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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안의 나날 원문보기 글쓴이: 람미
***간증: 1350. [역경의 열매]
김종인 <1-20> “장애인 재활 40년 외길은 오로지 하나님의
섭리”
고비마다 부드럽고 포근한 손 내밀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역사하고 이끄셔
장애인 재활 전문가로 수많은 장애인들에게 희망을 심어주고 있는 김종인 박사는 교회 장로로서 긍휼과 사랑의 마음으로 장애인을 섬기고 있다. 강민석 선임기자새벽기도회를 마치고 교회 문을 나서면 상큼한 새벽공기가 나를 맞는다. 주님과 교제 속에 시작하는 일과는 언제나 감사와 기쁨이 넘친다. 2004년 9월 8일부터 시작된 이 새벽제단은 2015년 11월 15일 현재 4000일이 넘고 있다. 하나님 앞에 부르짖을 수밖에 없었던 절명의 순간에 시작된 1000번제가 세 번을 마치고 네 번째를 이어가게 하시니 하나님의 은혜다.
나이가 들고 신앙의 연륜이 쌓이면서 느끼는 분명한 사실이 있다. 인간이 삶의 진정한 가치와 행복을 느끼는 순간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대로 쓰임받을 때’라는 사실이다. 인간이 아무리 잘났고, 사회적으로 유명하고, 물질적으로 부유해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지 못하다면 그것은 실패한 인생이란 생각이다.
이런 점에서 내 삶에 좌정해 주셔서 ‘장애인 재활’이란 큰 사명을 주시고 한국인 최초로 미국 노던콜로라도 주립대에서 재활학 박사 학위를 받게 만드시고, 장애인 재활 및 복지 전문가로서 40년 외길을 걷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지 않을 수 없다.
한 분이 내게 “박사님은 보통 사람이 평생 할 일의 서너 배는 하신 것 같다”고 했다. 이 말이 내겐 “하나님이 함께해 주셔서 지혜와 능력과 용기를 주셨다”는 말로 들렸다. 내 삶에서 정말 힘들었던 고비와 또 붉은신호등이 켜질 때마다 하나님은 부드럽고 포근한 손을 어김없이 내밀어 주셨다. 그리고 인도해 주신 그 길은 한치의 오차도 없는, 내게 꼭 필요한 길이었음을 후일 깨닫게 된다. 이제 부족한 한 영혼에게 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시고 섭리해 주셨는지 그 간증을 나누고자 한다.
1956년 경남 창원에서 8남매의 차남으로 태어난 나는 후일 장로, 권사가 되셨던 부모님의 신앙 속에 교회생활을 자연스레 받아들이며 성장했다. 아버님은 가축사료 사업을 크게 하셨는데 상호가 ‘육일상회’였다. 6일만 일하고 주일은 쉰다는 뜻이었다. 육일상회는 5일장이 크게 열리는 날도 주일이면 어김없이 문이 닫혔다. 모범생에 공부도 잘했던 나는 창원에서 고교를 졸업하고 대학 예비고사에 합격한 뒤 서울의 한 대학 입시를 치렀다. 그런데 1, 2차 모두 낙방했다. 당시 인기가 있던 수의학과와 공대를 지원해 더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재수를 시작해 이듬해 시험을 보았는데 역시 또 1, 2차 모두 고배를 마셨다. 정말 땅을 치며 울고 싶었다. 나를 지도했던 교사들은 왜 충분히 갈 수 있는 실력인데 시험만 보면 성적이 안 나오느냐고 한탄했다.
심한 열패감에 사로잡혀 앞으로 진로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는 중에 대구에 있는 한국사회사업대학(현 대구대학교 전신)에서 결원이 생겨 3차를 모집한다는 광고가 나왔다. 이곳 ‘특수교육학과’에 응시해 합격했다. 24명을 추가로 모집했는데 1000여명이 왔던 것으로 기억된다. 특수교육학과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른 채 학교에 입학한 나는 등록금을 내면서 창구의 남자 직원에게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특수교육학과는 무엇을 가르치는 덴가요?”
“그것도 모르고 왔어요. ×신들 가르치는 데요”
이 창구 직원의 말은 1970년대 당시 한국의 장애인 인식도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모두 살아가기에 급급한 때라 장애인 복지와 교육이란 단어 자체를 이해 못했던 것이었다.
난 이 말을 듣고는 대학에 아주 잘못 왔다고 생각했지만 1∼2년 공부한 뒤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편입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대학에서 내 인생의 대반전이 일어나는 엄청난 사건을 준비해 놓고 계셨다.
정리=김무정 선임기자 kmj@kmib.co.kr
* [역경의 열매] 김종인 <1> "장애인 재활 40년 외길은 오로지 하나님의 섭리"
* [역경의 열매] 김종인 <2> '1분만이라도 세상 보고싶다'는 장애학생 말 충격
* [역경의 열매] 김종인 <3> 대학신문 기자로 장애인 차별·편견 이슈화 활동
* [역경의 열매] 김종인 <4> 첫 직장 홀트복지회에서 살다시피 장애인 돌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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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경의 열매] 김종인 <20·끝> 나의 장애인 사랑 뒤엔 하나님의 긍휼이 늘 함께
◇약력=△대구대, 연세대·숭실대 대학원, 노던콜로라도주립대 대학원 졸업(인간재활학 박사) △홀트아동복지회 재활과장 역임 △나사렛대 부총장 및 재활복지대학원장 △한국사회복지정책연구원장 △한국재활상담사협회장 △밀알복지재단 이사 △분당영광교회 장로
***[역경의 열매] 김종인 <2> ‘1분만이라도 세상 보고싶다’는 장애학생 말 충격
툴툴거리던 생활이 부끄러워져 눈물… 하나님을 가슴으로 만나는 계기가 돼
대학입학 후 한 맹인학생을 통해 장애인 재활에 대한 사명감을 갖게 된 김종인 교수는 요즘도 수시로 장애아 부모들을 위한 강연과 상담에 열심을 내고 있다.원치 않은 대학에 보결생으로 입학했다는 열등감으로 시작한 대학생활은 영 재미가 없었다. 당시 한국사회복지대학 대구 대명동 캠퍼스에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광명학교, 지체장애인을 위한 보건학교, 농아인을 위한 영화학교, 정신지체장애인을 위한 보명학교가 함께 있었다.
운동회도 이 4개 학교가 모여서 하곤 했는데 시각장애인 학생들이 소리가 나는 축구공을 차며 경기하는 모습을 보며 신기해했다.
첫 학기가 거의 끝나가는 6월 초순으로 기억된다. 기숙사 생활을 하던 나는 아침마다 운동장에 나와 열심히 운동을 했다. 그런데 이날은 정신지체·농아·뇌성마비·시각장애 이렇게 4명의 학생이 운동장 가장자리 의자에 앉아 있었다. 나도 운동장을 몇 바퀴 돈 뒤 그들 옆에 다가가 앉았다. 마침 옆에 큰 막대기가 있었다. 장난기가 발동해 아이들은 어떤 소원이 있는지 막대로 배를 툭툭 치면서 추궁하듯 묻기 시작했다.
“야, 너희들 지금 가장 갖고 싶거나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말해봐라.”
장난삼아 말을 거는 내게 정신지체 학생은 트랜지스터라디오를, 농아 학생은 자전거를 갖고 싶다고 했다. 뇌성마비 학생은 한라산 등반을 해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다. 난 호기롭게 내가 기회가 되면 너희들의 소원을 다 들어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시각장애인 학생은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야, 넌 소원이 뭐냐. 이야기 해봐.”
눈이 일그러져 감겨 있는 상태의 그 학생은 다소 화가 난 듯한 표정이었다.
“들어줄 수도 없는데 말하면 뭐해요.”
난 더 궁금해졌다. 자꾸 학생에게 말해보라며 여러 번 재촉을 하자 그는 정말 간절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요. 정말 딱 한 번만이라도 눈을 떠서 이 세상을 보는 거예요. 5분 아니 1분만이라도 궁금한 세상을 봤으면 좋겠어요.”
이 학생의 말은 갑자기 망치로 내 머리를 한 대 치는 듯한 강한 충격과 전율로 다가왔다. 손에 든 막대기가 너무나 부끄러워 나도 모르게 놓아버렸다.
“나는 멀쩡한 몸에 좋은 부모 만나 어려움 없이 살아가면서도 당장 시원찮은 대학에 왔다고 툴툴거리며 만족을 못하고 있는데 이 학생은 평생소원이 잠깐이라도 세상을 보는 것이라지 않는가. 나는 눈 뜨고 살면서도 감사할 줄도 모르고 이렇게 장애인이나 놀리고 있다니.”
너무나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기숙사에 돌아와 나를 자책하는데 계속 눈물이 흘러내렸다. 펑펑 쏟아질 정도였다. 순간 내 어린시절이 주마등처럼 떠오르며 내가 한사대 특수교육학과에 입학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란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사실 재수 후 또 1, 2차까지 대학 입시에 낙방했을 때 자살을 결심하고 수면제 20알은 먹었던 나였다. 그런데 갑자기 구토가 나와 목숨을 건진 사건이 있었다. 이때 하나님이 나를 살려주시고 이곳으로 인도해 주신 것이라는 생각이 나를 휘감았다.
동시에 어머니 생각이 났다. 어머니 박은순 권사(경남가술교회)는 일생을 저녁 10시만 되면 어김없이 교회에 올라가 엎드려 철야하시고 새벽기도를 마치고 집에 와 또 예배와 기도로 하루를 사신 분이셨다. 어머니의 기도로 내가 지금까지 무탈하게 지내왔고 죽음의 위기에서도 살아났으며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이날부터 내 삶은 180도 확 달라지기 시작했다. 신앙인이라고 했지만 하나님을 가슴으로 만나지 못했던 나는 이날의 사건을 계기로 하나님이 우리의 삶 속에서 역사하시고 섭리하신다는 사실을 뜨겁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역경의 열매] 김종인 <3> 대학신문 기자로 장애인 차별·편견 이슈화 활동
지적장애인 강제 낙태 반대 시위·보도 청와대서도 관심… 법률 개정 무산돼
한국사회복지대학 학보사 편집국장으로 활동할 때의 김종인 교수. 장애인 문제에 대한 인식조차 없었던 부분들을 이슈화했다.시각장애 학생과의 만남을 통해 마음을 잡고 하나님의 강한 인도를 깨닫게 된 나는 곧장 자원봉사를 시작했다.
한 시각장애 고교생의 녹음도서나 점자도서를 만들어 주는 일을 도맡았다. 당시 원화여고 수선화클럽에서 녹음봉사를 해주었는데 녹음으로 안 되는 것이 수학책이었다. 그것은 내가 점필을 배워 점자로 찍었다. 수학참고서 1권을 점자로 찍으면 무려 13권이나 됐다. 그래프가 있는 수학 방정식 문제는 시각장애인이 풀기에는 고난 그 자체였다.
당시는 장애인 특별전형제도가 없었다. 따라서 예비고사를 통과하는 것이 시각장애인에겐 사법시험 합격 이상으로 어려웠다. 1970년대는 장애인 차별과 편견, 무시하는 의식이 만연했다. 장애인을 위한 법이나 제도도 전무해 이 분야에 관심을 가질수록 장애인들이 엄청난 사각지대에서 고통받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런 부분을 개선하는 데 조금이라도 역할을 해보려고 대학신문 견습기자로 들어갔다. 2학년 2학기에 편집국장 서리가 됐는데 당시 모자보건법에서 지적장애인이 임신하면 양수검사를 해서 낙태 시술을 할 수 있게 법을 개정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탄생하는 아이를 부모가 지적장애라는 이유로 낙태시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법 개정에 반대하는 머리띠를 두르고 1인 시위도 했고 학보에 대서특필해 이를 문제 삼았다. 나의 이런 열정과 움직임이 알려졌는지 청와대에서 연락이 왔다. 박정희 대통령께서 직접 막아 법 개정이 무산되었다.
