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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조 혜능(六祖慧能, 638~713) 대사 이야기>
혜능(慧能) 대사는 638년 광동성(廣東省) 신주(薪州)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노(盧)씨이고, 당나라 시대 중국 선종 제6조로서, 남종선(南宗禪)의 시조이다. 신수(神秀)와 더불어 5조 홍인(弘忍, 601~674) 문하의 2대 선사로서, 그의 설법, 혹은 일대기를 기록한 <육조단경(六祖壇經)>이 전해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경(經)’이라 칭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적은 글만을 지칭하는 것으로 불문에서는 하나의 불문율로 돼 있다. 그런데 혜능 대사의 <육조단경(六祖壇經)>과 신라의 원효(元曉) 대사 저술로 알려진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 두 책만은 ‘경(經)’이라 칭하고 있다. 그만큼 이 두 분의 도력이 부처님에 버금갈 정도이고, 그 책의 내용 역시 불경에 버금갈 정도라고 모두가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육조단경> 전편에 흐르는 이야기는, 한마디로 자기 본성을 깨치라는 것이다. 견성(見性)하라는 말이다.
혜능 대사는 어려서 글을 배우지 못했다. 그래서 어느 날 한 비구가 혜능에게 물었다.
“글을 모르면서 어찌 그대가 진리를 안단 말이오?”
“진리는 하늘의 달과 같다. 문자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달을 보는데 손가락을 거칠 필요는 없다.”
혜능은 이 한 마디로 상대를 제압했다. 이것이 선종의 유명한 불립문자(不立文字)의 세계를 말함이다.
전통적으로 달마(達磨)를 중국 선종의 초조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중국선(中國禪)’이라는 새로운 선문을 처음으로 열어젖힌 진정한 의미에서의 개조는 혜능 대사이다. 달마 조사에 의해서 시작된 중국선의 흐름은 6대째가 되는 혜능 대사에 오게 되면, <금강경>의 반야 사상에 근거한 새로운 경향을 띠게 된다. 즉, 혜능 대사의 등장으로 해서, 달마 조사의 전통이 활달, 자재로운 좌선을 강조하며, 견성(見性)할 것을 내용으로 하는 남종선으로 발전하게 된다.
그리하여 모든 개인이 각자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독창적인 돈오성불설(頓悟成佛說)을 제창, 번쇄한 불교를 간이화하는 한편, 전통적인 우상과 계율을 부정하면서, 용감하고 독창적인 혁신을 통해 인도 전래의 불교를 중국 실정에 맞게 중국화하는 데에 성공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현재 한국불교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선불교 조계종(曹溪宗)이다.
혜능 대사가 처음 출가할 때의 이야기이다.
혜능 대사의 아버지는 말단 관리였다. 모종 정치적 사건에 휘말려 영남의 신주(薪州)로 좌천됐다. 신주에 와서는 성곽의 초소를 지키는 미관말직이었다. 여기서 나은 늦둥이가 혜능이었다. 그래서 이곳이 혜능의 고향이 된 것이다. 불행히도 아버지가 일찍 죽음을 맞이해 혜능은 전혀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한 채 땔 나무를 해다 파는 나무꾼이 돼, 어머니와 더불어 겨우 생계를 이어가는 처지가 됐다.
그러던 어느 날 나무꾼 혜능은 어떤 선비 댁에 나무를 가져다 팔고 값을 받은 뒤 문을 나서다가 그 집 선비가 읽는 경전 구절이 그의 귓전을 때렸다.
「어디에도 머무르지 말고 마음을 내어라[응무소주 이생기심(不應所住而生起心)」
여기서 혜능은 언뜻 스치는 글귀에 깨친 바가 있어, 그 게 무슨 경이냐고 여쭈었다. 무식하지만 순수한 그의 심성은 열려 있었다. 다행히 주인 선비는 친절히 가르쳐 주었다. 그것이 <금강경>이라고, 그리고 황매현 동쪽 빙모산(憑母山)에 있는 오조 홍인(弘忍, 601~674) 선사가 늘 <금강경>을 수지 독송하라고 강조하는 바라고 했다.
혜능은 황매산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그러나 노모의 생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저런 사정을 안 선비는 은전 일 백 냥을 마련해 주면서 노모의 생계를 해결하라고 하고, 어서 오조 홍인을 찾아가 가르침을 받으라고 격려해주었다.
이에 호북성 황매현(黃梅縣)에 있는 오조사(五祖寺)로 5조 홍인 선사를 찾아가서 오조당 선방 안에 앉았다. 남루한 남방 옷을 입은 청년이 무릎을 꿇고 있는데, 키는 보통보다 작았고, 달걀형의 얼굴은 햇볕에 많이 타 있었으며, 눈자위가 움푹 튀어 나왔고, 광대뼈는 밑으로 축 처진 전형적인 남방 사람이었다. 속세에서는 나무꾼으로 살았다고 한다. 양손 여러 곳에 거친 상처 자국이 남아있었다. 이런 혜능을 바라보던 반대편 노승은 실눈을 가느다랗게 치켜뜨고 무거운 입을 뗐다.
