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서부 전선과 베티고지,화살머리고지, 백마고지, 저격능선(7)
방화동은 내가 작전과장 시절에 우리의 단계별 진지가 있던 곳으로 그 입구에 그당시에 없던 잠곡저수지가 생겨 잠곡리에 사람들이 모여살고 있다.
"중공군이 길을 잘못 들어 수도 서울을 지켰다?"
믿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이곳의 어른신들 이야기가 '51.1.4후퇴 당시에 중공군의 대부대가 이곳 일대로 진출하는데 사실 길은 하오고개 밖에 없는데 길을 잘못들어 수많은 병력이 이곳으로 방화동 계곡으로 밀어 닥치고 차량들과 말들이 또한 수없이 하오고개인줄 알고 들어 왔다가회목현 상해봉 방향으로 진출하려니 더이상 갈 수가 없어서 다시 돌려서 나가느라 하루이상을 지체하여 유엔군이 서울을ㄷ 빠져 나가기전 포위하려는 기도가 좌절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중공군 부사령관 홍학지의 회고록에 의하면 약간은 일리가 있는 내용인듯 하다.
중공군 66군은 '50.12.31부터 '51.1.1~2일어간에 화악산 방면은 돌파하여 가평 북면의 수덕산 상하홍적리, 상하남종으로 진출하여 국군 2사단 31연대와 32연대 국군 5사단 36연대 대부분을 섬멸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다 66군 중에 춘천쪽에 양동작전을 맡았던 198사단이 동작이 느려 상대를 잡지 못해 춘천북쪽의 상대가 남쪽으로 퇴각하게 되었다고 기록한 것을 보면 그로인해 포위망이 뚤렸다는 역설적 설명이 아닐까.
하오고개 방향으로 대열이 넘어섰다면 아마도 가평밑에서 아군을 포위소멸 했으리라 본다.
여기에 미군의 비행기가 끊임없이 중공군 대열을 괴롭혀 그들은 서울 탈환이후 한강이남으로 신속히 밀어붙이질 못하게 된다.
이 문제는 초기 전투시 북한군이 3일만에 수도 서울을 점령하고선 3일이란 시간을 지체하여 미군이 바로 부산항으로 들어오는 시간을 준 것처럼 이번에는 중공군이 서울에서 멈췄다.
"누가 전투에서 이기고도 적을 추격하니 않는가?"
당시 북한주재 쏘련 대사 라자예프는 중공군 총사령관 팽덕회의 공격중지에 강한 불만을 나타낸다이런 작전을 지시하는 사령관은 도대체 누구인가라고 공개적으로 비난했다고 홍학지는 말한다.
"그는 줄곧 우리더러 계속 추격해서 부산까지 밀고 들어가 상대를 바다에 빠뜨리라고 촉구했단다.
팽사령관은 그 말을 전해 듣고는 "그의 말에 신경쓰지 마. 내가 인민에게 책임을 지고 있는 한 경솔할 수 없어."라고 말했다고 한다.
팽더회는 그동안 거의 2개월동안 밀어붙이느라 병력이 피곤하고 구누물자 보급이 보급거리 신장으로 원활하지 못한점과 아직도 장진호 전투에서 비록 미 제1해병사단을 몰아내긴 했지만 너무나 많은 피핼르 입고 전투력 불능 상태인 제 9병단의 실태를 짐짓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새로 미국의 대통령이 된 아이젠하워의 유럽전선에서의 위용을 간파하여 분명 유엔군이 깊숙하게 끌여들여 인천 상륙작전같은 전법으로 배후를 차단하리라는 위험요소를 극복하고 싶었음이다.
보고를 받은 모택동은 스탈린에게 전보를 보냈다.
스탈린은 답신에서 "열세한 장비로써 세계최강의 미제국주의를 무찌른 팽덕회는 당대 천재적인 군사전문가이다. 팽의 의견이 옳다"고 말하고 라지예프를 귀국 조치시켰다고 한다.
이유야 어쨌든 우린 방화동에 들어가 일대를 탐문하고 잠곡리 마을회관에 들러 이장을 만났다.
이미 언급했듯이 이장은 전쟁둥이는 아니지만 이곳 사정에 능통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독바위일대도 알게 되고 현장 답사를 하게 되었다.
수많은 호들이 과연 6사단이 굴토한 것일까 후퇴해 가는 중공군의 호일까 아니면 5월공세 이후에 이곳으로 밀고 올라오는 우리 2사단의 전투흔적일까?
아니면 일시적으로 이곳 일대로 진출했던 미24사단의 전투흔적일까하는 여러가지 정황을 놓고 우린 많은 시간을 검토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백운산전투 운운 하며 큰소릴 내는 모습을 보며 과연 저 분들이 백운산이 어딘지 알고 그러는 것일까하는 의문점도 생기게 되었다.
우리나라 지도에 나오는 백운산이야 많다.
그중에 전쟁과 아니면 지역 공비토벌과 관련하여 유명한 곳은 구례 백운산이 있다.
비슷한 이름으로는 화천의 백암산 양구의 백석산 평창 진부의 백석산이 있다.
하지만 이곳 중서부전선의 화천 백운산 도는 포천 백운산은 광덕산으로부터 남쪽으로 길게 흘러 내리는 광주산맥의 흐름중에 도마치봉에 오기전 고지라고 되어있고 그 비슷한 위치에 삼각봉이 있다.
이곳에도 개인호는 어느정도 있지만 여느 전투지역보다 많다고는 볼 수 없다.
특히 백운산은 일자형 종격실 능선으로 공격이든 방어든 그렇게 여유로운 공간이 없다.
다시말해 전투하기에 부적합한 곳인데 귿이 이곳에서 전투했다고 하는 이유는 무얼까?
난 지난 20여년의 탐사결과와 전쟁사를 읽어보면서 모두가 광덕산을 잘못하여 백운산이라 하는걸로 나름의 정리를 하였다.
맞느냐 안맞느냐의 오엑스식 퀴스가 아니라 당연히 뭐든지 조금의 개연성은 다 있다고 본다.
중공군 전사에도 비록 상세히 기록 되어있는 '51.5월공세이후 유엔군의 신속한 반격에 제 180사단이 전멸했다고 기록하지만 어디에도 이곳 전투 언급은 찾지 못했다.
우리 전사에도 국군 2사단이 '51.5.20부터 홍천강에서 진격하며 청평 174고지와 호명산에서 전투를 하고 운악산에서 그래도 전투다운 전투를 하고 일사천리로 진격하여 백운산에 28일경 올라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다시 와이오밍선 진출을 위해 '51.6.5부터 공격이 시작되어 미 제9군단의 좌익으로 김화동쪽를 따라 공격하여 6월5일에 하오고개 우측의 복주산(지금 여기서는 복계산으로 부른다. 복주산은 그보다 훨씬 북쪽으로 있고 수피령고개 또는 매월대 폭포에서 오른다)에서 큰 전투와 바로 그 좌측지맥인 853고지에서 대성과를 달성했다고 되어 있다.
그럼 도대체 이곳 국망봉 도마치봉 백운산 삼각봉 광덕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에서 전투는 어던 성격일까?
아니 그 '51.4월공세에 사창리에서 패한 6사단이 다 전사한 곳일까, 아니면 중공군이 후퇴하면서 미군의 폭격으로 숨져간 곳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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