향(天香)인데, 스스로 매창이라고 호를 지어 불렀다. 부안현 아전이던 이탕종(李湯從)의 딸이다. 만력 계유(1573)에 나서 경술(1610)에 죽으니, 매창은 평생 노래 부르기와 시 읊기를 잘했다. 시 수백 편이 한때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더니, 지금은 거의 흩어져 없어졌다. 숭정후 무신년(1668) 10월에 아전들이 외며 전하던 여러 형태의 시 58수를 얻어 개암사에서 목판에 새긴다. 절의 중들이 ……― 무신년 12월 개암사에서 개간한다'
발문을 쓴 사람 이름은 없어졌지만, 중요한 과정은 다 소개되어 있다. 매창이 세상을 떠난 지 60년 가까이 되면서 수많던 시가 거의 없어졌는데, 매창을 사랑하던 부안의 아전들이 외우던 시 58수를 편집해 개암사에서 목판본으로 간행했다는 것이다.예전엔 간송미술관에만 '매창집' 목판본 2권을 소장되어 있었다. 연세대국문학과 허경진교수가 미국 하버드대학 옌칭도서관에서 발견한 '매창집'목판본에 마지막 한 줄이 더 남아있어 개암사에서 목판을 새겼다는 것과 절의 중들이 무슨일엔가 관여했다는 사실이 더 알려졌다. 이렇게 '매창집'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가 없던 중 부안문화원이 2017년 매창테마관 개관을 앞두고 자료 수집 차원에서 허경진 연세대 교수와 미래문화재연구소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하버드대학 소장본을 복본했다. 앞으로 매창을 사랑하고 흠모하는 모든 사람이 원본을 직접 볼 수 없지만 복본으로 '매창집'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본다. 경남 남해 호구산 용문사(虎丘山 龍門寺)에 소장된 '촌은집(村隱集) 책판'(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에는 조선 중기 문인 유희경과 사랑을 나눈 기생 이매창의 시가 포함되어 있다. 촌은(村隱) 유희경(劉希慶, 1545~1636)의 문집인 촌은집은 17세기 후반 중간본이 판각됐다. 이매창의 시 10여 편이 전해져 두 사람의 애틋한 서사를 증명한다. 조선시대 여류 시인의 작품이 당대 문인의 문집을 통해 판각됐다.
유희경 하면 사람들의 뇌리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일화는 당대의 명기(名妓)였던 부안의 이매창과 나눈 연사(戀事)일 것이다. 이매창은 송도(松都, 개성)의 황진이(黃眞伊, 1506?~1536[1545])와 함께 조선시대 최고의 시기(詩妓)로 알려져 있을 만큼 시적 재능이 뛰어났다. 두 사람은 나이 차가 28살이나 났지만, 부안에서 한 번 만난 뒤 인연을 맺었다. 서로의 문학을 높이 평가하며 연모의 정을 키워 따뜻한 애정을 나누었던 것이다. 신분의 벽 탓에 사랑을 이루지는 못했으나, 유희경은 문집에 10여 편의 시를 남길 만큼 각별한 흠모의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이매창이 그를 그리워하며 지었다는 시조도 전해져, 그 애정의 두터움을 짐작하게 한다.'이화우(梨花雨)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임 추풍낙엽(秋風落葉)에 저도 나를 생각하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라'한국 사람이라면 익히 알 만한 이 작품을 보아도, 두 사람이 나눈 사랑의 깊이는 아득하다.
참고문헌 - 『촌은집(村隱潗)』 -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지봉유설(芝峯類說)』 -『수촌만록(水村漫錄)』 -「조선역대여류시선(朝鮮歷代女流詩選)」(신구현,『조선문고』1-5, 학예사, 1939) 요약 테이블과 유희경의 사랑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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