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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말씀이 불처럼 타올라
예레미야 20:7-13 2025/2/16 주현 후 제6주
20:7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권유하시므로 내가 그 권유를 받았사오며 주께서 나보다 강하사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 거리가 되니 사람마다 종일토록 나를 조롱하나이다
20:8 내가 말할 때마다 외치며 파멸과 멸망을 선포하므로 여호와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내가 종일토록 치욕과 모욕 거리가 됨이니이다
20:9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20:10 나는 무리의 비방과 사방이 두려워함을 들었나이다 그들이 이르기를 고소하라 우리도 고소하리라 하오며 내 친한 벗도 다 내가 실족하기를 기다리며 그가 혹시 유혹을 받게 되면 우리가 그를 이기어 우리 원수를 갚자 하나이다
20:11 그러하오나 여호와는 두려운 용사 같으시며 나와 함께 하시므로 나를 박해하는 자들이 넘어지고 이기지 못할 것이오며 그들은 지혜롭게 행하지 못하므로 큰 치욕을 당하오리니 그 치욕은 길이 잊지 못할 것이니이다
20:12 의인을 시험하사 그 폐부와 심장을 보시는 만군의 여호와여 나의 사정을 주께 아뢰었사온즉 주께서 그들에게 보복하심을 나에게 보게 하옵소서
20:13 여호와께 노래하라 너희는 여호와를 찬양하라 가난한 자의 생명을 행악자의 손에서 구원하셨음이니라
평안의 인사를 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은총과 평화와 자비가 우리 모두에게 그리고 우리 자녀와
고난 받는 이웃들에게 늘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바울의 고민과 고뇌를 엿볼 수 있는 편지가 있습니다.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 디모데전와 후서입니다.
자신의 육체가 로마에 있는 감옥에 갇히자
바울은 사도로서의 사역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육체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자 바울은 종말론적 메시지를
생애 마지막 설교의 주제로 삼아 이렇게 선포합니다.
(새)딤후4:6 나는 이미 부어드리는 제물(奠祭 drink-offering)로
피를 흘릴 때가 되었고,
세상을 떠날 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난 이후 쭉 그래왔지만
이제 남아 있는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주님의 제단 앞에 온전히 부어드리는
전제(奠祭)의 삶을 살겠다는 종말론적 다짐이었습니다.
대단하지요.
흙속으로 사라지는 전제의 삶입니다.
하나님 앞에 부어드리는 제물
전제(奠祭)의 삶이란, 바로 이런 삶이었습니다.
(새)딤후4:7 ①나는 선한 싸움을 다 (싸웠습니다)싸우고,
②(나는) 달려갈 길을 마치고(마쳤습니다),
③(나는)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렇게 바울은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며, 믿음의 길을 지킨 이들에게 주어지는 ‘의의 면류관’을 소망하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시간들을 보냅니다.
(새)딤후4:8 이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마련되어 있으므로,
의로운 재판장이신 주님께서 그 날에 그것을 나에게 주실 것이며,
나에게만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타나시기를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믿음과 소망에도 불구하고
바울을 괴롭히는 고민과 고뇌가 하나 있었습니다.
한때 바울의 동역 자이자 교회의 일군이었던 이들에 대한
깊은 고민과 고뇌였습니다.
바울의 곁을 떠나고
(코이노니아)사귐의 공동체이자 성찬의 공동체인 교회를 떠난 이들도
과연 의의 면류관이 마련될 것인가에 대한 고민과 고뇌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떠남이, 그들의 등 돌림이, 결코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거짓 교사의 유혹과 세상이 주는 박해와 시련에 걸려 넘어진 결과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자기에게 주어진 십자가의 벽, 자기 부인의 벽을 넘지 못한 연약한 믿음의 결과였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어떻게 해야 거짓 교사의 유혹에 속아 넘어진 이들에게도
어떻게 해야 세상이 주는 박해와 시련에 걸려 넘어진 이들에게도, 의의 면류관이 주어질 수 있을까요?
바울이 기도 중에 찾은 해법은 바로 하나님의 자비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자비가
그들에게도 머물기를 바라는 기도를 생애 마지막 기도로 드립니다
바울의 상처와 고민과 고뇌를 엿볼 수 있는 본문 디모데후서 4장 9절입니다.
(새)딤후4:9 그대(디모데)는 속히 나에게로 오십시오.