이때 대학신문사 편집장에 불과한 내가 청와대로 초청돼 격려를 받고 박 대통령으로부터 ‘심신재활(心身再活)’이라는 휘호도 선물 받았다.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이 휘호는 내 삶에서 재활에 더 열심을 내는 견인차가 되어 주었다.
학보사에서 만난 안병즙 지도교수님이 내 삶의 멘토가 되어주신 것은 축복이었다. 장로이시면서 장애인들에 대한 남다른 사랑과 관심을 갖고 내게 장애인교육과 재활에 대한 폭넓은 시야를 갖도록 도와주셨다.
교수님은 지체장애인 대학생 모임인 ‘푸른샘’의 지도교수도 하셨는데 장애인들의 결혼식 단골 주례자셨다. 한 번은 한 장애인이 수술해야 하는데 피가 부족하다고 하자 그 자리서 헌혈하시겠다고 팔을 내미시는 것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 교수님은 늘 약자 편에서 정의롭게 사는 길을 성경말씀을 통해 제시해 주시곤 했다. 졸업할 때쯤 ‘자폐증’이란 장애가 새롭게 인식되고 이 용어를 쓰기 시작했다. 이 장애를 가진 이가 많은데 이를 이해하려면 의학적인 식견이 필요해 보건학을 공부하기로 했다.
연세대대학원 보건학과에 응시해 당당하게 합격했다. 대학교복에 연세원(연세대대학원)이라고 쓰인 배지를 달자 갑자기 엄청난 자긍심이 솟아나왔다. 하나님께서는 내 마음 밑바닥에 있던 학력 콤플렉스를 풀어주신 것이다.
대학원에 다니며 영등포여자상업고등학교 산업체특별학급 교사로 일했다. 당시 구로공단에는 128개 기업 공장이 있고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여공들이 전국에서 몰려와 일하고 있었다.
‘낮에는 산업역군, 밤에는 면학학도’란 슬로건을 내걸고 공부하는 여공들에게 ‘윤리’와 ‘생물’ 과목 등을 가르쳤다. 나보다 나이가 많은 여공도 수두룩했지만 보람이 컸다. 학생들과 이야기해 보면 대부분이 집에 소 1마리 사주겠다며 돈을 모으고 있었다.
이때 동생(김종두 연세대 영문학과 교수)과 원효로에서 자취를 했다. 난 밤늦게 집에 들어가서도 장애인 관련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내게 장애인을 위해 헌신하고 또 그들의 아픔을 나누라는 분명한 사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역경의 열매] 김종인 <4> 첫 직장 홀트복지회에서 살다시피 장애인 돌봐
홀트 여사의 헌신적 사랑에 큰 감동… 지적장애 커플 도와 결혼 성사 보람
홀트아동복지회 재활과장으로 일할 당시의 김종인 교수. 수많은 장애인을 만나며 그들의 아픔을 깨닫는 시간이었다.연세대대학원에서 보건학 공부를 끝낼 무렵 홀트아동복지회에서 직원을 공모했다. 면접을 거쳐 합격이 된 나는 드디어 전공한 특수교육학과 보건학을 현장에서 적용해볼 수 있게 되었다.
홀트아동복지회는 한국전쟁 직후인 1955년, 전쟁과 가난으로 부모를 잃은 아동을 입양시켜주기 위해 해리 홀트씨가 설립했다. 그는 한국 고아 8명을 입양한 것을 시작으로 부인 버다 여사와 함께 자신의 전 재산을 바쳐 고아와 장애인들을 돌봤다. 홀트씨는 아이들이 지낼 곳을 마련하기 위해 1960년대부터 경기도 고양시 일산 지역을 개간해 밭을 일궜으며 숨을 거두기 직전까지 아이들을 정성껏 보살폈다.
이처럼 사랑을 행동으로 보여준 홀트씨의 정신을 이어받아 홀트아동복지회는 입양사업은 물론 아동, 청소년, 미혼모, 장애인, 저소득계층 등에게 다양한 복지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회복지 전문기관으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내가 입사한 1981년에는 홀트씨는 돌아가시고 40대의 딸인 말리 홀트 여사가 자원봉사를 하며 한창 시설을 키워가고 있었다. 난 집이 서울 구의동이었음에도 일산에서 근무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일산에서 구의동까지 가려면 기차를 타고 신촌까지 나와 다시 버스로 갈아타야 했다. 그래서 아예 일산 시설에서 지내다 주말이 되면 집에 가곤 했다.
이때는 일산복지원의 모든 시설이 아주 열악했다. 말리 홀트 여사가 장애인을 돌보는 정성과 사랑이 얼마나 큰지 내가 보기에 혼자 열 사람 몫의 일을 하는 것 같았다. 성격이 불같은 데가 있었지만 장애인 한사람 한사람에 대한 깊은 사랑을 베풀어 큰 감동을 받았다.
당시 장애인과 고아 등 300여명이 함께 생활했는데 그중 80여명은 죽도 떠 먹여주어야 하는 중증이었다. 그 누구도 돌보지 않는, 버려지고 버림받은 장애 아이들이 모두 이곳에서 보살펴지고 있었다.
난 이곳에서 지적장애 원생들을 한명 한명 면담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같은 지적장애인 C씨(30)와 K양(24)이 결혼하게 해달라고 나를 계속 졸랐다. 지적장애인끼리의 결혼이 조심스러워 계속 회피하다 “너희들이 100만원을 모으면 결혼시켜주겠다”고 했다.
당시 C씨는 IQ가 60정도로 시설에서 일을 해 월 1만원 정도의 훈련비를, K양은 죽 끓이는 곳에 근무하며 월 2500원을 받고 있었다. 당시 내 봉급도 10만원 남짓일 때였다.
난 이들이 100만원을 모으기 힘들 것이라 여기고 무심코 한 말이었는데 1년 후 통장에 100만원을 만들어 내 앞에 턱 가져왔다.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알고 보니 이들이 100만원을 만들기 위해 휴지와 깡통을 줍고 보육교사들의 심부름을 해주며 눈물겹게 돈을 모은 것을 알게 되었다.
“얼마나 결혼이 하고 싶으면 이렇게 악착같이 돈을 모았을까. 이들이 결혼이 가능한지 진지하게 생각하고 도와주자.”
난 결혼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이들이 결혼했을 때 다시 지적장애 아이가 나올 확률이 없는지 염색체 검사도 해보고 일산 농장 내에 살집도 마련한 뒤 결혼식 날짜를 잡았다. 양복도 맞춰주고 드레스도 협찬받고 목사님의 주례로 결혼식을 잘 올렸다. 당시 매스컴에서도 이례적인 결혼에 큰 관심을 나타냈다.
이 부부는 주위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 생활보호대상자로 지정돼 도움을 받으며 정상인 아들도 낳았고 홀트에서 계속 성실하게 일하고 있다. 이 부부의 성공적인 결혼 사례는 정신지체, 뇌성마비 등 장애인들도 정상인과 같이 얼마든지 결혼할 수 있음을 내게 깨닫게 해주었고 이후 난 많은 커플을 탄생시키는 데 앞장섰다.
***[역경의 열매] 김종인 <5> 장애인 자립 위한 생활공동체 ‘로고하우스’ 열어
몸으로 부딪치며 장애인들 아픔 이해… 뇌성마비용 미국 특수휠체어면허증 따
1984년 특수휠체어면허증을 따기 위해 미국에 갈 때 입양 어린이 2명을 데려간 김종인 교수. 입양아와 함께 가면 항공료를 지원받았다.홀트복지회에서 장애인을 대하며 몸으로 느끼고 체험한 것들이 내가 대학과 대학원에서 학문적으로 배우고 익힌 부분보다 훨씬 유익했다. 단지 몸이 불편하고 지능이 떨어진다는 이유만으로 가정에서 버림받고, 사회에서 냉대받고 무시당하는 장애인들이 너무나 안타까웠다.
1981년은 유엔이 정한 ‘세계 장애인의 해’였다. 고위공직자 출신인 김한규씨가 홀트복지회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낙후시설 개보수 명령을 받았다. 우리나라도 심신장애자복지법(현 장애인복지법)이 시행되는 첫해로 홀트일산원도 새로운 패러다임을 요구받고 있었다.
시설 신축을 위해 기독교계에도 도움을 여러 곳에 요청했는데 순복음중앙교회(현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님께서 거금을 헌금해 주셔서 직업재활관과 교회, 2개 동을 지을 수 있었다. 말리 여사와 직원 모두가 감사해 했는데 이후 여의도순복음교회 성도들이 매주일 먼 이곳까지 와서 꾸준히 자원봉사도 해주었다.
하루는 숙소에서 잠을 청하려는데 원장이 전화를 걸어 “당장 O군을 이곳에서 내쫒으라”고 엄청나게 화를 냈다. 알고 보니 지체장애인 O군이 일터에서 일하다 지적장애인 M양의 가슴을 만지다 현장에서 들킨 것이다.
사정을 해도 소용이 없어 다음날 짐을 다 싸게 하고 내보내려는데 다른 장애시설로 보내기가 쉽지 않았다. 또 O군은 손재주도 좋아 혼자 자립할 수 있도록 내가 신경을 쓰고 있었기에 일단 구의동 우리 집으로 데려왔다. 그러다 보니 다른 장애인도 우리 집에 오게 됐고 난 집 근처 숙소 한 곳을 임차해 아예 ‘로고(LOGO)하우스’라 이름 짓고 장애인재활공동체를 만들었다. 운영비는 내 봉급을 고스란히 넣었다. 난 이들이 언제까지 사회의 도움만 받아선 안 되며 스스로 자립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그 모델을 만들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10여명까지 늘어난 로고하우스는 연필통 등 목제제품을 만들어 팔아 스스로 생활할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일산에서 퇴근한 뒤 로고하우스에 가서 아이들과 늦은 저녁을 먹곤 했다. 또 집 근처 목욕탕은 문을 닫는 밤 11시 전 1시간은 공짜로 입장을 시켜줘 늘 함께 목욕을 했다.
이때 수많은 장애아들과 몸으로 부딪히며 많은 대화를 했기에 그들이 느끼는 감성과 아픔을 자세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는 이후 내가 대학교수로, 장애인재활전문가로 사역하는 데 탄탄한 기초가 되어 주었다.
홀트에서 말리 여사의 신임을 받던 나는 가끔 해외 장애사설을 둘러볼 기회도 있었다. 선진국의 장애인 복지는 상상 이상이어서 나를 놀라게 했다. 우리나라는 언제쯤 이 수준에 오를 수 있을까 부럽기만 했다.
말리 여사는 1983년 미국 로스앤젤레스(LA) 얼바인에 가서 특수휠체어면허증을 따 오셨다. 그리고 이듬해 나도 가서 면허를 받아오라고 하셨다. 온 몸이 뒤틀리는 뇌성마비 장애는 자세를 잘 잡아주는 특수휠체어가 필요하고 이를 잘 작동시키고 조립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 교육을 3박4일간 받은 뒤 시험을 치르고 면허증을 받게 되는 것이다. 기술적인 부분뿐 아니라 뇌성마비 장애에 대한 이론적인 공부도 병행했다.
