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구치 11 - 조슈번의 수도 동해 바다 하기시를 찾아 옛일을 생각하다!
시모노세키 에서 산음 본선 이소카제 특급 기차를 타고 왼쪽으로 바다를 끼고 북상하면
장문시 를 거쳐 두시간만에 히가시 하기 (東秋 동하기) 역에 도착합니다.
우리는 히가시하기 역에서 내리지만 특급은 계속 달려 야마구치시로 가는 삼거리 마스다
ますだ 益田(익전) 역을 지나 요나꼬 까지 가는데, 만약에 시모노세키에서
후쓰(普通 보통, 완행) 를 탔을 경우에는 小串 역과 長門市 역에서 2번 갈아타야 합니다.
동해(일본해) 바닷가 하기(秋 추) 시는 옛 조슈번(야마구치) 모리씨의 수도로 현재 인구
5만 소도시인데 히로시마에서 변두리인 동해(일본해) 바닷가로 쫃겨온 사연이 있습니다.
조슈번(야마구치) 에서는 중신들이 번주에게 매년 새해 문안인사를 할 때
“ 주군 올해는 막부를 쳐야하지 않겠습니까 - 아니야, 아직은 때가 아니야! ”라고...
260여년간 이런 문답이 이어져 내려왔으니....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1,600년에
일본의 운명을 가르는 동서 20만 대군이 격돌한 세키가하라 전투 가 벌어집니다.
조슈등 서일본의 대영주 모리 데루모토 는 의리 때문에 도요토미의 어린 아들을
야심만만한 도쿠가와로 부터 지키고자 하는 이시다 미쓰나리 의 서군 에 참가합니다.
하지만 2만 대군을 동원하고서도 야심이 없는지라 모리씨는 부하 장수들만 보내고
자신은 오사카성 에 머물며 전투에 참가하지 않는등 소극적 이라 결국 패합니다.
부하 장수인 깃카와 히로이에 는 모리 가문의 존속 을 위해 동군인 구로다 나가마사를
통해 사전에 밀약하고는..... 전투시 동군측으로 돌아서서 서군을 방해합니다.
깃카와 히로이에 의 부친 모토하루는 모리가문의 창시자인 모토나리의 차남으로
깃카와가에 양자로 갔으니 성은 달라도 모리 데루모토 와는 핏줄로 4촌 인데...
깃카와 히로이에 는 임진왜란때는 4천명을 이끌고 모리 데루모토 부대의 선봉에 서서
행주산성 전투 에 참가해 제2목책을 불사르는 과정에서 부상을 당한바도 있습니다.
패전후 모리 가문은 멸망의 위기 를 맞았으나 서군을 배신하고 동군측에 섰던 깃카와
가 도쿠가와에게 읍소하는등 적극적인 주선으로 모리씨는 6국 120만석 에서....
"스오와 나가토 2국 36만석으로 조슈번" 을 간신히 유지하게 되는데 깃카와 는
조슈 동쪽 이웃인 이와쿠니국의 번주 가 되어 긴타이교 다리 를 건설합니다.
그럼 깃카와 히로이에 는 주군 모리씨에게는 역적 인가? 아님 2국으로 조슈번이라도
보존하게 주선했으니 충신 인가? 그가 죽을 때 남긴 절명시 絶命詩 가 있으니....
무사로 전하여지는 것이야말로 아마도 본래의 삶인가 하노라.
( 武夫の取り伝へたる梓弓 かへるやもとの栖なるらん ) 라....
*** 모리씨는 저 백제계 오우치 요시타카 의 영지중 山城(산성, 교토) 만 빼고 모두 차지했다 ***
그러고 보니 일본에서 주군을 배신한 가장 극적인 사건은 “혼노지의변” 이니! 오와리
(나고야) 다이묘 오다 노부나가 는 1582년 6월 동쪽의 효웅 가이의 다케다씨를 멸합니다.
오다 노부나가 는 일본의 중부지방과 교토를 손에 넣었으니 일본을 반쯤 통일한지라
이제 7개국을 지배하는 서쪽 히로시마 의 강대한 적 모리 毛利 씨 를 공격합니다.
노부나가 가 도요토미 히데요시 에게 모리씨 토벌 을 명하니 오카야마의 다카마츠성
高松城(고송성) 을 포위했는데.... 성주 시미즈 무네하루는 결사항전을 합니다.
히데요시 는 구로다 요시타카(간베에)의 진언으로 강을 막아 터뜨리는 수공작전 을
진행하는 중에 주군 노부나가 암살 정보를 듣고 사력을 다해 공격해 성을 함락합니다.
