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할 역할은 다 했고, 남은 역할은 내가 변치 않고 그 자리에 그 모습으로 있어주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었어. 이 나라, 사회의 변화와 전진을 지켜보면서, 혹시 요구가 있으면 몇 마디를 해주는 것으로 족하지."
프랑스의 <르 몽드>는 리영희 선생(한양대 명예교수)을 민주화 운동 당시 한국 청년, 학생들의 '사상의 은사'라고 불렀다. 한 평자는 그를 '살아있는 신화'로 부르기도 했다. 2000년 뇌출혈로 쓰러진 뒤, 칩거하던 리영희 선생이 한반도의 20세기를 관통한 전 생애를 회고한 <대화>(임헌영 대담, 한길사 펴냄)를 내고 "미국식 자본주의의 극복"이라는 묵직한 화두를 후배 세대에게 던졌다. 마침 북핵, 독도 문제 등 난마처럼 얽힌 국제정세 속에서 온 국민이 우왕좌왕하고 있는 때이다.
지난 연말 평생 장서를 군포 시립도서관에 기증한 리영희 선생은 이제 더 이상 과거처럼 당장의 구체적 문제에 천착하는 연구자가 아니다. 이 때문인지 김민웅 성공회대 겸임교수와 대화를 시작하기 전 리 선생은 "자료와 빈틈없이 짜인 논리에 기반을 둔 실증적이고 정리된 대답을 하기는 어렵다"며 "이 때문에 지금 진행되는 구체적인 상황을 언급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고 선을 그었다. 하지만 두 시간 동안 대담이 진행되는 동안 리 선생은 지금 현재 진행되는 상황에 대해서 거침없는 시각을 내놓았다.
"독도 문제, 미국이 일본 팽창주의를 부추기고 있다"
리영희 선생(한양대 명예교수) ⓒ프레시안
리 선생은 우선 최근 한승조 등 일부 극우인사들의 일제 강점기를 정당화하는 발언의 배경에 주목했다.
리 선생은 "한 교수 같은 사람의 주장은 오히려 현재적 의미 속에서 살필 때 더 큰 문제가 있다"며 "그들의 주장에는 미국과 군사적 협력을 통해 일본과 공동 전선을 형성해 중국, 러시아와 대항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정치적 의도가 숨어 있다"고 지적했다.
유사시에 미국의 묵인 하에 일본군이 한반도로 진출할 수 있고 거기에 국내의 우익ㆍ반공 세력이 동조하는 것을 상정한 1960년대 일본의 '미쓰야 계획'의 21세기 버전이라는 것이다. '미쓰야 계획'은 1965년 리 선생이 <조선일보> 기자로 재직하던 당시 한국을 방문한 일본의 기시 노부스케 전 수상 인터뷰를 통해 폭로돼 당시 큰 파문을 일으킨 '일본군의 가상 작전계획'이다.
리 선생은 북핵, 독도 문제 등에서도 '미국의 역할'에 주목할 것을 강조했다. 그는 "최근 독도 문제 등이 큰 관심을 끌고 있지만 지식인이나 대중들이 핵심을 놓치고 있다"며 "현재 우경화된 일본의 행보 뒤에는 미국이 있음을 항상 염두에 둬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미일 동맹이 강화되고 있는 가운데 일본이 우리나라와 중국에 대해서 영토 문제를 들고 나오는 것을 보면서 1905년 영국이 일본을 앞세워(영일 동맹) 중국과 러시아를 공격하고, 더 나아가 동남아시아를 장악했던 1백 년 전 역사를 떠올리게 된다"며 "당시 영국이 했던 것처럼 지금 미국은 향후 전개될 중국, 러시아와 대립 관계를 염두에 두고 일본의 팽창주의를 부추기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과거 1960년대처럼 미국은 북핵 문제를 계기로 북한을 압박해 일본, 한반도, 대만, 필리핀을 잇는 중국과 러시아을 견제하는 새로운 축을 다시 만드는 것을 시도하고 있다"며 "일본을 욕하는 것만으로 독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고 다시 한번 강조했다.
"쉽게 동요하고, 흥분하면 싸우기도 전에 저들 의도대로 움직이는 것"
리영희 선생은 최근 독도 문제에 대한 우리나라 지도자, 국민의 태도에 대해서도 신랄하게 비판했다.