LA로 간 나는 대학에서 특수교육 전공을 했기에 지식도 있는 데다 정말 열심히 공부했고 일과 후에 조립법을 복습하곤 해 최종 시험에서 93점을 받았다. 1년 전 말리 여사가 받은 점수는 76점이셨다. 영어도 잘 못하는 내가 그저 열심히 한 것밖에 없는데 높은 점수를 받은 것이다.
이 93점 특수휠체어면허증 성적표는 내 인생을 또 한번 놀랍게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이때는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역경의 열매] 김종인 <6> 88장애인올림픽, ‘복지정책 연구’ 새 진로 계기로
“법·제도 개선” 장애인 목소리 터져나와 홀트 사역 마감… 사회복지정책硏으로
유희상 선수가 우승한 1987년 오이타국제휠체어 마라톤대회의 김포공항 환영식. 중앙이 홀트선수단장으로 참가한 김종인 교수.88서울올림픽과 함께 서울장애인올림픽대회(88서울패럴림픽)도 열렸다. 이 때까지 장애인문제에 관심을 갖지 않던 국민들이 한국에 모인 세계 각 국의 장애인들의 의욕적인 모습과 시합광경을 보면서 장애인에 대한 인식개선을 하게 됐다. 또 사회복지에 영향과 도전을 주었다.
당시 우리나라는 패럴림픽에 어떤 종목이 있는지조차 모르다 주최국으로서 체면을 지켜야 하기에 장애인스포츠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나는 장애인이 가장 많이 사는 우리 시설에서 ‘홀트선수단’을 창단하자고 미리 제안해 감독을 맡았다. 그래서 1986년 인도네시아에서 개최된 장애인아세안·극동게임과 87년 일본 오이타 국제휠체어 마라톤에 선수들을 이끌고 참여했다. 이때 유희상 선수가 하프마라톤에서 우승했다.
홀트스포츠선수단은 중증뇌성마비 장애인 스포츠종목인 보치아 종목을 선택해 집중훈련을 했다. 최고동, 송경수 선수는 둘 다 일반휠체어를 혼자 탈 수 없는 1급 중증 뇌성마비장애인인데 보치아 경기는 신체적 재활효과가 컸다.
난 이들을 선수로 연습시키면서 재활효과까지 나타나는 결과를 기록해 ‘장애인 스포츠가 재활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논문도 발표했다. 최고동 씨는 국가대표 선수로 선발되어 서울장애인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수상, 국위선양과 함께 체육연금대상자가 되어 지금도 혜택을 받고 있다.
서울장애인올림픽개막이 3달 정도 남았을 당시 홀트아동복지회 김한규 회장님이 나를 호출했다. “김종인 과장, 내가 88장애인올림픽 실무부위원장을 맡았는데 당신이 문화예술부분 장애인작품전시회를 좀 맡아 주세요.”
갑자기 장애인작품전 담당관이 된 나는 시각장애인이 만든 도자기, 발로 짠 모자, 입으로 그린 동양화 등 재활극복의지가 담긴 600여점의 작품을 장애인올림픽기간에 전시했다. 연 인원 10만명에 달하는 국내외 인사가 관람해 성황을 이뤘다. 서울패럴림픽(영문판)소식에 ‘한국장애인예술가들의 영혼의 걸작품’이라고 호평을 받았으며 국내외 언론에도 30여차례 보도돼 장애인올림픽이 체육행사만이 아니라 문화행사로서의 위상도 드높이는 창구가 되었다.
장애인올림픽이 개최되면서 그동안 집에서 움츠려 지내던 장애당사자의 욕구가 거침없이 터져 나왔다. 이 장애인올림픽 국제행사는 집이나 시설에서 격리되어 있던 장애인의 자존감을 높이 세워 주었기 때문이다.
한국지체장애인협회가 결성돼 법인화 작업에 들어갔다. 장애자(者)를 장애인(人)으로 바꾸어달라는 장애당사자의 목소리를 함께 높였다. 장애인수를 정확히 파악해달라고 정부에 요청하는 한편 장애등록제의 필요성을 정부와 장애인 모두에게 요구했다.
이런 노력의 결과로 1989년 ‘심신장애자복지법’을 ‘장애인복지법’으로 개정하게 된다. 나는 이런 여러 가지 장애인 문제에 관여하면서 장애인올림픽을 계기로 새 길을 걷게 된다. 하나님께서 내가 홀트의 현장사역을 마감하고 이제 또 다른 장애인재활복지정책과 제도에 헌신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어 주신 것이다.
홀트의 김한규 회장이 13대 국회의원에 당선돼 이곳을 사임하게 되면서 한국사회복지정책연구원을 함께 열자고 제안한 것이다. 갈등도 있었지만 홀트라는 울타리보다 아직 초보 단계인 한국 장애인문제에 더 열정을 쏟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실 일이란 확신이 있었다. 나는 새롭게 문을 연 연구원의 상임이사와 사무국장으로 장애인관련법과 제도개선을 포함한 사회복지정책 개발에 헌신하게 되었다. 이 분야의 일은 할 일이 너무 많았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1992년 여름, 말리 홀트 여사가 전화를 걸어 꼭 만나고 싶으니 일산으로 와 달라고 했다.
***[역경의 열매] 김종인 <7> 한국엔 소개 안된 인간재활학 박사 뒤늦게 도전
현지서 언어 지도 ‘미국 아버지’ 덕분… 영어실력 부족한데도 전과목 A학점
미국 유학 시 부족한 영어를 세심하게 지도해 주고 리포트도 체크해 준 미국 기드온협회장 딕네스씨(왼쪽). 김종인 교수는 그를 ‘미국 아버지’ 라고 불렀다.말리 홀트 여사는 자신이 안식년을 맞아 지난 1년간 미국 노던콜로라도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돌아왔다며 나에게 이 대학서 공부해볼 것을 권했다.
“재활과 특수교육 두 가지 전공으로 공부했는데 미스터 김도 공부하면 어때요. 내가 입학허가서와 장학금을 받아줄게요.”
너무나 갑작스런 일이라 당황한 나는 일단 생각해보고 연락하겠다고 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미국 휠체어면허증을 취득할 때 내 성적이 우수했던 것을 기억해 추천한 것 같았다. 사실 내 영어는 그리 신통치 않았다. 그녀는 한국을 위해 국내엔 아직 소개된 적이 없는 ‘인간재활학’(Human Rehabilitation)을 공부해 보라고 재차 권했다.
용기를 냈다. 박사 학위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말리의 추천은 강력했고 토플시험 없이 입학허가서가 날아왔다. 대사관에서 비자를 받아 1993년 1월 4일, 37세의 때늦은 나이로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인간재활을 전공하는 새로운 길을 하나님께서 열어 주신 것이다.
눈 덮인 록키산이 있는 콜로라도에서 첫 여장을 푼 곳이 송요준 장로님 댁이었다. 송 장로는 내가 공부할 노던콜로라도대학 메디칼센터 의사이자 교수였다. 학교에 가니 지도교수가 정해져 있었는데 박사과정은 토플성적이 없으면 안 된다고 했다. 갑작스런 상황에 막막했다. 영어공부를 해야 하는 것이 절대 절명이었다.
송 장로님께 이 문제를 상담하니 그릴리의 기드온협회장 딕네스씨를 소개해 주었다. 난 이분을 ‘미국 아버지’(America Dad)라 부르며 영어를 지도받기 시작했다.
“주님. 제게 영어 방언을 허락해 주세요. 지혜를 주셔서 토플 점수가 제대로 나와 한국으로 돌아가는 망신을 당하지 않게 해 주세요.”
이 무렵 내가 매일 외쳤던 절규이자 기도였다. 난 경상도 사나이라 안 되는 발음이 많았다. ‘L’ ‘R’ 자 구분이 안 되고 ‘쌀’ 과 ‘살’ 발음도 잘 되지 않았다. 딕네스씨는 원래 미국 대학 영어영문학과에서 석사를 받고 월남전에도 참여한 분으로 아주 고급영어를 구사했다. 이 분의 영어 지도는 내 실력을 빠르게 향상시켜 주었다. 내가 작성한 리포트는 어김없이 딕네스씨의 검증을 거쳐 제출했는데 신기하게도 언제나 A학점이 나왔다.
죽어라 공부한 토플시험에서 537점을 받아 일단 조건부 박사과정 학생이 되었다. 당시 입학 자격은 550점이었다.
송 장로님은 내가 학교에 입학한 직후부터 졸업하고 나오는 날까지 한인 성경공부반을 만들어 매주 신앙지도를 해주셨다. 고비마다 하나님은 기도를 요구하고 또 필요한 분들을 붙여주셨다. 로리 카트만 여사는 인자한 미국 할머니다. 로리는 학과 행정실 담당 직원으로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적당히 부를 이름이 없어 ‘맘(Mom)’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후 정말 어머니 같이 따뜻하고 헌신적인 사랑으로 나를 도와 주셨다.
교수들의 생리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그녀는 내가 졸업 논문심사 날짜를 받은 뒤 장소와 발표내용을 상의하자 완벽하게 도움을 주었다. 그녀는 내게 20달러만 달라고 해 케익과 꽃, 심지어 향수까지 뿌려놓는 멋진 심사장소를 만들어 주었다.
하나님께서는 박사과정 졸업까지 2년 9개월 간 90학점을 올 A로 이수하고 졸업하는 영예를 선물로 주셨다. 재활학 박사과정 68학점과 노인학 22학점을 추가로 취득해 노인전문가 자격증까지 받은 것이다. 이렇게 빨리, 이렇게 많은 학점을 딴 경우는 내가 처음이라고 했다.
나의 한국인 최초 인간재활학 박사 학위는 그 첫 문을 말리 홀트 여사가 열었지만 이후 여러 명의 천사들이 협력하고 응원해 만든 기적의 열매였다.
***[역경의 열매] 김종인 <8> 지도교수 “영적 소명 찾아주는 재활 사역 해달라”
울프 박사 지도로 ‘통전적 재활’ 눈 떠… 넓어진 시야에서 장애인 문제 연구
박사학위 수여식에서 지도교수인 울프 박사(오른쪽)가 김종인 교수에게 박사학위 후드를 걸어주고 있다.1996년 5월 8일은 내 생애 가장 감격적인 날이었다. 노던 콜로라도 컨벤션센터에서 박사학위 수여식을 마치니 유학생활을 도와준 감사한 분들이 모두 축하차 와 계셨다.
유학 내내 성경공부를 인도해 주신 송요준 장로님, 영어와 신앙의 표본이신 미국 아버지 딕네스씨, 주일날에 섬겼던 평강교회 김평덕 목사님 등 무려 40여분이나 와 주셨다. 이분들은 하나같이 한국에서의 장애인 사역을 당부했다.
“김 박사, 하나님께서 먼 이곳까지 보내 학위를 받게 하신 것은 한국 장애인들의 복지 향상과 영혼 구원을 위한 특별한 사명 때문임을 잊지 말게나.”
지도교수 울프 박사는 “존(John·종인의 약자)은 내가 41년 동안 지킨 강단을 떠나며 키운 한국 최초의 인간재활학 박사로 더없이 자랑스럽다”며 이렇게 말했다.
