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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믿음으로 열매 맺는 달☜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으니라(약2:22) 잠11:17-31절) 믿음의 농사(農事)
농사(農事)를 짓는 사람들에게 가장 어려운 것은 미래의 수요를 예측하는 것입니다. 즉 농부들이 어떤 해에는 배추 값이 많이 오를 것이라고 생각해서 배추를 많이 심었는데, 그해에는 너도나도 배추를 많이 심어서 과잉 생산으로 팔지 못하고, 밭을 갈아엎는 경우도 있습니다.
거기에 비해서 농부들이 어떤 해에는 배추가 너무나 흔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배추를 심지 않았는데, 배추가 너무나 귀하여 없어서 팔지 못하는 해도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보면, 아무리 인간들이 열심히 일을 해도 하나님께서 복(福)을 주셔야 복(福)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성경에서는 정말 지혜로운 사람은 땅의 농사만 잘 짓는 사람이 아니라, 하늘의 농사 즉 믿음의 농사를 잘 짓는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땅의 농사만 지은 사람은 눈앞에 있는 이익(利益)만 생각하기 때문에 앞으로 자신에게 닥칠 일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농사를 잘 지은 사람은 하나님께서 미래의 위기를 피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기 때문에 위기 때, 하나님의 도움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평소에 하나님의 복(福)이 조금씩 모이기 시작해서 나중에는 이 세상에서도 엄청난 복(福)이 쌓이게 됩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애굽 땅의 총리 요셉이었습니다. 요셉은 믿음의 농사를 지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미래에 올 대흉년을 알았고, 그것에 대비해서 많은 사람들의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잠언 11장 앞부분을 살펴보면, 세상 사람들은 장사를 할 때, 저울을 속여서라도 이익(利益)을 더 보려고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장사를 할 때, 남을 속여서라도 이익(利益)을 보거나, 혹은 폭리(暴利)를 취하려고 하는 이유는 하늘의 복(福)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최고의 보물(寶物)이 돈이 아니라, 우리 자신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굳이 남을 속여가면서 부자(富者)가 되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최고의 부자(富者)는 자기 속을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으로 채우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속을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으로 채우면, 우리 자신이 보물(寶物)이 되는데, 그렇게 되면, 하나님의 복(福)이 우리에게 저절로 따라오게 되기 때문입니다. 즉 돈도 저절로 따라오고, 명예도 저절로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말씀, 잠언 11장 후반부를 보면, 바로 이런 믿음의 농사의 결과에 대하여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Ⅰ.인자한 사람
우리가 흔히 세상에서 성공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주로 사람의 머리였습니다. 즉 사람의 지능(知能)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입니다. 사람들 중에서 머리가 좋은 사람은 어려운 시험에도 합격하고, 좋은 학교도 나오기 때문에 세상에서 좋은 자리를 차지하는데, 월등(越等)하게 유리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람의 신체적인 기능(技能)이었습니다. 옛날에는 다른 사람보다 힘이 월등하게 세어서 일을 잘한다든가, 아니면, 요즘 같으면, 운동에 뛰어난 소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속에 있는 감정에 대해서는 연애(戀愛)할 때, 외에는 전혀 쓸모가 없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요즘와서 많은 사람들은 속에 있는 감정(感情)에 상처받지 않고, 건강한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머리가 뛰어나 공부를 잘하고, 높은 직책에 있다고 하여도 마음이 병들었을 때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거나, 아니면 자살(自殺)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려는 것을 많이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행복을 머리나 신체로 느끼지 않고, 자신의 감정으로 느낍니다. 그런데 사람이 마음속에 분노(忿怒)를 오래 품고 있어서 감정이 상하게 되면 그때는 도무지 이 세상에서 행복을 느끼지 못하고, 언제나 불안하기 때문에 그것을 견디지 못해서 죽음을 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11:17절)인자한 자는 자기 영혼을 이롭게 하고 잔인한 자는 자기의 몸을 해롭게 하느니라.”여기서‘인자한 자’라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 대하여 너그러운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사람의 마음이 너그러울 수 있게 되었을까? 대개 천성적(天性的)으로 다른 사람에 대하여 까다롭거나 혹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너그럽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너그럽지 못한 사람은 대개 자라면서 사랑을 받지 못한 사람인 경우가 많습니다. 