리 선생은 "지도자부터 국민들까지 쉽게 동요하고, 흥분하기 시작하면 싸우기도 전에 저들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것"이라며 "그런 대응으로는 절대로 일본을 따라 갈 수 없다"고 최근의 노무현 대통령부터 일반 국민의 감정적인 대응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리 선생은 대신 불독같은 영국인, 여우같은 일본인처럼 행동할 것을 부탁했다. 그는 "쉽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가볍게 동요하지 않으면서도 끈질긴 '불독의 뚝심'을, 또 치밀함, 조직력, 협상력을 조화시켜 나가는 '여우의 교묘함'을 동시에 가질 때 이 어려운 상황을 극복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편협한 민족주의 벗어나 우리의 약점과 못남 직시해야"
리 선생은 지난 2,30년간 우리나라가 이룩한 성과에 대해서 아주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민족 역량에 대한 냉정한 자기반성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리 선생은 "지난 2,30년은 과거 어떤 특정한 시기의 몇십 년보다 더 큰 변화를 이룩했다고 단언할 수 있다"며 "우리가 희망하고 지향하는 사회를 향해 나아가는 양과 질의 속도를 놓고 보면 불만이 없지는 않지만, 앞으로 계속 나아갈 수 있는 '희망의 근거'를 마련한 시기"라고 지나온 한 세대에 걸친 기간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하지만 리 선생은 "우리 민족이 가지고 있는 국수주의적이고 편협한 민족주의에서 벗어나 다른 민족들이 이룩한 성취에 대해서 눈을 돌려보는 '세계적 시야'가 필요하다"며 "루쉰이 <아Q정전>에서 철저하게 중국 대중의 무지몽매, 교활, 탐욕, 무능, 이런 부정적 속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스스로 각성을 촉구했던 것처럼 우리 역시 뼈아픈 자기반성을 통해 우리의 약점과 못남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미국의 '벌거벗은 자본주의' 좇는 현재 상황 '절망적'"
특히 리 선생은 미국식 자본주의를 좇는 최근의 상황에 대해서 "절망적"이라며 침통함을 표시했다.
리 선생은 "이익만을 좇는 인간성이 상실된 미국의 '벌거벗은 자본주의'를 우리나라가 좇고 있는 것은 굉장히 우려스러운 일"이라며 "세계 어느 나라를 가도 우리나라 사람처럼 무제한적인 사치, 방종, 이기주의와 같은 이런 구제불능과 같은 행태를 보이는 나라가 없다"고 한탄했다.
리 선생은 "인간적 요소를 물질적 가치의 하위에 놓는 경제 제도, 정치 구조 이런 것을 배격해야 한다"며 "'인간이 인간과 더불어 살지 않는'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마음을 합치고, 희망을 공유하고, 외교적ㆍ정치적인 난제를 풀어나갈 수 있겠느냐"며 현 사회경제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반성을 촉구했다.
이번 대담은 프레시안의 <대화> 연재의 연장에서 기획됐다. 그 동안 진행해온 것과는 다르게 프레시안 기획위원인 김민웅 박사가 리영희 선생을 인터뷰한 내용을 정리해 싣는다.
다음은 3월26일 두 시간에 걸쳐 군포시 산본 리영희 선생 자택에서 이뤄진 대담 전문.
사회와 세계가 빠진 진공 상태 속 지식인들
김민웅: 귀한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하다.
리영희: 나에게 지난날처럼 자료에 기반을 둔 실증적이고, 빈틈없이 짜인 논리와 치밀하게 정리된 대답을 요구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데, 오늘은 좀 다른 방식이 되었으면 한다.
김민웅: 그렇지 않아도 오늘은 보다 성찰적인 차원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우선 책 나온 것 축하드린다. 선생님의 회고록 <대화>(임헌영 대담, 한길사 펴냄)는 개인과 역사가 하나로 엉킨, 매우 고밀도의 저작이라고 여겨진다. 그간 역사적 무게를 가진 회고록을 보기 어려웠는데, 이번에 선생님의 회고록 출간으로 우리는 소중한 유산 하나를 얻었다고 생각이 든다. 미국을 비롯한 나라들의 경우, 지도적 위치에 있던 인물들의 회고록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질 뿐만 아니라 대중들도 굉장히 많이 찾는다. 아쉽게도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현상을 보기 어려운 느낌이다.
리영희: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지금까지 대체적인 회고록은 개인의 행적을 중심으로 엮는 바람에 사회가 빠지고, 시대 상황이 빠지고, 세계가 빠져 있다. 회고록만 보면 저자는 역사의 진공 상태에 살았던 것 같다. 지식인들의 회고록조차 그런 경향을 보여주는데 대부분의 지식인들의 정신 상태가 역사의 공백상태를 드러내고 있다는 증거가 아닌가 싶다.