“인간재활학은 장애인을 인간적 측면으로 보는 것이 기본철학이네. 재활방향이 두 가지로 신체적, 정신적 재활에 영적인 재활까지 포함하는 전인적(Holistic) 재활이 있네. 또 다른 것은 의료적, 심리사회적, 교육적, 직업적 재활을 통합하는 통전적(Total) 재활이지. 이 중에서도 직업재활은 모든 생명체에는 소명적 일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이것을 발견·발전시켜 주는 것인데 여기에 최선을 다해 주게나.”
울프 교수는 “결국 영적 소명을 찾아주는 것이 인간 재활의 핵심적 가치”라고 거듭 강조하셨다. 이날 나는 하나님께서 왜 나에게 인간재활학을 공부하게 하셨는지 울프 교수를 통해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학위 수여식날 밤, 11시가 넘어 숙소로 돌아온 나는 흥분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만감이 교차했는데, 갑자기 한국에 계신 어머니가 떠올랐다. 토플 성적도 없이 용감하게 유학 온 내가 박사학위와 미국 노인전문가 자격증을 동시에 받고, 학위수여도 조기에 받을 수 있게 된 것은 어머니의 기도 때문이라는 깨달음이 온 것이다.
수시로 철야기도를 하시고 매일 새벽마다 기도하는 어머니의 기도에 응답한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눈물로 꼬박 밤을 지새웠다. 어머니의 기도는 위대했고, 그 기도 덕분에 오늘을 맞이했음을 절절히 감사했다. 또 말리 홀트 여사에게도 고마웠다. 그저 한국 장애인복지 향상을 위해 직원도 아닌 나에게 유학의 길을 열어 준 것이다.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천안에 있는 나사렛대학에 나가야 했다. 유학 중 한국을 방문했을 때 나사렛대 재활선교학과에서 교수임용 면접을 보고 왔는데, 바로 임용이 됐음을 통보받은 것이다.
한국사회복지정책연구원 일에도 복귀한 나는 좀 더 넓은 시야에서 장애인 문제를 연구해 나가기 시작해야만 했다. 우리 연구원 사무실은 서울시청 앞 백남빌딩에 있었다. 난 유학가기 전 장애인들이 생존권 보장과 종합복지대책 수립을 요구하며 펼치는 시청 앞 시위를 매일 목격하곤 했었다.
특히 휠체어를 탄 중증 장애인이 리프트 고장으로 추락하는 사건이 일어난 후 장애인 이동권 문제는 단연 이슈였다. 장애인신문, 장애인복지신문 등이 앞다투어 창간됐다. 이 신문들은 학보사 편집국장 출신인 나에게 재활상담과 칼럼 연재를 요청했었다.
나는 장애인의 애환과 삶의 처절한 고통을 매주 여론화시켰다. 이때 사회복지 정책을 학문적으로 배워 현실과 접목할 필요를 느껴 숭실대 대학원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했었던 것이다.
당시 어윤배(세문안교회 장로) 교수님을 지도교수로 모시고 지방자치시대에 장애인 복지 발전 방안에 대한 연구를 한 것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었다. 어 교수님은 중소기업과 복지국가에 대해 탁월한 식견이 있는 분으로 내가 유학할 때 콜로라도에 직접 찾아와 기도와 격려를 해주셨다.
***[역경의 열매] 김종인 <9> 장애인 대상 라디오 방송에 26년 ‘최장수 출연’
중증 장애인 희망·복음 전파 통로로… 방송 덕분에 시민교회 희망부도 탄생
1989년 당시 극동방송 장애인 생방송 프로 ‘희망의 구름다리’에서 정은주 아나운서와 함께 진행을 하는 김종인 교수(왼쪽).이야기가 좀 되돌아가지만 유학가기 전 일이다. 극동방송 조완순 PD가 장애인 환우 대상 프로그램인 ‘희망의 구름다리’를 맡았다며 방송진행을 내게 요청했다.
“안 됩니다. 경상도 사투리가 강한데 어떻게 진행합니까?”
“장애인선교단체연합회에서 선생님을 추천받았거든요. 일단 진행 멘트를 해보시고 결정하시지요.”
당시 황영일 편성국장 앞에서 심사를 받았는데 “목소리와 말씀 내용에 진정성이 있어 전문 진행자로 괜찮다”고 했다. 이때부터 유학을 떠나기 전인 1992년 12월 31일까지 ‘희망의 구름다리’를 생방송으로 진행했다.
이 방송은 유학을 다녀와서도 계속했다. 지금은 ‘참 좋은 내 친구’란 프로로 바뀌었는데 요즘도 매주 화요일 ‘기독교와 장애인 코너’에 출연하고 있다. 극동방송 진행자로, 칼럼리스트로 참여한 햇수가 무려 26년이 넘어 최장수 출연자 중 한 사람이 된 것이 감사하다. 당시 ‘희망의 구름다리’는 중증장애인의 사연 소개와 장애인의 정보 전달로 인기를 끌었다.
거동이 힘든 중증 장애인들은 라디오가 친구다. 특히 같은 장애인들의 소식과 정보를 접하며 마음의 위안과 의욕을 얻고 복음전파의 통로가 됨을 절감한다. 나는 이 극동방송을 진행한 것이 계기가 되어 KBS 제1라디오 장애인 대상 프로그램 ‘내일은 푸른 하늘’에도 매주 출연했다. 이후 유학을 가서도 KBS 해외통신원으로 미국 재활계 소식을 일주일에 한 번씩 방송했다. 미국의 장애인 교육과 선진 재활 정책도 소개했다.
이런 연유로 KBS에서 장애인 대상 ‘사랑의 소리방송’을 설립하며 세미나를 열 때 발제를 요청받아 한국을 방문, 미국의 장애인 전문채널 인터치방송을 소개했다. 이때 장애인대상 방송의 중요성을 역설, 지금의 KBS-3 라디오 탄생에 힘을 보탠 것은 보람으로 여긴다.
방송활동 덕분에 탄생된 것이 바로 당시 내가 출석하던 서울 능동 시민교회 희망부이다. 다운증후군 명수와 뇌성마비 은희, 두 명이 이 시민교회 주일학교에 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아이들은 주일학교에서 완전 왕따였다. 친구들에게 늘 놀림을 받았다.
이를 보다 못한 나는 이 두 명의 어린이와 함께 ‘희망부’를 만들어 따로 예배를 드렸다. 이것이 시초가 된 서울 시민교회 희망부는 점점 발전을 거듭해 오늘날 장애인을 위한 모범적 교회로 소개되고 있다.
이제 희망1부는 아동과 청소년 장애인이, 희망2부는 성인부터 장년 장애인이 예배를 드린다. 장애인만 98명, 교사 95명, 가족까지 모두 출석하는 교회로 이것이 시민교회 부흥의 초석이 되었다.
서울 시민교회는 현재 주간 보호작업시설, 보호작업장 등 장애인 재활과 복지, 선교의 요람이 되고 있어 그 첫 돌을 놓은 나로서는 정말 기쁘고 감사하기 이를 데 없다.
선교재활학 교수로 임용 받은 천안의 나사렛대학교에 첫 출근해 보니 대학이라고 하기엔 규모가 아주 작고 시설도 열악했다. 건물도 달랑 1개동에 행정실과 강의실, 교수실 등 모든 것이 모여 있었다. 한국 나사렛교단에서 운영하는 이 대학에서 재활분야를 전공한 교수가 국내에선 없었기에 내가 임용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처음으로 이 학과를 만들고 초빙해준 나사렛대학교가 나로선 너무나 감사했다. 첫날 4층 교수실로 올라간 나는 거동이 불편한 근육이양증 학생의 전화를 받았다. 나와 상담을 하고 싶은데 계단을 못 올라온다고 했다.
난 1층에 내려가 학생을 업고 4층 교수실까지 올라왔다. 한국에서 그것도 장애인재활을 가르치는 대학에서 엘리베이터가 없는 ‘장애인 장벽’의 현실을 절절히 체험하는 순간이었다.
***[역경의 열매] 김종인 <10> 대학에 ‘장애학생 도우미’ 신설하자 자원자 몰려
서로 도우며 공부하는 전통 세워 보람… 점자도서 등 정부 지원금 12억 받아
1998년 나사렛대학교 인간재활학과가 주최한 학술캠프 후 학생들과 함께한 김종인 교수(두 번째 줄 왼쪽 두 번째).미국에서 인간재활학을 공부한 뒤 대학교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다. 이제 한국도 국민소득이 높아지면서 장애인 재활의 중요성이 대두되었고 이를 도울 많은 전문가들이 필요했다.
나사렛대학교 재활선교학과 교수에 임용돼 1996년 가을학기부터 강의를 시작했다. 당시 학과장 전석균 교수로부터 학교 상황을 듣게 되었다. “첫 신입생은 주야간 정원이 80명인데 52명밖에 안 왔어요. 그래서 야간을 없애는 정원 조정을 했지요.”
난 재활선교학과가 재활학인지 선교학인지 정체성이 모호하고 경쟁력이 별로 없어 신입생 유치에 애로사항이 있는 것으로 분석했다. 그래서 신민규 기획처장(현 총장)을 찾아가 내가 전공한 인간재활학을 한국 최초로 나사렛대에 접목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말씀드렸다.
“김 교수님. 아주 좋은 생각입니다. 교육부에 가서 학과 명칭변경 승인을 받도록 합시다.”
함께 교육부에 가서 재활선교학과를 인간재활학과로 바꾼다니 교육부 담당 주무관이 “인간재활학, 참 희한한 학과네요. 어떻게 학과 이름에 인간이라는 명칭이 붙나요?”
그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눈치였다. 나는 장애인도 인간이라는 관점, 신체적·정신적·영적 재활까지 포함하는 전인적 재활까지 내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주무관은 뭔가 개운치 않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명칭변경을 허락했다.
학술진흥재단에 박사학위 신고를 하러 갔을 때도 ‘인간재활학 박사’라고 적으니 담당 직원이 “인간재활학이라는 학문이 있어요?”라며 껄껄 웃더니 “재활학 박사로 하시지요”라고 해 그렇게 등록이 돼 있다.
인간재활학 전공자로 장애인이 눈에 너무나 잘 띈다. 당시 나사렛대에 근이양증 창훈이와 뇌성마비 은일이를 비롯한 지체장애인 3명과 수화 통역 서비스가 필요한 청각장애인, 점자 도서나 음성 도서가 요구되는 시각장애인이 입학해 공부하고 있었다.
난 이들이 정상적으로 공부하기 힘드니 학교 내에 장애학생 도우미 제도를 신설했다. 의외로 반응이 좋았다. 돕겠다는 학생들이 자청해서 나왔다. 비장애인과 장애인이 서로 도와가며 공부하는 모습은 보기가 좋았고 이 전통은 지금까지 아주 잘 이어지고 있다.
강의를 하면서 두 가지가 꼭 필요한데 학교 재정이 미약해 이루지 못했다. 첫 번째는 시각장애·청각장애 학생에게 점자나 음성 도서, 수화 도서가 필요했지만 갖추어주지 못했다. 두 번째는 지체장애 학생들이 강의실을 오가려면 엘리베이터 설치가 필요했지만 너무 비싸 엄두를 내지 못했다.
난 새벽마다 하나님께 이 두 가지 기도제목을 놓고 기도했고 주위에 기도를 부탁드렸다. 하나님은 기도를 정확히 응답해주셨다. 나사렛대가 교육부에 ‘점자·음성·전자 교육정보센터 설치 프로젝트안’을 올렸는데 이것이 선정돼 12억6000만원의 지원금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 자금 중 3억원을 들여 시각, 청각, 지체 등 모든 유형의 장애인이 한 곳에서 학업을 수행할 수 있는 최첨단 장애인 무장벽(Barrier Free) 강의실을 만들었다. 엘리베이터 역시 당장은 아니었지만 몇 년 후 “천국에는 계단이 없습니다”라는 캠페인을 펼쳐 설치를 이루었다.