시미즈 무네하루 는 십여년전에 모리 데루모토 가 동진하여 오카야마현 서부에 해당하는
빗츄의 미무라씨를 칠때 항복한자 인데 이번에는 모리씨를 배신하지 않았던 것이네요?
그전에 오카야마현 동부 비젠의 우키다 나오이에 는 모리군의 압박을 견디다 못해 동쪽
오다 노부나가에게 귀의하며 아들 우키다 히데이에 (宇喜田秀家) 를 인질로 바칩니다.
우키다 히데이에 는 노부나가의 부장 히데요시 에게 맡겨지는데 신임을 얻으니...
마에다 도시이에의 딸 로 히데요시의 양녀가 된 고히메와 결혼 을 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와의 이런 인연으로 임진왜란때는 제8군 1만의 병력으로
젊은 나이에도 일본군 총사령관 을 지냈으며 정유재란때는
모리 데루모토가 우군, 그는 좌군의 총수 가 되어 남원과 전주를 점령합니다.
예전에 히오시마의 모리 데루모토 는 서진하는 오다 노부나가 견제를 위해
무라카미 수군 을 혼간지 (本願寺, 오오사카)에 파견하여
첫번째는 승리했으나 두번째는 구키 요시다카 의 수군에 패배한적이 있습니다.
이 구키 가 시코쿠의 도도 다카토라 와 더불어 임진왜란때 일본 수군을 이끌게 되며...
7개국 영주 모리씨는 노부나가 사후 교토를 평정한 히데요시에게 결국 굴복 합니다.
이후 1,585년 히데요시의 시코쿠 정벌과 다음해에는 규슈의 90% 를 통일한 사쓰마군을 치자
모리씨 는 선봉에 서서 무공을 세워 주고쿠(中國) 6국 120만석 영주 를 유지 합니다.
모리 데루모토 는 임진왜란때는 다른 무장의 3배가 넘는 3만 으로 제7군으로 출전
하지만 히데요시 사후 귀국해서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전하니 조슈번
36만석 으로 강등당하고 물러난후 딸을 이와쿠니번 깃카와 에게 시집보내게 됩니다.
그전에 아케치 미쓰히데 는 노부나가의 명으로 히데요시를 지원하기 위해 주코쿠로
진군하던 6월 2일 주군이 머무는 혼노지 本能寺 에 난입하는 반역 을 저지릅니다.
시중에 우스개 말로 흔히 하는게 있으니.... “ 심한 쫑코는 살인을 초래한다!“
갑작스런 변고에 오다 노부나가는 자결 하고 이후 도요토미 히데요시 의
시대가 열리는데 노부나가를 대신해 아들 오다 노부타카의 절명시 가 전해집니다.
옛부터 주인을 치는 간사한자! 천벌을 기다려라 하시바 지쿠젠.
(昔より 主を討つ身の 野間なれば 報いを待てや 羽柴筑前)
그에 대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복수를 당해 죽는 아케치 미쓰히데 의 절명시!
순역에 두 문은 없고 큰 길은 마음 속에 있음을 깨달았도다.
오십 오년간의 내 꿈이여, 깨고 나니 원래로 돌아가누나.
( 順逆無二門 大道徹心源 五十五年夢 覚来帰一元 )
아케치 미쓰히데 는 모반후 사돈과 사위 호소카와 타다오키 細川忠興(세천충흥)에게 간절히
도움을 호소하지만 타다오키는 부인 타마(세례명 가랴사) 를 단바국 미토노에
유폐시키고 주고쿠 오가에시 라 부르는 전광석화 같이 회군한 히데요시 수하로 참전합니다.
호소카와 타다오키 는 히데요시가 교토를 장악하고 다시 서쪽으로 진군해 모리씨의 항복을
받은후 1,587년 규슈의 90% 를 장악한 시마즈씨를 를 정벌 할때도 앞장을 섭니다.
나카쓰와 고쿠라의 번주가된 호소카와 타다오키 는 임진왜란 때는 1군 고니시, 2군 가또,
3군 구로다에 이어 제9군을 이끌고 진주성 싸움에서 경상우병사 류숭인 을 격파합니다.
주군 노부나가를 위해 아케치 미쓰히데를 죽이고 이후 숱한 전투를 치르며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또한 죽을때 절명시를 남겼으니.....
이슬로 와서 이슬로 가는 이 몸이여. 나니와(浪速) 의 영화도 꿈속의 꿈이련가.
( 露と落ち 露と消えにし 我が身かな 浪速のことは 夢のまた夢 )
각설하고 저 세키가하라 전투 에서 맹활약하는 서군의 사쓰마(가고시마) 번주
시마즈 요시히로 가 병사를 불과 1,500명 밖에 동원하지 못한 사정이 있었으니.....