즉 자라면서 부모나 형제로부터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은 대체로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너그러운 편이고, 어렸을 때, 부모나 주위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별로 받지 못하고, 자란 사람은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너그럽지 못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다른 사람에 대하여 너그럽다고 해도 결국 자신이 망하게 되거나, 위기에 닥치게 되면, 결국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키거나, 혹은 다른 사람에 대하여 공격적으로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평소에는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았는데, 나중에 친구를 배신하거나, 가족을 배신하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이 살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인자(仁慈)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만남으로 자기 영혼이 치료를 받은 사람을 말합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전인격적(全人格的)인 과정으로 이루어지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지적(知的)인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단순히 머리로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결국 우리가 머리로 믿는 것은 가슴으로 내려와서 가슴이 뜨거워지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농부가 농사를 지을 때, 밭에 씨를 뿌리면,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것 같습니다. 아마 농사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씨만 허비하는 것같이 보일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밭에 비가 오고, 온도가 올라가게 되면, 새파랗게 싹이 올라오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듣고, 은혜를 받는다고 하지만, 대개는 별 변화(變化)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떤 계기(契機)를 만나게 되면, 그동안 들었던 말씀과 성령의 은혜가 합쳐지면서 우리 마음이 뜨거워지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 마음에 부흥이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다른 것보다 먼저 우리 안에 있는 상한 심령(心靈)을 치료하십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사람이나, 자기 자신이 우리 마음 안에 너무나도 많은 상처를 만들어 놓았는데, 우리는 그 많은 상처들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평소에 너무 감각(感覺)이 둔하여서 그 상처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다가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나쁜 말을 하거나, 혹은 좋지 않은 취급을 받게 되면, 그 부분이 많이 아프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분노(忿怒)를 품고 살아가게 됩니다.
사람들 중, 마음속에 분노(忿怒)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분노(忿怒)가 자기 자신을 향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마음이 상하게 되고, 또 이 분노(忿怒)가 다른 사람을 향하게 되는 경우에는 다른 사람에 대하여 잔인(殘忍)하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 안에 성령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부어지게 되면, 마음의 이런 상처와 분노가 녹아버리게 되고, 그리고 거기에 새 살이 돋아나게 됩니다. 이때 우리는 놀랍게도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관대(寬待)해지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인자(仁慈)한 사람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다 나름대로 마음속에 칼을 하나씩 품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거나, 혹은 자기 기분이 좋지 않으면, 말로 다른 사람을 찌르게 됩니다.
옛날에 보면, 사람들이 항상 허리에 칼을 차고 다녔는데, 그때는 사람들이 얼마나 싸움을 많이 했겠는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머리를 좋게 하거나, 혹은 우리의 신체가 강하게 하는 대신에 우리 마음속에 있는 분노를 녹여서 사랑의 사람이 되게 합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난 후에 머리가 좋아지는 것도 아니고 힘이 더 세어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유리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이 내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즉 나 자신이 존귀해지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관대(寬待)해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나를 이 모습 이대로 받으셨듯이, 다른 사람도 그대로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첫걸음은 그 사람을 내 사람으로 만들지 않고, 그 사람 그대로 인정해주는 것입니다. 즉 우리 안에 다른 사람에 대하여 품고 있었던 복수(復讐)의 칼을 버리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진정으로 평화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 성경 말씀을 보면, 인자한 사람은‘자기의 영혼을 이롭게 한다’고 했습니다.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사람은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 대하여 관대(寬待)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아무런 조건 없이 나를 사랑하시고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 조건이 있습니다. 즉 사람들은 여러 가지 요구 사항이 받아들여지면, 사랑하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있는 그대로 무조건 사랑합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살아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사람은 무슨 일을 하더라도 기쁨으로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기쁨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에너지가 생기는 것과 같습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들의 에너지는 기쁨에서 생깁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에 기쁨이 충만하면, 이 세상에 힘든 것도 없고, 하지 못할 일도 없습니다. 거기에 비해서 잔인(殘忍)한 사람은 자기 몸을 해롭게 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잔인(殘忍)한 사람은 자기 안에 분노(忿怒)가 있는 사람입니다.
