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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히브리서 제5강
완전한 데로 나아가라
말씀/히5:11-6:20
요절/히6:1,2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오늘 말씀은 히브리 성도들의 영적 미성숙을 책망함과 동시에 성숙한 신앙으로 나아가도록 권면합니다. 이를 위해 그들이 성장하지 않을 때 어떤 위험이 따르는가도 경고합니다. 우리 신앙은 성장해야 합니다. 신앙이 성장할 때 우리는 신앙생활의 맛을 알게 되고 열매 맺는 기쁨도 누리게 됩니다. 이 시간 말씀을 통해 영적성장과 성숙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I. 완전한 데로 나아가라 (5:11-6:3)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이 멜기세덱의 서열을 따르는 대제사장임을 언급한 후 멜기세덱에 대해 설명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 성도들이 영적인 깨달음이 둔하고 너무 어려 이를 설명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먼저 그들에게 영적으로 성장해야함을 말씀합니다. 그러면 그들이 어떤 점에서 영적으로 어린 아이와 같습니까?
첫째,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게을렀습니다. 11절에서 “너희가 듣는 것이 둔하므로”에서 둔하다는 말은 헬라어로 ‘노드로스’인데 이것은 ‘게으르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6장 12절에 나오는 ‘게으르다’와 같은 단어입니다. 말씀을 듣는데 게으른 것은 타성에 젖어 말씀에 대한 간절함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연구하고 이것을 내 것으로 삼고자하는 영적인 의욕이 없는 상태로 영적 게으름뱅이입니다. 이런 자들은 이미 알고 있는 말씀으로 자만심에 빠져있기 때문에 말씀을 들을 때 형식적으로 듣기 쉽습니다. 말씀에 대한 영적소원이 없기 때문에 영적성장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기 때문에 늘 새롭고 신선한 감동을 줍니다. 세상에서 지친 우리의 영혼을 소생시켜 주고 험한 세상을 살 힘을 공급해 줍니다. 간절히 사모하는 자들에게는 말씀의 문이 열려 말씀의 깊은 세계를 체험하며 날로 성장하고 성령충만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기에 게으른 자들은 신앙생활은 타성에 빠지고 영적 소원은 상실한 채로 살아가거나 오히려 세상을 동경하며 살아갑니다.
둘째, 가르침에 있어 영적으로 어린 아이였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여기 ‘때가 오래되었으므로’는 그들이 말씀의 가르침을 받은 지 상당 기간이 흘렀음을 말해 줍니다. 대략 30년 정도 되었습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말씀을 받았기 때문에 당연히 말씀으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는 성경선생들이 되어야 했습니다. 성경선생이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믿음과 덕과 지식을 쌓기에 힘써야 하고 형식주의와 매너리즘에 빠져 영적으로 굳지 않도록 영적성장을 위해 부단한 자기투쟁에 힘써야 합니다. 산모가 갓난아기에게 젖을 풍성하게 먹이기 위해서는 영양가 있는 음식을 많이 섭취하듯 성경선생이 다른 사람들에게 젖을 풍성히 먹이기 위해서는 영양가 있게 잘 섭취해야 합니다. 그런데 히브리 성도들은 신앙경륜으로 보면 마땅히 성경선생이 되어야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신앙이 퇴보하여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머물러 있어 오히려 가르침을 받아야 할 형편이 되었습니다. 오랜 신자들이 다시 말씀의 초보를 배우는 것은 대학원생이 초등학문을 다시 공부해야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은 빼어난 성경선생이 되기까지 영적으로 끊임없이 성장해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벧후3:18)” 권면합니다. 신앙은 성장하지 않으면 퇴보이고 영적으로 성장하지 않으면 영적 기쁨과 영적 열매의 풍성함도 맛볼 수 없습니다.
셋째, 영적 체험 면에서 어린 아이였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여기 ‘의의 말씀’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맺게 하는 말씀을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성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을 통해 맺을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은 진실하기 때문에 이를 순종하기만 하면 놀라운 영적 비밀을 깨달을 수 있고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성이 맺어집니다.
