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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수당227 상량문花樹堂上樑文
당黨에는 상庠이 있고 가家에는 숙塾이 있으니228 선왕이 선비 양성을 확충한 방법
이고, 절[拜]은 달을 기준으로 하고 음주는 나이를 기준으로 하니 옛사람이 종족 화합
을 중시한 방법이라네. 이곳은 노래하고 곡하는 장소이니 진실로 강독하는 집으로
적당하네.
삼가 생각하건대 낙동강 상류에 풍산 류씨의 명문가가 있네. 새로운 터에 성조聖祖께
서 처음 개국한 때를 만났으니 전서공典書公229의 마을이 오래되었네. 오래된 가문에서
후손들이 중흥을 이었으니 입암공立巖公230의 세대부터 번창하였네.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 자연에서 늙어 갔고, 한 모퉁이에 정자를 지어 대대로 전하였네. 임금의 근신近臣
으로 해동海東에서 걸출하였으니 영원토록 감당나무 노래를 남겨 읊조리게 하였네.231
육자陸子의 부賦가 없는 것이 부끄러우니232 어찌 감히 다 말할 수 있겠는가마
는, 위공魏公의 책이 있음에 힘입어233 대략 선계先系의 차례를 회복하였네. 사정공
司正公234이 사람들을 구제한 의리는 지나는 교외에 술과 음식을 차리는 것이었고,
선략공宣略公235이 제사를 지낸 정성은 깨끗한 제기에 희생의 피와 털을 담는 것이
었네. 상류에서 목욕을 피한 것은 조행이 진실한 판서공判書公236이었고, 선조의 사
당에 단청을 금지한 것은 검약을 법도로 삼은 찬성공贊成公237이었네. 명성이 자자
한 귀촌공龜村公238 같은 분이 있었고, 또한 자질이 훌륭한 파산공巴山公239이 있었
네. 파산공은 비지賁趾240 선생과 함께 수명이 길지 못하여 사람들이 공자 문하의 두
안자顔子라고 일컬었고, 귀촌공은 승정원에 들어가 거침없이 기록하여 세상에서 을사
년(1545)의 삼주서三注書라고 전하였네.
땅의 신령이 명승지에 보배를 축적하였으니 멀리 전당강錢塘江과 같은 빼어난 기세
에 배합할 만하네.241 하늘의 운행이 태평성대에 순환하였으니 다시 하남河南 정자
程子와 같은 위대한 현인을 배출하였네.242 의리義利를 양단하는 공부는 젊은 시절에
스승에게 배운 것이고, 체용일원體用一源243의 학문은 천추에 전한 도통이라네. 제갈량
諸葛亮의 충정은 산하가 그 노고를 제사 지내고, 백정伯靜 형제의 문호244는 부녀자들
도 그 시문을 암송하네.
수암修巖245·졸재拙齋246·우헌寓軒247·주일공主一公248이 발휘하고, 우눌愚訥249·만사
晩思250·회당悔堂251·서호공西湖公252이 계승하였네. 모두 선대로부터 아름다운 자취를
이어 후손에게 넉넉히 남겨주지 않음이 없었네. 마치 물의 근원이 깊을수록 멀리 흘
러가는 것과 같으며 나무의 뿌리가 두터울수록 가지가 뻗어 나가는 것과 같네. 누군
들 우리 선조의 후손이 아니겠는가. 애초에 가까운 사람 먼 사람이 없으니 일문의 사
람들을 통틀어 헤아림에 그 수가 수십 수백에 이르네.
