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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대제사장 예수 그리스도. / 永遠に大祭司であるイエス・キリスト。( 2024년 3월 17일 주일예배)
본문; 히브리서 5:5-10
히 5:5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도 자기 자신을 스스로 높여서 대제사장이 되는 영광을 차지하신 것이 아니라, 그에게 "너는 내 아들이다.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하고 말씀하신 분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6 또 다른 곳에서 "너는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라 임명받은 영원한 제사장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7 예수께서 육신으로 세상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분께 큰 부르짖음과 많은 눈물로써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경외심을 보시어서, 그 간구를 들어주셨습니다. 8 그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9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10 하나님에게서 멜기세덱의 계통을 따라 대제사장으로 임명을 받으셨습니다.
5. 同じようにキリストも、大祭司となる栄誉を御自分で得たのではなく、/「あなたはわたしの子、/わたしは今日、あなたを産んだ」と言われた方が、それをお与えになったのです。6. また、神は他の個所で、/「あなたこそ永遠に、/メルキゼデクと同じような祭司である」と言われています。7. キリストは、肉において生きておられたとき、激しい叫び声をあげ、涙を流しながら、御自分を死から救う力のある方に、祈りと願いとをささげ、その畏れ敬う態度のゆえに聞き入れられました。8. キリストは御子であるにもかかわらず、多くの苦しみによって従順を学ばれました。9. そして、完全な者となられたので、御自分に従順であるすべての人々に対して、永遠の救いの源となり、10. 神からメルキゼデクと同じような大祭司と呼ばれたのです。
지난 주일까지 약 40주간에 걸쳐서 예수동행 시리즈 설교를 마쳤습니다. 십자가의 복음을 믿는 자아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하여 주님과 동행하며 누리는 축복과 복음을 전하는 삶에 대해서까지 배우고 나누었습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복음’이시고 ‘영생’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 안에, 주님과 동행하는 행복과 기쁨, 그리고 든든함을 누리는 믿음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그런 풍요로운 믿음의 삶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하신 영생의 복음을 증거하고 전파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2주 후에 부활절을 맞이합니다. 이 두 주간 특별히 주님의 고난과 죽으심, 그리고 마침내 부활하심으로 완성하신 우리를 위한 거듭남과 영생의 축복을 약속하시는 복음의 핵심을 거울삼아 자신을 점검하려고 합니다. 오늘의 본문을 통해 성경이 약속하시는 복음이 영원한 축복의 근원인 것이 믿어지는 실감나게 체감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복음의 창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대해서 고백하는 구절인데요. 본문의 앞 구절에서는 구약의 제사장들이 하는 역할이 가진 치명적인 약점과 부작용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거룩하게 하시고 그들에게 축복이 넘치는 삶을 주시려고 율법을 정하시고, 그에 따른 제사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내용은 이미 구약성경의 레위기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니 꼭 정독해 보시길 추천합니다. 다소 이해가 어려운 부분이 있을 수 있으나, 간단히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제사’는 거룩함을 회복하고, 사람다움을 회복하여 축복의 길을 여시는 제사라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상숭배를 하며 소원을 빌기 위한 제사와 성경의 제사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입니다.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은 자신의 길흉화복을 점치거나, 혹은 자기의 필요를 관철하기 위한 수단으로 제사를 지냅니다. 우상숭배자들은 제사를 통해 자기가 신으로 여기는 우상들의 기분을 좋게 하려고 하지요. 그렇게 기분이 좋아지면 제사를 지키는 이들에게 좋은 일도 생기게 해 주고, 뭔가 소원도 이루어 주는 마술램프의 지니와 같은 존재가 힘을 써 주는 것을 바라면서 제사를 지냅니다.
제가 어렸을 때 저희 아버지가 양복점을 운영하셨는데요. 이사를 가서 새로운 점포를 열게 되면 고사라는 것을 지냈습니다. 돼지머리 고기를 올려놓고 어떻게든 장사가 잘 되고 돈벌이가 잘 되기를 비는 행위를 하는 것이지요. 사람들을 초대해서 맛있는 음식도 나누어 먹고 술과 유흥을 즐기며 그 고사를 받는 귀신이나 영적인 존재가 그 제사하는 행위를 보면서 기분이 좋아서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그리고 돈 버는 일이 순조롭기를 소원하는 것이지요.
일본에서도 대체로 한여름에 한 차례식 마츠리를 하지요. 그 마츠리의 한자가 제사할 제라는 글자입니다. 마츠리를 하면서 마을의 액운을 떨쳐버리고, 행운이 찾아와 안녕하기를 비는 것입니다.