“그대는 어디 사는 누구인가?”
“영남(嶺南)의 백성입니다.”
“무슨 일로 왔는가?”
“오직 부처가 되기 위해 왔습니다.”
이에 홍인이 말했다.
“그대는 남방 출신의 오랑캐여서 불성이 없거늘 어떻게 부처가 되려고 하는가?” 라고 찔렀다.
그 당시 남방(오늘의 중국 廣州 부근)은 비문명지여서 오랑캐 지역으로 천시했었다. 그러자 주변에서 간간이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런 말을 들으면 대개는 얼굴이 일그러지며 발길을 돌리곤 했다. 그러나 이 단구의 청년은 아랑곳하지 않고 고개를 쳐든다. 그리고 노승의 눈을 무심히 쳐다보며, 어눌하지만 확고한 어조로 이렇게 대답한다.
“사람에겐 남북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불성엔 남북이 없습니다.”라고 했다.
그런데 또 다른 이야기는, 혜능이 결코 무식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혜능에게 「응무소주 이생기심(不應所住而生起心)」이라는 구절을 들려준 선비는 유지광(劉知光)이라는 사람으로 혜능과 잘 아는 사이였다고 한다. 그래서 혜능을 그 부근 사찰에 있던 무진장(無盡藏)이라는 여승에게 소개해서 그 여승으로부터 <열반경(涅槃經)>을 배웠다는 것이다. “사람에겐 남북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불성엔 남북이 없습니다.”라는 말은 <열반경>을 이해하지 않고는 할 수 없는 말이라는 것이다. 친구 유지광이나 무진장 비구니나 혜능의 재능을 알았기에 오조 홍인께 보내 주었다는 것이다.
아무튼, 순간 홍인은 눈을 크게 뜨고 이 무지렁이를 지긋이 쳐다봤다. 불성이나 수행과는 도무지 거리가 멀 것 같은 청년이다. 하지만 웬만해선 되돌아가지 않을 당돌함이 그의 전신에 배어 있었다. 또한, 불성의 근본이 평등하다는 반격에 홍인은 비범한 인재임을 알아챘다.
그래서 노승은 더 이야기하려다 멈추고 청년에게 이렇게 말하고 방을 나가 버렸다.
“너는 방앗간에 가서 일이나 해라”
혹시 대중들의 시기로 자칫 목숨을 잃을까 염려해, 가장 고되고 후미진 방앗간에 혼자서 방아 찧는 일을 하라고 했다. 하지만 스승과 제자의 마음은 이미 하나였기에 방앗간은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법을 성숙시킬 최고의 장소였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 어느 날 홍인 선사는 제자들에게 말했다.
“누군가에게 내 선법(禪法)을 물려주려고 한다. 누구라도 좋으니 자기가 깨달은 심경(心境)을 게송으로 읊어봐라. 선(禪)의 진수를 깨달은 사람에게 내 선법(禪法)을 물려주겠다.”
당시 홍인의 제자들은 700명을 헤아렸다고 한다. 그런데 아무도 선뜻 게송을 읊으러 나서는 자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때 제자 중에 신수(神秀)라는 손꼽히는 학승이 있었다. 그는 학문에도 정통해 스승의 대리를 맡기도 하는 덕망 높은 사람이었다. 아무도 나서지 않으니 상좌승인 신수가 짐을 지게 됐다. 그리하여 신수는 자기가 깨친 심경을 노래로 읊어, 스승이 지나다니는 복도에 붙여놓았다.
신시보리수(身是菩堤樹) - 몸은 보리(菩堤)라는 나무요,
심여명경대(心如明鏡台) - 마음은 맑은 거울의 받침대로다.
시시근불식(時時勤拂拭) - 언제나 부지런히 닦고 닦아서
막사야진애(莫使惹塵埃) - 먼지가 끼지 않게 해야 하겠다.
몸은 득도한 보리수와 같고 마음은 깨끗해서 맑은 거울과 같으므로 언제나 더러워지지 않도록 닦고 닦아서 번뇌의 먼지와 티끌이 끼지 않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신수의 게송을 본 홍인 선사의 제자들은 저마다 그를 찬양했다. 그러나 선사 홍인은 다른 생각을 했다.
“신수의 노래는 진실을 표현하고 있으나 아직 충분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면서도 그런 속내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제자들에게 신수의 게송을 외우라고 했다. 후미진 곳에서 방아를 찧던 혜능의 귀에도 지나가는 학인들이 이 게송을 외우는 소리가 들렸다. 혜능은 한 번 듣는 순간 그것이 견성에 이르지 못한 자가 지은 게송임을 알아차렸다. 그는 방앗간에 있는 동안 이미 선(禪)의 대의를 체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자기도 한 수 읊으려고 했으나 글자를 몰라 적을 수가 없었다. 그는 그날 밤에, 자기의 심경을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대신 쓰게 해서 벽에 붙였다.