기도가 나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약자와 소외된 자를 위한 내용이라면 하나님은 반드시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분이란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김대중정부가 들어서면서 지방대학 특성화 어젠다를 설정하고 교육부에 제출하라는 제의를 받았다. 난 나사렛교단의 정신인 ‘긍휼 사역’을 바탕으로 재활복지 특성화를 설정하자는 의견을 제시한 뒤 장기 발전 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역경의 열매] 김종인 <11> 비장애인들 5㎞ 휠체어·안대 장애체험 행사
참가자들 “장애를 이해했다” 목소리 ‘의회 정치대학’ 설립 지방의회 진출 교두보
미국에서 귀국한 뒤 기독교TV에 출연, 해외 장애인 재활 소식을 전했던 김종인 교수(오른쪽)는 MBC ‘칭찬합시다’를 계기로 활발한 방송 활동을 펼치게 된다.나사렛대학교를 재활복지 특성화 대학으로 만들겠다고 다짐한 뒤 나는 장애인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장애인 인식 개선이 절실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1998년 장애인의 날을 맞아 대대적인 ‘장애체험 행사’를 계획했다.
그것은 학교에서 출발, 천안역을 거쳐 천안버스터미널까지 무려 5㎞를 휠체어장애체험, 안대를 하고 걷는 시각장애체험, 무언의 청각장애체험을 하는 것이었다. 나사렛대학이 설립 후 최초로 마련한 장애체험에는 미국인 선교사 백위열 총장과 한국 최대 장애인 조직인 지체장애인협회 장기철 회장이 선두에 섰다. 장애인 수십명이 자연스럽게 행사에 동참했고 인간재활학과 학생들이 앞장섰다. 또 재학생 300여명도 동참했다.
한마디로 성과가 아주 좋았다. 여기저기서 눈물을 흘렸다. 보행 중 다리를 다치고 부딪쳐 상처가 났다고 했다. 답답해 죽는 줄 알았다고 했다. 장애체험의 수고를 한 만큼 더 크고 더 깊게 장애를 이해했다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도 미국에서 무려 3일 꼬박 안대를 하고 시각장애인을 체험했던 적이 있다. 그에 비하면 두세 시간 체험은 쉬운 것이었지만 결코 작지 않은 5㎞를 장애체험한 것을 지금도 기억하며 이야기하곤 한다. 행사 후 서로 어려움을 토로하는 모습에서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하나 되는 통합사회의 아름다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 행사는 사회의 관심을 끌었고 나사렛대 설립 이후 가장 많은 언론 보도가 나왔다.
장기철 회장은 행사 후 새로운 것을 요청했다.
“김 교수님, 최근 장애인 정책 패러다임이 장애 당사자 중심으로 바뀌고 있는데 정작 장애인들은 학력이 낮습니다. 장애 당사자가 국회의원이 되거나 지방의회에 많이 진출하려면 ‘의회 정치대학’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만들어주세요.”
그의 요구는 현실화됐다. 난 한국지체장애인협회 의회 정치대학 교학처장을 맡아 장애인의 지방의회 의원 진출의 교두보를 놓는 데 기여할 수 있었다. 이는 내 생에 큰 보람 중 하나다. 이곳에서 난 법학석사 학위를 갖고 장애인 인권운동을 하던 우주형 교수를 만났는데 그는 지금 나사렛대학 인간재활학과 교수이기도 하다. 지체장애인협회에서 통계를 내보니 2014년까지 지방의회나 자치단체장 등으로 진출한 장애인이 87명이라고 했다. 장애인들이 사회 곳곳에 더 많이 진출해야 할 것이라고 본다.
99년 11월 중순, 한 통의 전화가 교수연구실로 걸려왔다.
“릴레이로 이어지는 MBC ‘칭찬합시다’입니다. 한 인사가 교수님을 칭찬해서요.”
나를 추천한 이는 양평 은혜의집 최재학 원장이었다. 최 원장은 박인숙 사모님과 오갈 데 없는 장애인 30여명을 지극한 정성과 사랑으로 돌보고 계셨다. 그러나 90년 초, 은혜의집을 설립할 때 주변에서 장애시설이 들어온다는 이유만으로 전입신고조차 못해 애를 먹고 있었다. 이때 내가 문제를 도와주고 상담해 주었는데 고마웠던지 ‘칭찬합시다’의 주인공으로 나를 추천한 것이다.
당시 인기였던 이 방송의 힘은 컸다. 방송 후 난 하루에 10건 이상의 상담 요청을 받았다. 사명으로 여기고 한 건 한 건 최선을 다했다. 한 인사가 “김 교수님, 일복이 터졌네요, 얼마나 힘드세요?”라고 했지만 나로선 가진 지식을 나눌 수 있어 감사했다.
MBC ‘칭찬합니다’ 출연 이후 장애인식 개선 프로그램인 ‘손에 손잡고’가 신설됐고 나는 더블 MC로 기용됐다. 이 프로그램은 장애인 선수 한 명과 연예인 한 명이 휠체어를 타고 장애를 체험하는 것으로 시청자들에게 장애인 이동권 문제의 심각성을 일깨워주었다. 동시에 잔잔한 감동도 주었고 무엇보다 장애인 인식 개선에 큰 몫을 해 주었다.
***[역경의 열매] 김종인 <12> 재활산업 전문인력 양성 ‘누리사업’ 선정
일반대학원 재활학 박사과정 신설… DPI 수화통역 서비스대학 선정
나사렛대 인간재활학과 개설 20주년을 맞아 지난 24일 열린 기념행사. 졸업생과 재학생이 한자리에 모였다.나사렛대학이 장애인체험행사로 언론에 자주 소개되고 또 재활복지특성화 대학으로 정부지원을 많이 받으면서 장애학생 선호도가 높은 대학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장애학생이 사용하는 언어인 ‘수화’와 ‘점자’는 대학 어디에서도 가르치지 않았다. 당시 백위열 총장께 ‘수화통역학과’와 ‘점자 문헌정보학과’의 설치를 제안해 국내 최초로 두 학과를 개설했다. 아울러 재활공학과를 만들어 학과장을 지냈고 학문적 특성화를 위해 재활복지대학원도 설립, 초대 원장에 임용됐다.
장애인복지, 직업재활, 재활스포츠, 재활심리, 재활공학, 언어치료, 국제수화통역 등 하나같이 특성화된 학과를 구성했다. 특히 국제수화통역학과는 한국수화는 물론 미국과 중국, 일본수화까지 다 연마할 수 있게 했다. 그러자 이런 학과가 없는 중국, 일본의 농인 유학생이 대거 유학을 오는 학과로 국제적 각광을 받았다.
2003년 노무현 정부가 들어설 당시 나사렛대학교는 장애인 학생수가 143명으로 장애학생 특성화대학으로 자리를 잡았다. 장애학생 도우미 봉사단은 정부지원 없이도 봉사자가 345명일만큼 활동이 왕성했다. 봉사단장 조화정 씨는 수화통역 봉사를 했는데, 훗날 통역서비스를 했던 농아인과 결혼까지 하게 된다.
새 정부는 지방대학들이 발전할 수 있도록 혁신역량 강화사업, 이른바 누리(NURI)사업을 제안하라고 했다. 따라서 우리 대학도 재활학부와 특수교육학부가 중심이 되어 백석대학(특수교육)과 순천향대학(특수교육), 한서대학(의지 보조기)과 컨소시엄을 맺어 ‘재활산업 전문인력 양성사업단’을 꾸렸다.
그리고 내가 단장이 되어 프레젠테이션을 하며 충청도 23개 팀과 자웅을 겨루었다. 최종 2∼3개 팀이 뽑힌다는데, 힘없는 우리 사업단은 선정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소문도 들려왔다. 최종 발표는 수안보에서 했다. 일주일 전부터 매일 새벽기도를 하며 우리가 누리사업에 선정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최종 발표장에 들어서니 평가위원장을 중심으로 7명의 심사위원이 앉아 있었다.
“발표를 5∼7분간 하시고 질의응답을 받겠습니다. 시작하세요.”
나는 마포대교에서 장애를 비관해 자살을 시도했던 한 장애인이 나사렛대학교에 와서 새로운 희망을 갖고 공부해 자립해 나가는 내용을 서두에 넣어 재활복지의 현주소와 전문인력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설명에 몰입돼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앞을 보니 평가위원장도 공감하며 눈가에 이슬이 맺히고 있었다. 프레젠테이션을 무려 25분이나 한 것을 나중에 알았다.
한 달 후 드디어 발표가 났다. “충청권 나사렛대학 재활산업 인력양성사업단에 년 20억원씩 5년간 총 100억원을 지원한다”라고 적혀 있었다. 선정된 3개 사업단 중에서 우리가 제일 먼저 이름이 올라 있었다. 난 감격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를 연발했다. 소외되고 고통받는 장애인들을 위한 하나님의 은혜가 기적을 만들어내는 순간이었다.
2003년부터 2008년까지 펼친 이 사업은 큰 열매를 맺었다. 먼저 학문적으로 일반대학원 재활학박사 과정과 지적장애인대학 과정을 신설했다. 산업 특성화로는 재활공학과를 중심으로 재활복지산업의 새로운 진원지로 전진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여기에 세계 장애인대회(DPI)의 수화통역 서비스대학으로 선정되는 것은 물론 일본 고베대학, 중국 북경연합대학, 미국 노던콜로라도 대학 등과 함께 장애인재활복지를 공고히 세워 나갔다. 2009년 교육부에서는 누리사업을 총평하면서 특성화 부분에서 나사렛대학교를 최우수 대학으로 선정해주어 교육부장관상을 수상하는 영예까지 얻었다.
***[역경의 열매] 김종인 <13> 끼 많던 제자 민휘, 장애 딛고 당당한 배우로
국내 첫 다운증후군 영화배우로 맹활약… 오디션 위해 함께 연습하던 기억 생생
가나엔터테인먼트 김은경 대표(가운데)와 다운증후군 영화배우 강민휘씨(오른쪽)가 함께했다. 왼쪽은 모델 서단비씨.2001년 나사렛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 한창 열리고 있었다. 오후에 신학부 교수 한 분이 나를 찾아왔다.
“있잖아요. 얼굴 닮은 꼴, 이상한 학생이 한 명 들어왔는데 아침부터 혼자 놀고 있네요.”
가서 보니 다운증후군 강민휘란 학생이었다. 다운증후군은 21번째 염색체가 하나 많은 지적장애의 대표적 유형의 하나다. 당시는 시각, 청각, 지체장애만 장애학생 특별전형 제도가 있었고 지적장애인은 해당되지 않았다.
그런데 2001년 입시에 신학부 야간이 미달되면서 무시험 전형으로 민휘군이 입학하게 된 것이다. 신학부 교수님은 이 학생이 어떻게 신학이라는 학업을 이수할지 걱정된다며 긴 한숨을 쉬었다. 일단 학교에 입학했으니 1년 후 내가 가르치는 인간재활학과로 전과하기로 했다.
강민휘군의 인간재활학과 수업엔 에피소드가 많다. 그는 체육시간을 가장 좋아했고 특히 농구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골 킬러였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우선하는 경향이 강했고 컴퓨터 강의시간도 주도했다. 다른 교과목 시간은 이해가 되지 않아 장난을 치거나 때로는 잠을 못이겨 코고는 날도 있었다.