덕행과 훈업을 서로 권해야 하고 허물과 그른 일을 서로 경계해야 하니, 기품이 어
찌 가지런해지지 않겠으며 단서가 어찌 한결같아지지 않겠는가. 장공예張公藝가 이 때
문에 백 글자의 인忍에 공을 들였고, 소명윤蘇明允이 이 때문에 한 사람의 몸에 근본을
미루었거늘,253 어찌 집안을 나누고 쪼개다가 후손끼리 점점 멀어지게 해서야 되겠
는가. 진실로 오순도순 잔치를 열고 싶다면 너른 집을 얻어 주선하는 것이 으뜸이라
네. 강주江州의 개는 한 우리에서 함께 먹이를 먹었으니 하찮은 짐승도 감동할 줄 안
것이고, 양씨楊氏 집안의 형제는 큰 휘장을 쳐서 같이 지냈으니 지극한 즐거움이 이보
다 더한 것이 없네.254
그리하여 400년 된 고향에 나아가 비로소 수십 기둥의 건물을 창건하였네. 양진당
養眞堂 북쪽에 터를 개척하여 오르내리시는 선조의 영령을 가까이 하였고,255 원지정
서쪽에 누각을 세워 늘 학문을 遠志亭 닦는 훌륭한 일을 차례로 하였네.256 20년의 경
영이 고생스러웠지만 많은 일꾼들이 기꺼이 달려와 진력하였네. 무이武夷257의 산수
가 몹시 빼어나고 마을과 떨어져 있지 않네. 고장의 노소가 다 모였으니 부를 필요가
없네. 하얀 언덕의 소나무 숲과 모래밭은 향기로운 성덕盛德을 생각하는 듯하고 저물
녘 강가의 푸른 절벽은 훌륭한 문장의 여운을 받드는 듯하니, 골육骨肉의 천륜을 삼가
잊지 못하여 앙모仰慕의 자리를 배회하며 감격하네.
공부는 효경孝敬을 근본으로 삼고, 사업은 시서詩書 외에 다른 것이 없네. 이곳에서
노래하고 읊조려 낮에는 하는 일이 있고 밤에는 얻음이 있으며, 재주를 기르고 마음
을 닦아 서로 화목하게 지내고 따지지 말아야 하네. 각궁角弓이 번연히 뒤집혔다는 시
를 외우고, 길가의 갈대를 밟지 말라는 경계를 따라야 하네.258 여러 대 동안 함께
밥을 지어 먹은 것을 부러워하지 않고, 온갖 공인들을 공방에 있게 한 것처럼 하였
네.259 모두가 강 너머의 두 정자260에서 봄에는 거문고를 타고 가을에는 시를 읊을
수 있으나, 어찌 같은 마을의 한집에서 아침에 모이고 저녁에 모이기에 편한 것만 하
겠는가. 등잔불을 켜고 책을 읽으며 한공韓公의 부지런함을 본받고, 화수회를 열고 술
을 마시며 위씨韋氏 집안의 화락함을 보전하니,261 신중하고 과묵한 것은 자신을 다스
리는 묘책이요, 장엄하고 화락한 것은 여럿이 지내는 비결이라네.
가문이 어진 선조에게 이미 열렸으니 어찌 감히 새로운 것을 더하겠는가. 가업이
잔약한 후손에게 더욱 면려되니 구업舊業의 감회가 갑절로 절실하네. 멀면 소원해지
고 소원해지면 잊게 되어 길 가는 사람과 다를 바가 없어지니, 자식에서 손자까지 손
자에서 증손까지 저마다 오늘의 지극한 뜻을 체행해야 하네.
천 년 동안 기북冀北의 들에서 준마들이 무리를 이루었고,262 하루아침에 등공鄧公
의 동산에서 아름다운 재목이 땅에 배출되었네.263 곤궁하여 오두막집에 살면서도
의義에 배부르고 인仁에 살찔 수 있다면,264 온 나라에 두루 통하여 임금을 성군으로
만들고 세상에 은택을 끼칠 수 있다네. 영주永州의 철보鐵步를 크게 진동시킨 것은 진공
晉公의 회나무 그늘을 거듭 배회해서이니,265 진실로 어버이를 욕되게 하지 않는다면
아마도 기꺼이 나에게 후손이 있다고 말하겠네.
이에 들보를 올리는 노래를 통하여 경건히 기해祁奚266의 마음을 진술하노라.