보리본무수(菩提本無樹) - 보리는 원래 나무가 아니요,
명경역비대(明鏡亦非台) - 밝은 거울 역시 있을 수 없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 - 본래 아무것도 없으니,
하처야진애(何處惹塵埃) - 어디서 먼지를 닦겠는가.
깨달음(菩提)이라는 나무도 없고, 밝은 거울 같은 것도 없으며, 본래 아무것도 없는 [공(空)인] 것이다. (공이니) 먼지가 묻을 데도 없으니 털 필요도 없다는 것이다.
신수가 읊은 것은, 몸이 보리수이니 잘 가꾸자. 마음이 거울이니 잘 닦자. 그리하여 성불하자, 그런 뜻이다.
그러나 혜능이 읊은 내용은 달랐다. 나무의 어디에 보리(菩提)가 있으며, 거울 어디에 마음이 있어 닦는다 말인가. 나무, 거울, 그것들은 모두 객(客)일진대, 어찌 객(客)에게서 내 마음을 찾아, 털고 닦는다 말인가, 그런 말이다.
이 게송을 본 홍인 선사의 문하생들은 깜짝 놀랐다. 선의 절대성을 노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본래 자성(自性)은 실체가 없는 것이다. 신수가 지었다는 게송은 자성에 실체가 있는 듯이 돼 있고, 부지런히 닦듯이 점수(漸修)를 이야기하고 있다. 그래서 문 안에 들지 못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혜능이 지었다는 게송은 자성이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으며, 돈오(頓悟)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 두 게송에서 이미 북종선과 남종선이 갈리지는 실마리가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신수는 상좌승이었다. 모두가 당연히 신수가 의발을 받으리라 의심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홍인 선사는 혜능의 게송을 보고 말했다.
"아직도 부족하다"고 시큰둥하게 말했다.
혹시나 시기해서 그를 해치려는 자가 있을까 염려해서였다.
이 두 게송에서 알 수 있듯이 신수의 북종선은 수행을 차곡차곡 쌓아 나가는 데 중점을 두고 있으므로, 점오(漸悟:서서히 깨친다)라 하겠고, 혜능의 남종선을 돈오(頓悟:단박에 깨친다)'라 하겠다.
신수는 몸과 마음을 대응시키고, 미망과 오도를 적대시하고, 먼지와 불식을 구별하는 상대적인 인식(分別心)을 보였다. 그러나 혜능은 보다 높은 차원의 관점에서 ‘본래 아무것도 없다(本來無一物)’라고 공(空)의 경지를 보였다. 모든 집착에서 벗어난, 순수한 인간성의 원점에서의 인식이라 할 수 있다.
신수는 경을 많이 읽고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고 혜능은 나무꾼에 일자무식, 불문에 들어와서는 8개월 동안 방아만 찧은 사람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그 이유는, 지혜는 지식과 달리 지력(智力)으로 전수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온몸과 마음으로 경험하고 실천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뒤 어느 날 홍인 선사는 방앗간을 찾았다. 등에 돌을 지고 방아를 찧고 있는 제자에게 말했다.
“도를 구하는 사람은 법을 위해 몸을 잊는 것이 마땅히 이와 같이 해야 한다.” 이 말로 스승의 숨은 정을 드러내고, 지팡이로 방아를 세 번 치고 나가버렸다. 삼경에 오조당(五祖堂)을 찾아오라는 뜻이었다. 혜능은 삼경이 돼서 오조당을 찾아가 홍인 선사를 참예했다. 오조는 대중이 볼까 봐 가사로 문을 가리고 혜능에게 <금강경>을 설해 주었다. 강설을 듣던 중 「마땅히 머문 바 없이 마음을 낼지니라(不應所住而生起心)]라는 구절에서 대오했다. 그때 혜능은 24세였다.
오조는 혜능이 본성을 깨쳤음을 알고 의발을 전하면서 말했다.
“이제 너를 육조로 삼겠노라. 그러니 스스로 잘 호렴하고 널리 중생을 제도해 앞으로도 선법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라.”
바로 선종의 제6대 조사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홍인을 처음 만나 ‘불성무남북(佛性無南北)’으로 선문답을 하고 방아를 찧은 지 8개월이었다. 심지어 그는 삭발 수계식도 하지 않은 행자(行者, skt. Acarin)에 불과했다. 아직 정식 스님도 아니었다. 완전히 파격적인 전승이었다. 그만큼 홍인이나 혜능은 통념과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홍인이 말했다.
“만약 이곳에 계속 있다가는 사람들이 그대를 해칠 수 있으니, 어서 빨리 먼 곳으로 떠나야 하네. 부지런히 남쪽으로 가되 삼 년 동안은 법을 펴려 하지 말게.”
