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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 행동) 01. 알면 사랑하게 된다.
동굴 벽화의 소재를 살펴보면 동물들이 대부분입니다. 먼 옛날 고구려 벽화에서 장수들이 사냥하는 모습을 봐도 동물에 관한 관심은 오랜 옛날부터 아주 많았던 듯합니다. 그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간단히 생각해 보면 ‘필요했기 때문’에 그러했을 겁니다. 식량을 얻기 위해 동물을 사냥해야 했고, 그러려면 그 동물이 어느 통로로 이용해 어디로 이동하고 언제 나타나는지 잘 알아야 했을 겁니다. 그런 지식이 없는 사냥꾼은 동물이 오지도 않는 엉뚱한 곳에서 늘 헛수고만 했을 테지요. 또 만약 사람을 잡아먹고 해칠 수 있는 무서운 동물이라면, 그 동물이 언제 어디에 나타나는지 알아야 피할 수 있었을 겁니다. 아마도 이렇게 인간은 생존을 위해 동물을 관찰했을 겁니다. 그런데 이런 필요 때문에 관찰한다고 하지만 그것 말고도 이유는 또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 좀 더 근본적인 이유인지도 모르지요.
하버드 대학교의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E. O. Wilson)교수는 ‘바이오필리아(Biophilia)’라는 아주 과감한 이론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바이오(Bio)는 ‘생명 또는 생물’이라는 뜻이고, 필리아(philia)라는 말은 ‘좋아한다, 사랑한다’라는 뜻입니다. 윌슨 교수는 인간의 천성에 생명 그 자체에 대한 ‘사랑’ 또는 ‘애착’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를테면 우리가 새끼사슴을 보고 무척 예쁘다고 느끼는 것은 누가 시키거나 디즈니 영화에 새끼사슴이 자주 나와서 습관적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자연과 함께하고 싶어 하는 천성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늘 사랑스러운 마음만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참새를 보고 돌멩이를 던지기도 합니다. 예전부터 동물을 잡아먹고 살았으니 먹이를 보면 잡으려고 그렇게 행동하는 건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참새가 열린 창문으로 방에 들어왔을 때 그 참새를 죽이려고 밖에 나가서 돌멩이를 가지고 들어오지는 않지요. 그렇게 아주 가까이 다가오면 대개 그 새를 사랑하게 됩니다. 잘 보호해주고 심지어는 기르고 싶어 합니다. 이런 행동을 보면, 동물을 사랑하는 본성이 인간의 내면에 있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동물을 연구하다 보면 그들의 행동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는데, 현재의 인간도 진화의 산물이기에 이런 관찰 속에서 인간의 본성을 찾는 데 많은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동물행동학자들이 동물을 연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이지요.
이런 상상을 해보지요. 문명이 발달한 외계 어느 행성의 생물학자들이 우주선을 타고 돌아다니다가 ‘지구는 참 아름다운 행성인데 저기 무슨 생물이 사는지 한번 연구해보자’라고 결심하고, 연구비를 마련해서 지구로 내려온다고 상상해봅시다. 우주선을 타고 어딘가 착륙하여 ‘참, 지구에는 묘한 동물들이 많이 사는구나’라고 하며 이것저것 연구를 시작하겠지요. 그들이 몇천 년 전에 내려왔다면 다른 동물들을 더 연구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이라면 인간을 연구할 가능성이 제일 큽니다. 왜냐하면, 어디를 가나 인간이 있으니까요. 그들이 본 인간은 바로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라는 동물입니다. 속명은 ‘호모’고, 종명은 ‘사피엔스’라는 종입니다. 호모 사피엔스 외에는 동물이라곤 거의 보기 힘들 겁니다.
