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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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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당 조정육의 그림과 인생 스크랩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 속으로 들어간 우키요에
무진당 추천 0 조회 476 11.10.12 16:23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조정육의 『동양화가 말을 걸다』⑭카츠시카 호쿠사이, <붉은 후지산>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 속으로 들어간 우키요에

 

 

빈센트 반 고호의 <귀를 붕대로 감은 자화상>은 두 점이 알려져 있다. 한 점은 붉은색 바탕을 배경으로 파이프를 물고 있는 모습이고, 다른 한 점은 녹색과 파란색이 두드러진 자화상이다. 두 작품 모두 불안한 색조와 거칠거칠한 붓 터치 속에 고갱과의 불화 때문에 귀를 자른 화가의 광기가 담겨 있다. 쏘아보는 듯한 눈빛과 꼭 다문 입술에는 철저히 고독하게 살다간 한 사내의 외로움이 묻어 있어 이 그림을 한 번 본 사람은 쉽게 그를 잊지 못한다. 그만큼 고호의 작품은 인상이 강렬하고 개성이 강하다. 그런데 녹색과 파란색이 강조된 자화상을 들여다보면 뒷배경에 이상한 그림 한 점이 붙어 있다. 우끼요에(浮世繪)다. 배경이 없었더라면 인물이 훨씬 더 돋보였을 텐데 그걸 모를 리 없는 고호가 굳이 그 효과를 반감시켜가면서까지 배경에 이 그림을 붙여 놓았다. 왜 그랬을까. 이 작품에서는 우끼요에가 한 장이지만 <탕기 영감>에서는 정도가 더 심하다. 여섯 장이나 되는 그림이 조각보처럼 붙어 있다. 이쯤 되면 고호가 우끼요에를 배경으로 그려 넣은 이유가 매우 의도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도대체 우끼요에가 어떤 그림이기에 프랑스에서 활동하고 있던 고호가 일본 그림을 자신의 그림 속에 간접광고처럼 집어 넣었을까.

 

카츠시카 호쿠사이, 《후카쿠 36경》 중 <붉은 후지산>, 1831년경, 다색판화, 15.6×22.7cm, MOA미술관, 시즈오카

 

 

뜬구름같은 세상을 그린 그림

일본의 산 하면 곧바로 후지산(富士山)이 떠오른다. 후지산은 외국인들에게 일본을 상징하는 산으로 각인되어 있다. 카츠시카 호쿠사이(葛飾北齋:1760-1849)가 그린 <붉은 후지산>은 일본이라는 작은 나라에서 지역 명소로만 알려진 동네 산을 전 세계 사람들이 찾고 싶어 하는 산으로 화려하게 데뷔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평소 일본화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일식집에서 기모노를 입은 미인의 모습과 함께 후지산을 그린 이 그림을 봤을 것이다. 그만큼 <붉은 후지산>은 흡인력이 있다. 카츠시카 호쿠사이가 일흔을 조금 넘겼을 때 제작한 작품으로 《후카쿠36경(富嶽三十六景)》중의 일부다. 후카쿠(富嶽)는 후지산의 다른 이름이다. 이 시리즈는 일본인들이 신령스럽게 여기는 후지산을 여러 각도에서 바라보며 그린 우끼요에로 단순하면서도 파격적인 구도와 생동감 넘치는 표현이 돋보이는 명작이다.

우끼요에의 한자음은 ‘부세회(浮世繪)’다. ‘뜬구름 같은 세상을 그린 그림’이라는 뜻이다. 끊임없는 전란과 고통 속에서 근심스럽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세상은 그야말로 부질없이 떠다니는 뜬구름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늘 아래 놓인 모든 것은 무상(無常)하다. 세월의 풍화작용 속에 똑같이 무너진다. 성주괴공(成住壞空)의 진리 앞에 영원한 것은 없다. 강한 것도 약한 것도, 고운 것도 추한 것도 때가 되면 예외 없이 낡고 부서진다. 영원히 깨질 것 같지 않던 단단한 바위도 때가 되면 바스라져 모래로 변한다. 별도 나이가 들면 우주속의 먼지로 사라지는데 사람의 일생이야 오죽하랴. 인생도 바람결에 떠다니는 뜬구름 같다. 인생이 이렇게 덧없고 무상할진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할까. '꿈 같고 환영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으며(如夢幻泡影), 이슬 같고 번갯불 같은데(如露亦如電)' 이 짧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 무상한 세상에서 ‘자연의 흐름을 거스르려는 것은 어차피 쓸모없는 짓’이다. 차라리 사라져가는 것의 아름다움을 적극적으로 즐겨야 한다.