그리고 “가사는 다툼의 실마리가 될 터이니 너에게서 그치고 뒤로는 전하지 말라.”고 했다. 오조는 다툼의 단서가 될 의발은 이번으로 그치고 더 이상 후대로 전수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이 말에 따라 가사를 전하는 전통은 게송 한 수를 전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혜능이 말했다.
“제자는 본시 이 고장 산길을 잘 알지 못합니다. 어디로 가야 합니까?”
오조는 혜능을 데리고 밤길을 걸어 강가에 닿았다. 마침 배가 한 척 있어, 오조는 혜능을 위해 친히 노를 잡고 저었다. 혜능이 민망해서 노를 달라고 했으나, 오조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내 마땅히 너를 건네주리라.” 하며, 계속 노를 저어 강을 건네주었다.
이렇게 오조는 은밀히 정통적인 선법(禪法)을 무식한 혜능에게 전했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불립문자(不立文字)의 경지를 드러낸 좋은 본보기라 하겠다.
혜능은 오조를 하직하고 발길을 옮겨 계속 남쪽으로 향했다. 날이 새고 혜능이 오조의 의발을 받았다는 것을 눈치챈 대중은 가사와 발우를 빼앗기 위해 수백의 사람이 그 뒤를 밟았다. 혜능은 남쪽으로 향한 지 두 달 만에 대유령(大庾嶺)에 이르렀다.
그런데 수많은 사람이 자기 뒤를 쫓고 있음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리고 발 빠른 장군 출신의 혜명(慧明)이라는 학인이 가장 먼저 혜능의 뒤를 밟았다.
혜능은 이러한 조짐을 알고서 가사와 발우를 바위 위에 얹어놓고 숲속으로 몸을 피했다. 이를 발견한 혜명은 횡재로 생각하고 가사와 발우를 집어 들려고 했으나 이 어찌 된 일인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에 놀란 혜명은 불현듯 두려움이 와서, 진리는 힘으로 빼앗을 수 없는 것임을 깨닫는 순간 마음을 바꾸어 이렇게 말했다.
“행자님, 행자님, 저는 법을 구하러 온 것이지 가사와 발우를 가지러 온 것이 아닙니다.”
이 소리에 혜능이 나타나 바위에 올라앉아 말했다.
“너는 무엇을 구하러 왔는가? 옷을 구하려는가, 법을 구하려는가?”
이에 혜명은 넙죽 엎드려 말했다.
“옷을 구하려는 것이 아니고, 다만 법을 구하려니, 행자께서 저에게 법을 일러 주시기 바랍니다.”
이에 혜능이 다음과 같이 유명한 말을 했다.
“너는 잠시 생각을 거두어라, 그리고 선도 악도 모두 생각하지 말라[불사선 불사악(不思善不思惡)],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이러한 때에 혜명의 부모가 낳기 전의 본래면복(本來面目)이 온 곳을 돌이켜 봐라.”
불사선불사악(不思善不思惡)이다. 선악이 나누어지기 전의 상태로 가라, 그리고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이란,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를 낳아주기 전이라는 말이 아니다. 잠시 아버지 어머니라는 말을 빌어서 상대적 인식 이전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천지미분전(天地未分前), 하늘과 땅이 생기기 전을 말하는 것이다. 결국, 일체 모든 의미의 상대적 인식이 생기기 이전의 절대적 경지를 가리키는 말이다.
혜명이 이 말이 떨어지자마자 홀연히 묵묵히 계합해서 크게 깨달아, 드디어 절하며 말하기를,
“사람이 물을 마셔보고 차고 뜨거운지 아는 것과 같습니다. 제가 오조 문하에서 30년을 공부했으나 오늘에야 비로소 과거의 잘못을 알았습니다.”라고 했다.
비록 무인 출신이라고는 하지만 오조 홍인 선사 밑에서 30년 수행을 닦은 몸이라 앞뒤가 막힌 인사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당초 혜명은 가사와 발우를 탈취할 목적으로 달려왔으나 바위 위에 놓여 있는 가사와 발우가 들리지 않자 두려운 마음에 양심이 되살아나서 진리는 힘으로 빼앗을 수 없는 것임을 깨닫는 순간 법을 들으려는 마음으로 변했다.
이때 혜능이 말한 불사선 불사악(不思善不思惡)은 의발을 뺏으려 했던 마음을 악이라 생각지 말고, 법을 들으려 한 마음을 선이라고도 생각지 말고 - 방금 악과 선 사이에 오락가락한 마음을 떠나서, 전혀 물들지 않은 혜명이 태어나기 이전의 순수한 본심이 뭐냐 하는 것이다. 곧바로 혜명의 본심을 찌른 직지인심(直指人心)의 현장이다.
당사자 혜명이 뼈저리게 받아들일 정확하고 비수 같은 이 말이 후대 조사들 문답의 본보기가 되기도 했다. 그리하여 꼼짝 못 하고 혜명은 넙죽 절하며, 스스로 혜능의 제자가 돼, 진정한 불문에 입문할 수 있었다.