그런데 인간을 연구하자면, 일단 우리가 하는 일이 한둘이 아니기 때문에 매우 복잡합니다. 외계 생물학자들은 인간이라는 동물을 쫓아다니며 다른 동물과는 다른 행동을 하는 것을 많이 발견할 것입니다. 다른 동물은 배가 고프면 열매를 따 먹거나 풀을 뜯어 먹거나 아니면 다른 동물을 덮쳐서 잡아먹는데, 인간이라는 동물은 묘하게도 사람들이 많이 모여있는 곳으로 가서 미리 누군가가 먹을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것을 집어 들고나오면서 주춤주춤하더니 주머니에서 뭘 꺼내 건네주면 저쪽에서도 무언가를 주고……. 외계인은 ‘참 이상한 방법으로 음식을 찾아 먹는구나’라고 하면서 기록을 하겠죠. 이런 일련의 행위들을 이를테면 경제학이라고 소개하면서, 원료를 제공하는 사람, 상품을 만드는 사람, 그 상품을 팔고 사는 사람 등이 따로 있다고 기록할 겁니다. 어떤 때는 싸움이 벌어져서 소동이 일어나기도 하는데, 다른 동물 사회에서는 싸움이 벌어지면 이를 드러내고 싸우다 힘이 좀 부친다 싶으면 도망가버립니다. 물론 인간이란 동물도 그런 행동을 하긴 하지만 대부분 그저 몇 마디 나누다가 둘이 같이 어디를 가서 검은 옷 입은 사람 앞에 앉으면 누가 대신 일어나서 얘기도 해주고 하면서 누가 옳은지 그른지를 따집니다. 인간들은 법이라는 것을 만들어 그런 식으로 해결한다고 기록하겠지요.
윌슨 교수는 출간한 『사회생물학』에서 모든 학문은 생물학일 수밖에 없으며 모든 학문은 생물학으로 귀착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왜냐하면, 위에서 예를 든 것처럼 외계의 생물학자가 와서 인간을 연구한다면, 법학을 연구해도 그게 어떻게 보면 호모 사피엔스라는 생물 행동 일부에 해당하고, 경제학을 연구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술을 해도 그렇고, 모든 학문 분야가 어떻게 보면 이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의 동물행동학의 범위에 포함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작게 보면 동물행동학, 크게 보면 생물학이 모든 학문을 포용할 수밖에 없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예언했습니다. 물론 다른 분야의 학자들은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지요. 윌슨은 『통섭(Consilience)』이라는 책을 써서 결국 모든 학문은 자연과학(특히 생물학)을 통해 풀어낼 수밖에 없음을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모든 인간사가 종교에서부터 예술, 법률, 경제 등 모든 것들이 결국은 자연과학적으로 분석이 되지 않는 한 앞으로 큰 발전이 없을 것이라는 얘기죠.
‘컨실리언스(Consilience)’라는 말은 새로 소개된 어려운 말입니다. 우리말로 하면 ‘지식의 대통일’ 정도로 옮길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저는 ‘통섭(統攝)’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생물학은 기초과학의 한 분야지만 종합적인 성격이 강한 학문입니다. 생명 현상 자체가 너무나 다양하므로 다양한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고, 그런 다양한 질문에 답하는 학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생물학 분야 중에서도 동물행동학은 특히 더 종합적인 성향이 강합니다. 한 방향으로 한 가지 질문만 해서는 그 동물의 행동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동물행동학자들은 어떤 동물의 행동에 대해 말할 때 기본적으로 두 가지 질문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어떻게’라는 질문이고, 또 하나는 ‘왜’라는 질문인데, 영어로 하면 곧 How와 Why지요. 예를 들어 황로는 겨울이 되면 아름다운 주황색 깃털이 거의 다 빠져 희끗희끗해집니다. 번식기인 여름이 되면 다시 화려한 색을 띠지요. 이걸 바라보면서 동물행동학자는 먼저 ‘어떻게’라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이 일어날까요? 계절이 바뀌어 낮이 길어지기 시작하면 그 자극 때문에 새들의 몸속 호르몬 체계가 변하면서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어떻게’라는 것은 이 과정을 묻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런 질문에 대해 유전학적으로나 생리학적 또는 생화학적으로 많은 연구를 해왔고 상당 부분 그 메커니즘을 찾아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어떻게’라는 질문에 답을 해보아도 또 질문이 남습니다. 도대체 ‘왜’ 그런 행동을 하느냐는 겁니다. 왜 할까요? 그냥 그대로 있지, 왜 에너지를 써가면서 겨울에는 깃털을 떨어드리고 봄에는 다시 만드는지, 또 동물 암컷은 보통 수컷보다 별 볼일 없이 생겼는데 암컷은 왜 이런 작업을 하지 않는지, 수컷들만 이렇게 화장을 하고 치장을 하는 데 시간을 보내고 공을 들이는지? 이런 여러 문제를 왜? 왜? 왜? 하면서 질문해나갈 수 있지요.
Why라는 질문은 어떻게 보면 동물의 행동을 진화의 관점에서 보며 이 생명체가 어떻게 이런 행동을 하게 됐느냐를 묻습니다. 그래서 동물의 행동에 대해서는 How와 Why라는 두 물음이 모두 필요하고, 이 두 물음 모두에 답을 할 수 있어야 완벽하다고 할 수 있지요.