사람이 마음속에 분노(忿怒)를 오래 품고 있으면, 결국 기쁨의 감정이 없어지게 됩니다. 우리 안에 기쁨의 감정은 모든 충격을 막아내는 완충(緩衝)역할을 하게 됩니다. 즉 우리 주위에서 누군가가 우리에게 욕을 한다든지, 혹은 누군가가 좋지 않은 소문을 퍼뜨릴 때에도 마음속에 기쁨의 감정이 있으면, 그런 좋지 않은 것들을 모두 다 물리치기 때문에 전혀 나쁜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 안에 분노(忿怒)를 오래 품고 있어서 감정이 말라버리면, 그때는 누군가가 나쁜 말을 해도 충격(衝擊)을 받고, 또 누군가가 어떤 소문을 퍼뜨려도 패닉(Panic)상태가 되고, 자기가 어떤 엉뚱한 생각을 해도 믿어 버리기 때문에 결국 자기 신경이 견디지 못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말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는데, 요즘 가장 심각한 것은 자기 자신을 스스로 견디지 못해서 자살(自殺)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 사탄은 *너 한 사람 때문에 결국 네 집 식구 모두 불행하게 되니까 네가 죽으면 모든 것이 해결 된다*는 식으로 충동(衝動)질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공부를 좀 잘하는 것보다, 신체적으로 재능(才能)이 있는 것과 운동을 잘하는 것보다, 정신적으로 건강한 것이 얼마나 큰 복(福)인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만 행복하게 살 수 있지,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않으면, 하루하루가 불안해서 자기 스스로가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11:18절)악인의 삯은 허무하되 공의를 뿌린 자의 상은 확실하니라.”
여기서 우리는 두 종류의 농사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악인(惡人)의 농사이고, 다른 하나는 의인(義人)의 농사입니다. 여기서 악인(惡人)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이 세상을 악하고 못되게 사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악인(惡人)이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붙들지 않고, 자기 욕심과 야망을 따라서 사는 사람을 말합니다. 일단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붙들지 않고 세상을 보면, 세상에 좋은 것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즉 세상에는 돈도 있고, 출세도 명예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세상에 있는 것들을 붙들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도 하고, 노력도 합니다. 사람들 중에는 이 세상에서 좋은 것들을 많이 붙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세상에 있는 돈이나, 지식이나, 명예를 붙들고 보면, 물론 이런 것들이 없었던 옛날보다는 훨씬 살기 좋은 것은 사실이지만, 무엇인가 마음에 아쉽고, 허전한 부분이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등산(登山)가들은 높은 산(山)에 올라가는 것을 아주 큰 명예로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어떤 등산가가 많은 준비를 해서 죽을 각오를 하고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라갔을 때 무엇을 느끼게 될까? 물론 이 세상에서 최고로 높은 정상에 올라간 것은 너무나도 기쁘겠지만, 사실 그 정상은 너무나 춥고, 바람이 불기 때문에 도저히 오래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등산(登山)하는 사람들이 높은 산(山)정상을 정복했을 때, 하는 일은 거의 숨도 쉴 수 없는 상황에서 사진 한두 장 찍고는 서둘러 산(山)을 내려 와야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사람은 이 높은 산(山)정상을 오르지 못한 사람들에 비해서는 대단한 자부심(自負心)을 가지고 있지만, 결국 자기 자신은 변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가장 만족스러울 때는 자기 자신이 아름답게 변(變)할 때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우리의 껍데기는 바꿀 수 있을지 몰라도 우리 속사람은 전혀 바꾸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악인의 삯이 허무(虛無)하다는 것은 굳이 이 세상에서 악(惡)하게 살지 않아도 자기 욕심과 정욕을 따라서 사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아무리 많은 것들을 가져도 자기 자신은 바뀐 것이 없다는 것 때문입니다.
결국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은 신기루를 따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보는 아름다운 것들은 결코 축복(祝福)의 실체(實體)가 아닌 것입니다.
