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픈 사람
욱수성당을 찾았다. 평일인데도 신자들이 가득했다. 그곳은 내가 세례를 받고 신앙의 싹을 틔운 곳이라 더욱 정감이 갔다. 그때 형제자매들의 면면이 보였다. 세월 앞에는 어쩔 수 없이 황혼이었다. 세월의 흔적을 온몸으로 받으며 신앙의 길을 가고 있는 모습이 마치 영글게 익어가는 과일이었다.
미사가 끝나고 만남의 장소에서 몇몇 지인과 차를 나누었다. 그곳에서 여기회 회장을 만나 ‘여기애인’ 60호 발간을 위해 출판사로 갔다. 교정을 마무리 짓고 바울로 대주교님을 찾아뵈었다. 대주교님은 우리를 반갑게 맞아 주셨다. 건강을 되찾은듯하여 기뻤고, 한참을 소담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대주교님은 어떻게 하여 나가사키의 순례를 열었을까 싶었는데 생각이 떠올랐다. 당신의 저서 『저녁노을에 햇살이』에서 밝히고 있다. 대주교님은 여간해서 밖으로 드러나게 감동하는 일이 없었는데 당신에게도 매혹적인 것이 있었고, 거기에 반해버린 일이 있었다고 술회하면서 좋아하고 사랑하도록 해준 것은 확실히 받은 은혜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한국교회 200주년에 교황님을 모시고 대구에서 청소년대회를 개최했다고 했다. 그것을 계기로 청소년을 위한 새로운 일을 모색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나가사키 순례를 보내는 것이었다. 막상 시행하려고 했으나 응하는 학생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일반 신자들을 상대로 시작했다. 관덕정 후원회를 중심으로 시작했는데 호응이 좋았다고 하셨다. 그 후 중고등학생에게 다카시 박사의 저서를 읽게 하여 독후감 모집으로 선정된 수상자에게 매년 그곳에 순례의 길을 열어놓으셨다.
그곳 나가사키 순례의 목적은 보통 삶을 살면서 신앙을 바탕으로 사는 훈련을 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일본에서 원자탄이 떨어진 곳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이다. 그런데 원자탄하면 나가사키를 먼저 생각하는 것은 바로 여기당 때문이라고 하셨다. 여기당은 원폭 피폭과 그 영향에 대한 것을 기록하여 세상에 알린 나가이다카시 박사가 살았으며, 다카시 박사는 그의 저서 『나가사키의 종』을 통해서 나가사키의 종소리를 온 세상에 퍼져나가게 했다.
그곳에는 나가이다카시 박사 기념관이 있고 그가 살던 여기당이 있다. 많은 사람이 그곳에 가서 다카시 박사의 생애를 생각하며 감동에 잠긴다. 거기에 감동을 받은 대주교님은 한국에도 나가이다카시와 같은 모양으로 살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해서 여기회를 만들었다. 사랑하고 사는 것, 만인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것, 그래서 전쟁 없이 평화로운 세상을 이루어 나가는 것, 이런 좋은 일을 우리가 스스로 해나가자는 것이었다.
대주교님께서는 나가사키 순례가 이런 것을 실제로 살도록 하는 힘이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당신의 생애에 큰 영향을 준 사람이기에 남들에게도 감히 전해주고 싶은 마음에서 나가사키 순례를 권장하며 몸소 순례단을 이끌고 가시기도 한다. 대주교님과 소담을 나누면서 보고픈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려보기도 했으며, 대주교님과 함께 언제 나가사키 순례를 할까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