어기여차 들보 동쪽으로 제물을 던지니 兒郞偉拋樑東
먼 산에 해가 떠올라 서창書窓에 들어오네 遠山生旭入書櫳
긴 밤을 지나 때로 밝은 태양이 돌아오니 長夜有時回白日
명성의 소장消長을 동몽들에게 이야기하네267 明誠消息說羣蒙
어기여차 들보 서쪽으로 제물을 던지니 兒郞偉拋樑西
훨훨 나는 봉황이 머물려 하는 형세라네 飛鳳翩翩勢欲低
아마 강가에 띠 풀을 베고 거처를 정한 날에 想得誅茅江上日
봉황이 이 사이에 옮겨와 머물렀나 보네 九苞移向此間棲
어기여차 들보 남쪽으로 제물을 던지니 兒郞偉拋樑南
눈앞에 삼필봉268이 그림과 같네 眼前如畫筆峯三
산수 좋은 옛 마을에 화목한 기운이 나오니 煙霞古洞生和氣
산꼭대기에 덮인 것은 남기嵐氣가 아니라네 羃在峯頭不是嵐
어기여차 들보 북쪽으로 제물을 던지니 兒郞偉拋樑北
천 길의 옥연이 끝도 없이 깊다네 玉淵千丈深無極
우리 종족의 두터운 세의世誼가 이와 함께하니 吾宗厚誼與之俱
덕업을 쌓은 유래가 오랜 세월에서 비롯하네 蓄德由來基萬億
어기여차 들보 위쪽으로 제물을 던지니 兒郞偉拋樑上
처마 끝의 별자리를 우러러 바라보네 屋角星文起視仰
대대로 자손들이 남다른 자질로 태어나니 世世兒孫生絶奇
삼태성과 문곡성269이 서로 비추어주네 三台文曲照相向
어기여차 들보 아래쪽으로 제물을 던지니 兒郞偉拋樑下
온 집안의 노소가 모여 유현儒賢을 추앙하네 一門童冠集儒推
맑은 밤에 「서명」270을 다시 읽으니 淸宵更讀西銘篇
효제가 가득하여 밖에서 빌릴 것 없네 孝悌油然不外假
삼가 바라건대 들보를 올린 뒤에 선비들이 유풍을 진작시키고 집집마다 세업을 계승
하여 강산에서는 깨끗하고 빼어난 기운을 키우고 집안에서는 글을 읽는 소리가 넘쳐나
게 하소서. 경전의 가르침은 농사와 같아 아버지는 자식을 권면하고 형은 아우를 권면
하며, 떳떳한 행실은 일상의 일이 되어 들어와서는 효도하고 나가서는 공경하여 남은
힘이 글짓기에 미칠 만하고 참된 공부가 명리에 빼앗기지 않게 하소서.
낙동강의 아름다운 단서가 빛나고 영남의 이름난 가문이 장중하니 저마다 오늘부터 그
대들의 거동을 삼가야 할 것이다. 내 말을 믿지 못하겠으면 이 화수당을 살펴볼지어다.
227 화수당(花樹堂):본디 풍산 류씨 집안에서 종족의 화합을 도모하기 위해 지은 공간이었는데 뒤에 류규가
강학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학칙과 강습 절목 등을 제정하였다. 지금의 안동시 풍천면 하회마을 내에
있었으며 400년 된 소나무가 남아 있다.
228 당(黨)에는……있으니: 예기(禮記) 「학기(學記)」에서 “옛날의 교육 기관으로는 가(家)에는 숙(塾)이 있고,
당(黨)에는 상(庠)이 있으며, 술(術)에는 서(序)가 있고, 국(國)에는 학(學)이 있었다.[古之敎者 家有塾 黨有庠
術有序 國有學]”라고 하였다. 가는 25가를, 당은 500가를 말한다. 또 술(術)은 수(遂)의 오자(誤字)로, 수는
12,500가를 말하며 원교(遠郊)의 밖에 있는 지역을 의미한다.