반대로 의인(義人)이 뿌린 삯은 확실하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뿌린다고 하는 것은 농사(農事)를 짓는 개념입니다. 결국 의인의 농사는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으로 자기 안을 채우는 농사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축복(祝福)을 농사짓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듣는 것을 두고, 조롱하기를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 밥을 먹여주느냐*라는 말을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 속을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으로 채우고, 불같은 연단을 통과하면, 우리 자신 전체가 하나님 앞에서 보석(寶石)으로 변(變)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의인의 농사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식으로 믿음의 농사(農事)를 짓는 동안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세상의 좋은 것들을 모두 다 차지해버릴 것입니다. 이때 우리는 때로 세상에서 가난하게 되기도 하고, 출세의 길에서 멀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우리가 이렇게 믿음의 농사를 지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응답이 있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이 언제나 뜨거워서 웬만한 시험이 와서는 넘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십니다.
우리에게 이런 응답(應答)의 기회가 많아지면서 이 세상에서도 자꾸 복(福)이 쌓이게 됩니다. 하나님의 축복(祝福)은 마치 자석(磁石)같은 효력이 있어서 세상의 복(福)도 끌어당기게 됩니다. 결국 우리가 복을 끌어당길 수 있어야지, 복을 밀어내는데, 복을 받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의(義)를 뿌린 자의 상(賞)은 확실하다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믿음의 농사를 지으면, 틀림없이 복(福)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11:19절)공의를 굳게 지키는 자는 생명에 이르고 악을 따르는 자는 사망에 이르느니라.”여기서‘의를 굳게 지킨다.’고 하는 것은 이 믿음의 길을 굳세게 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보면, 세상에 좋은 것들이 너무나도 많기 때문에 마음에 흔들릴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가지면, 당장 유익이 되고, 즉시 사람들의 인정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또 우리가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가지면, 당장 생활이 달라질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에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만 붙들지 못하게 하는 것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의(義)를 굳게 지키려고 하면 우리 힘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의 맛을 한번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생명의 말씀의 맛이 세상의 맛보다 더 달고, 맛이 있어야만 믿음의 길을 가게 됩니다.
다윗 같은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 얼마나 맛이 있는지 *송이 꿀보다 더 달다*고 했습니다.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 꿀보다 더 달도다(시9:10).
그리고 우리가 이 믿음의 길을 가려고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들어 주셔서 세상으로 가는 길이 막혀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순수하게 자기 의지로 이 믿음의 길을 갈 수 있는 사람은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결국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세상으로 가고 싶어서 몸부림을 쳐도 허락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붙들고, 씨름하셔서 이 믿음의 길을 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보면, 이 길이 사는 길입니다. 우리 영혼이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먹어서 강건하게 되어 있고, 생명력이 넘치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악(惡)을 따르는 자는 사망(死亡)에 이르게 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사는 자체가 마치 겨울 산(山)에서 조난을 당한 것과 같고, 광야에서 길을 잃은 것과 같기 때문에 세상을 따라서 사는 것은 진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아직 죽지 않고, 생존(生存)해 있는 것뿐이지 안전하게 살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서 겨울 산(山)에서 조난을 당한 사람들이 살아 있는 것은 생존(生存)해 있는 것이지, 완전히 산 것은 아닙니다. 이들이 완전히 살려고 하면, 산에서 내려와서 안전한 곳으로 가든지, 가족이 있는 집으로 가야 완전히 산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생존(生存)과 사는 것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생존(生存)이란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사는 것이란 의미를 알고 사랑을 하면서 가치 있게 사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 보면, 믿음의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너무나도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1:20절)마음이 굽은 자는 여호와께 미움을 받아도 행위가 온전한 자는 그의 기뻐하심을 받느니라.” 두 종류의 사람이 나오는데, 하나는 마음이 굽은 자이고, 다른 하나는 행위가 온전한 자입니다. 우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을 가리켜 행위가 온전하다고 했는데, 과연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행위가 온전한 자들일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실수투성이고, 허물투성이입니다. 