그러나 지금 히브리 성도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마땅히 성경선생이 되어야 했지만 선생은 고사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해 다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다 큰 어른이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다시 기저귀나 차고 젖병을 물고 있으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영적 성장을 이룰 수 있습니까? 14절을 보십시오.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사람들이 먹는 음식입니다. 맛있고 영양분이 많은 음식들은 대개 단단합니다. 돼지족발, 꼬리곰탕, LA갈비 등 어린 아이들이 먹기에는 단단하고 조금은 질깁니다. 이런 음식 속에 담겨진 영양분은 젖에 담긴 영양분과는 비교되지 않습니다. 이것을 강인한 치아를 사용해 잘근잘근 씹어 먹을 때 그 깊은 맛을 은미하게 되고 살이 되고 피가 되는 영양분을 얻게 됩니다. 여기 단단한 음식은 의의 말씀, 곧 기독교 복음의 기초에서 나아가 영적으로 성숙한 말씀을 의미합니다. 부르심, 하나님의 소망, 자기부인과 자기 십자가, 고난과 희생을 통한 영광에 관한 말씀입니다. 이런 말씀을 우리의 지각, 곧 이성과 감성과 영성을 모두 사용해 잘근잘근 씹어 은미하고 묵상하면 말씀의 깊은 맛을 보게 됩니다. 이 말씀이 나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 말씀을 통해 나에게 역사하시는지 깊이 체험하게 됩니다. 그렇게 자기 스스로 말씀 앞에 연단을 받게 되면 무엇이 하나님 편에서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분별하는 자립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이제 젖보다는 좀 단단하고 질기지만 씹을수록 맛이 우러나는 단단한 하나님의 말씀에서 맛을 찾게 됩니다. 그러므로 젖을 떼고 목자님이 조금씩 씹어주는 말씀을 먹는 이유식 단계를 지나 스스로 말씀을 씹어 먹는 장성한 자의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말씀을 깊이 소화하고 순종하므로 말씀을 체험하는 연단(self-training)을 받아야 합니다. 깊이 생각하는 것을 싫어하는 이 시대에 우리가 문제의식을 가지고 단단한 음식, 곧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우리의 모든 지각을 이용해 깊이 있게 먹으므로 말씀의 깊은 세계로 나아가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러면 히브리서 저자는 이런 성장을 위해 어떻게 하라고 권면합니까? 함께 6장 1,2절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로 나아갈지니라.” 세상 모든 것에 초보, 곧 기초가 있고 그것이 가장 중요함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피아노를 처음 배우는 사람들은 바이엘이라는 교본으로 보통 배운다고 합니다. 기본인 바이엘 상하를 넘지 못하면 더 나아갈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 신앙의 기초가 무엇입니까?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 이는 기독교 신앙의 기본 중의 기본으로 가장 중요한 진리요, 기초입니다. 이것이 분명하고 확실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기초에만 머물러 있어도 안된다는 것입니다. 당시 히브리 성도들의 문제는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에 머물러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했을 때 현상유지도 못하고 오히려 믿음이 퇴보하여 옛날로 돌아가게 되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저자는 이런 교훈에 관한 터를 다시 닦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집을 지을 때도 기초공사는 한번 하지 두 번하지 않습니다. 일단 기초공사가 끝나면 벽채를 세우고 지붕을 얹어 집을 완성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히브리 성도들도 그리스도의 도의 기초를 넘어 완전한 데로 나아가야 합니다. 완전한 데로 나아가라는 것은 성숙한 신앙의 세계로 나아가라는 말입니다. 완전함, 성숙함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분이신 예수님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성숙한 믿음과 예수님을 닮은 인격으로 성장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에베소서 4장 13절에서 말씀합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보통 어릴 때는 대개 유치합니다. 어린아이의 일을 버리지 못합니다. 제가 양이었을 때 목자님에게 짓궂은 장난을 종종 쳤던 기억이 납니다. 또 형제들과 공동생활을 하면서도 서로 다른 성격과 기질을 품지 못해 코를 씩씩 불기도 했습니다. 식사당번인데 밥도 설거지도 안한 형제가 도저히 용서가 되질 않았습니다. 이처럼 어리고 감정적이기도 하고 자기중심적인 성향이 강한 것이 어린 아이의 모습, 어린 신앙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신앙훈련을 통해 인간적이고 자기중심적인 모습을 조금씩 벗어야 합니다. 하나님 중심적인 사람, 영적인 사람, 땅의 욕심을 죽이고 하늘의 신령한 것들을 추구하는 사람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십자가를 사랑하고 한 영혼을 돕기 위해 눈물로 기도하는 사람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결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끊임없이 예수님을 배우는 투쟁이 필요합니다. 특별히 목자요, 성경선생으로서 문제 많은 인생들을 섬기신 예수님을 배울 때 가능합니다. 이는 세상에서도 결혼해서 자식을 낳고 키우다 보면 자기밖에 모르던 사람이 자녀를 낳고 키우는 수고와 헌신으로 인해 성숙함에 이르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한 사람을 돕기 위해 간절히 기도하게 되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게 됩니다. 