229 전서공(典書公):풍산 류씨 하회마을 입향조 류종혜(柳從惠, ?∼?)를 말한다. 시조 류절(柳節)의 6대손이다.
조선 초에 음직으로 공조 전서를 지냈다.
230 입암공(立巖公):입암은 류중영(柳仲郢, 1515∼1573)의 호이다. 자는 언우(彦遇), 본관은 풍산(豐山)이다.
류성룡의 아버지이다. 1540년 문과에 급제한 뒤, 공조 좌랑·예조 참의·황해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선조
의 세계(世系)를 정리하여 가보(家譜) 를 편찬하였다.
231 영원토록……하였네:감당나무 노래는 주(周)나라 문왕(文王) 때 남국(南國)의 백성들이 소백(召伯)의 선정
(善政)에 감사하는 뜻으로 그가 머물고 쉬었던 감당나무를 소중히 여겨 “무성한 감당나무를 자르지도 말
고 베지도 말라. 소백께서 쉬셨던 곳이니라.[蔽芾甘棠 勿翦勿伐 召伯所茇]”라고 노래한 것을 가리킨다.(
詩經 「召南·甘棠」) 여기서는 류성룡의 공적을 후세 사람들이 오래도록 기리는 것을 뜻한다.
232 육자(陸子)의……부끄러우니:선조의 세덕이나 공렬을 읊은 시문이 없는 것이 부끄럽다는 말이다. ‘육자의
부’는 서진(西晉)의 육기(陸機)가 지은 「조덕부(祖德賦)」와 「술선부(述先賦)」를 가리킨다.( 全晉文 卷96)
233 위공(魏公)의……힘입어:선대의 내력을 알 만한 문헌이 남아 있어 후세의 자료가 된다는 말이다. 류중영이
선대의 계보를 정리하여 가보(家譜) 를 편찬한 사실과 관련되는 듯하다. ‘위공’은 송나라 한기(韓琦, 1008
∼1075) 또는 장준(張浚, 1097∼1164)을 가리키는 듯하나 어떤 문헌을 말하는지는 상세하지 않다.
234 사정공(司正公):류종혜의 아들 류홍(柳洪, 1373∼1458)을 말한다.
235 선략공(宣略公):류홍의 아들 류소(柳沼, 1424∼?)를 말한다. 선략장군에 올랐고, 충무위 부호군을 지냈다.
236 판서공(判書公):류자온(柳子溫, 1453∼1502)을 말한다. 자는 직이(直而)이다. 류공작(柳公綽)·류공권(柳公
權)·류공석(柳公奭)·류공계(柳公季) 등 4형제를 두었으며 류성룡의 고조부이다. 1474년 진사시에 입격하여
창원 교수(昌原敎授)를 지냈다. 뒤에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
237 찬성공(贊成公):류공작(柳公綽, 1481∼1559)을 말한다. 자는 유재(裕哉)이다. 간성 군수(杆城郡守)를 지냈
고, 의정부 좌찬성 겸 판의금부사에 추증되었다.
238 귀촌공(龜村公):귀촌은 류경심(柳景深, 1516∼1571)의 호이다. 자는 태호(太浩)이다. 아버지는 류공권(柳
公權)이다. 1544년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헌·병조 참판·평안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1545년에 승정원 주
서로 있으면서 조박(趙璞)·안명세(安名世)와 함께 직필로 인정을 받았다.
239 파산공(巴山公):파산은 류중엄(柳仲淹, 1538∼1571)의 호이다. 자는 경문(景文)이다. 류공석의 아들이며
이황의 문인이다. 안동의 타양서원(陀陽書院)에 배향되었다.
240 비지(賁趾):남치리(南致利, 1534∼1580)의 호이다. 자는 의중(義仲), 본관은 영양(英陽)이다. 이황의 문인
이다. 안동의 노림서원(魯林書院)에 배향되었고, 저서로는 비지집 이 있다.