아마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보면, 어떻게 저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우리는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부족한 것을 모두 다 채워서 온전한 사람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집에서 자녀들에게 부족한 것이 있어도 부모가 모두 다 채워주기 때문에 아이들은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하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는 절대로 완벽(完璧)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거기에 비해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는 자기 나름대로는 완전하게 살려고 합니다. 그래서 금욕적(禁慾的)으로 살기도 하고, 고행(苦行)을 하기도 하고, 고통스러운 순례(巡禮)의 길을 떠나기도 합니다.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 힘으로 완전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의 특징은 사실 나름대로는 굉장히 애도 많이 쓰고, 훌륭하게 살기도 하지만, 다른 사람에 대하여 비판적(批判的)입니다. 그렇게 해야 자기가 잘난 것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전혀 허물이나, 실수가 없는 종이 되는 것보다는 실수를 많이 해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가 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어떤 큰 회사의 회장이 볼 때, 직원들이 모두 다 좋은 학교를 나오고, 인물도 좋고, 언변(言辯)도 좋고, 게다가 너무나도 척척 일을 잘하지만, 그들은 결코 이 회장의 자식들은 아닌 것입니다. 결국 나중에 이 회사를 차지하는 것은 우수했던 자들이 아니라, 그 회장의 자녀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구약의 율법이 자녀들에게 준 법(法)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구약의 율법(律法)은 그것의 뛰어난 정신과 축복에도 불구하고 종에게 준, 법(法)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음(福音)은 자녀에게 준, 법(法)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완벽주의(完壁主義)는 좋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조금 실수하는 것이 두려워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 자신이 조금이라도 실수하고, 자기가 정해 놓은 목표(目標)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심하게 자책(自責)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종의 영(靈)이지, 자녀의 영(靈)은 아닌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다른 사람이 실수하거든*...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하라(마 18:22).고 하셨습니다.
Ⅱ.욕심스러운 삶의 결과
우선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이 없다고 가정한다면, 힘이 있는 자들이 가장 유리할 것입니다. 만일 이 세상에 하나님이 없다면, 인색(吝嗇)하게 구는 사람이 가장 많은 재물(財物)을 모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신다면, 그 결과는 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게 복(福)을 주기도 하시고, 또 복(福)을 빼앗아 가기도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복(福)을 받는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만 사로잡을 수 있다면, 사실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11:21절)악인은 피차 손을 잡을지라도 벌을 면하지 못할 것이나 의인의 자손은 구원을 얻으리라”
여기서‘악인이 피차 손을 잡는 것’이 무엇일까? 하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가장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악인(惡人)들끼리 서로 동맹(同盟)을 맺는 것입니다. 악인들이 손을 잡는 것은 이 세상을 악(惡)으로써 영구적(永久的)으로 지배하자는 뜻입니다.
만약 이 세상에서 악인(惡人)들끼리 협력을 하고, 힘을 합친다면, 그렇지 않아도 힘이 없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거의 숨도 쉴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악(惡)의 세력이 손을 잡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정의(正義)를 사랑하지 않고, 세상과 타협을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을 사랑하게 되면, 결국 부흥이 없어지면서 악(惡)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들이 미신(迷信)을 강요당하게 되고, 말도 되지도 않는 명분을 위해서 돈을 내야하고, 몸으로 협력을 해야 합니다. 이때 하나님의 백성들이 비로소 깨닫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恩惠)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붙들고 부르짖을 때, 하나님은 다시 부흥을 주십니다. 그때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영적인 부흥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강한 정의(正意)의 세력들이 나타나게 하셔서 악의 세력을 쳐부수게 하십니다.
아무리 악인(惡人)들끼리 서로가 필요해서 손을 잡는다 하더라도 악인(惡人)들도 자기들이 별 볼일 없다는 것을 알고, 속으로는 멸시(蔑視)하고 비웃습니다.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무엇이 옳은지, 다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단지 악(惡)한 자들은 아무리 마음을 먹어도 악(惡)한 짓을 할 수밖에 없지만, 자기들도 이것이 얼마나 악(惡)하고 비열(卑劣)한지, 잘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생명의 말씀의 부흥을 주시면서 세상에도 정의(正義)의 세력이 나타나게 하십니다.
그때 악(惡)한 자들은 갑자기 힘을 잃고, 숨게 됩니다. 즉 바퀴벌레나 쥐가 어둠속에서 활개를 치면서 돌아다니다가 갑자기 환한 빛이 비취면, 놀라서 달아나는 것처럼, 악(惡)의 세력은 정의(正義)앞에서는 맥을 추지 못합니다.