또 양들을 돕다 보면 자기가 깨지는 아픔을 겪게 되고 상처를 받기도 합니다. 실패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인간적 혈기, 자기중심성 이런 것들이 하나씩 깨져 나가게 됩니다. 자기의지와 성실이 바닥나고 하나님을 붙들고 말씀을 의지하므로 깊은 믿음의 세계, 은혜의 세계로 나아가게 됩니다. 한 사람을 돕는 것은 그 사람을 성숙하게 하고 완전한 데로 나아가게 하는 아주 좋은 길입니다. 또한 인생의 해결되지 않는 여러 문제와 고난을 통해 연단되어지고 성숙해지게 됩니다. 이런 문제들로 인해 평소 찾지 않던 하나님을 찾게 되고 나의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성숙하게 하고자 고난도 주시고 시련도 주십니다. 이때 쓴 뿌리를 품지 말고 인내하며 눈물로 기도해야 합니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순종하고자 몸부림쳐야 합니다. 그러면 고난의 의미를 깨닫게 되고 그 속에서 아름다운 시편을 쓴 다윗처럼 성숙한 신앙, 완전한 데로 나아갈 수 있게 됩니다. 성숙한 믿음의 사람들은 예외 없이 이런 고난과 아픔을 통해 내면이 성숙해지고 신앙이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변화되기 전, 그 누구보다 자기중심적이고 심히 인간적인 자였습니다. 그는 장자권을 얻으려고 형과 싸우고 재산을 얻기 위해 외삼촌과 싸웠습니다. 그의 삶은 속임수와 싸움의 연속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그를 드세디 드센 두 아내와 사기꾼 뺨치는 외삼촌을 통해 훈련하셨습니다. 그리고 거칠고 육신적이며 시기심에 사로잡힌 많은 아들들을 통해 그의 강한 자기를 깨뜨리셨습니다. 이로 인해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내면이 깨지고 하나님 중심의 사람, 속이고 빼앗는데서 나누어주고 축복하는 사람으로 변화되게 되었습니다.
현재 우리의 신앙은 어디로 나아가고 있습니까? 계속 그리스도의 도의 기초에만 머물러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기초를 넘어 완전한 데로 나아가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과 내면이 예수님을 닮은 장성한 분량에까지 성장하고 성숙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Ⅱ.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 (6:4-20)
히브리서 저자는 4-8절에서 우리가 왜 그리스도의 도의 기초를 넘어 성장해야만 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 말해줍니다. 4-6절을 보십시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여기 ‘타락’은 도덕적인 타락이 아니라 고의적으로 완전히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변절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기독교에서 유대교로 배교하는 것이나, 신자가 믿음을 저버리고 예수님을 현저히 욕보일 정도로 불신자가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자들은 유일한 구원의 길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더 이상 구원받을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본 자들은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4,5). 그런데 예수님 안에서 그 큰 은혜와 그 큰 능력을 체험했으면서도 마음이 완악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기 회개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회개시키지 못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완악하고 완고해서 고의적으로 회개하지 않을 정도로 타락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체험했으면서도 이제는 고의적으로 주님을 대적하고 변절한 채로 회개하지 않는 자는 심판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7,8절을 보십시오. “땅이 그 위에 자주 내리는 비를 흡수하여 밭가는 자들이 쓰기에 합당한 채소를 내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만일 가시와 엉겅퀴를 내면 버림을 당하고 저주함에 가까워 그 마지막은 불사름이 되리라.” 우리가 영적으로 자신을 잘 가꾸면, 즉 영적 성장과 성숙으로 나아가기 위해 애를 쓰면 좋은 밭이 되어 축복의 단비를 받고 합당한 채소를 냅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의 밭을 가꾸지 않으면 들풀이 점령하고 가시와 엉겅퀴가 자리를 잡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하지 않으면 세상잡초들이 내 마음을 점령해버립니다. 우리가 성숙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퇴보합니다. 더 나아가 변절합니다. 그런 사람의 마지막은 가시와 엉겅퀴를 불태우는 것처럼 불사름, 곧 심판이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2장 12절에서는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말씀합니다. 우리가 내가 체험한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헛되이 해서는 안되겠습니다. 늘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고 영적성장에 힘써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9절을 보십시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이같이 말하나 너희에게는 이보다 더 큰 좋은 것, 곧 구원에 속한 것이 있음을 확신하노라.” 히브리서 저자는 변절자들이 받을 무서운 심판에 대해 좀 세게 경고했습니다. 하지만 다시 소망의 메시지를 전함으로 그들을 격려하고 위로하고자 합니다. 히브리 성도들에게 옛날로 돌아가려는 유혹이 있었을지라도 결정적으로 지금 그들은 변절하지 않고 남아있는 자들이었습니다. 