대체로 사람들은 이렇게 자신의 삶에 나쁜 일은 사라지고, 좋은 일만 있기를 소원하고 비는 행위를 아주 오랜 옛날부터 지켜왔습니다. 우상숭배의 전통을 지켜 온 것이지요. 하나님의 배반한 이스라엘이 그랬구요. 가나안의 수많은 우상숭배가 풍요와 번영만을 비는 역할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빌고 소원을 비는 행위는 결코 그 바라는대로 성취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상들은 하나같이 모두 아무런 능력이 없는 나무나 돌덩어리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도 그런 우상숭배의 어리석음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열국의 우상은 은금이요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그들의 입에는 아무 호흡도 없나니 (시 135:15-17)
그것을 만든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것과 같으리로다 (시 135:18)
성경은 우상을 만들고 그것에 절하고 비는 것은 우상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라고 명확하게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이는 곧 하나님께 대한 범죄입니다. 그 이유는 제사를 지키고 지내는 것은 사람의 욕망과 탐욕의 소원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허락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허락하신 제사는 바로 속죄와 감사의 제사입니다. 속죄를 통해 거룩함을 회복하고, 감사를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풍요를 회복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앞서 말씀드린 레위기를 통해 이 거룩함을 회복하는 제사의 방법과 그 기능에 대해서 아주 구체적으로 그리고 자세하게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그래서 레위기는 반복되어 기록된 구절들이 있어서 다소 읽는 것이 쉽지 않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제사가 어떤 능력과 축복인지를 믿게 되면 늘 새롭고, 감격스레 읽을 수 있는 책이 또한 레위기입니다.
성경적인 올바른 제사를 지키는 일에 있어서 제사장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구별하여 세우신 제사장을 통해 속죄와 감사의 제물을 드리려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입니다.
속된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때 제사장을 통해야만 하도록 구약의 율법에서 결정해 놓았습니다. 하지만 치명적인 단점이나 약점이 있었는데요. 인간으로서의 제사장은 속죄와 감사의 제사를 대행할 수는 있어도 그 죄를 속죄하는 능력은 없었던 것이지요. 또한 제사를 위한 제물이 그 제물을 드리는 사람의 죄를 속죄하지도 못합니다. 물론 제사장이나 제물은 제사를 드리는 사람을 정결하게 할 수 있는 거룩함이나 권능도 지니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제사장들이 지성소에 들어와 주님의 영광 가운데 대면하는 것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제물의 희생제사를 통해 속죄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던 것입니다. 인간과 그가 가져 온 흠이 없는 제물은 실제로는 한없이 흠과 결핍으로 더럽기가 한이 없는 존재였지만, 주님의 은혜로 그 허물과 결핍을 채우셨던 것이지요.
인간 제사장과 제물의 역할이 눈에 보이는 하나의 상징이며 그림자와 같았다면,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상징의 본질적인 존재로서 이 땅에 나타나셔서 그 사명을 감당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5절에서 구약의 시편 2:7절을 인용하였는데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6절에 인용한 시편 110편 4절의 말씀으로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제사장으로 세워지셨습니다.
이 두 구절은 예수님께서 곧 하나님의 아들이며, 하나님께서 친히 정하신 제사의 완전성을 회복하실 분이라는 뜻입니다. 구약성경의 배경지식을 알고 있다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신분인 하나님의 아들과 제사장의 사명을 감당하시는 예수님이신 것이지요. 그렇다고 구약의 지식이 없는 우리들은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언어로 기록되고 고백된 하나님의 아들이며 동시에 제사장이신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이 땅의 현실에서 성취하는 분이십니다.
8절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면서도 고난을 받으시는 자리에 순종하셨습니다. 성경도 그 사실을 이렇게 뒷받침하고 있는데요.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6-8)
하나님의 아들로 현실적인 모습으로 나타나신 하나님 자신이시지만, 고난과 고통 그리고 수치와 좌절을 회피하지 않으셨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이 땅에서 겪게 되는 수많은 고생스러움과 절망을 그저 제3자의 입장에서 관망하시지 않고 직접 체감하고 실감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괴로움과 고생을 주님은 이미 다 알고 계시고, 체감하고 계신다는 뜻이지요. 그저 말만 듣고 공감한다고 위로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고통과 아픔을 함께 느끼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괴롭고, 힘들고, 낙심되어 모든 진액이 다 빠져나간 것 같은 상태에 있다면 주님도 그런 상황을 함께 느끼고 계신다고 믿어도 좋습니다. 우리가 느끼는 그 어떤 괴로움과 쓰라림도 주님을 다 느끼고 계십니다. 이것에 곧 하나님의 아들로 느끼시는 고난에 순종하시는 모습입니다.