241 멀리……만하네:전당강은 중국 동남부를 흐르는 강의 이름으로 절강(浙江)으로 불리기도 한다. 항주만(杭
州灣)으로 흘러드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조수를 절강조(浙江潮)라고 하는데, 만조 때에 강물과 바닷물이 맞
부딪치면서 큰 파도를 일으켜 우레 같은 소리를 낸다고 한다.( 武林舊事 「觀潮」) 여기서는 하회마을 일대
의 낙동강을 빗대었다.
242 다시……배출하였네:‘하남의 위대한 현인’은 정자(程子)를 가리키는데 여기서는 류성룡을 뜻한다.
243 체용일원(體用一源):세상의 삼라만상은 본체인 리(理)의 용(用)이므로 그 근원이 하나라는 뜻이다. 정이(程
頤)의 역전(易傳) 서문에서 “지극히 은미한 것은 리(理)이고 지극히 현저한 것은 상(象)이니, 체와 용이
한 근원이고 현저함과 은미함이 간격이 없다.”라고 하였다.
244 백정(伯靜) 형제의 문호:‘백정’은 채원정(蔡元定)의 장남 채연(蔡淵, 1156∼1236)의 자이다. 아우 채침
(蔡沈, 1167∼1230)과 함께 가학을 계승하여 도학에 밝았다. 여기서는 류운룡과 류성룡 형제를 가리킨
다.
245 수암(修巖):류진(柳袗, 1582∼1635)의 호이다. 자는 계화(季華)이다. 류성룡의 3남이다. 1610년 소과에
입격하였고, 1623년에 학행으로 천거되어 형조 정랑·청도 군수 등을 지냈다.
246 졸재(拙齋):류원지(柳元之, 1598∼1674)의 호이다. 초명은 경현(景顯). 자는 장경(長卿)이다. 조부 류성룡
과 계부 류진(柳袗)에게 수학하였다. 황간·진안 등지의 현감을 지냈고, 성리(性理)·이기(理氣)·상수(象數)·천
문·지리·예설 등에 통달하였다. 안동의 화천서원에 배향되었다.
247 우헌(寓軒):류세명(柳世鳴, 1636∼1688)의 호이다.
248 주일공(主一公):류후장(柳後章, 1650∼1706)을 말한다. 자는 군회(君晦), 호는 주일재(主一齋)이다. 아버지
류만하(柳萬河)에게 수학하였다. 저서로는 주일재일고(主一齋逸稿) 가 있다.
249 우눌(愚訥):류의하(柳宜河, 1616∼1698)의 호이다. 자는 자안(子安)이다. 류원지의 장남이다. 봉화 현감·
세자익위사 익찬 등을 지냈다.
250 만사(晩思):류세정(柳世楨, 1617∼1686)의 호이다. 자는 성거(聖擧), 다른 호는 정재(靜齋)이다. 류운룡의
증손이며 류원지의 문인이다.
251 회당(悔堂):류세철(柳世哲, 1627∼1681)의 호이다.
252 서호공(西湖公):서호는 류성화(柳聖和, 1668∼1748)의 호이다. 자는 개중(介仲)이다. 음직으로 관직에 나
아가 산음 현감을 지냈다.