이에 육조께서 “그렇도다” 하셨으니, 혜명은 이제야 비로소 달마 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시어 마음을 바로 가리키어 성품을 보아 부처를 이루게 함이 언설에 있지 않음을 알았다.
그리하여 스승의 이름자를 같이 쓸 수 없다고 해서 이름도 혜명에서 도명(道明)이라 고치고 혜능의 제자로서 대중 교화에 힘썼다고 한다.
혜능이 넘어갔던 대유령(大庾嶺)은 영남과 영북을 가르는 분수령이다. 혜능은 남북의 분기점이 되는 이 산마루를 넘어 남쪽을 내려갔다. 그 뒤 혜능은 인가를 피해 산속으로 들어가서 사냥꾼들과 어울려 살면서 세월을 보냈다. 살생이 금지된 스님과 살생으로 먹고사는 사냥꾼, 상(常)과 무상(無常)이 서로 의지하듯, 살생과 불살생이 묘하게 의지해 있었다. 동료들이 산짐승 몰이를 할 때 그에게 그물을 지키라고 하면 그중에 걸려든 동물을 놓아주곤 했다. 사냥꾼과 같이 생활하기 17년, 그러던 어느 날 혜능은 불현듯 이러다 늙어버리면 불법을 전파할 시간이 다 달아나겠다는 생각에 산에서 내려와 그 후 유명한 ‘풍번문답(風幡問答)’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느 날 법성사(法性寺)라는 절 앞을 지나갈 때였다. 당간지주에 걸린 깃발이 나부끼는 것을 두고, 두 스님이 쟁론을 벌이고 있었다.
“바람이 움직이는 것이다.”
“아니다. 깃발이 움직이는 것이다.”
“당신 눈에는 펄럭이는 깃발이 보이지 않습니까?”
“깃발에 발이 달렸습니까? 손이 달렸습니까! 깃발이 움직이는 주체라면 바람 없이도 움직일 수 있어야지요. 바람 없이 움직이지 못한다면 깃발이 주체가 아니라 바람이 주체지요.”
“뭐요? 바람이란 것이 실체가 있다면 스님의 말을 인정하겠지만, 바람이란 일정한 모양이 있는 것도 아니지 않소. 결국, 깃발이 펄럭이는 현상을 통해서만 바람의 존재가 증명되는 것이오. 따라서 깃발이 펄럭이는 현상을 부정하고 따로 바람이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스님의 말은 옳지 않소.”
이렇게 두 승려는 서로 자기주장만 옳다고 맞서고 있었다. 이러고 있는데,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 절의 주지 스님인 인종(印宗) 스님도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이 광경을 옆에서 지켜보던 혜능이 끼어들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점잖은 토론에 속인이 한마디 끼어들어도 괜찮겠습니까?”
편들어줄 사람이 아쉬웠던 두 스님이 동시에 말했다.
“당신이 말해 보시오. 깃발이 움직입니까, 바람이 움직입니까?”
그러자 혜능이 말했다.
불시풍동(不是風動 :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요,)
불시번동(不是幡動 :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요,)
인자심동(人者心動 : 그대들 마음이 움직이는 것이오.)
이것이 바로 유명한 풍번문답(風幡問答)이다.
문답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움직이는 건 바로 우리들 마음이라는 간결한 메시지가 시대를 초월한 울림으로 표출됐다. 외부 현상은 덧없고, 어쩌면 마음의 작용에 불과할 뿐이라는 불가의 진리로 향하고 있었다. 유식무경(唯識無境)이라, 우리가 마주하는 대상이란 실제 고정된 특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대부분 이 사실을 모르고 대상에 고정관념을 일으켜 고유한 특성을 가진 뭔가가 있는 것처럼 생각한다. 그리고는 헛된 관념들을 이리저리 엮어 온갖 주장을 펼친다. 그건 번뇌를 늘리는 짓일 뿐이다.
혜능의 말이 떨어지자 논쟁하던 당사자는 물론 웅성거리며 어느 한쪽 의견에 동조하고 있던 대중들은 모두 삽시간에 침묵에 빠졌다. 움직인 게 깃발도 아니고, 바람도 아닌 너희들 마음이라고 했다. 모든 것은 마음이 지어낸 것이라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대승 진리를 관통하고 있다. 무리들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당신은 도대체 어디서 온 사람이오?”
“그냥 지금 여기에 있는 사람입니다.”
이러한 풍번문답을 지켜본 당시 법성사 주지 인종(印宗, 627~713) 법사가 그 행자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서 정중히 대하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두 승려 다툼의 의미는?”
이에 그 행자가 말했다.
“바람과 깃발을 두고 어느 것이 옳은지 그른지 논쟁한다면 정말 어리석은 짓이지요. 이기고 지는 데에 마음이 끌려서 다툰다면 아상(我相)⋅인상(人相)⋅중생상(衆生相)⋅수자상(壽者相)을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불법은 각자 스스로 깨닫고 수행해야 하는 것이지, 입으로 논쟁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이에 인종은 그 행자(혜능)를 상석으로 맞아 깊은 뜻을 물었다.