나는 항상 발 딛고 선 사회와 개인의 상호관계를 강조해 왔다. 사회의 변화 속에서 나의 변화가 있고 또 나의 작용으로 주변 환경이 변하고, 다시 그런 변화가 내게 영향을 주는 이런 변증법적인 걸 강조했기 때문이다. 이 책 역시 그런 관점이 적극적으로 반영됐다.
지식인에게 '쓴다'는 것의 의미
ⓒ프레시안
김민웅: 2년이라는 긴 시간을 통해서 정리된 책이 아닌가? 따라서 회고록을 쓰는 과정에서 느낀 점도 있을 테고, 막상 회고록을 끝낸 다음에 세월이 지난 만큼 애초와는 다르게 느낀 점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책이 나온 뒤 주변의 반응은 또 어떠한지 궁금하다.
리영희: 그 질문에다 이 책을 쓰게 된 과정부터 덧붙이고 싶다. 새로운 세기가 바뀐 2000년에 나는 뇌출혈로 쓰러지면서 글을 아예 쓰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그때 나는 아, 이제 지식인으로서 모든 것이 다 끝났구나, 했다. 지금은 그럭저럭 걸어 다닐 만은 하지만 여전히 손을 쓰기는 불편하다.
나는 그 동안 많은 참여와 사회적 비판을 했고, 나름대로 계몽자적 역할을 해 왔다. 그 동안에 존경할 만한 많은 동지들도 있었지만 또 많은 적을 만들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몸이 힘들어지고 나니 더더욱 새로운 집필활동이란 생각할 수 없었다.
사실 1980년대 초에 내 삶을 회고하는 글을 쓰다 잡혀가는 바람에 박정희가 쿠데타로 집권하기까지, 그러니까 30세까지 얘기가 담긴 <역정>(창작과비평사 펴냄)이라는 책이 있다. 그 책을 구상하고 쓸 때까지만 해도 나의 삶은 민족, 국가, 세계와 긴밀하게 연결돼 있었다고 여겼지. 그런데 새로운 세기로 바뀌면서 세상이 너무나 변했고, 더 이상 나는 세계와 긴밀하게 연결돼 있지 않게 된 것이 아닌가 했다. 이런 상황에서 세상에 책 한 권을 내놓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어 나는 이제 아무 것도 쓰지 않겠다라고 결심했었다.
그렇게 마음먹고 불경이나 읽고 있는데, 과거에 내 책을 읽고 영향을 받았던 후배들 또 출판사에서 삶의 마무리 같은 것을 남겨야 하지 않겠는가, 자꾸 독촉을 했다. 나 역시 시대적인 의미는 없을지 모르나 그 동안의 내 삶을 마무리하는 의미는 있겠다, 생각이 들기도 했고. 그래서 한번 책을 내보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김민웅: 애초에 예상했던 것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리영희: 그럴 수밖에 없었다. 도저히 내가 직접 쓸 수가 없으니까 출판사의 제안에 의해서 구술로 대담을 하게 됐다. 새삼 '쓴다'는 것의 의미를 절실하게 깨닫는 시간이었다. 지식인이 내 손에 쥐어진 펜을 가지고 종이에 기록할 때 그 사고의 흐름이 종이에 이르기까지 자기 머리 속에서 나온 가장 잘 익은 사유가 나온다. 그 때 비로소 문장도 아름답고, 논리적 일관성이 있고, 문법적 정확성이 있다. 그런데 구술이라는 것을 처음으로 해보니까 '쓴다'는 것과 전혀 다르더라.
내가 직접 쓸 때는 쓰고자 하는 것과 관련된 자료를 옆에다 챙겨놓고 사유를 전개해 나간다. 마치 설계도를 그려놓고, 재료를 완비한 다음 건물을 지어나가는 것과 비슷하다. 그런데 구술이라는 것은 누에가 실을 뽑아내듯이 술술 나오기는 하는데, 나중에 보면 아무 체계도 없고, 논리도 없고, 앞뒤 연결이나 문맥의 정확성도 없다는 느낌이 강했다. 1년 정도 구술을 해 정리한 결과를 보니 실로 아주 말이 아니었다. 비상한 머리를 가진 문학비평가 임헌영이 내 책을 모조리 다 읽고서 독자로서 이 책에 넣고 싶은 사건이나 얘기를 끄집어낼 수 있도록 도움을 줬는데도 불구하고 그와는 별도로 내 자신으로서는 여러모로 불만스러운 작업결과였었다. 물론 이것은 임헌영 선생의 작업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구술이라는 작업이 갖는 문제에 대한 내 느낌이었다.