253 장공예(張公藝)가……미루었거늘:장공예는 당나라 고종(高宗)에게 참을 인(忍) 자만 백여 차례 써서 9대를
한 집안에 거느리며 생활할 수 있는 비결을 가르쳐주었고, 자가 명윤(明允)인 소순(蘇洵)은 집안 족보의 서
문에서 “내가 길거리의 사람처럼 보는 자가 처음에는 형제였고 형제는 처음에 한 사람의 몸이었으니, 슬프
구나![吾所與相視如塗人者 其初兄弟也 兄弟其初 一人之身也 悲夫]”라고 하였다.( 舊唐書 卷188 「孝友列傳·
張公藝」, 唐宋八大家文鈔 卷116 「老泉文鈔10·族譜引」)
254 강주(江州)의……없네:송나라 강주 사람 진긍(陳兢)의 집안에는 구세(九世)의 종족 700여 명이 함께 살면
서 넓은 집에서 차례에 따라 앉아 함께 식사하였는데, 기르던 개 100여 마리도 그 집안의 화목함에 영향
을 받아서 한 마리라도 오지 않으면 다 올 때까지 먹이를 먹지 않았다고 한다. 북위(北魏)의 양파(楊播)의
집안은 법도가 순후하여 아우가 형을 아버지처럼 섬겼는데, 대청에 장막으로 휴게할 곳을 마련해 놓고 형제
가 같이 지내며 내실로 들어가지 않았다고 한다.( 宋史 卷456 「孝義列傳·陳兢」)
255 양진당(養眞堂)……하였고:양진당은 풍산 류씨의 대종가이다. 당호(堂號)는 겸암 류운룡의 6대손 류영(柳
泳, 1687∼1761)의 호에서 유래한다. 하회마을 중심에서 약간 서쪽에 위치한다. 우측 북편에 2개의 사당이
있는데, 정면의 큰 사당은 류중영의 사당이며 작은 사당은 류운룡의 불천위 사당이다.
256 원지정(遠志亭)……하였네:원지정은 원지정사(遠志精舍)를 말한다. 서쪽의 누각은 연좌루(燕坐樓)를 가리키
는데 이곳에 오르면 부용대(芙蓉臺)와 화천(花川)을 한눈에 볼 수 있다고 한다. 장수(藏修)는 예기 「학
기」에 나온 말로, 항상 학문을 닦아 게을리하지 않음을 뜻한다.
257 무이(武夷):본디 주희가 강학하던 무이산(武夷山)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하회마을의 진산(鎭山)인 화산(花山)
을 가리킨다.
258 각궁(角弓)이……하네: 시경 「소아(小雅)·각궁(角弓)」에서 “조화로운 각궁이여, 번연히 뒤집혔도다. 형제
와 인척들은, 서로 멀리하지 말지어다.[騂騂角弓 翩其反矣 兄弟婚姻 無胥遠矣]”라고 한 것과 「대아(大雅)·행
위(行葦)」에서 “우북한 저 길가의 갈대, 소와 양이 밟지 않으면, 바야흐로 움트며 형체를 이루어, 잎이 부
드럽고 윤택하리라.[敦彼行葦 牛羊勿踐履 方苞方體 維葉泥泥]”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모두 가족과 문족의
화목을 노래한 시이다.
259 여러 대……하였네:오랜 세월 대가족을 이루고 지낼 뿐만 아니라, 구성원 각자가 자기 자리에서 맡은 직
분을 충실하게 해냈음을 뜻한다. 여러 대를 거치면서 200여 자손이 함께 기거하고 밥도 함께 지어 먹었다
는 이방(李昉) 집안의 고사와 온갖 공인들이 일터에 있으면서 맡은 일을 성취한다는 자하(子夏)의 말에서
인용한 것이다.( 小學集註 卷6 「善行」, 論語 「子張」)
260 강 너머의 두 정자:하회마을 북안(北岸)에서 배를 타고 건너면 겸암정사와 옥연정사가 나온다.
261 등잔불을……보전하니:당나라 때 한유(韓愈)는 등잔불을 밝혀 낮을 이으면서 부지런히 글을 읽었고, 위씨
(韋氏) 집안은 꽃나무 아래에서 친족을 모아 놓고 술을 마셨다고 한다.( 唐宋八大家文鈔 卷10 「昌黎文鈔
10·進學解」, 御定全唐詩 卷199 「韋員外家花樹歌」)
262 기북(冀北)의……이루었고:‘기북’은 본디 준마가 많이 생산되는 곳인데, 말에 대한 뛰어난 감식력을 가진
백락(伯樂)이 기북의 들판을 한 번 지나가자 이곳에 좋은 말이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韓昌黎文
集 卷21 「送溫處士赴河陽軍序」) 여기서는 하회마을을 아우르는 안동의 풍산 들판을 가리키며 이곳이 인
재가 많이 배출되었음을 뜻한다.