“오래전부터 황매(黃梅)의 의발(衣鉢)과 법(法)이 남방으로 갔다는 말을 들어왔습니다. 행자가 바로 그 오조의 법통을 이어받은 분입니까?”
이에 행자는 말했다.
“부끄럽습니다.”라는 대답으로 자신이 육조임을 밝혔다. 이에 인종은 예를 갖추어 가르침을 청했다.
그런데 혜능은 17년 동안 숨어 지내느라 머리 깎을 기회가 없었다. 그 내력을 알게 된 인종은 즉시 수계의식을 갖추어 혜능을 삭발해 비구계를 내리고 스승으로 섬기는 예를 갖추었다.
여기서 우리는 한 편의 드라마를 떠올리게 된다. 수계의식에 있어서 계를 내리는 승려는 스승이고, 계를 받아 승려가 되면 마땅히 그 스승의 제자가 되는 것이 불문의 법도이거늘, 스승의 입장에서 계를 준 인종이 오히려 계를 받은 혜능의 제자가 되다니, 불문 법도의 대역전극이 연출된 것이다. 이런 역전은 그전에도 그 후에도 다시없었다.
이 풍번문답이 이루어진 곳 법성사는 현재 광저우(廣州) 광효사(光孝寺)로 절 이름이 바뀌어 현존하고 있다. 676년에 혜능 대사가 머리를 깎고 정식으로 출가한 곳이다. 광저우시 광효사에 혜능 대사가 출가 당시 깎은 머리카락을 기리기 위해 세운 7층 벽돌의 예발탑이 있다. 중국 선불교의 육조 혜능 대사는 진작 오조 홍인 대사로부터 후계자로 인정받았지만 시기하는 무리를 피해 숨어 지내다 뒤늦게 머리를 깎은 것이다.
그 후 혜능 대사는 한 줄기 법을 전하며 일생을 보내가다 713년 75세를 일기로 열반에 들었다. 대사는 원적에 앞서 자성(自性)이 곧 진불(眞佛)이며, 법신(法身)과 보신(報身), 화신(化身)은 본래가 한 몸이라는 삼위일체론(三位一體論)을 골자로 임종게를 남기고 문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마지막 법문을 했다.
“오직 자신의 본심을 알고 자신의 본성을 잘 보면 움직임도 고요함도 없고, 생도 사도 없으며, 가고 옴도 없고, 옳고 그름도 없으며, 머무름도 가는 것도 없느니라.”
이 말을 남기고 저녁 산책을 나서 뒷산 큰 바위 위에 휴식하는 것처럼 앉았다가 그대로 입적했다.
사실상 중국선불교의 종조(宗祖)이며, 돈오견성론(頓悟見性論)을 주장해 조사선(祖師禪)을 확립한 분이 바로 6조 혜능 대사이다.
‘나도 불성이 있다.’
‘나도 본래는 부처이다.’
‘자기의 성품을 봐서 문득 깨달으면 바로 부처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
이런 말들은 특정 종교의 경지를 떠나 만고의 진리이고 시공을 초월한 대단한 법어이다.
현재 광저우시(廣州市)에서 차로 서너 시간 거리인 신흥현(新興縣) 국은사(國恩寺)는 혜능 선사의 생가가 지척인 곳이고, 혜능은 이곳에서 열반에 들었다.
그리고 혜능 대사가 가장 오래 머문 절이 남화사(南華寺)다. 역시 광저우(廣州)에 있는 남화사는 원래 보림사(寶林寺)라 했고, 당대에는 흥천사(興泉寺)라고도 했다가 송나라 때부터 남화사라 불리고 있다. 혜능 대사는 이 절의 주지로 30여 년간 있으면서 법을 폈다. 따라서 남화사는 실질적인 육조 도량인 셈이다. 중국 역사상 가장 찬란한 문명의 황금기인 당⋅송 시대의 사상적 지주였던 선불교의 사실상 진원지였고, 동아시아 선불교의 실질적인 중심지였다. 이곳에는 혜능 대사의 진신불이 모셔져 있다.
그런데 한국 불교사에 기이한 이야기 하나가 전한다. 신라 성덕왕 때(702∼737) 낭주군(朗州郡 : 현재 전라남도 영암군)의 운암사(雲巖寺)의 승려이자 의상(義湘) 대사 제자 중 한 사람인 삼법(三法) 스님은 육조 혜능 대사의 도(道)와 덕을 사모하고 있었으나 714년에 입적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친견하지 못한 것을 애통하고 한스러워했다. 그때 금마국(金馬國, 지금의 익산) 미륵사의 규창(圭昌)이라는 스님이 당나라로부터 돌아오면서 가지고 온 육조 혜능 대사의 <법보단경(法寶壇經-육조단경)> 초본을 보게 됐다.