장애학생 1명과 비장애학생 3명이 함께 생활하는 기숙사 자립통합 학습생활관에는 인간 재활학과 동급생 안익훈 학생이 민휘의 멘토였다. 하지만 민휘는 자기가 오히려 익훈이의 멘토라고 우겼다.
그런데 민휘는 언어발달을 촉진하기 위해 배운 플루트가 가히 수준급이었다. 학교축제 등에서 그가 플루트로 ‘당신은 사람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을 연주하면 환호성이 터졌다.
한번은 극동방송 출연 차 갔다가 가나엔터테인먼트 김은경 대표를 만났다. 김 대표가 장애인 연기자를 키우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민휘를 소개했다. 그 후 3개월이 지났을 때 한 영화사 감독이 다운증후군 지적장애인을 찾고 있다고 했다. 오디션 내용이 가요 ‘진정 난 몰랐었네’를 모션을 취하며 연기하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천안 대학근처 노래방에 민휘를 수시로 데려가 연습을 시켰다. 오디션 당일에는 함께 가지 못했지만 내내 간절하게 기도했다.
“하나님 민휘의 하나 더 있는 염색체가 희망의 염색체가 되게 해 주옵소서.”
그런데 민휘는 박흥식 감독의 ‘사랑해 말순씨’라는 영화에 결국 조연으로 캐스팅 됐고 그 역할도 잘 연기했다. 이어 KBS-1TV 인간극장 5부작의 주인공도 됐다. ‘천사 배우가 되다’는 이 프로는 수많은 장애인 자녀를 둔 부모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었다.
나는 민휘가 2004년 데뷔 때부터 영화, 드라마, 뮤지컬 모든 장르를 넘나들며 연기자로서 활동하고, 급기야 2014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을 수상한 것은 나사렛대학교 교육의 덕택이라고만 생각하지 않는다.
지적장애인이 갖고 있는 한계점을 독실한 크리스천인 김은경 대표의 헌신과 희생, 보살핌이 이뤄낸 훈훈한 결실이었다. 민휘도 자신의 한계를 훌륭히 극복하고 인간승리의 드라마를 펼쳐나가고 있다고 믿는다.
모든 생명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서 희망염색체 영화배우 강민휘를 통해 당신의 귀한 뜻과 소명을 이루어 가신다고 여긴다. 원래 불교신자인 민휘는 이제 성가대원으로, 가족구원의 도구로 복음을 전하고 있다. 이 가운데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발견하며 감사와 영광을 돌리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민휘가 몸담은 대학에서 그의 성공 모델을 통해 지적장애와 자폐성 장애발달 장애인에게도 고등교육의 문을 활짝 열어주도록 만들어 주셨다. 이처럼 하나님은 지극히 작은 자인 지적장애인을 가장 귀히 보시고 사랑하신다.
***[역경의 열매] 김종인 <14> “내가 최고” 교만함 생기자 하나님의 시험이…
도움 줬던 제자가 되레 학교에 거짓 제보… 새벽기도·100일 아침금식 끝에 오해 풀려
2003년 6월 12일 정보통신의 날에 장애인 정보통신 기여 공로로 정부로부터 근정포장을 수여받고 있는 김종인 교수(왼쪽).MBC ‘칭찬합시다’의 주인공과 TV 사회자 등으로 인지도가 높아진 나는 누리사업 단장이 되면서 상복도 터졌다. 2003년 6월 12일, 정보통신의 날에 장애인정보통신에 기여한 공로로 정부가 주는 ‘근정포장’을 받았다. 교육부 장애학생 복지지원 평가에도 최우수대학으로 선정됐다.
그러자 갑자기 보건복지부, 노동부, 교육부, 정보통신부 등 정부부처 자문위원으로 위촉받아 왕성하게 활동했다. 곳곳에서 강의요청이 쇄도하는 등 세상말로 정말 잘 나갔다. 그러자 나도 모르게 내가 장애인 관련 분야에서는 최고라는 우쭐하는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나를 고난을 통해 신앙으로 단련시켜 주셨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나 감사한 일이지만 당시로선 너무나 고통스런 사건이었다.
어느 날, 학생상담소장이 갑자기 나를 만나자고 했다. “교수님. 잘 들어 주세요. K란 학생이 교수님에 대해 제보를 했습니다. 그 학생에게 교수님이 어떤 말과 행동을 했는지 서면으로 진술해 보고해 주십시오.”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가 마치 그 학생과 무슨 이성적인 관계가 있는 듯 의심하는 분위기였다. 기억을 살리니 K학생을 만난 일이 있었다.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해 자신도 피해 다닌다며 밥도 굶고 학교에 왔다고 했다. 학생이 울고 있기에 전날 받은 특강비를 주며 위로했던 기억이 났다. 학생상담소장에게 이 말을 했지만 믿지 않는 눈치였다. 내가 돈을 주며 마치 학생을 유혹했던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K학생 역시 비슷한 발언을 했다는 것이다.
정말 미칠 것 같았다. 무엇인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나사렛대에 부임해 IMF를 맞았을 때, 가난한 학생들이 너무 많았다. 적게는 30만원 많게는 300만원까지 학비보조, 연수비를 지원하며 혜택을 준 학생이 13명이나 되었는데 오히려 이런 일을 당하니 어이가 없었다. 학교측도 학생 말만 일방적으로 믿어주는 것이 너무나 서운했다.
주일날 교회 이영식 담임목사께 이 문제를 털어놓고 상담을 요청했다.
“목사님, 제가 고난 속에 있습니다. 학교측이 도무지 제 말을 안 믿습니다.”
“우리 기도합시다. 하나님과 권사님과의 관계가 어떠한지 먼저 점검하세요.”
당시 권사 직분을 갖고 있던 나는 그날부터 뜨겁게 새벽기도를 시작했다. 새벽기도 8일 만에 기도 가운데 “하나님은 교만을 제일 싫어하시는데 내가 하나님이 주신 영광을 가로채 우쭐대고 있었으며 하나님께서 이 고난을 통해 이 사실을 깨닫게 해주시려 한다”는 응답을 받게 되었다.
그날 바로 일천번제를 결정했다. 아침금식 100일도 작정해 지키며 “하나님 이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주십시오.”라고 매일 기도했다. 하루도 울지 않는 날이 없었다.
담임목사님도 함께 기도해 주셨고 교회 권사님 여러분이 중보기도팀을 만들어 기도해 주셨다. 결국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해 주셨다.
100일 아침금식을 마친 그날, 학교에서 나의 모든 오해가 풀리는 기적적인 일을 경험했다. K학생이 자신이 장학금을 받지 못하게 된 것이 나 때문인 줄 알고 궁지에 몰아넣으려 했던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나는 다음날 새벽제단을 쌓으면서 하나님께 감사기도와 평생 새벽제단을 쌓을 것을 서원했다. 이렇게 매일 새벽에 무릎 꿇던 나는 2007년 3월 18일, 출석하던 분당영광교회에서 장로장립을 받게 되었다.
나사렛성결교단에서는 최초로 분당 영광교회에서 남자권사로 임직을 받은 것도 축복인데 이제 교수로서 나사렛성결교단 첫 장로가 된 것이다. 고난 속에서 기도하게 하신 하나님은 신앙을 더 두텁게 해 주셨고 기도는 문제해결의 열쇠일 뿐 아니라 축복의 통로임을 확인시켜 주셨다.
***[역경의 열매] 김종인 <15> 산재 장애인에 눈돌리니 재활·자립 연구과제 산적
산재노동자협회 결성 후 순회 특강… 장애인 공부 원하는 박종균씨 만나
지난해 2월 척수장애인 최초로 재활학 박사가 된 박종균씨가 학위 수여식에서 김종인 교수(오른쪽)와 기쁨을 나누고 있다.우리나라 장애인의 패러다임이 변하고 있다. 1970년대만 해도 소아마비가 대표적인 장애였다. 그러나 이제 소아마비는 백신 개발과 예방접종으로 더 이상 발생되지 않는 나라가 되었다. 오히려 교통사고와 산업재해가 장애 발생의 더 큰 요인이다. 2000년 3월, 휠체어에 몸을 실은 이병호란 분이 교수연구실로 나를 찾아왔다. 자신을 산재노동자라고 소개했다. 이어서 그는 임의단체 한국산재노동자협회장을 맡고 있는데 부탁이 있다고 했다
“김 교수님, 산재노동자도 장애인 아닙니까? 회원의 권익 보호와 자립생활을 위해 사단법인 설립을 도와주십시오.”
그날부터 산업재해 장애인 관련 현장 연구를 시작했다. 중도장애인이 겪는 애환과 상실감, 소외로부터 오는 우울증, 심지어 자살로까지 이어지는 산재장애인의 심리사회적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장애수당이나 연금을 받아 경제적으로 빈곤한 상태가 아닌 경우라도 직업재활의 소중함을 산재장애인과 만나 연구하면서 깊이 깨닫게 되었다. 그 결과 2002년 산재노동자협회 단체 조직 결성과 함께 외국의 산재보험 제도, 단체의 역할을 주제로 전국순회 특강을 시작했다. 충북지역 특강을 하는데 한 휠체어 장애인이 강의 후 만나길 원했다.
“교수님, 저는 장애등급 1급 박종균입니다. 공부하고 싶습니다.”
그는 산업체 근무 특례보충역으로 막장에서 현장감독을 하던 중 지하 840m 갱도에서 붕괴 사고로 척수가 손상돼 전신마비 장애인이 됐다고 했다.
“사고 후 2년간은 하반신 감각이 없었고 대소변도 받아냈습니다. 초기 재활 자립생활에 관한 가이드가 전혀 없어 엄청 힘들었습니다.”
그는 산재장애인 당사자로서 자신과 같은 중증장애인의 재활과 자립에 헌신하고 싶다며 도움을 요청했다.
“박 선생이 장애인이 된 것에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있음을 받아들입시다. 그리고 우리 같이 기도하면서 미래를 설계해 봅시다.”
그를 나사렛대 재활복지대학원 장애인복지 전공에 입학시키려 했으나 학사 학위가 없었다. 그는 방송통신대 법학과를 마친 뒤 2008년에 입학했다. 그의 지도교수가 된 나는 그의 뜨거운 향학열, 장애극복 의지에 찬사와 격려를 보내며 관심을 기울였다.
그의 논문을 지도할 때마다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끝마쳤다. 크리스천이 아니면서도 기도를 잘 따라하는 그가 고마웠다. 그는 산재장애인의 사회복귀 방안을 석사학위 논문으로 준비하면서 전국에 있는 산재장애인 200여명을 직접 대면해 사회복귀 요인을 분석하고 대안을 찾는 노력을 했다. 이 자료는 지금도 산재장애인 연구에 활용되고 있다. 석사학위를 받은 뒤 다시 재활학 박사과정 입학을 제안했고 또 인간재활학과 강의 기회도 부여했다. 산재장애인 당사자로 특강 강사가 된 그가 내겐 큰 보람으로 다가왔다.
졸업논문 최종 심사를 하루 앞둔 날, 박종균씨와 연락이 닿지 않아 그의 집으로 찾아갔다. 논문 마무리로 2박3일 동안 뜬눈으로 지새우다 욕창과 허리통증으로 눕지도 일어나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의 몸을 잡고 추켜올리는 순간 유혈이 낭자한 방석과 감각이 전혀 없는 하반신을 보면서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우리 둘은 서로 부둥켜안고 실컷 울었다. 그리고 함께 기도했다.