이것이 일본인들의 미의식이다. 그들이 계절마다 ‘벚꽃과 반딧불, 단풍’을 찾아 맹렬하게 여행지를 찾아나서는 것도 ‘눈앞에서 덧없이 지고, 작은 빛을 잃고, 선명한 색을 빼앗기는’ 찰나의 아름다움 속에서 오히려 위로를 받고 안심을 느끼기 때문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런 현상을 가리켜 '모든 것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것이다, 라는 포기의 세계관은 일본인의 정신성에 강하게 새겨진 민족적 멘털리티로서 고대부터 거의 변하지 않고 이어져 왔다'.(「비현실적인 몽상가로서」『문학동네』2011년 가을호)고 해명한다. 덧없는 세상이기에 순간에서 영원을 찾겠다는 것이다. 우끼요에 속에 가로등불을 향해 달려드는 불나방의 가벼운 날갯짓과, 절정의 순간에 불빛 속에서 생을 마감하는 생명체의 격정이 포개어 담긴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일본열도의 아름다움으로 눈을 돌리다.

우끼요에는 에도시대(江戶時代:1603-1867)에 만들어진 풍속화라고 해서 ‘에도에(江戶繪:에도 그림)’라고도 부른다. 에도는 도쿄(東京)의 옛날 명칭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1543-1616)가 쇼군(將軍)의 자리에 오른 후 만든 신도시다. 그는 ‘덴노(天皇)’가 머물고 있는 교토(京都)를 떠나 황무지나 다름없는 에도에 바쿠후(幕府:)를 설치하고 관료기구를 장악했다. 바쿠후의 하부에는 조닌(町人)이라는 상인들이 그들을 떠받치고 있었다. 이때부터 덴노는 메이지 유신(明治維新:1868-1889)으로 권력을 다시 잡을 때까지 명목상으로만 최고 수장일 뿐 정치와 행정에는 일체 간여할 수 없었다. 황도(皇都)인 교토는 전통과 문화가 강고하게 자리 잡고 있었던 반면 신도시인 에도는 문화의 볼모지였다. 건설 현장이나 다름없는 신도시에는 외지에서 온 남자들로 득실거렸다. 혼자 있는 남자들이 많다보니 즉석 음식이 인기를 끌었고, 유곽과 가부끼 극장같은 독특한 문화가 발달했다. 상업적인 풍속화인 우끼요에에 유녀(遊女)들과 가부끼 배우들, 그리고 음란한 춘화(春畵)와 기괴한 귀신이야기가 주소재로 등장하는 것은 에도 시대의 풍속을 반영한다. 조닌들이 주 소비층인 우끼요에는 대부분 이 범주내에서 그려졌다.

 카츠시카 호쿠사이라는 거장이 등장하면서 우끼요에 세계에 일대 전환이 이루어진다. 일본 열도의 아름다움을 판화 속에 담기 시작한 것이다. 에도 막부는 통치권을 강화하기 위해 산킨코타이(參勤交代)라는 제도를 만들어 지방의 다이묘들을 일정 기간 동안 에도에 와서 머물도록 했다. 대신 고카이도(五街道:에도를 기점으로 한 다섯 주요 도로)를 정비하고 슈쿠바(驛站)를 설치하여 이동하는데 불편을 최소화시켰다. 도카이도(東海道), 나카센도(中山道), 고슈가도(甲州街道), 오슈가도(?州街道), 닛코 가도(日光街道) 등의 고카이도를 따라 처음에는 다이묘 행렬이 지나다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상인과 순례객, 그리고 여행자들이 그 뒤를 따랐다. 카츠시카 호쿠사이가 유녀와 가부끼 배우 대신 자신이 여행하면서 본 풍경을 소재로 선택하게 된 것은 이런 시대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그의 뒤를 따라우타가와 히로시게(歌川廣重:1797-1858)같은 천재작가가 등장해서 서정적인 울림을 주는 풍경 판화로 그 맥을 이었다.

