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사단은 ‘다윈’에 의해서다.
인간은 아담의 후손이 아니라 영장류에서 진화했으며 사람도 동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입을 틀어막는 종교재판이 성행했고 지금도 일부종교계는 진화론을 금기시한다.
대부분의 정치적, 예술적 행위의 실제적 동기가 성(Sex)에 기인한다는 ‘프로이드’ 학설도 난감하게 했다.
지나치게 말초 신경적이라는 불평과 도마 위에 오른 인간의 정신분석으로 신비성이 퇴색되었다.
미국기자 웬디 노스컷은 사람들이 얼마나 멍청한가를 알기 위해 ‘다윈 상’을 제정했다.
매년 가장 멍청한 실수로 죽은 자를 수상한다.
폭탄을 넣은 소포가 반송되자 그것을 뜯다가 죽은 테러리스트도 있고, 고층빌딩 유리창이 얼마나 견고
한지 실험하기 위해 힘차게 달려가 24층에서 추락한 변호사도 있다.
12층 높이의 쓰레기 미끄럼틀을 타겠다던 캐나다의 한 남자는 자동압축기 속으로 빨려든다는 사실을
몰랐다.
인간의 굴욕은 낡은 도그마에 기인하고, 노스컷이 제정한 다윈상도 불완전한 인간본성이 빚어낸 가십
거리로 보인다.
그러나 인간이 동물과 같다는 것은 폄하된 면이 있다.
원시시대도 수확을 위해 씨를 뿌렸다.
인간의 촉수는 앞날을 설계하는 비전(Vision)에 능하다.
미래학자들도 앞 다투어 ‘비전’을 제시하며 지각변동을 예측하고 있다.
선진국들도 ‘2020 비전’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또한 글로벌 인재교육에 열을 올리고 있다.
자신만의 재능, 독창성을 개발하는 다양한 교육상품을 개발하고 글로벌 이미지 부각에 전력하고 있다.
글로벌 마인드의 핵심 키워드는 무엇일까?
우선 매뉴얼을 통째로 암기하는 아날로그적 인간은 배제한다.
지식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지식을 부릴 줄 아는 사람이 필요하다.
스스로 지식을 창조하면 더욱 좋다.
다르게 생각하고 다름을 즐기는 사람을 원한다.
고루한 자일수록 두더지게임 하듯 남과 달리 튀어 오르면 망치로 때려 넣어야 직성이 풀린다.
글로벌 에너지는 끼와 개성, 유연한 사고, 풍성한 상상력이다.
유창한 표현력과 의사소통능력도 필수품이다.
침묵은 무지이며 튀는 인재를 원한다.
글로벌 경쟁력은 발랄한 영감과 좋은 인간관계, 다자간의 토론이나 세련된 프레젠테이션 능력도 요구한다.
글로벌 매너는 금상첨화다.
EQ로 일컬어지는 타인존중, 감정이입에 능해야 한다.
조직을 앞세우는 개미 같은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독립적 존재로 창의적 콘텐츠를 개발하는 거미를 원한다.
지난 세기 산업사회의 심벌이 개미라면 글로벌 이미지는 거미이다.
전자가 깃발을 보고 따라가는 단체행군에 능하다면 후자는 유유자적 하늘에다 그물을 던져놓는 기발한
독창성이 돋보인다.
일사불란하게 뭉치는 뚝심으로 개미는 땅속에서도 천국을 건설하지만 독창성이 없고 무리에서 떨어지면
쳇바퀴만 돌게 된다.
거미는 시공을 거미줄로 교직하는 지혜가 있다.
허공에 매달려서도 전술전략에 능하고 허허실실로 지략이 뛰어난 창조적 동물이다.
글로벌시대는 조각난 부속품보다 거미줄을 치듯 정교한 완성품을 원한다.
따라서 당대의 화두는 ‘개미와 거미’이다.
일사불란을 좋아하는 일본인이 개미라면 엑스터시(忘我)를 즐기는 한국인의 신바람은 거미의 속성이다.
뛰어난 독창성과 현란한 비전은 하나 되는 문화에서 비롯된다.
변강쇠 캐릭터
변강쇠는 조선후기의 쇠잔하고 척박한 시대가 낳은 캐릭터다.
제도권에서 밀려나 유리걸식하던 발칙한 인물이다.
흔히 강쇠라면 천하의 난봉꾼을 연상케 하는 까닭도 그런 연유에서다.