생물학자들은 이런 질문을 하면서 여러 방법으로 접근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대체로 ‘어떻게’라는 질문을 하다 보면 문제가 자연스럽게 좀 더 작은 단위로 자꾸 나뉘고 더 세밀히 들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물리학이나 화학 등 다른 학문의 도움을 받아서 생물리학이나 생화학 등과 같은 메커니즘 쪽으로 접근하게 되지요. 그래서 대개 ‘어떻게’라는 것들을 자꾸 생각하다 보면 환원주의적인 접근 방법을 쓰게 됩니다. 그런데 ‘왜’라는 질문을 하다 보면 ‘어떻게’와는 달리 문제를 좀 더 종합적인 관점에서 보게 되고, 좀 더 진화적인 관점에서 보게 됩니다. 동물행동학에는 이런 학문적인 특성이 있습니다.
동물행동학은 꽤 오랫동안 발달해 온 학문입니다. 동굴 속에 동물 벽화를 그린 먼 조상도 동물의 이동 통로를 관찰하고 그것을 분석하고 이용하였으니 말하자면 모두 동물행동학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동물행동학과 오늘날의 동물행동학은 굉장한 차이를 보입니다. 왜냐하면, 지금의 동물행동학은 자연과학 일부로서 연구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자연과학적 연구란 무엇이며 어떻게 하는 것인가를 아는 것이 동물행동학이라는 현대 학문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한 가지 실화를 소개해볼까요. 미국 아소칸 주에서는 기독교인들이 진화학을 학교에서 강의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바람에 그 문제가 법정으로까지 갔습니다.
당시 아소칸 주 법원의 윌리엄 오버턴(William Overton) 판사는 이 문제에 대한 판결을 위해 각계의 전문가들에게 과연 자연과학이 무엇이냐를 묻고 법정에서 증언하도록 했습니다. 나중에 이 판사가 판결문을 썼는데, 그 판결문에서 그는 자연과학의 특성을 다섯 가지로 정의했습니다. 그가 내린 자연과학에 대한 정의가 어떻게 보면 자연과학자가 내린 정의보다도 더 간결하면서도 정곡을 찌른 것 같습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자연과학이 되려면 첫째, ‘자연법칙에 따라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자연과학은 인간이 만들어 낸 어떤 법규나 종교적인 강령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존재하는 자연의 원리를 따라야 한다는 뜻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두 번째는 ‘모든 것을 자연법칙에 따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입니다. 두 가지가 어떻게 보면 매우 비슷한 얘기지만 병행되어야 하는 일입니다. 그다음에 역시 중요한 얘기인데, ‘실제 세계에서 검증할 수 있어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검증할 수 없는 것은 자연과학일 수 없다는 것이죠.
예를 들어, 모든 것을 하느님이 창조했다는 가설은 검증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이 창조했다는 사실은 다시 해볼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에게 실험하려고 하니 어느 날 좀 와서 다시 한번 해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세상에 기독교 같은 종교들이 있는 것은 너무나 좋고 당연한 일이지만, 검증할 수 없으므로 그것이 창조과학이니 기독교과학이니 해서 과학의 영역에 들어올 수는 없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 그는 자연과학의 특징을 ‘연구 결과는 언제나 잠정적일 수밖에 없다.’라고 했습니다. 새로운 이론이 나오고 새로운 실험 방법이 나오면 바뀔 가능성을 언제나 갖고 있어야 그게 자연과학으로서 힘을 얻는다는 말입니다. 마지막으로 ‘반박할 수 있어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실험을 어떻게 하느냐, 자료를 어떻게 모으느냐, 가설을 어떻게 세우고 검증하느냐에 따라서 기존의 학설이나 믿음을 반증할 수 있어야 자연과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정리하면, 자연법칙에 따라 실험적으로 검증할 수 있어야 하고 실험 결과에 따라 반박할 수 있는 여지가 있어야 자연과학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동물행동학은 자연과학입니다. 자연과학에서 제시하는 법칙에 따라 관찰하고 연구하고 결과를 분석하는 학문이지요. 가끔 동물영화를 보다 보면 마치 동물의 세계에 대해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또는 동물심리학자처럼 ‘저 동물은 지금 이래서 그렇습니다.’라고 해설하는 걸 들을 수 있습니다. 전문가들도 아직 잘 모르거나 결론이 나지 않은 내용인데 벌써 모두 결론이 난 것처럼 이야기하지요. 결코,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앞으로는 우리가 모두 동물의 행동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매사에 이것이 과학적으로 검증될 수 있는 문제인지, 우리가 실험해볼 수 있는지 없는지 먼저 생각하는 태도를 길러야 하지 않을까요? 그것이 바로 과학 발전의 밑거름입니다.