이뿐만이 아니라 주님은 9절에 기록된 대로 온전하게 되셔서,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고 하셨습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 2:11)
예수님의 그 순종으로 말미암아 예수를 구세주로 고백하는 모든 이들에게 영원한 구원, 즉 영생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제사장이 동물로 드리는 제물로 드려서 때마다 용서를 받고 잠깐만 효험이 있는 제사가 아니라, 영원토록 유효한 제사를 완성하셨다는 말씀이지요.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육신의 죽음을 통과하시기 직전 마지막에 이렇게 고백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요 19:30)
그리고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의 이 희생제사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히 10:14)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죽음은 곧 나의 죄를 처벌하시는 죽음입니다. 예수님의 속죄가 아니면, 나는 직접 정죄와 처벌을 받고 죽음과 함께 영원히 멸망하고 지옥에 갇힐 수 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자기 스스로를 희생제물로 삼으셔서 단번에 지성소에 들어가시므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는 대속의 제사를 완성하셨던 것입니다. 대속의 제사가 온전히 드려졌음으로 이제는 다시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또한 인간의 제사장도 혹은 제사장 역할도 사실 필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것은 제사를 드리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헌금과 봉사는 우리의 허물과 죄를 대신 속죄하는 제물로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예물을 드리는 행위가 자신의 물질적인 축복을 얻어내기 위해 투자하듯 바치는 것은 더더욱 아닌 것이구요.
우리의 예배는 이렇게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 나를 구원하시고 영생을 누리게 하신 주님께 감사하기 위해 예의를 갖춰 종교적 형식을 차용하여 모이는 것입니다. 이 예배를 통해 우리는 찬양과 찬송도 부르고, 기도하며 감사를 고백합니다. 말씀을 들으며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그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지요.
저와 여러분이 예배와 제사에 대해서 뚜렷이 분별하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편 119편 9절~16절을 통해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그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찬송을 받으실 주 여호와여 주의 율례들을 내게 가르치소서 (시 119:9-12)
그리고 다윗은 자신의 중대한 범죄에 대해서 지적을 받고 깨우치게 되었을 때 주님 앞에 회개하고 자복하며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시 51:10-12)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은 모두 자신의 부유함과 성공, 그리고 출세와 형통함을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이기적으로 자기중심적인 욕심과 탐욕을 채워주시도록 소원빌기를 반복하지 않았습니다. 모두 다윗과 같은 심령으로 애통하며 겸손하고 겸허하게 고백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예언자의 입술을 통해 우리에게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 31:31, 33)
저와 여러분은 바로 우리의 주님께서 새롭게 다시 맺으시고 세우신 언약의 주인공들입니다. 육신의 제사장을 거치지 않고, 누군가의 힘에 의존하지 않고 직접 주님의 말씀을 듣는 사람들입니다. 다윗이 갈망하였던 고백처럼 우리 안에 정결한 마음을 창조하신 주님께서 주님의 성령을 우리 안에 머물게 하셨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입술을 통해 고백하게 하신 주님의 법을 친히 우리 안에 기록해 두셨습니다.
이 모든 기적과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십자가 죽음, 그리고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실제로 일어난 일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주님의 약속을 믿을 때 단지 삶의 형편이나, 여건, 그리고 조건과 상황을 따라 헤아리거나 평가하거나 진단하지 않기를 부탁드립니다. 내가 살아가는 의미가 이유가 단지 이 땅에서의 생활여건과 일상의 목표에 묶이지 않으시길 갈망합니다.
예수님께서 고난받으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이 가치를 단지 먹고 마시고 입고 살아가는 의식주의 값어치로 환산되는 일이 벌어지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삶의 어떤 모습이든 주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여, 거룩한 삶을 소명으로 취하는 놀라운 기적의 주인공으로 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고난과 죽음과 부활은 단지 의식주를 해결하고, 사람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정도의 실질적인 일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보다 영적이고 차원이 높은 일에까지 비치는 능력입니다. 물론 주님께서 우리의 의식주 문제와 현실적인 어려움에 관심이 없으신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거기에 주저앉아 있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은 우리의 존재가치가 인생에서 끝나지 않고 영생에 이르기까지 존귀하다는 것을 증언하는 사건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주님의 임재 안에 주님과 동행하면서 자신의 실질적이고 영적인 가치와 존엄에 대해서 늘 기억하며 함부로 살지 않기를 갈망합니다. 이번 사순절과 고난주간, 그리고 부활절을 기억할 때 단지 교회의 행사나 이벤트를 떠올리는 태도에서 한 발 더 전진하여, 자신의 존재가치와 영적 존엄성을 회복하고 감사와 찬양으로 반응하는 일상생활의 축복을 풍성하게 누리실 수 있기를 복음의 창시자이시며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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