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05.21.기초과제/이은규
1) 누군가
누군가에 의해 움직이는 산마루엔 구름같은 기운이 서려있다. 풀이 누엿거리고 나무가 흔들거린다. 먼 산 내다보던 멧새는 어디로 가는가?
바람이 쫓아가고 구름이 뒤를 따른다.
2) 방문
꽃들은 눈보라를 뚫고 질주하고 있다. 계절의 통증을 울컥울컥 뿜어낸다. 핏자욱은 켜켜이 바래서 향기와 함께 바람에 날린다.
때맞춰 찾아온 손님의 방문이 질펀하다.
3) 캔버스
나는 유화 물감에 젖어 산다.
어떤 색깔이든 붓이 가는 대로 젖어든다. 나무를 그리든 숲을 그리든, 바람을 그리든 구름을 그리든, 강이든 바다든, 남자든 여자든 칠하는 대로 그린다.
그가 누구든 무한한 색깔과 끝없는 초원이 있고 광활한 들판을 그릴 수가 있다.
나는 오늘도 깃발을 세워놓고 오색 찬란한 그림에 젖어 꿈을 꾸고 있다.
4) 외투
외투의 보호능력은 패션이다. 얼굴을 보호하고 꾸미는 화장품이다. 세상을 보는 눈이고 세상이 보는 창이다. 외투는 앞단추를 풀어야 패션이다.
5) 해바라기
해바라기는 햇볕이다. 햇볕을 받아 재가공해서 더 많이 되돌려 주는 신사다.
보고 싶은 그리움이 뽑아낸 장대 끝에 매달려 의리를 지키는 신사다.
6) 문 밖
경계는 어디에 있는가?
문을 열고 밖을 보면 문은 없고 안과 밖은 구별이 없다. 문은 어디에 있는가 ? 소유의 문을 치우고 바람에게도 구름에게도 짐을 지우자.
문 밖 바닷가엔 파도가 모래톱을 쌓았다 지웠다 한다.
7) 발목
말의 발목은 초원을 지배하고 한때 세계를 지배한 때가 있었다. 말발굽 소리가 먼지를 날리면 선이 생기고 지도가 바뀐다.
인간의 발목은 땅을 밟고 세계를 밟으려고만 한다. 그것이 발목의 관록이다.
8) 시끄럽게 짖어댄다
개가 시끄럽게 짖어대는 이유는 어떤 욕망을 잠재우려는 압박이다.
소리란 욕망의 분출이다.
산마루에 울려 퍼지는 소리를 들어보라. 님을 부르는 소리 욕망의 벅찬 소리 환희의 노래 까투리가 꺼병이 부르는 소리 새 싹이 움트는 소리 꽃망울 터지는 소리
흘러가는 바람소리 구름 소리 .
개는 그런 소리를 들으며 집을 지키고 있다.
9) 내려다 본다
산마루에서는 내려다
보고 글짜기에서는 올려다 본다. 정지된 시간이지만 시선의 위치에 따라 대상은 다르다. 성냥갑같은 아파트, 조개껍데기같은 초가지붕들, 고층아파트와 성곽같은 집. 산중턱을 오르면서 꼭대기를 올려다 본다. 골짜기를 내려다 본다. 쉬는 곳도 산중턱이다.
10) 눈동자가 갈라진다
? ? ?
11) 난간
우산각 난간에 앉아 낚시터를 바라본다.
정각은 강가의 절벽 끝에 서있다.
노인의 시선은 찌 끝이다. 입질을 해도 눈썹 하나 까딱 않는다. 노인이 건들고 있는 것은 시간이다.
난간은 세상을 보는 창이다.
12) 사진을 찍는다
화가는 상상을 그리나 사진사는 실상을 그린다. 화가는 그림을 그리고 사진사는 사진을 찍는다.
화가는 시간을 그리고 사진은 찰라를 찍는다.
그림은 붓으로 그리고 사진은 기계가 그린다.
13) 햇볕
햇볕이 뙤약뙤약 영글어 가는 들녘 낚시터엔 물살이 햇볕을 영글게 하고 있다. 어옹은 붕어 몇 마리를 안주삼아 시간을 마시고 있다.
14) 신바람
꽃들은 봄의 신바람에 빠져서 할 말을 잃고 초록은 여름의 신바람에 취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가을은 황금빛 신바람에 물들어 겨울을 맞고 있다. 하얀 신바람은 눈사람도 웃게 만든다.
신바람은 화가에게 그림을 그리게 하고 가수에겐 노래를 하게 한다. 신바람이 씌어댄 시인은 말장난을 하고 있다.
15) 발그란 얼굴
술 한 잔에 발그란 얼굴이면 순진한 그림, 말 한 마디에 발그란 얼굴이면 순진한 표정, 순진한 꽃들은 술을 마실 수 없다. 나무는 수액을 위로 뽑아 올리지만 술꾼은 알콜을 아래로 뱉어낸다.
16) 나생이
보리고개에 피는 나생이꽃 온 몸으로 상위에 오른다. 한겨울 추위를 이겨낸 매서운 신辛맛으로 고개를 넘는다.
17) 들녁
한겨울 들녁에서 들려오는 숨소리 눈 바람 몰고 오는 함성이 억새처럼 깔려 있다.
18) 연두빛 소리
봄 언덕에서 들려오는 연두빛 소리 바람에 묻어 온다.
19) 산마루
산마루에서 내려다 보이는 꼬막살이 개미살이 한살이.
고마고만한 집들이 고마고만한 세상을 일구고 있다.
20) 배롱나무꽃
백일 동안 정성으로 피워낸 배롱나무꽃 한 바가지로 정성껏 지어 올린 햇쌀밥은 배롱나무의 전설이다.
피고지고 지고피고 백일 동안 인내하며 햇빛을 일궈낸 쌀밥이다. 보리피리 불며 넘던 고개에 핀 붉은 쌀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