이런 그들에게는 더 큰 좋은 것, 곧 영원한 구원의 약속이 있습니다. 버리고 떠나 돌아오지 않으면 끝이지만 끝까지 남아있으면 구원의 약속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현실이 어렵고 힘들어도 옛 생활로 돌아가지 말고 주님께 붙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더 좋은 것, 영원한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의로운 행위와 성도를 섬기고 지금도 섬기고 있는 사랑을 주님께서 기억하고 계심을 상기시켜 줍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작은 수고와 헌신을 하나도 땅에 떨어뜨리지 않으시고 다 기억하사 갚아주시는 의로우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나의 수고와 헌신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것 같고 오히려 헌신하느라 손해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의 모든 수고와 헌신을 잊지 않으시고 갚아주시되 넘치도록 갚아주십니다. 이는 지금처럼 저금리 시대에 고배당수익을 올리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이 공평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을 믿고 모든 것을 맡기고 신앙의 경주를 끝까지 감당해야겠습니다.
그런데 언제까지 이렇게 수고하고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까? 끝까지, 우리의 소망이 성취되는 그날까지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왕 하는 것, 끝을 봐야합니다. 완주해야 영광이 있고, 또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약속들을 응답 받은 자들과 같은 은혜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창12:2)”는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신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약속이 인치심을 받고 확정된 때는 이삭을 바침으로 하나님의 인정함을 받은 때였습니다(창22:16,17). 이는 신앙생활을 출발한지 30년이 넘은 때였습니다. 그동안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중도에서 포기하고 싶은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그는 끝까지 인내할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약속의 말씀을 믿고 오래 참았을 때 마침내 하나님께서 자기를 가리켜 맹세하시면서까지 그 약속을 인치셨습니다. “내가 반드시 너에게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하게 하고 번성하게 하리라(14).” 이 말씀은 확실히 복주고 확실히 번성하게 하신다는 반복을 통한 강조법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렇게 오래 참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들었기 때문입니다(15). 그보다도 약속하시는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신앙생활을 통해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깊이 체험했기 때문에 신실하신 하나님께 자신을 온전히 맡김으로 오래 참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16,17절을 보십시오. 사람들은 어떤 일의 확실함을 나타내기 위해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합니다. 맹세는 하늘이 두 쪽 나도 반드시 지키겠다는 모든 일의 최후 확정입니다. 하나님께서도 그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하지 않음을 보이시기 위해 맹세로 보증하셨습니다. 이성적으로 믿기 어렵고 하나님의 약속이 비현실적으로 보일 때 맹세하십니다. 그리고 그 약속이 때가 되지 않아서 지연될 때 하나님은 맹세하심으로 믿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도우십니다. 이는 하나님의 약속이 얼마나 확실한가 알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약속의 확실함이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난처를 찾은 우리에게 큰 안위를 받게 하여 주십니다. 앞에 있는 소망은 천국의 소망이요 영생의 소망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 우상숭배의 땅인 갈대아 우르를 피하여 약속의 땅으로 나아갔듯 우리도 죄악된 세상을 피하여 하나님 나라로 소망 가운데 나가는 거룩한 순례자들입니다. 이 소망은 우리 영혼의 닻과 같아 견고하여 튼튼합니다. 때로는 죽도록 헌신하고 충성해도 미래가 보이지 않아 답답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소망이 우리에게 있기에 우리의 믿음과 헌신하는 삶이 손해 보는 삶, 장래가 없는 삶이 아니라 최후에 승리와 영광을 주는 것임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소망을 의지해 흔들리거나 떠내려가지 말고 앞서 가신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는 거룩한 순례자의 삶을 끝까지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기초를 넘어 완전한 데로 나아가야겠습니다. 이를 위해 이제는 젖만 먹지 않고 지각을 이용해 단단한 음식을 먹음으로 깊은 말씀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자기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배우므로 하나님 중심의 사람이 되고, 어떤 사람도 품고 섬기는 성숙한 내면성을 가진 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또한 약속의 말씀과 천국소망에 닻을 내리므로 죄악된 세상을 피해 천국을 향해 가는 거룩한 순례자의 삶을 온전히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