김민웅: 선생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옮기면 그 자체로 이미 글이 되는데 그런 어려움이 있었다고 하니 놀랍다. 워낙 치밀하고 정교한 성격이시기에 그렇게 혼자 느끼신 것 아닌가?
리영희: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 정리를 해놓고 보니 너무나 허술하다는 생각, 특히 지금까지 내가 세상에 내놓은 글을 기준으로 볼 때는 도대체 내가 한 얘기가 이 모양인가 싶을 정도로 한심한 거야. 그래서 밤에 '어느 쪽의 무슨 행에 그 낱말이 잘못 되었구나', '앞뒤 순서가 잘못 되었구나', 이런 생각이 들면 자다 말고 나와서 떨리는 손으로 한 시간 정도 수정하곤 했어. 그렇게 세 번을 수정을 해서 이렇게 책으로 나오게 됐다.
김민웅: 그 동안에 나온 책과 글도 그런 치밀한 준비 때문에 더욱더 빛을 발했던 것 같다. 사실 선생님의 저서와 그 작업 과정을 보면 어느 하나 허술하게 하지 않고 확인과 문체 수정을 거듭하시면서 완벽을 기하신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후배들에게 소중한 귀감이다.
리영희: 사실 나는 내 글이 문학은 아니지만 글을 쓸 때 아름답고 정확한 문장을 쓰도록 노력해왔다. 그래서 2백자 원고지에 혹 같은 낱말이 들어있으면 다른 낱말로 대체하고, 한 문장의 길이가 2백자 원고지 세 줄 정도를 넘지 않도록 신경을 써왔다. 문장은 가능하면 짧게 하고, 긴 문장이 나온 뒤에는 짧은 문장이 두세 개쯤 나와서 독자가 한숨 돌릴 수 있도록 구성을 하고. 별로 중요하지 않는 내용은 좀 긴 문장을 쓰고, 핵심을 담고 있는 문장은 짧게 끊어서 쓰곤 했다. 문장이 길면 읽는 사람의 호흡이 가쁘고, 앞뒤 의미의 연결에 혼란이 올 수 있다는 생각에서지.
인간 리영희, 대학 새내기를 만나다
김민웅: 구술작업의 한계에 대해서 말씀하지만 독자로서의 느낌은 또 다르다. 선생님이 치밀하게 전개를 하려고 최대한 노력을 하신 덕택도 있었지만, 독자들은 도리어 구술 형식으로 구성된 책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이야기체가 되어서 선생님과 직접 마주하면서 듣는 기분이 상당히 괜찮다.
그 동안에 썼던 명쾌하고 간결한 글이 전문적인 지식을 습득하는 과정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면, 이 책은 전혀 다른 역할을 하는 것 같다. 내가 강의하는 학부 학생들한테 필독서로 읽으라고 과제를 주기까지 했다. 별 부담 없이 한 시대와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를 할 수 있는 명저라고 여겨진다. 아주 쉽고 편안하게 인간 리영희의 삶을 느끼면서 세상을 볼 수 있도록 하늘에서 기회를 준 게 아닌가. (웃음)
1974년 <전환시대의 논리>부터 지금까지 나온 책들이 어느 정도 의식을 가지고 읽어나가야 한다면, 이 책은 그런 준비 없이도 인간 리영희와 만나서 누구든지 어렵지 않게 그 시대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는 대단히 놀라온 힘이 있다.
리영희: 글쎄, 그런 의미를 내가 스스로 자각 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듣고 보니 그런 면도 있는 것 같다. 내 아내가 별로 책을 안 읽는 사람이다. (웃음) 몇 천 권의 책들이 있지만 내 서재에 들어가 보는 일이 웬만해서는 별로 없다. 그런데 이 책이 나온 뒤에 누워서 조금 이리저리 읽어볼까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읽기 시작한 다음에 1백40쪽을 내리 읽었다는 거야. 내 아내로서는 기록이다. 앉아서 한 자리에서 1백40쪽을 읽었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도 그런 비슷한 얘기를 한다. 글로 빨려 들어갔다고. (웃음)
김민웅: 역시 그렇지 않는가? 구술로 만들어진 책이기에 독자와의 만남은 오히려 훨씬 유리한 처지에 있는 책이 된 것 같다. 책을 내놓고 난 뒤 혹 아쉬운 점은 없나?