판소리 변강쇠의 이본(異本)이 ‘가루지기타령’으로 유랑민들의 애환과 강쇠의 이미지를 잘 대변하고 있다.
가루지기란 송장을 장작처럼 지고 가서 묻는다는 뜻이다.
조선후기 유랑민들의 피폐해진 삶은 끝없이 밟혀도 일어서는 풀잎 같은 존재였다.
따라서 천민들의 죽음도 화려한 장례의식과는 거리가 멀다.
변강쇠와 한통속인 옹녀도 문명사회로부터 버림받은 그로테스크한 캐릭터다.
여섯 명의 서방을 죽게 했다는 청상(靑孀)살이 문제가 되어 월경촌에서 쫓겨난다.
사설은 그렇지만 옹녀 스스로 봇짐 싸들고 탈출했다는 편이 옳다.
제도권이 얽매고 있는 수절과부에 대한 사회적 올가미를 과감히 거부한 저항적인 기질과 반골적인
캐릭터는 변강쇠를 빼닮았으니 천생연분인 셈이다.
청석관에서 운명적으로 만난 두 화상은 마음을 돌려먹고 지리산자락 함양 땅에 살림을 차린다.
그러나 허튼 짓 이외는 아무 재간이 없는 강쇠가 문제였다.
나무 해오라는 옹녀의 등쌀에 동구 밖 장승들을 모조리 뽑아다가 패어 때고 뜨끈뜨끈한 구둘목에서
한껏 놀아났다.
원통한 함양 목신들이 노량진 두목장승을 찾아가 읍소했고 대노한 두목은 팔도에 사발통문을 돌려
변강쇠를 단죄한다.
당장 목을 잘라 죽여서는 한이 차지 않으니 조선 땅에 있는 94가지 병이라는 병은 모두 강쇠에게 한꺼
번에 앓게 하는 이른바 ‘병’도배를 당해 옴짝달싹 못하고 뻣뻣하게 선채로 죽는 장승죽음을 맞는다.
장승은 마을을 지켜온 수호신이고 민족정체성의 상징이다.
따라서 강쇠의 장승 패 때기는 반사회적이고 변형된 체제도전이다.
결국 변강쇠타령은 음담패설로 일관한 사랑 놀음이 아니다.
작품의 사설 속에 녹아있는 알레고리는 기존질서에 대한 반체제적 에너지의 표출이다.
강쇠가 아무리 체제도전의 저항을 계속한다 해도 매번 바위에 계란치기다.
무모한 현실도전에 대한 심리적 갈등만 증폭시켰다.
따라서 변강쇠의 사회관은 ‘무정부’주의다.
체제에 대한 좌절감과 갈등심리로 죽어서도 칼날 같은 반항심만 남아 있다.
변강쇠타령의 작품성도 역설적인 플롯에 있다.
유랑민의 고초를 희극으로 각색하고 우리고전에서 유례없는 비극적 종말로 처리했다.
여왕벌인 옹녀도 허공으로 증발되고 만다.
곧 존재의 무화(無化)다.
강쇠는 기댈만한 언덕도 없었고 유리걸식하는 떠돌이로 태어났으니 잃을 것도 없는 철저한 민초였다.
문제는 자신의 고집을 꺾지 않는 데 있다.
이로 인해 본인의 삶이 파멸되지만 그의 저항적인 의식구조는 변하지 않는다.
특히 강쇠적인 기질은 죽음 앞에서도 굽히지 않는다.
뻣뻣하게 서서 죽는 장승죽음을 맞이하면서도 후회하지 않고 절대자에게 참회하는 장면이 없다.
그들에게 신은 사치스런 존재이다.
그의 치상과정에서 7명의 다른 떠돌이들의 죽음조차도 희극적으로 처리하며 공포나 연민의 정이 없다.
가객은 부채를 짝 펼치며 숨이 딸칵, 악사는 가얏고를 켜다가 그만 식고, 퉁소장이는 힘이 빠져 그만
자진하는 등 괴기한 죽음의 연출도 해학적으로 치부하는 눈물겨운 소극(笑劇)성이 체제저항의 변형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강쇠와 옹녀는 역설적으로 ‘한’문화의 왜곡을 고발하고 있다.
상하가 하나라는 생각이나 자타여일(自他如一)의 민족원형들이 철저히 봉쇄된 신분체제에 대한
아나키즘이다.
누구에게나 변강쇠 캐릭터는 숨어 있는 것이다.
(제갈태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