263 등공(鄧公)의……배출되었네:등공은 당나라 때 등(鄧)에 봉해진 사람이다. 그는 말을 매우 좋아하는 마벽
(馬癖)이 있었는데 두보의 「총마행(驄馬行)」에서 “등공의 마벽은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으니, 처음으로 대
완의 종자에서 화총마를 얻었네.[鄧公馬癖人共知 初得花驄大宛種]”라고 한 시구가 있다. 대본의 ‘梗楠’에서
‘梗’은 ‘楩’의 오자(誤字)로 판단하여 번역하였다. 의미상 ‘아름다운 재목’에 해당하는 것은 ‘楩楠’이기 때문
이다.
264 의(義)에……있다면: 맹자 「고자 상(告子上)」에서 “ 시경 에 ‘술로 이미 취하고 덕으로 이미 배부르네.’
하였으니, 인의에 충족함을 말한 것이다.[詩云 旣醉以酒 旣飽以德 言飽乎仁義也]”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265 영주(永州)의……배회해서이니:영주 사마(永州司馬)로 있던 유종원(柳宗元)이 철로보(鐵爐歩)라는 지명의 유
래를 찾고서 “아, 세상에 실체는 이미 없어졌는데 이름만 남은 이런 경우가 정말 있단 말인가.”라고 탄식
하였고, 진공(晉公) 왕호(王祜)가 자기 뜰에 회나무 세 그루를 심으면서 “내 자손 가운데 반드시 삼공(三公)
이 되는 자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과연 뒤에 아들 위국공(魏國公) 왕단(王旦)이 진종(眞宗) 연간에
재상(宰相)을 지냈다고 한다.( 唐宋八大家文鈔 卷23 「柳州文鈔7·永州鐵爐歩志」, 卷143 「東坡文鈔·三槐堂
銘」) 여기서는 풍산 류씨 가문의 이름에 실체가 생긴 것은 관직에 오르는 후손들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임
을 말하였다.
266 기해(祁奚):춘추 시대 진(晉)나라의 대부이다. 그는 공평무사하여 원수인 해호(解狐)와 자기 아들인 기오(祁
午)를 진 도공(晉悼公)에게 천거했다고 한다.( 春秋左氏傳 「襄公」 3年)
267 긴 밤을……이야기하네:밤이 낮이 되고 낮이 밤이 되는 현상을 가지고 명(明)과 성(誠)의 이치를 설명해주
었음을 말한다. 사리를 분명히 아는 것을 명이라 하고, 마음에 거짓이 없고 지극히 성실한 상태를 성이라
한다. 이와 관련하여 중용장구(中庸章句) 제21장에서 “성(誠)으로 말미암아 밝아지는 것을 성(性)이라고
하고 명으로 말미암아 진실해지는 것을 교라고 하니, 진실하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진실해진다.[自誠明 謂之
性 自明誠 謂之敎 誠則明矣 明則誠矣]”라고 하였다.
268 삼필봉(三筆峯):병산서원과 하회마을 사이에 있는 산으로 마늘봉[蒜峯]·문필봉(文筆峯)·만은봉(晩隱峯) 등으
로도 불린다.
269 삼태성(三台星)과 문곡성(文曲星):삼태성은 삼정승을 비롯한 고관을 비유하는 말로 쓰이고, 문창성은 문재
(文才)를 주관하는 별로 글재주가 뛰어난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쓰인다.
270 「서명(西銘)」:장재(張載)가 학당의 양쪽에 걸어놓은 명 가운데 서쪽에 있던 것으로, 하늘을 아버지로 여기
고 땅을 어머니로 여겨 사람들을 모두 나의 동포와 같이 여겨야 함을 논하였다.( 張子全書 卷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