리영희: 그렇게 열심히 공을 들여서 힘들게 수정을 했는데도 내놓고 나니 내용에 실수가 발견된다. 또 책이라는 형태의 전달 수단의 제약 조건 때문에 좀더 많은 이야기를 다 넣을 수 없었다는 게 아쉬웠다.
사실 이 책에 수록된 일들이 나한테는 모두 다 의미 있는 얘기인데, 독자들에게는 조금이라도 신선함을 줄 수 있을지, 이게 가장 큰 걱정이다. 이 책을 읽고 나라는 인간의 삶에 대해서 좀더 이해를 하게 될까 또 내가 어렵사리 모색하며 고민한 사상적인 고통, 싸움과 같은 것들이 잘 전달될까, 이런 게 쓰고 나서 막연했다.
현실과 타협하지 않은 '유학자적 인본주의자'
김민웅: 충분히 전달되고 있다고 독후감을 말씀드리고 싶다. 1970년대 중반에 대학생활을 해온 나를 비롯한 우리세대들이야 선생님을 30년 정도 모시고 살아온 거나 마찬가지다. 우리들에게는 '리영희의 제1세대 제자'라는 자부심도 있다. 그 책을 읽으면서 이런 느낌이 들었다. 한 시대를 온몸으로 부딪치면서 신념을 지켜온 선생님의 모습에서 서양적 개념의 자유와 진실을 위한 투쟁과 함께, 그 밑바닥에는 과거의 우리 선비, 유학자와 같은 모습 즉 머리 숙이지 않고 꿋꿋이 지조를 지켜왔던 그런 분들의 모습이 투영되는 것 같았다. 우리 선조들의 모습이었는데, 어느새 우리가 우여곡절의 세월을 통과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잃어버렸던 그런 것 말이다.
리영희: 이 책에서도 임헌영 교수가 나를 '유학자적 인본주의자'로 지칭한 대목이 있다. 아마 그 분이 나에 대해서 느낀 것을 집약적으로 표현한 말일 텐데, 지금 김 박사 해석을 듣고 보니 '아, 그런 뜻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웃음)
ⓒ프레시안
김민웅: 그런 모습이 굉장히 소중하다. 어떤 뜻을 세우고 '이게 옳다', 일단 마음을 정하면 쉽게 타협하지 않고 자기 길을 가는 것 말이다. 이런 저런 이유와 구실을 내세워 현실과 타협하고 스스로를 팔아넘기는 모습이 흔한 시대에 이런 자세로 살아오셨다는 것은 참으로 감동스럽다. 선생님의 글과 삶을 보면서 다시 한번 꼭 가슴 속에 안고 가야 할 문화적, 시대적 유전인자를 확인하게 돼 후배 세대로서 기쁘고 감사하다.
리영희: 난 항상 글을 쓰면서도 나와 내 글이 타자에게 어떻게 비춰질까, 이런 걸 고민해 왔다. 그걸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줘서, 더욱이 내가 의식하지 못한 긍정적인 의미까지 부각시켜줘서 아주 고맙다.
'절대적인 것'에 대한 경도는 위험하다
김민웅: 선생님은 지나온 시대를 아주 엄격한 기준을 가지고 현실을 판단하고 개입해 왔다. 그런데 <대화>를 보면 '유연성'과 '여유로움'에 대한 지적이 많이 나온다. 사실 의외였다. 너무 급하게 변화를 도모하다 도리어 생각하지 못한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는 지적도 의미 있게 다가왔다. 가령, "박정희를 절대악으로만 보는 것은 동의하지 않는다", 이런 얘기도 있어서 인상 깊었다. 인간과 역사에 대하여 보다 포괄적이고 생각보다 너그러운 해석을 가지고 계시는구나 했다.
리영희: 사실 나는 종교와 관련해서도 그렇지만 인간의 생존 방식, 사회 발전 등 모든 면에 있어서 어떤 선악의 가치나 절대적인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다. 예를 들어 나는 마르크스의 이론적 입장도 상당한 정도까지 부정 내지는 수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거 아니면 저거다라는 식의 접근에는 고려할 바가 많다.