“하나님, 박종균 선생의 육체적 고통이 너무나 심합니다. 치유의 손길로 안수하여 주소서. 논문 잘 마무리되게 힘주시고 축복하소서.”
‘척수장애인의 사회 복귀를 위한 한국형 전환 재활 시스템 모델 개발’이란 주제로 쓴 그의 박사학위 논문이 통과돼 2014년 2월 11일 척추장애인 최초로 재활학 박사가 탄생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였다. 지금 박종균 박사는 독실한 크리스천이 되어 나사렛대 인간재활학과 교수이자 장애인 인식개선 스타 강사로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역경의 열매] 김종인 <16> 장애인 재활·복지 인재육성 노력 ‘열매’ 잇따라
정영오 박사, 몽골에 교육선교사 자원… 美서 귀국 서원선 박사 활동·정착 도와
재활복지전문인력양성센터 소장으로 온 시각장애인 서원선 박사(왼쪽 두 번째)를 김종인 교수(왼쪽 세 번째)와 연구원들이 환영하고 있다.장애인들에게 깊은 관심을 갖고 인재육성의 사명을 주신 하나님께서는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만나게 하시고 또 열매를 맺도록 응답해 주셨다.
현재 몽골국제대학 교수로 사역 중인 정영오(여) 박사는 나사렛대 인간재활학과 1회 졸업생이다. 내게 미국유학을 상담하길래 열심히 조언했고 내가 비상임 원장인 한국사회복지정잭연구원에 근무시키며 유학을 준비토록 했다. 내가 공부한 미국 노던콜로라도대학 대학원 입학허가를 받아 비자를 신청했는데 단박에 비자발급이 거부돼 울상을 지었다.
홀어머니와 사는 정 박사가 가정형편이 아주 어려워 재정보증을 세우지 못한 것이다. 3000만원 은행잔고증명이 필요한데 막막했다. 정 박사와 내가 찾은 해결책은 기도뿐이었다.
“하나님 길을 열어 주옵소서.”
마침 은행지점장으로 있던 친구가 3000만원을 내 구좌에 잠시 넣어 재정보증을 해결할 수 있었다. 그녀는 노던콜로라도대에서 재활상담석사를, 텍사스 오스틴대에서 재활교육으로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졸업 후 미국과 한국의 여러 대학에서 초빙을 받았지만 사례비도 거의 없는 몽골국제대학에 교육선교사로 가겠다고 서원했다.
“김 교수님.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저를 놀랍게 인도해 주셨는데 이제 제가 얻은 지식을 조건 없이 나누고 싶어요.”
인간재활학 제자로서 첫 열매인 정 박사가 참으로 자랑스럽고 예쁘다. 하나님이 보시기엔 더 예쁘실 것이다.
현재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 글로벌재활상담과정 특임교수이자 한국장애인개발원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는 시각장애인 서원선 박사의 경우도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소명을 주심을 알게 한다. 그는 미국 텍사스 오스틴대학원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미시간대에서 박사(재활상담학) 학위를 받고 주정부 재활상담사로서 일하며 경력을 쌓았다. 한국장애인으로서 미국 주정부 정규 공무원으로 일한 인재였다.
박근혜 대통령의 장애인공약 1호인 ‘장애인등급제 폐지’가 이뤄지면 장애인서비스별 판정을 할 수 있는 재활상담사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서 박사는 한국에 꼭 필요한 보물이다. 그는 귀국 후 얻은 직장에서 일방적 해고를 당해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난 내가 관여하고 있는 한국사회복지정책연구원에 재활복지전문인력양성센터란 부설기관을 만든 뒤 서 박사를 소장으로 근무토록 했다. 한국의 재활상담사 양성을 준비한 것이다. 재활상담사 핵심 8과목 중 ‘재활윤리’와 ‘재활상담’ 과목은 서 박사가 직접 개발하고 ‘발달장애인재활상담’과 ‘재활학개론’은 내가 집필했다. ‘장애학’은 장애인재단 서인환 총장이 쓴 뒤 직업능력개발원에 민간자격 신청을 냈다. 그런데 재활상담사는 의료인력이 담당해야 한다며 자격증발급이 거부되고 말았다. 재활상담사에 대한 정부의 포괄적 이해가 없는 것이 안타까웠다.
자신의 지식과 경력을 한국을 위해 사용하겠다며 미국의 안정된 직장도 마다하고 한국에 들어온 서 박사였다. 그런데 한국사회는 그가 시각장애인이라는 단점만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인재가 안정된 직장을 얻지 못해 미국에 돌아가려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자리를 마련해 준 것이다. 서 박사는 점점 실력을 인정받고 발전을 거듭하기 시작했다.
특히 올해 내가 이사로 있는 웨신대학에서 강의할 수 있도록 추천도 해줄 수 있었다. 그는 시각장애인이지만 이제 대학교수로, 공직자로 누구나 부러워하는 삶을 살고 있다. 그가 미국으로 돌아갔더라면 한국으로선 큰 손해가 아닐 수 없었다. 서 박사는 자신이 방황할 때 힘이 돼 준 한 자매와 결혼해 아들을 낳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
***[역경의 열매] 김종인 <17> 발달장애인들 사용 쉬운 ‘세례 앱’ 제안해 개발
밀알재단서 개발비 3000만원 지원… 장애인 선교 장벽 허물어 큰 보람
지난 10월 25일 김종인 교수(맨 왼쪽)가 출석하는 분당영광교회에서 영광부 창립기념 예배를 드리고 자원봉사자 등과 기념사진을 찍었다.예수님 사역을 요약하면 ‘치유’와 ‘영혼 구원’이다. 장애인 전문가인 나는 기독교인으로서 장애인 선교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1977년 설립된 베데스다선교회에서 강의와 봉사를 했고 장애인 계몽 봉사 전도를 모토로 설립된 밀알선교단에서도 대학 동아리를 섬겼다. 2000년대 초에는 김일권 목사님이 설립한 재활선교신학교 학장으로 재활선교사를 양성하기도 했다.
장애인 복음전파에 세 가지 두꺼운 장벽이 있다. 첫째, 장애인들을 교회에서 환영하지 않고 오히려 방해된다며 예배에 잘 참여시키지 않는 장벽이다. 둘째, 확대 주보나 점자 주보, 수화 통역사가 없어 주일학교 운영 및 예배 등 의사소통의 장벽이 있다. 셋째, 휠체어장애인이 도저히 접근이 불가능한 건축구조물의 장벽이다.
난 이런 점들을 개선하기 위해 언론 기고와 강연을 통해 강조하곤 했지만 항상 한계에 부딪쳤다. 아울러 한국이 지식정보사회가 되면서 장애인선교 패러다임도 바꿔져야 했다. 초창기는 장애인시설에 찾아가 복음을 전하고, 집에 혼자 지내는 장애인을 발굴하는 대면선교가 불가능해지면서 장애인선교회 스스로 복지법인을 만들어 선교를 이뤄가는 형태로 전환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내게 장애인 복지에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벅차게 주셨다. 그것을 어떻게 다 감당하느냐고 했지만 오히려 감사의 조건이었다. 은혜복지재단 이사장을 맡은 것을 비롯해 밀알복지재단, 브솔복지재단, 한국재활재단, 한국뇌성마비복지회, 에덴장애인복지관 등 10곳이 넘는 곳에서 이사와 감사로 참여하고 있다. 난 이곳에서 전문성이나 노력을 나누는 것보다 오히려 더 배우고 있다.
2005년에는 이화여대 사회복지학과 김성이 교수님 등 일곱 분과 ‘교회사회복지의 철학과 방법’을 집필한 것은 현장 봉사에서 얻은 복지선교 열매이기도 했다. 또 손봉호 교수님과 홍정길 정형석 목사님은 밀알복지재단 이사로 함께 참여하며 장애인 사역 롤모델로 깊이 존경하게 됐다.
2014년 1월 초 새벽기도 중에 발달장애인에게도 복음이 전해져 천국시민으로 세례를 베풀어야 한다는 소명감이 불타올랐다. 바로 밀알복지재단의 정형석 대표에게 발달장애인을 위한 세례 애플리케이션(앱) 개발을 제안했다.
“목사님, 발달장애인들이 의사소통 장애로 세례 기회마저 박탈당한다면 이분들은 천국백성이 되지 못할 거 아닙니까?” “예, 저도 발달장애인들에게 세례를 집례하면서 항상 이것이 잘되었는지 확신이 안 올 때가 있었습니다.”
정 목사님은 한국사회복지정책연구원 정도선 국장이 만든 제안서를 검토하고 앱 개발비 3000만원을 지원해주셨다. 1년6개월여의 연구 끝에 밀알발달세례 앱이 드디어 개발됐다. 이 앱은 천지창조, 인간의 타락, 예수님과 구원, 교회생활, 신앙생활 등에 대한 내용이 잘 정리돼 있다. 여기에 이해하기 쉬운 15개 세례문답이 들어 있어 발달장애인들이 이를 받아들이고 터치만 도와주면 된다.
밀알선교단에서 이를 기점으로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통합예배 ‘worship together’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밀알발달세례 앱 제공 세미나를 열어 적극 보급하기에 이르렀다.
나는 여기에 편승해 워십 투게더 슬로건과 함께 ‘복음의 무장벽운동(Gospel Barrier Free)’을 제안했다. 어느 교회나 작은 자, 장애인을 위한 장벽을 허물고 사랑과 인내, 관심으로 섬겨주자는 것이다.
내가 섬기는 분당영광교회도 발달장애인 학생 한 명이 출석을 하고 있어 내가 한 사람을 위해 ‘영광부’를 만들었고 매주 성경공부와 함께 예배를 드리면서 인원이 점점 늘고 있다. 이런 운동이 한국교회 전체에 널리 퍼져 나갔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역경의 열매] 김종인 <18> 중증장애인의 평생일터 ‘행복공장’ 만들기 운동
WI 서울대회 계기 직업재활 눈 돌려… 스스로 꿈과 미래를 설계하도록 도와
2007년 한국에서 개최된 WI 아시아 대회에 김종인 교수, 정덕환 에덴복지재단 원장, 신필균 한국장애인고용촉진공단 이사장, WI회장이 함께 했다(왼쪽부터).내 일과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은 매일 새벽예배에서 주님과 교통을 할 때이다. 어슴프레한 미명에 첫 시간을 드려 생명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함으로 오늘도 주 안에서 승리할 영적 힘을 얻는다. 그리고 주님이 주신 은혜를 핸드폰 문자로 나누는 사람이 있다. 바로 에덴복지재단 정덕환 원장이다.
그는 국가대표 유도선수로 연세대 3학년 재학 중 사고를 당해 전신마비 장애인이 되었다. 30년 전, 서울 개봉동 판잣집에서 장애인 5명과 함께 에덴복지원을 열고, 세발 오토바이를 타고 다닐 때 처음 만났다. 그는 불굴의 의지와 노력으로 현재는 중증장애인의 근로사업장 에덴하우스 등 500여명의 근로장애인을 고용하는 국내 최대의 직업재활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나는 장애당사자인 정 원장을 우뚝 세우는 것이 한국 장애인들에게 희망을 준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이는 어리지만 ‘섬김의 멘토’가 된다는 마음으로 끊임없이 새로운 정보를 소개하고 학업도 독려했다.