동물행동학은 일상생활에도 많은 도움을 줄 수 있는 학문 분야이긴 하지만, 무엇보다 앞으로 우리 인간이 겪게 될 아주 심각한 문제인 환경문제를 연구하는 데 가장 기본이 되는 분야 중 하나입니다. 예를 하나 들어볼까요? 영국에는 나비동호인협회가 참 많습니다. 그 사람들은 모여서 나비를 관찰하고 보호하는 일을 하지요. 그런데 주민 대부분이 그 동호회에 가입되어 있어서, 선거철만 되면 그 협회를 찾아가 ‘나비 보호 법안이 올라오면 난 무조건 찬성하겠소’라는 얘기를 안 하면 당선될 가망이 별로 없답니다.
영국의 조지 엠즈(George Elmes) 박사는 오랫동안 개미를 연구한 사람입니다. 엠즈 박사가 지원받은 연구비 중에는 나비 보호를 명목으로 나온 연구비도 있었습니다. 그가 연구한 나비들은 부전나비들이었는데, 이 나비들은 개미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부전나비 애벌레는 개미가 자기 애벌레로 착각하도록 속입니다. 비슷한 화학물질을 분비하고 개미 애벌레처럼 행동하면 개미는 자기 애벌레인 줄 알고 정성껏 보살핍니다. 이렇게 개미굴로 초대받은 부전나비 애벌레는 돌아다니면서 개미알도 먹고, 배가 고프면 일개미들한테 ‘나, 배고파요’라고 하면서 개미 애벌레 흉내를 내 개미들이 열심히 먹이를 날라오게 합니다. 그러다 성충이 되면 개미집을 날아 나오지요. 그럼 또 알을 낳고 그 알에서 애벌레가 나오면 그 동네 개미가 데려다가 키워주는 식으로 살아갑니다. 결국, 나비를 보호하려면 개미를 보호해야 합니다. 그래서 영국의 지역 주민들은 나비를 보호하기 위해 개미를 어떻게 보호하면 되느냐 하는 연구를 엠즈 박사에게 의뢰한 것입니다.
당시 심각한 문제는 나비의 수가 매년 크게 줄어드는 것이었습니다. 영국 정부에서는 줄어드는 나비를 보호하기 위해 거금을 들여 나비가 사는 지역을 매입했지요. 그리고 울타리를 쳐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게 보호구역을 만들었습니다. 언뜻 보면 어마어마한 돈을 투자해 대단한 일을 한 것이죠. 환경보호 운동 차원에서 보면 큰일을 한 겁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비의 숫자는 점점 줄어들었습니다. 그래서 엠즈 박사가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했습니다.
엠즈 박사는 개미의 행동과 생태를 연구하여 지극히 간단한 처방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그전에는 소나 양들이 보호구역에 들어가 풀을 뜯었는데, 이제 못 들어가게 하니까 풀을 뜯을 동물이 없어 풀이 길게 자라고, 그러자 개미집으로 햇볕이 직접 들어오지 못해 개미집 안의 온도가 내려가 개미들이 제대로 발육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개미들이 자꾸 사라지고, 나비도 함께 사라지더라는 거죠.
따라서 그가 오랜 연구를 거쳐 내린 결론은 너무나 간단했습니다. “울타리는 쳐놓되 소냐 양들을 들여 풀을 뜯게 하라.” 소나 양들이 들어가 풀을 뜯으면, 소나 양은 먹이를 얻어 좋고 개미집에도 햇볕이 따뜻하게 비치니 개미가 자라 나비도 많아지더라는 겁니다. 너무나 간단하게 환경을 파괴하지도 않고 농부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한 것이죠. 바로 이게 동물행동학자들이 직접적으로 이바지할 수 있는 일의 하나입니다.