좌파적 지식인들은 대체로, 예를 들어 일제 침략 때 나라를 팔아먹은 것은 상류계급, 지식인들이었고, 백성은 애국적인 것처럼 단순화시킨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지배계급 가운데 적지 않은 인물들이 오히려 헌신적으로 애국했는가 하면, 백성들이 적극적으로 적에게 협력한 사례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 숱하게 존재한다. 이런 식의 단순화는 계급이 단 하나의 심리 조건, 행동 원리로 움직인다는 잘못된 가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간사는 복잡하고, 이를 명확하게 파악하려면 의식의 성숙이 있어야 한다.
김민웅: 그런 생각은 1974년 <전환시대의 논리>를 낼 당시부터 그랬던 것인가, 아니면 이후 점차적인 생각의 변화가 이루어낸 결과인가?
리영희: 아마도 역시 세월이 흐르면서 많이 수정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다르게 말하자면 성숙했다고 할 수도 있고, 더 깊어지고 넓은 차원에서 인식을 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너무 뾰쪽하게만 사태를 이해할 일이 아니다.
박정희 독재가 남긴 '부정적 유산들'
김민웅: 그런 면에서 박정희 얘기를 한번 해보고 싶다. 우리 세대는 물론 선생님도 박정희 체제에서 큰 고초를 겪었다. 최근에 박정희와 그 체제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를 놓고 여러 가지 논란이 있어왔다. 사실 일본군 출신으로서의 친일행적, 여수순천 사건 당시 군 내부의 남로당 동지 배신, 이후 독재와 인권 탄압 등을 염두에 두면 박정희는 '절대악'으로 간주될 만하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저지른 역사적 업보 때문에서라도 민족적 정통성을 갖기 위해 몸부림치던 모습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거나 나름대로 역사의 소명에 부응하기 위해 헌신했다는 식의 긍정적인 평가도 있는 게 사실이다. 유신 체제 이전의 박정희와 이후의 박정희는 다르게 평가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리영희: 김 박사가 정확히 지적한 대로 사실 많은 동포들이 민족의 적에 대해서 과감히 싸우기 위해 나서고 또 고통을 겪고 있을 때 거기에 투항한 것이나 그 이후에 변절을 반복한 것 그리고 독재 정권 과정에서 비인간적인 탄압을 염두에 두면 박정희는 결정적으로 부정되어야 할 인간형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남긴 유산으로서 그보다 더 부정적인 것은 그의 독재로 말미암아서 지금까지 또 앞으로 상당 기간에 걸쳐서 우리 사회의 유산으로 남은 것들이다. 인간이 기회에 따라 변절하는 행태, 미국과 같은 외세에 대한 의존, 문화적 천민성, 지역감정 등이 그것이다.
예를 두 가지 들어보겠다. 그를 신처럼 모시는 사람들은 경부고속도로를 그 상징으로 드는데, 그 도로를 놓기 위해서 그 부정한 베트남 전쟁에 동포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은 왜 생각을 못하나? 결과적으로 그 생명들은 도로 하나만도 못한 무가치한 것이었나? 여전히 가장 큰 우리 민족의 상처로 남아있고, 지금도 공존에 심각한 위협을 주는 민족 간 대립의 지속을 심화시킨 것을 그냥 간과할 수 있나?
물론 중공업의 기틀을 닦아 산업화의 기반을 마련한 것과 같은 구체적인 물질적 유산이 무가치하다고 말하기는 힘들다. 또 그런 박정희 체제에서 혜택을 본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 하지만 그것이 앞에서 지적한 그런 부정적인 것들을 다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 정도로,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함부로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박정희는 미국의 꼭두각시, 경제 성장 그의 공 아니다
ⓒ프레시안
김민웅: 하지만 '역대 지도자들 중에서 누가 제일 괜찮은가', 이런 질문에 대중들은 항상 박정희를 선택한다. 허상이 많기는 하지만 일말의 진실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도 해본다. 나도 일본에서 태어나 1960년대 초에 귀국했을 때 고국의 헐벗고 빈곤한 모습은 어린 나이에 큰 충격이었다. 박정희가 그것을 탈피하는 물질적 기반을 마련한 것에 대해 대중들이 일정 부분 평가를 한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인간 박정희로서 이 나라를 그래도 좀 반듯하게 만들고 싶은 열정이 없었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지 않은가?
또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여러 정권을 통과해오면서 과연 박정희 만큼 장래를 나름대로 전망하고, 계획을 세워서 추진한 이가 있었는지 많은 대중들이 그런 점에서 박정희에게 주목을 하는 것 같다. 박정희의 부정적 측면과 긍정적 측면에 대한 애증이 엇갈리는 것이 보다 진실이 아닐까?