4: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해서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가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가고, 디도는 달마디아로 가고,
4:11 누가만 나와 함께 있습니다. 그대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십시오. 그 사람은 나의 일에 요긴한 사람입니다.
4:12 나는 두기고를 에베소로 보냈습니다.
4:13 그대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에 있는 가보의 집에 두고 온 외투를 가져오고, 또 책들은 특히 양피지에 쓴 것들을 가져오십시오.
4:14 구리 세공 알렉산더가 나에게 해를 많이 입혔습니다. 주님께서 그의 행위대로 그에게 갚으실 것입니다.
4:15 그대도 경계하십시오. 그가 우리 말에 몹시 반대하였습니다.
4:16 내가 처음 나를 변론할 때에, 내 편에 서서 나를 도와 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 나를 버리고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허물이 돌아가지 않기를 빕니다.
그래서 바울이 거의 모든 편지에서 공식처럼 사용했던 인사말 '은혜'(charis)와 '평강'(eirene)이라는 단어에, 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자비(eleos)’를 유독 디모데전서와 후서에서만 더했던 것입니다.
(새)딤전1:1 우리의 구주이신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된 나 바울이,
1:2 믿음 안에서 나의 참 아들이 된 디모데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께서 내려주시는 은혜와 자비와 평화가 그대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새)딤후1:1 하나님의 뜻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된 나 바울이,
1:2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께서 내려주시는 은혜와 자비와 평화가 그대에게 있기를 빕니다.
이렇게 디모데전서와 후서에서
이전에 없었던 인사말 '자비'를 유독 첨가한 이유는
거짓교사의 유혹에 넘어진 이들이
세상이 주는 박해와 시련으로 인해 실족한 이들이
하나님의 자비를 입어, 그들에게 책임이 돌아가기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새)딤후4:16 내가 처음 나를 변론할 때에, 내 편에 서서 나를 도와 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 나를 버리고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허물이 돌아가지 않기를 빕니다.
어느 선배 목사님이 들러주신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시는데
교인 중에 한 분이 이렇게 묻더라는 것입니다.
‘목사님도 외로우세요?
얼핏 머릿속을 스치는 정답은 이것이었습니다.
‘주님이 계신 데 외롭기는 뭐가 외로워요’
하지만 그렇게 대답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럼요, 그럼요. 외롭지요. 말의 무력함을 절감할 때, 입술로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 성도들에게 믿음으로 다가가지 않고 왜곡되어 땅 바닥에 내 팽겨진 주보처럼 될 때, 그 때 무척 외롭지요.’
감리교 최초의 조직신학자 정경옥 교수님이 계십니다.
이분이 한국인 최초로 인간 예수의 생애를 기록한 ‘예수전’을 쓰셨습니다. 그 책의 제목이 ‘그는 이러케 살엇다’(국한문 세로쓰기, 1938 평양애린원)입니다.
거기에 보면, 예수님의 외로움이 이렇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외로움
그 외로움은 자신이 믿었던 한 제자의 밀고, 배신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피땀 흘려 기도하실 때 잠을 자다가 흩어져 버린 제자들 때문도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자신을 세 번씩이나 모른다고 했기 때문도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외로움, 그 외로움의 실체는 바로 이것이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자기의 제자들이 다 어디로 가고 자기 혼자 남아 있다는 것이 외롭다는 것보다 사랑을 주어도 받을 이 없다는 것을 외로워하셨던 것이다. 그렇다. 신앙의 사람이 되려면 세상에서 친구가 없다. 믿음의 생활을 하는 사람은 고독의 사람이요 눈물의 사람이다. 선견을 가진 사람은 군중의 환영을 받지 못한다.
사랑을 주어도 받을 이 없다는 외로움
그 외로움이 우리 주님을 괴롭히는 외로움이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신학대학교에 입학시험을 보는 날이었습니다.
성경 시험을 감독하기 위해 들어오신 감독관 선생님이 느닷없이 이런 제안을 하셨습니다. ‘여러분 찬송가 한 장 부르고 시험 봅시다.’
그렇게 성경 시험을 앞두고 부른 찬양이 찬송가 323(355)장 부름 받아 나선 이 몸이었습니다.