이 세상에서 정의(正義)의 편에 선다는 것은 너무나도 멋있고,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정의로운 사람들을 보면, 너무나도 좋아하게 되고, 절대적인 지지를 보내게 되는데, 그것은 못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억눌러서 누리는 영광과 비교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언제나 정의(正義)로워야 하고, 불의(不義)의 편에 설 필요가 없습니다. 불의의 세력은 정의로운 자의 한 마디로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의인(義人)의 자손은 구원(救援)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의인의 자손은 부모의 의(義)를 보기 때문에 그렇게 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자손(子孫)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자식(子息)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제자들을 말합니다. 즉 의인(義人)에게 배우는 자는 의인(義人)이 될 가능성이 많고, 선지자(先知者)에게 배우는 자는 결국 자기 자신이 선지자(先知者)의 능력을 받게 됩니다.
11:22절)아름다운 여인이 삼가지 아니하는 것은 마치 돼지 코에 금 고리 같으니라.”
잠언은 심심찮게 여인들의 이야기를 등장시켜서 우리들의 흥미를 돋우고 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여성들은 외적(外的)인 아름다움을 가지고 평가를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우리나라 여성들은 더욱 아름다워지기 위해서 헬스(health)를 하거나 성형 수술을 하거나, 좋은 화장품을 쓰고 있습니다. 여성들이 아름답다는 것은 확실히 중요한 플러스(plus)요인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남자들은 여성을 마치 자기 마음대로 가지고 놀 수 있는 인형처럼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여성은 결코 인형이 아닙니다. 여성들도 사람마다 모두 다 다른 개성(個性)을 가지고 있고, 그 마음 안에 분노라든지, 열등감이라든지, 시기심 같은 것을 가지고 있는 인간인 것입니다.
그런데 남자들이 어리석게도 여성들에게 믿음의 농사(農事)를 짓지 않고, 인형처럼 외모(外貌)만 가꾸기를 원하면, 어떻게 될까? 여성은 인형이 아니기 때문에 탁자(卓子)위에 가만히 있지 않고, 돌아다니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그 아름다움이란 돼지코에 금 고리와 같아서 그런 여자는 속에 든 것이 더러운 탐욕(貪慾)밖에 없기 때문에 온 집을 들쑤셔 놓고, 백화점을 돌아다니면서 카드로 돈을 쓰기 때문에 뒷감당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남자는 여자를 결코 인형으로 생각해서는 안 되고, 자기에게 가장 소중한 배필(配匹)로 생각해서 그 마음에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담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아내가 입을 벌릴 때마다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 쏟아져 나오게 되는데, 인격을 관통(貫通)한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은 그대로 영혼을 치료하는 약(藥)이고, 축복(祝福)인 것입니다.
그리고 어려울 때, 위해서 기도해주고, 내 영혼을 지켜주는 든든한 반석(盤石)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가슴에 담고 있고, 사랑으로 충만한 아내는 가장 뛰어난 천사입니다. 우리는 천사와 함께 사는 사람이 되어야지 금 고리를 차고 있는 돼지와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Ⅲ.의인의 소원
사람은 누구나 다 이 세상에서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마다 바라는 것이 모두 다 다릅니다. 할 수 있는 한 이 세상에서 눈에 보이는 돈이나 명예를 더욱 많이 가지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 사람들은 악인(惡人)입니다.
이 사람들이 악(惡)해서 악인(惡人)이 아니라, 그 마음에 들어 있는 것이 욕심이고, 야망(野望)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나면 다른 사람들이 모두 행복해지기를 바라게 됩니다. 물론 우리가 다른 사람이 행복해지기를 바란다고 하는 것은 너무나도 막연하고, 모호(模糊)해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로 이런 선(善)한 소망을 아름답게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11:23절)의인의 소원은 오직 선하나 악인의 소망은 진노를 이루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믿게 되었을 때, 가장 먼저 변(變)하는 것은 맨 처음에 자기 자신의 소중함을 깨닫게 됩니다. 옛날에는 무조건 공부를 잘해야 하고 잘 생겨야 인정을 받는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을 믿고 나면, 그러하지 않아도 자신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때 우리는 이제부터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게 됩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난 후에는 삶의 구제적인 목표가 없어져 버리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 삶의 목표는 믿음의 농사(農事)입니다. 즉 우리 속을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으로 채우고, 연단을 통과해서 보석(寶石)이 되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 다른 사람에 대한 태도가 달라집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모를 때에는 다른 사람들을 모두 내 중심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즉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얼굴이 잘 생겼거나, 혹은 공부를 잘하거나, 혹은 나에게 잘해주는 사람은 좋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대신 그 외의 사람들은 관심(關心)도 없고, 좋아할 이유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믿게 되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가치가 있으며, 감히 내 욕심을 위해서 그들의 행복을 다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난 뒤에는 다른 사람을 그 사람 자체로 인정해주게 됩니다. 즉 다른 사람들이 나와 상관없이 모두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여기에 보면‘의인의 소원은 선하나’라고 했는데,‘선(善)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것을 말합니다.