이런 일은 우리나라에서도 할 수 있습니다. 바로 까치에 관한 연구입니다. 가치는 예부터 길조로 알려진 새죠. 그런데 요즘에는 까치가 아주 수난을 겪고 있습니다. 정전 사고의 주범인 데다 농가에 엄청난 피해를 주기 때문이죠. 그래서 여러 기관을 대표하는 새의 자리에서 쫓아내는가 하면 총으로 쏴서 죽이기까지 합니다. 정전 사고를 유발하여 재정상의 손해를 일으키는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둥지를 틀 만한 데가 많지 않다 보니 자꾸 전봇대에 둥지를 틀고, 둥지를 만들 만한 나뭇가지가 많지 않으니 철사 같은 것으로 둥지를 트는 것입니다. 통계가 정확하진 않지만, 전체 정전 사고의 15~30%가 가치 때문에 일어난다고 합니다. 한전에 문의해보면,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고 합니다. 어떤 때는 사고 한 번에 몇백억 손해를 보기도 한답니다. 엄청난 일이죠. 그래서 한전에서는 매년 거의 30여만 명을 동원해 줄잡아 2만 개 이상의 까치둥지를 털어내는 작업을 한다고 합니다. 400억 정도의 예산을 쓰면서요.
사람들 대부분은 정전 사고 등의 근본적인 원인을 까치가 너무 많아졌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이건 전혀 근거가 없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예전 자료가 없으므로 지금과 비교할 수가 없으니까요. 까치를 연구하는 생태학자로서 그렇게 결론 내리는 것은 너무 성급하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까치가 둥지를 틀 수 있는 나무를 우리가 너무 많이 베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가로수에 둥지를 틀고, 이제는 가로수도 모자라서 전봇대에 트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자연의 나무보다 전봇대를 더 좋아할 까치는 이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까치는 미루나무 같은 걸 참 좋아했는데 지금은 미루나무가 거의 사라졌습니다. 인간이 그런 상황을 만들어 놓고 까치가 많아졌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릅니다. 모든 일이 까치가 많아진 탓이라고만 보는 것은 아주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제 연구실에서는 까치의 생태를 연구해 왔습니다. 옛날에는 까치가 아주 굵은 나무에 둥지를 틀었겠지만, 지금은 나무가 많이 부족해 가는 나무에도 둥지를 틉니다. 흔들흔들 위태롭게 살아가지요. 아무리 관찰 때문이라지만, 나무가 너무 흔들려서 부러질까 봐 기어 올라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다리차를 이용해서 올라가 까치 새끼들에게 여러 표식도 하고 이것을 이용해 연구합니다. 무게도 재고 가치 다리에 고리도 달아주고 날개에 이름표도 달아주고 DNA 조사 등을 위해서 피나 조직을 조금 떼어내는 일도 합니다. 그런 다음에 그 까치가 이름표를 단 채 돌아다니면 망원경으로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계속 모니터링을 하는 것이죠.
이런 연구를 하는 일환으로 까치가 어디에, 왜, 어떻게 둥지를 만드는지, 둥지를 트는 행동을 연구하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한전이 겪는 어려움을 해결해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으로 열심히 연구하고 있지요. 그런데 연구비 사정이 별로 좋지 않습니다. 사다리차 한 번 빌리는데도 하루에 많은 돈이 들어갑니다. 보통 일이 아니지요. 한전에서 까치를 잡는 데 쓰는 돈이 1년에 수백억이라는데, 그것의 10분의 1이나 20분의 1만이라도 이 연구에 투자하면 어떨지……. 하다못해 사다리차라도 좀 빌려주면, 환경친화적으로 까치에게도 좋고 우리에게도 좋은 해결책을 찾아볼 수 있을 텐데요. 이런 일이 계기가 되면 우리도 100~200년간 지속할 까치에 관한 장기적인 연구를 계획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돈이 없다고 동물 행동 연구를 못 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모든 동물행동학자는 돈이 없어도 그냥 계속 연구를 진행합니다. 왜냐고요? 너무 재미있으니까요. 그냥 호기심 하나만으로도 동물을 연구한다는 것은 너무나 흥미진진합니다. 여러분도 동물영화를 아주 좋아하지 않나요? 동물을 연구하는 과정은 몹시 어렵지만, 그 어려움 속에서도 순간순간 언제나 흥미진진함과 아름다움을 느낍니다.
여러분도 이런 동물의 세계를 탐구하면서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좀 더 과학적으로 사고하고 자연에 대하여 많이 알도록 노력하면 좋겠습니다. 알면 사랑하게 됩니다. 여러분 모두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길 바랍니다.
최재천. 인간과 동물. 궁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