1.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만 따라 가오리니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
어느 누가 막으리까 죽음인들 막으리까
2.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 들고 가오리다
소돔 같은 거리에도 사랑 안고 찾아가서
종의 몸에 지닌 것도 아낌없이 드리리다
종의 몸에 지닌 것도 아낌없이 드리리다
3. 존귀 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 천대 십자가는 제 가지고 가오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아멘
하지만 문제는 이런 다짐과 결단들이 흔들릴 때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외로움처럼
사랑을 주어도 받을 이 없다고 느껴질 때
어느 목사님의 외로움처럼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 믿음으로 다가가지 않고,
왜곡되어 땅 바닥에 내 팽겨질 때
그때 부름 받아 나선 이 몸에 대한 회의와 외로움이 찾아온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예레미야도 그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강력한 부르심으로 예언자의 길을 용기 있게 그리고 진실하게 걸었지만,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 정의와 공의를 담대하게 목숨 걸고 선포했지만, 그가 선포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이가 없다고 느껴질 때, 하나님의 말씀 정의와 공의를 부담되는 말씀(Burden of Yahweh)으로 왜곡하여 듣고, 믿음마저 땅 바닥에 내 팽겨질 때, 예레미야는 말로 다할 수 없는 회의와 외로움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총감독이자 제사장인 바스홀에 의해 밤새도록 두들겨 맞고 돌아온 그 다음 날이었습니다.
그 날 아침 예레미야는
이 모든 것을 (쇼케트)지켜보시기만 하고 침묵하시는 하나님께
이런 탄식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새)렘20:7 주님, 주님께서 나를 속이셨으므로('설득하셨으므로' 또는 '유혹하셨으므로), 내가 주님께 속았습니다('설득당했습니다' 또는 '유혹당했습니다'. 주님께서는 나보다 더 강하셔서 나를 이기셨으므로, 내가 조롱거리가 되니, 사람들이 날마다 나를 조롱합니다.
20:8 내가 입을 열어 말을 할 때마다 '폭력'을 고발하고 '파멸'을 외치니, 주님의 말씀 때문에, 나는 날마다 치욕과 모욕거리가 됩니다.
20:9 '이제는 주님을 말하지 않겠다. 다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외치지 않겠다' 하고 결심하여 보지만,
그런데요.
그 다음 말씀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일이 예레미야 자신에게 치욕과 모욕거리가 되었지만
그래서 다시는 치욕과 모욕을 안겨주는 하나님의 일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해 보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분명해 지는 사실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자신의 심장으로부터 불처럼 타오르는 주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새)렘20:9 '이제는 주님을 말하지 않겠다. 다시는 주님의 이름으로 외치지 않겠다' 하고 결심하여 보지만,
그 때마다, 주님의 말씀이 나의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뼛속에까지 타들어 가니, 나는 견디다 못해 그만 항복하고 맙니다.
만약입니다.
만약 예레미야가 하나님 앞에서 투정만 부렸다면
회의의 늪 외로움의 늪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 속에서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의 현존을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새)렘20:11 그러나 ①주님, 주님은 내 옆에 계시는 힘센 용사이십니다. 그러므로 나를 박해하는 사람들이, 힘도 쓰지 못하고 쓰러질 것입니다. 이처럼 그들이 실패해서, 그들은 영원히 잊지 못할 큰 수치를 당할 것입니다. 20:12 ②만군의 주님, 주님은 의로운 사람을 시험하시고, 생각과 마음을 감찰하시는 분이십니다. 내 억울한 사정을 주님께 아뢰었으니, 주님께서 그들에게 내 원수를 갚아 주십시오. 내가 그것을 보기를 원합니다.
따라서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새)렘20:13 "주님께 노래하여라! 주님을 찬양하여라!
주님께서는 억압받는 사람들을 악인들의 권세에서 건져 주신다."
말씀을 마칩니다.
두 주에 걸쳐 샤를 드 푸코의 기도문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나의 아버지 이 몸을 당신께 바치오니 당신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저를 어떻게 하시든지 감사드릴 뿐입니다.
저는 무엇이나 준비되어 있고 무엇이나 받아들이겠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저와 모든 피조물에게서 이루어진다면 그밖에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내 영혼을 당신 손에 도로 드립니다.
하나님께 영혼을 바치옵니다. 이 마음의 사랑을 다하여 하나님께 영혼을 바치옵니다. 당신을 사랑하옵기에 이 몸을 드리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저의 사랑입니다. 남김없이 이 몸을 당신 손에 맡깁니다.
끝없이 당신을 믿습니다. 당신은 나의 아버지시기 때문입니다. 아멘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