반면에‘악인의 소망은 진노를 이룬다.’고 했는데, 악인(惡人)들은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기 때문에 결국 선(線)을 넘게 됩니다. 즉 마음속에 욕심이 있는 사람은 정상적인 것으로는 만족을 하지 못하고, 반드시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해야 만족이 되는 것입니다.
결국 이것은 죄(罪)를 짓는 것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미끼에 걸려서 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남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기 때문에 마음속에 욕망(慾望)이 일어나더라도 물리칠 수가 있습니다. 이 차이는 어마어마한 것입니다.
11:24절)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11:24절은 아주 유명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할 수 있는 대로 돈을 쓰지 않고, 모아야 부자(富者)가 될 것 같은데, 흩어 구제를 해도 부자(富者)가 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구제(救濟)하는 것 이상의 하나님의 복(福)을 받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병들지 않고, 사고가 나지 않는 것만 가지고도 엄청나게 돈을 벌 때가 많습니다.
또 쓰나미가 나지 않고, 구제역(口蹄疫)이 일어나지 않아도 우리는 엄청난 돈을 버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차라리 작은 것을 쓰고, 큰 것을 막는 것이 더욱 유익(有益)입니다.
11:25절)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남을 구제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복(福)된 이유가 무엇일까? 일단 남을 돕기 좋아하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물질에 집착(執着)하는데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사람은 돈이 생기면 생길수록 더욱 돈에 집착하게 되는데, 여기서 집착한다는 것은 아주 정신적으로 유치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에게 돈이나 물건을 주면, 그런 집착(執着)에서 벗어나면서 마음이 아주 풍요로워지게 됩니다. 거기에 다가 남을 돕는 사람은 자기가 행복한 것보다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이 얼마나 기쁜지 알게 됩니다.
이상한 것은 자기가 행복한 사람은 정신적으로 병드는데 비하여 남을 위해서 봉사하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아주 건강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남을 윤택(潤澤)하게 하는 사람이 어떻게 자기가 윤택(潤澤)해질 수 있을까? 그것은 바로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쓰면, 그것이 백 배 천 배로 커지면서 그 부스러기만 해도 열두 광주리가 되는 것입니다.
11:26절)곡식을 내놓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에게 저주를 받을 것이나 파는 자는 그의 머리에 복이 임하리라”
‘곡식을 내놓지 않는 자’는 어려울 때, 매점매석(買點賈惜)하는 자입니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의 불행(不幸)을 통해서 돈을 벌려고 하는 사람인데, 백성이 이런 사람을 원망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들이 번 돈은 하나님이 축복(祝福)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남들이 어려울 때, 자기가 모은 것을 풀어서 돕는 사람은 그 머리에 복(福)이 임하게 됩니다. 즉 하나님 앞에 아주 존귀(尊貴)한 자가 되고, 사람들도 그를 존경(尊敬)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욕먹는 부자(富者)는 비참(悲慘)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자는 칭찬 받는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11:27절)선을 간절히 구하는 자는 은총을 얻으려니와 악을 더듬어 찾는 자에게는 악이 임하리라”
‘선을 간절히 찾는다.’는 것은 선(善)의 길을 찾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을 찾는 것은 보석(寶石)을 찾는 것보다 더욱 어렵습니다. 그러나 일단 우리가 나의 길을 찾기만 하면, 어마어마한 복(福)을 만들어낼 수가 있습니다.