리영희: 그것은 두 가지로 나눠서 잘 따져봐야 한다. 박정희가 경제적인 희망을 보이게 한 것, 그래서 빈곤에서 벗어나게 한 것, 경제적 발전의 기틀을 마련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시기에 혹 박정희가 아니었더라도 미국의 정치적 이해 때문에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사실 우리가 아는 경제 성장을 이끈 리더 박정희는 미국이 전부 뒤에서 밀어주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박정희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킬 때 우리의 GNP(국민 총생산)은 98달러였다. 그 때 북한이 어땠는지 아나? 북한은 이미 기관차를 만드는 등 중공업 단계에 들어서고 있었다. 세계에서 기관차를 만들고 수출한 여섯 번째 나라가 북한이니까.
당시 구소련 사회주의권과 사활을 건 대결을 펼치고 있었던 미국의 입장에서는 남한과 독일에서 즉 사회주의와 맞대응하는 두 곳에서 전면적인 지원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당시 국제 정세 속에서는 박정희가 아니라 박길동이든 또 다른 누가 대통령이 됐더라도 미국이 전폭적인 지원과 코치를 할 수밖에 없었다는 거지.
실제로 케네디의 보좌관이었던 왈트 로스토(Walt W. Rostow)가 직접 우리나라의 경제발전 계획을 짜고 집행했다. 일본과 한일협정을 강제로 맺게 해 몇 푼의 돈을 일본에서 받아서 북한과의 균형을 유지하도록 한 것도 미국이었고. 사실 박정희가 발상을 하고 집행한 것들 따져보면 자율성은 아주 적다. 이런 전제 하에서 따져보면 마치 박정희가 발상부터 과정까지 전부 주도한 것처럼 여기는 것은 아주 어이없는 일이다. 만약 박정희가 제대로 못했다면 미국은 또 다른 누군가를 내세웠을 것이다.
지도력을 갖고 국민의 절박한 요구에 반응을 하면서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했다는 평가도 동의할 수 없다. 사실 왈트 로스토나 최근에 죽은 조지 케넌과 같은 미국 수뇌부의 세계 및 동북아시아의 구상을 살펴보면 박정희의 비전으로 돌릴 만한 것이 거의 없다. 즉 사실을 파고들면 박정희의 리더십이라는 것도 매우 제한적이었다는 것이다. 단 아까도 얘기했듯이 어쨌든 결과적으로 뭔가가 남았고, 그걸 모두 무가치하다고 부정하기는 어렵다는 점은 인정하는 바이다.
한승조 교수 발언, 미국 등에 업은 한일 우익들의 밀착 징후
김민웅: 최근에 한승조 고려대 명예교수가 일제 강점기를 미화시키는 발언으로 파동이 일었다. 그는 "19세기 정세를 살펴보면 조선이 러시아의 식민지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며 "그 후 러시아의 궤적을 염두에 둘 때 차라리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던 것이 의미가 있다"는 식의 얘기를 했다. 즉 일본이 우리나라의 근대화의 계기를 마련했다는 식으로 우리 민족의 주체성을 부정하는 얘기다. 이런 주장은 사실 새로운 것이라기보다는 '식민지 근대화론'의 연장선상에 있는 발언이기도 하다.
리영희: 최근에 화제가 되고 있는 몇몇 분들이 말하는 한일합방과 19세기 상황에 대해서는 우선 내 생각이 결론이 확실하게 안 나 있다. 대신 고민을 거듭하면서 상황을 해석하는 나름의 체계는 마련됐다. 먼저 설명을 좀 하겠다.
내 책에서도 말했지만 나는 종종 해외를 여행할 기회가 있었다. 그 중 가장 인상적인 경험 두 가지를 얘기해보겠다. 먼저 프랑스 파리의 에펠탑을 방문했을 때 들었던 감상이다. 1898년에 열린 파리 만국박람회의 개최를 기념하기 위해 315.65m의 에펠탑을 프랑스 국민이 세웠다는 안내판 앞에서 나는 1898년부터 1910년에 이르는 조선말과 한일합방의 우리를 떠올리며 슬퍼졌다. 이미 프랑스는 에펠탑을 만들 만한 철광석 채취 기술, 광물의 야금 기술, 철 재료 용광로의 규모와 기능의 구준, 압연기술, 300m가 넘는 구조물을 구성하는 데 필요한 구조역학, 재료공학 등의 연관 기술이 종합적으로 발달해 있었다.