사쓰마의 시마즈씨 는 정유재란때인 1,598년 9월 사천 선진리성에서
1만 병력으로, 4로병진 공격해온 동일원의 명나라군 3만 5천과
정기룡의 조선군 5천등 4만을 맞아 2만여명을 몰살시키는 대승 을 거둡니다.
그 몇달 전에 가토 기요마사 의 1만 6천군이 지키는 울산 도산성 을 공격한
양호의 명나라군 3만 8천에 권율의 조선군 1만2천등 5만 연합군 이
명군의 대포 공격으로 승기를 잡았다가 왜군 원군의 구원으로 패하고 퇴각한후...
1,598년 9월 마귀의 명나라군 2만4천에 김응서의 조선군 6천등 3만 연합군이 재차 울산을
공격하다가 사천성 패배 의 소식을 듣고 황급히 후퇴 했으니 이는 시마즈씨의 공 이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은 탓으로 일본의 주인 자리를 두고 내란 이 일어날 상황이라....
조선에서 철수 하는데 서쪽 순천에 주둔중인 고니시로 부터 구원요청 을 받습니다.
이런경우 대개는 구원을 하는 시늉만 하여야 하는데 시마즈씨는 전력을 동원 합니다!
이순신이 여수를 지나 순천 바다를 봉쇄 하자 사천의 시마즈씨 는 500척 군선을 동원해
고니시 유키나가를 구출 (노량해전) 하다가 조명 연합군에 무려 350척 을 잃습니다.
장차 일본에서 가문의 존망을 걸고 내란 이 벌어질 판인데 자신의 병력을 다 쏟아붓다니???
노량해전에서 병사의 절반 이상을 잃고 귀국한데다가 규슈 최남단 가고시마에서 교토는
먼 거리라 사쓰마의 시마즈씨 는 동서 20만 대군이 일본의 운명을 놓고 격돌한
세키가하라 전투 에 병사는 불과 1,500명 밖에 동원하지 못했지만 가장 치열하게 싸웁니다!
서군 내부의 배신으로 패색이 짙어지자 사쓰마군은 후퇴 하는데 고향인 서쪽이 아닌
동쪽 도쿠가와군 본영 으로 쳐들어가는 기상천외한 전술 을 선보입니다.
사쓰마의 시마즈? 미친사람 아냐? 노량에서 전군을 투입하더니 이번엔 적 본영으로?
누구고 예기치 못한 난데없는 돌진에 기겁한 도쿠가와 본영이 흩어지자 그틈을 이용해
포위를 뚫었는데... 사쓰마군 은 본대의 후미 에 결사대를 50명씩 남겨두고 후퇴합니다.
후미에 20여차례 남겨지는 결사대 천여명 은 차례차례 모두 몰살 당하지만 본대는 후퇴에
성공해 100여명이 번주를 옹위해 규슈 남쪽 사쓰마(가고시마) 에 도착했던 것입니다.
사람의 목숨은 하나뿐 인데 저 결사대들이 도망치지 않고 번주의 후퇴를 위해 기꺼이
목숨 을 버린 이유는 무엇때문 일까요? 번주가 영지를 뺏기면 가신(무사)
들도 봉록(연봉) 을 잃고 낭인(실업자) 이 되는데 이는 새로 오는
번주 역시 자신의 오랜 가신(무사) 들을 데리고 단체로 이사 를 오기 때문입니다!
왕이나 다름없는 번주 가 망하면 무사들도 지위와 연봉을 잃고 낭인이 되니 그
가족들도 굶주리게 되니.... 오로지 충성 을 다하는 것이라! 이후
사쓰마번에서는 결사항전 을 하니 도쿠가와군이 몇번 공격에 실패하고는
희생을 줄이기 위해 타협 하니 무용으로 영지를 보존한 시마즈 요시히로 의 절명시!
봄 벛꽃도 가을의 낙엽도 가버리누나.
인생 한철 세키가하라로 부터의 귀향길 같이 덧없는 것이로다.
( 春秋の花も紅葉もとどまらず 人も空しき関路なりけり )
일본에서는 사실상 독립국이라 불리는 260개 번 중에 큰 번이 60개 정도 되는데 그중에
조슈 (야마구치, 모리씨) 번 과 사쓰마 (가고시마, 시마즈씨) 번 이 성장합니다.
모리씨의 조슈번 과 시마즈씨의 사쓰마번 은 히젠번과 도사번을 끌어들여 4번 동맹군은
무진전쟁 을 일으켜 260여년을 이어온 에도(도쿄)의 도쿠가와 막부의 쇼군을
타도하고 1,868년에 천황(일왕)을 옹립한 "메이지 유신의 주역" 이 되는
것이니 이제 유신의 주역중에서도 주역인 여기 "조슈번의 수도 하기시" 를 둘러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