삼법 스님은 향을 사르고 공경히 <단경>을 읽어보니, 마치 혜능 대사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는 것처럼 구구절절이 감명받고 깨닫게 돼, 기쁨과 슬픔이 말할 수 없이 교차했다.
그런데 <단경>에서 혜능 대사가 “내가 입적한 뒤 5~6년 후 내 머리를 베가는 놈이 있을 것”이라는 대목을 보게 됐다. 그 순간 무릎을 치며 아주 엉뚱한 결심을 하고야 만다.
혜능 스님이 이미 머리를 탈취해 갈 것이라는 예언을 했으니 누군가 틀림없이 가져갈 것이니, 다른 사람이 가져가기 전에 내 힘으로 그걸 가져와야겠다! 이 일을 도모해 우리나라 만대의 복전이 되도록 하겠다고 결심했다.
삼법 스님의 실천력은 대단했다. 그 길로 당대 최고 권력자인 김유신(金庾信)의 아내였고, 김유신 장군 사후 출가한 영묘사(靈妙寺) 비구니가 된 법정(法淨) 스님에게 달려갔다. 법정 비구니는 삼법의 계획을 듣고 2만금이라는 큰돈을 선뜻 내놓았다.
삼법 스님은 돈을 받고 돌아온 즉시 상선을 타고 바다를 건너 당나라로 들어갔다. 이때가 722년 5월이었다. 3개월 후 광주(廣州) 보림사(寶林寺-남화사)에 이르러 육조 탑에 나아가 무수히 절을 올리고 마음속 깊이 자기의 소원이 성취되도록 빌었는데, 7일째 되는 날 밤에 한 줄기의 빛이 육조 탑 꼭대기에 머물다가 동쪽 하늘을 가로질러 뻗쳤다.
삼법 스님은 광채가 상서로워 우러러 예배를 드리면서 소원이 이루어질 것 같은 감응에 기뻐했다. 그러나 주변 형세를 보니 혜능의 정상(頂相)을 갖고 간다는 것은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백방으로 계책을 다 궁리해 봤지만 자기와 함께 상의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 울적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그러던 중 신라에서 유학 온 백율사(柏栗寺) 스님 대비(大悲) 선사가 마침 홍주(洪州)의 개원사(開元寺)에 머무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삼법 스님은 곧바로 대비 선사를 찾아가 간직하고 있던 계획을 고백하니 그는 기뻐하면서‘
“내 마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해서, 서로 의기투합했다.
그런데 대비(大悲) 스님이 말했다.
“그러나 전에 감탑(龕塔)을 만들 때 나 역시 자세하게 관찰했습니다만, 예언으로 훈계했기 때문에 얇은 철판과 보포를 겹겹으로 감싸고 탑문도 단단하게 봉함했고 엄중히 감시하며 지키고 있기 때문에 여간 뛰어난 힘을 가진 사람이 아니고서는 감히 손을 댈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그런데 당시 개원사에는 용기와 힘이 뛰어난 장정만(張淨滿)이란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함부로 이 일을 말할 수 없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그의 부모님이 돌아갔다는 부음의 소식을 전해 듣고 무척이나 괴로워하고 슬퍼하고 있었다. 대비 스님은 삼법 스님과 상의해 1만금을 건네주면서 부조했더니 장정만은 그 돈을 받고 감격했다. 그리하여 집으로 돌아가 장례를 치르고 돌아왔다.
대비 스님은 그에게 육조 대사의 정상을 탈취해 올 일을 은밀히 부탁하니, 장정만은 말했다.
“비록 끓는 물에 들어가고 타는 불을 밟는 위험이라도 마다할 수 없는데, 어찌 장정만은 하물며 이 정도의 일을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하고 보림사를 향해 떠나갔다.
그 이튿날 장정만은 보림사의 육조탑에 도착해 한밤중 사람이 없는 조용한 틈을 타서 탑의 문을 열고 몰래 육조 혜능의 정상을 탈취해 재빠른 걸음으로 달려서 개원사로 돌아와 대비 스님에게 드렸다.
이에 삼법과 대비 스님은 그날 밤 육조 혜능의 정상을 짊어지고 낮에는 숨고 밤에 길을 재촉해 달려서 항주에 와서 배를 타고 당진에 도착, 귀국해 이 일을 비밀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숨기고 법정 스님이 머물던 영묘사(靈妙寺)에서 밤마다 육조의 정상에 공양을 올렸다고 한다.
그러던 차에 삼법 스님 꿈속에 오색의 구름이 은은하게 비치는 가운데 한 노스님이 나타나서,
“나의 머리가 이 땅에 돌아옴은 불굴과 인연이 있기 때문이다. 마땅한 곳에 묻으라고 하면서, 자신의 인연 터가 지리산 아래의 눈 속에 등나무 꽃이 핀 곳이니 그곳으로 옮기라.”고 했다.