반면에‘악(惡)을 더듬어 찾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어두운 데서 일부러 더욱 악(惡)한 길을 찾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에게는 재앙(災殃)이 닥치게 됩니다. 즉 어둠 가운데서 어느 날 갑자기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11:28절)자기의 재물을 의지하는 자는 패망하려니와 의인은 푸른 잎사귀 같아서 번성하리라”
재물(財物)은 평상시에 큰 도움이 되지만, 위기의 순간에는 도움이 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사람들은 마땅히 다른 것을 붙들것이 없어서 재물(財物)을 의지하고 삽니다. 그러나 재앙(災殃)이 터지거나, 전쟁(戰爭)이 나거나, 무서운 전염병(傳染病)이 퍼지면, 돈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이 많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이 이런 재앙(災殃)이 일어나지 않게 막으시기 때문에 언제나 푸른 나무의 잎사귀인 것입니다.
11:29절)자기 집을 해롭게 하는 자의 소득은 바람이라 미련한 자는 마음이 지혜로운 자의 종이 되리라”
마음이 악(惡)한 사람은 자기 마음속에 불만이 있기 때문에 식구들에게 분풀이를 합니다. 악인(惡人)은 돈이 있어서 괜찮다고 생각하지만, 그 집은 식구들 사이에 미움이 기득하게 되어서 결국 나중에는 뿔뿔이 흩어지고, 모르는 사람들보다 더 멀어지게 됩니다.
모두 마음의 상처를 가지고 원망하는 마음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미련한 자가 지혜로운 자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돈을 모두 다 날리고, 말씀의 종이 되어야 다시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11:30-31절)의인의 열매는 생명나무라 지혜로운 자는 사람을 얻느니라. 보라 의인이라도 이 세상에서 보응을 받겠거든 하물며 악인과 죄인이리요”
이 두 구절의 말씀은 지금까지 말씀의 최종적인 결론(決論)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농사(農事)를 잘 짓는 것이 진정으로 사는 길입니다.
이것은 생명나무이기 때문에 무한정으로 과실을 맺고, 맹수(猛獸)들처럼 서로 잡아먹지 않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꾸만 지혜로운 사람을 만들게 되어서 결국 지혜로운 자로 집이 채워지게 되는데, 이 집은 영원한 성전(聖殿)이고, 무너지지 않는 축복(祝福)의 성(城)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세상에서 연단을 받아야 보석(寶石)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 악인(惡人)과 죄인(罪人)은 영원한 심판(審判)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때로는 신앙에 참 좋은 분들도 결국 연단하셔서 정금(正金)이 되어서 천국(天國)에 가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믿음의 농사(農事)를 잘 짓는 성도들 다 되시기 바랍니다.아-멘
찬송가 357장 *주 믿는 사람 일어나*
오늘의 묵상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5:4)
*매일 새벽 4-5시 기도하는 습관을 가집시다.*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시46:5)
◁가족같은 교회. 교회같은 가족▷
☞교갱원의 엄격한 규칙을 지켜 낙오자 없이 모두 성숙한 복된 그리스도인이 됩시다.
▣ 癸卯年 *신실하고 충성된 일꾼을 세워 성장하는 해*
※후반기는 필(必)히 행정서식을 작성제출해야 교갱원소속 A급셀(cell)로 자립 새출발 할 수 있습니다.(정착완료. 양식보존. 새벽기도. 교갱원설립후원. 춘추심방. 실명으로 소통)
교갱원은 1단계 묵상, 생명의 양식과 필수과목(26과). 2단계 생명의 양식과 전도학교(13과).3단계 생명의 양식과 청지기 대학(17과)으로 정예부대가 됩니다. 누구든지 전화신청받습니다(유료 : 각 교재 1과당=1만원, 방법 : 교갱원 설립 때까지 임시 카톡영상으로)
교갱원카페.카톡.천국시민이 은혜받고 감사하며, 기도로 화답하는 것은 믿음의 열매. 후원계좌 NH콕뱅크 302-8772-0191-01(헌금내용)
대한 예수교 장로회(합동)교회갱신 성경연구원
정 의 영 목사 ☎ 010-8772-01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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