일단 연세대에서 수학한 것을 인정받게 해 인간재활학을 공부하도록 했다. 수업을 듣고 리포트를 스스로 정리할 수 없는 중증장애인이었기에 수업내용을 컴퓨터 파일 콘텐츠로 만들어 들을 수 있도록 도왔다. 또 개인강의를 하며 인간재활학의 학문적 이해를 넓혀가도록 했다. 그 결과 2002년 장한 졸업생으로 당시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청와대에 초청받아 격려를 받았다. 하루는 정 원장이 나를 만나고 싶다며 연락을 해왔다.
“교수님, 국제적으로 장애인의 일과 고용을 개발하는 UN단체가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WI(Workability International)란 곳인데 저희를 여기에 가입시켜 주십시오.”
나는 조사에 들어가 2006년 미국에서 개최된 WI 연차세계대회에 실무를 보던 에덴의 홍성규씨와 함께 참석했다. 그리고 이곳에 가입함과 동시에 WI를 폭넓게 이해하게 되었다. 다음해인 2007년에 WI-ASIA 대회가 서울에서 개최됐다. 난 이곳에서 ‘한국 장애인 고용의 발전방안’을 주제로 발제, 국제적 관심을 끌었다.
정 원장은 2008년 장애인직업재활시설회 회장이 되었다. 그리고 첫 해에 ‘직업재활의 날’을 제정하고 중증장애인 직업재활 10대 실천과제를 선포하겠다고 의견을 물어왔다. 그날이 10월 30일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얘기했다.
“1030은 ‘일이 없으면 삶이 없다’란 뜻이네요. 우리 장애인들의 재활을 독려하는 딱 맞춤의 날을 잘 정하셨습니다.”
정 원장은 회장을 맡은 6년 내내 ‘1030 운동’ 즉 ‘일이 없으면 삶이 없다’고 외치며 이 운동을 펼쳐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나와 계속 아침마다 문자를 통한 신앙교제를 하면서 하나님께서 장애인들이 열심히 마음껏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실 것을 함께 기도했다.
이처럼 기도의 공통분모가 계속 쌓여가다 드디어 하나님께서 응답을 해주셨다. 중증장애인의 평생일터를 추구하는 ‘행복공장만들기 운동본부’를 함께 창립한 것이다.
직업복지, 생명존중, 착한소비, 사회통합을 내세운 행복공장 이념은 발달 장애인에게 일을 주어 이들을 세금을 내는 국민으로 바꾸자는 취지다. 난 행복공장 만들기 운동본부의 자문위원장을 맡아 열심히 응원하며 돕고 있다.
중증장애인에게 최저임금 이상을 받게 해 꿈과 미래를 설계할 수 있도록 하자는 이 운동이 한국은 물론 저개발국가들에게까지 수출될 수 있도록 계속 도울 생각이다. 오늘 아침 정 원장과 나눈 문자의 한 대목이다.
“행복공장을 통해 발달장애인을 세금 내는 국민으로 만들고, 고용복지와 생명구원의 전당이 되도록 기도합시다.”
***[역경의 열매] 김종인 <19> 장애인이 가진 ‘또 다른 능력’ 개발하도록 도와야
장애 유형에 따라 독특한 능력 갖춰… 각자에 맞는 일과 직업 찾아줘야
아산사회복지재단의 후원을 받아 지난달 24일 발달장애 인재개발센터 개소 및 국제세미나를 개최한 김종인 교수.연재하는 동안 많은 분들로부터 ‘장애인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게 됐다’는 전화를 받았다. 이 기회에 좀 더 자세히 알려드리고 싶다.
우리나라 등록 장애인은 250만명이다. 이 중 지체장애인이 51%로 제일 많고 65세 이상 노인장애인도 40%나 된다. 지적장애와 자폐성장애 등 발달장애는 21만명으로 전체 장애인구의 8.3%이다. 0∼30세 장애인 중 53%가 발달장애인으로 교육과 재활, 생애주기별 복지의 핵심적 대상으로 부상되고 있다. 10년 전이었다. 발달 장애인에게도 고등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자 한 대학의 사회복지 교수가 내게 핀잔을 주었다.
“교육효과도 없는 지적장애인에게 나사렛대학은 왜 그렇게 많은 등록금을 받고 교육을 시킵니까?”
당시 지적장애인 고등교육은 부정적 견해가 훨씬 많았고 무용론을 주장하는 학자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나사렛대 재활자립학과는 발달장애인에게 있어 소위 ‘서울대’로 불릴 만큼 경쟁력 있는 학과로 크게 부상했다.
첫 졸업생부터 90%이상 높은 취업률을 보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2012년 재활자립학과 학과장을 지내며 발달 장애인 영어교육(SLD)를 직접 가르쳤다. 일반 학생도 아닌 발달 장애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친다는 것이 무척 부담이 되어 의사소통과 가르침의 은사를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었다. 나는 이때 확실히 깨달았다. 기도는 하나님과 사람의 소통이며, 사람과 사람의 소통 또한 성령의 능력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인지와 감각적 영어소통기법으로 시도했는데 하나님은 지혜를 주셨고 효과도 탁월했다. 스마트폰을 통해서도 교육의 수월성을 찾게 돼 ‘뜻이 있으면 길이 있다’는 진리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2014년에는 서울시 예산을 지원받아 발달장애인들에게 적합한 직종개발 및 고용을 위해 국내 최초로 ‘발달행정보조사’ 자격증을 개발했다. 노동부 승인을 통해 한국직업능력개발원에 등록된 이 자격증은 자격연수교육과 함께 의사소통, 직업일반, 문서수발, 정리정돈 등 4과목을 심층면접과 실기시험으로 검정 60점 이상 받아야 자격증을 준다. 올해 113명이 이 자격증을 받아 일선에서 일하고 있다.
지적장애인과 자폐성장애인은 나름대로 강점이 있다. 다운증후군의 경우 낙천적인 성격으로 밝은 대인관계를 유지하며 충직한 청지기로 보조업무를 잘 수행한다. 암에도 걸리지 않는다. 자폐성은 한 가지 일에 몰입해 단순직업에 탁월하며 맡은 일에 강한 소신이 있고 일부는 아이큐가 150 이상으로 나타난다. 독특한 아이디어를 내는 천재성도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런 유형을 잘 살펴 각자에 맞는 직업과 일을 찾아주는 것이 장애인 재활이며 큰 틀에서 고용확대가 되는 셈이다. 이렇게 늘 노심초사하고 기도하며 장애인 재활과 직업개발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가운데 올해 초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아산사회복지재단에서 발달장애인 권리보장과 지원법 시행을 앞두고 발달장애인 사업제안이 공모됐는데 내가 몸담고 있는 한국사회복지정책연구원에서 제출한 ‘발달장애 인재개발센터설치 운영프로젝트’가 선정된 것이다. 나와 연구원들은 큰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발달장애인을 인재로 개발한다는 것을 아직도 역설이자 시기상조라고 주장하는 학자들이 있다. 하지만 난 그분들에게 꼭 해드리고 싶은 말이 있다.
“발달장애인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격체입니다. 각 인간에게 하나님께서 고유한 사명과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또 다른 능력(Differently Able)을 찾고 개발시켜 사회구성원으로 살아가도록 도움과 지원을 아끼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역경의 열매] 김종인 <20·끝> 나의 장애인 사랑 뒤엔 하나님의 긍휼이 늘 함께
능력보다 몇 배나 많은 일 하도록 허락… 진정한 재활 위해 신앙교육에도 노력
서울 방이동에 있는 한국사회복지정책연구원과 한국재활상담사협회 사무실은 김종인 교수(가운데)가 연구원들과 장애인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산실이다. 강민석 선임기자지나온 시간을 돌이키면 하나님께서는 내가 가진 능력보다 몇 배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주셨다. 그것은 내가 새벽마다 무릎 꿇고 부족함을 간구하니 지혜를 주시고 귀한 만남들을 허락하셨기 때문이다.
세계 다큐멘터리 영화제 7곳에서 수상한 ‘달팽이의 별’ 주인공인 조영찬 장애인 부부는 남편이 시각과 청각이 상실된 중복장애인이고 아내는 척추측만증 장애인이다. 그런데 이들이 개발해 사용한 촉점자를 눈여겨보게 되었다. 이를 응용해 우리 연구소와 KT가 손잡고 시청각 중복장애인과 소통하는 ‘점어기 개발 시연’을 함으로써 호평을 받았다. 계속 연구 중이니 곧 활용이 가능하리라 믿는다.
이밖에도 한국의 지적·발달장애인협회를 유엔 단체로 가입시키거나 KOICA가 콜롬비아에 짓는 재활센터 건립 자문 등 내가 장애인 관련 재활 및 복지를 위해 관여하는 분야는 참으로 많다. 이 모든 것 하나 하나가 열매로 맺어질 때마다 내가 느끼는 기쁨과 감사는 남다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이것을 이뤄주시고 힘주시고 계심을 알기 때문이다. 특히 내가 갖는 발달장애인에 대한 긍휼과 사랑은 나의 의지가 아닌 성령의 만지심이 분명하다. 그들이 참 사랑스럽고, 가르치는 것에도 보람이 넘친다.
그동안 장애인 부모들을 만나 재활 상담을 해주면서 내가 가장 강조하는 것이 신앙이다. 진정한 재활은 자신의 생명이 하나님께로 왔고 이 땅에서 허락하신 목적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다가 본향으로 가는 것임을 인식시키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래서 장애인 세례문답 등 신양교육 프로그램 개발에 주력했던 것이기도 하다.
한국의 장애인 복지는 선진국과 비교해 크게 뒤떨어지지 않는다. 단지 시혜적 복지는 높으나 아직 일자리를 주거나 배려하는 수준이 낮다. 스웨덴의 경우 삼할(Samhall)이란 공기업에서 어떤 장애인이라도 하루 서너시간 일하는 자리를 만들어 소득을 보장시켜줌으로써 우리를 부럽게 만든다.
1990년에 제정된 미국장애인법은 ‘합리적 배려’에 기반을 두고 있다. 피츠버그 대학 4층 총장실에 가려던 휠체어 장애학생이 엘리베이터가 없어 올라가지 못하게 되자 학교를 상대로 고소를 했는데 그 판결이 재미있다. “피츠버그대 총장은 그 장애 학생처럼 한 달간 의무적으로 휠체어 생활을 해보라”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도 2008년부터 ‘장애인 차별금지 및 권리구제법’이 시행되고 있어 정당한 편의제공을 외면하거나 악의적 차별은 처벌토록 하고 있다. 비장애인은 장애인이 어떤 아픔과 고통 속에 있는지 살피는 배려와 관심을 가져줄 것을 부탁한다.
연재를 마치며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시는 많은 분과 특히 어머니 박은순 권사, 아내 구은옥 선교사에게 감사한다. 간호사로 인도와 파키스탄 등지에서 OM선교사로 사역했던 아내는 선교 후원자였던 어머니의 소개로 나를 만나 오늘까지 든든한 동역자가 되어주었다. 평생 선교사로, 또 장애인 전문가로만 살려고 했던 두 사람이 두 자녀를 두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다.
난 참 눈물이 많다. 새벽강단에서, 주일예배에서 걸핏하면 손수건을 꺼내야 한다. 모든 것이 은혜이고 감격이고 감사이기에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막을 도리가 없다. 주님이 내게 주신 사명이 어디까지인지 아직 나는 모른다. 그러나 언제나 초심으로 돌아가 맡겨진 사역들에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그래서 주님께 “잘했다” 칭찬받는 종이 되는 것이 최고의 목표다. 연재글을 읽어주시고 성원해주신 모든 분께 감사드리며 부족한 나를 위해 기도를 부탁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