그래서 삼법 스님은 그 이튿날 대비 스님과 좋은 터를 찾기 위해 동쪽 지리산으로 갔다. 이때가 12월이었다. 눈이 온 산에 쌓여 길이 막혀 있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한 사슴이 나타나서 인도하는 길을 따라가니 12월인데도 따뜻하기가 봄날과 같고 등나무 꽃이 만발한 곳을 발견했다. 기쁨에 넘쳐 주변을 살펴보니 동굴에 석문이 있었고 문안에는 샘물이 솟고 있었다. 이곳에 육조의 정상을 임시로 봉안하고 장차 탑을 세워 모시기로 했다. 그날 밤에 그 노스님이 또 꿈에 나타나서 말했다.
“탑을 세워 현창하지 말라. 비문을 만들어 기록하거나 새기지 말라. 무명 무상이 제일이다.”라고 했다.
그리하여 돌을 쪼개고 다듬어 함을 만들어 깊숙이 묻어 안치했다. 그리고 한곳에 옥천사(玉泉寺)를 짓고 그곳에서 선정을 닦았다. 대비 스님도 몇 개월 뒤에 백율사로 돌아가 오로지 선학을 닦다가 그해 입적했다. 그리고 삼법 스님도 17년 뒤에 입적했다. 삼법 스님은 운암사에서 출가했으므로 입적하고 운암사로 돌아가 장례를 치렀다.
그 뒤 이 암자는 불에 타 없어졌는데, 뒤에 진감국사(眞鑑國師)가 이 터를 찾아 다시 절을 창건하고 육조 혜능의 정상을 봉안한 육조정상탑(六祖頂相塔)을 세우고, 그 위에 육조진전을 건립했다. 이러한 내용은 <해동고승전>의 저자인 각훈(覺訓) 스님이 1103년에 썼다고 전해지는 <선종 육조혜능정상 동래연기(禪宗六祖惠能頂相東來緣起)>에 전하고 있다.
그리고 지리산(하동) 쌍계사(雙溪寺)는 신라 성덕왕 23년(724)에 삼법(三法) 스님과 대비(大悲) 스님이 육조 혜능 대사의 정상을 모신 뒤 옥천사라는 이름으로 창건한 그 절터이고, 진감국사에 의해 중건돼 쌍계사라 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도 육조 혜능 선사의 두상이 쌍계사의 육조정상탑에 모셔져 있다고 한다.
그런데 미국의 존 매크래(John R. McRae)의 저서가 <북종과 초기 선불교의 형성>이란 이름으로 번역돼 2018년 대한민국학술원 우수학술도서에 선정됐다.
이 책은 중국 선불교의 중요 종파 중의 하나였던 북종과 그리고 초기 선불교의 형성과 관련된 폭넓은 연구서이다. 중국 초기 선불교는 선(禪)의 초조인 보리달마에서부터 남종과 북종으로 갈라지는 신수(神秀)와 혜능(慧能) 때까지라고 할 수 있다. 초조 달마에서 5조 홍인(弘忍)을 거쳐 6조까지 이 시기는 아직 남종과 북종으로 갈라지기 이전으로 남종과 북종이라는 명칭은 하택 신회(荷澤神會, 684-758)와 그 제자들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학술서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한국불교에 논쟁점을 제시한다. 존 매크래는 초기 선종사를 다루며 북종과 남종부터 신수와 혜능의 법통 문제 등에 새로운 주장을 내놓는다. 오조 홍인의 문하에서 신수와 혜능은 동시에 공부하지도 않았고, 전법이 이뤄지는 말년에는 신수와 혜능 누구도 홍인과 같이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전등(傳燈)에 관련한 전설이 초기 선불교의 중요한 발명품”임을 연구자들이 상기할 것과 전설과 역사를 구별할 것을 주문했다.
불교를 조금 접한 불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육조 혜능의 전등담이 ‘허구’라는 것이다. 이 같은 비판적 문제 제기와 논쟁을 성법 스님이 추구하고 있다.
“제가 가장 고민하는 문제는 ‘불교가 역사적으로 잘 구현됐는가’입니다. 저는 이 같은 의문을 경전을 통해서 확인합니다. 경론에 근거 없이 맹목적으로 요구하는 믿음이나 수행을 부정합니다. 저는 세계 최고의 석학들의 연구들을 소개하고 이릍 통해 한국불교 내에서 전통의 ‘불설 교학’이 바로 서길 바랍니다. 또한 발간되는 총서를 통해 활용도 높은 현대의 논장이 이뤄지길 기대합니다.”
따라서 육조정상동래설(六祖頂相東來說)은 아쉽기는 하지만 육조 대사를 흠모하는 아름다운 미담의 설화로 인식해야지 그것을 마치 사실처럼 받아들여서는 안 될 것이다.
더구나 광저우 남화사에는 혜능 대사의 진신불이 지금도 모셔져 있다.
[출처] <육조 혜능(六祖慧能, 638~713) 대사 이야기>|작성자 향수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