 

 

빈센트 반 고흐, <귀를 붕대로 감은 자화상>, 1889년, 캔버스에 유채, 60×49cm, 코트 올드 인스티튜트갤러리

 

 

유럽에서의 자포니즘 열풍

유럽인들이 일본을 알게 된 것은 도자기를 통해서였다. 일본에서 전단지나 신문지처럼 가볍게 취급된 우끼요에는 귀한 도자기가 깨지지 않도록 포장지로 사용되었다. 요즘 우리가 택배를 보낼 때 물품 사이에 신문지를 끼워 넣는 것과 같은 이치다.  정작 유럽인들의 눈길을 끈 것은 도자기가 아니라 포장지였다. 이런 분위기속에서 19세기 중반, 일본미술에 대한 호기심과 이국취미로 ‘자포니즘(Japonisme)’ 열풍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인상파화가들의 반응은 광적이었다. 빛의 변화에 따라 시시각각 달라지는 풍경을 그리는데 지쳐 있던 인상파 화가들은 일본미술에서 발견되는 ‘비대칭적이고 양식적이고 풍성한 색채’에 혼을 빼앗겼다. 대담한 구도와 선명한 색채도 매력적이었다. 카츠시카 호쿠사이는 일본을 후지산의 나라로 알리는 전령이었다. 인상파화가들은 자신의 그림 속에 일본을 상징하는 병풍, 부채, 기모노, 도자기, 족자, 우끼요에 등의 알레고리를 경쟁적으로 그려 넣기 시작했다. 화가들의 스펙트럼도 넓었다. 드가, 마네, 모네, 르노와르, 로트렉, 루소, 에곤 쉴레, 클림트 등 19세기를 살았던 많은 작가들이 우끼요에에 심취했다.

그 중에서도 고흐는 특히 그 정도가 심했다. 그는 우끼요에를 단순히 그림의 배경 일부로만 집어넣는데 만족하지 못했다. 우타가와 히로시게의 《에도 명소 100경(名所江戶百景)》을 유화로 모사할 정도로 심취했다. <귀를 붕대로 감은 자화상>의 배경에 우끼요에가 들어가 있는 것은 이런 시대적 배경을 반영한다. 자신의 귀를 자를 정도로 심각한 광기에 빠져 산 고흐 또한 당시 모든 인상파화가들처럼 그림의 형식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한 장의 그림 속에는 의외로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처음 만난 상대에 대해 알고 싶은가. 격식을 갖춘 행동 너머의 배경을 잘 살펴보시라. 얼굴 표정과 손짓, 말투와 언어, 입고 있는 옷과 걸음걸이 등 그가 하는 모든 행동 속에는 그가 지금까지 살아온 생활방식과 전 생애가 담겨 있다. 숟가락 들고 밥 먹는 모습 속에도 그 사람의 일상이 투영되어 있다. 처음 보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의 모습에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굳이 점쟁이가 아니라도 상대방에 대해 금새 파악할 수 있다. 상대방의 ‘빽그라운드’를 알고 나면 상황 파악이 안되어서 주책없이 엉뚱한 소리를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조정육)

 

김경호김연우 - 사랑과 우정 사이 (With 김연우) (피.. | 음악을 들으려면 원본보기를 클릭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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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1.10.12 20:32

    첫댓글 ㅎㅎ 무진당님의 예리한 관찰력 덕분에 서양화속에 일본화가 잔존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천재화가로 알려진 고호의 눈빛이 범상치 않습니다 ()()()

  • 11.10.15 10:02

    고갱이 타이티의 햇살 아래에서 그림을 그렸듯이... 고흐도 자신이 동경하던
    우끼요예의 단순함과 밝은 색채처럼... 일본에서의 삶이 주어졌다면.....
    아쉬움이 듭니다. ~뜬구름 같은 세상에서.. 너무도 강렬한 자의식의 충동을
    몸서리쳐질 정도의 한계 상황까지 몰고 간 후의 슬픈 평화처럼...아프게 와닿는
    < 귀를 붕대로 감은 자화상>과 무진당님의 글을 깊이 감상하며, 이 가을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으로 이해바라밀을 실천하고자 노력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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