우리 민족이 동시대에 이룩한 것은 뭐가 있나? 아무것도 없었다. 조선말과 한일합방에 걸친 시기의 서울 시내 풍물 사진첩을 보면, 건물이라고는 2층집도 없고, 가옥은 누추한 초가집뿐인데다가, 길이라는 게 수도의 한복판인데 오물이 고인 더러운 진창길이고, 수송 수단이라고 움직이는 것이 고작 몇 개의 달구지고, 대부분은 옹기와 장작을 나르는 지게꾼들이지. 철조 건물은 고사하고 석조 건물 한 채도 보이지 않는 한심한 모습이라니. 누군들 잘 하고 싶지 않았겠나? 안 하고 싶었던 게 아니라 우리는 당시 능력이 없었던 것이다.
그 후 스페인의 알함브라 궁전에서 1600년대 말에 제조된 약 2m 크기의 정밀한 시계를 보았을 때 역시 같은 생각에 잠겼다. 시계의 정밀성이나 모든 부속품의 완벽성은 3백년 후의 제품같이 완벽했다. 1600년대 우리 조상들은 무엇을 만들었을까?
나는 이런 경험을 할 때마다 우리 민족의 업적이 빈약함을 너무나 절감하곤 했다. 국수주의적이고 편협한 민족주의자들은 마치 우리 민족이 세계 문명과 문화에서 중심적이거나 선도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착각하곤 한다.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많은 이들이 기울었던 '내재적 발전론', '자본주의 맹아론'에도 이런 편향이 있었던 것은 아닌지 반성해볼 필요가 있다.
조선말부터 한일합방에 걸친 시기에 보였던 그 지지부진한 모습들, 현대화를 추진할 의지나 능력이 없었던 정치 지도자들과 과거에 얽매여 있었던 사회 체제 등, 이 모든 것을 생각할 때 나는 '내재적 발전론', '자본주의 맹아론'에 쉽게 동의할 수 없다. 구한말에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것이 뭐냐에 대해서 냉정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서울대학교의 안병직 교수가 1980년에 최초로 '식민지 근대화론'을 제기한 다음 논란이 최근까지 계속되고 있지만, 일단 앞에서 지적한 당시 현실에 대한 냉정한 판단을 전제할 때 일제가 남긴 발전소, 철도를 오로지 수탈만을 위한 것, 아무런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물론 이런 결론이 바로 일본의 식민 지배를 합리화하고, 식민지 경험을 통해 모든 것이 다 이루어졌다, 이런 식으로 나아가서는 안 될 것이다. 사실 한승조 교수와 같은 사람의 주장은 오히려 현재적 의미 속에서 살필 때 더 큰 문제가 있다. 그들이 그런 소리를 지금 새삼 하는 것은 미국의 군사적 협력과 같은 뒷받침을 받아 일본과 공동 전선을 형성해 중국, 러시아에 대항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목적의식을 밑에 깔고 일본과 관계를 좋은 방향으로 돌리려는 의도가 있는 것이다. 동북아시아에서 미국이 의도하는 군사적 전략을 관철시키려는 정치적으로 반동적인 뜻을 가지고 있는 거지.
그 사람들은 내가 앞에서 지적한 19세기에 대한 냉정한 역사적 통찰에서 그런 주장을 하기보다는, 미국을 추종하고 평화에 반대하는 체질에서 그런 주장을 하고 있다. 한승조 교수가 '러시아의 식민지가 됐을 것이다'와 같은 역사적 가정이기 때문에 유력한 논거가 될 수 없는 것을 들면서 주장을 펴는 데서도 잘 알 수 있다. 만약 역사가 그렇게 전개됐다면 동북아시아에서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졌겠지. 힘의 역관계가 달라졌을 테니까.
종속적인 대미 관계로는 미래가 없다
김민웅 박사(성공회대 겸임교수) ⓒ프레시안
김민웅: 마침 말씀을 하시니 그 연장선상에서 이런 질문도 가능하겠다. 한승조 교수의 논리를 더 밀고 나가면, '해방 이후 미국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이 정도라도 발전한 거 아니냐'는 주장이 가능할 수 있다. 많은 대중들이 지금 한승조 교수의 주장에 크게 반발했지만, 미국에 대해서 같은 논리로 얘길 할 때도 반발을 할까? 그렇지 않을 것 같다. 미국과 관련해서는 식민지 근대화론이 별 저항 없이 먹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리영희: 그것도 따지고 들면 쉽지 않은 문제다. 부정할 수 없는 현실적인, 또는 물질적 발전'이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 대해서도 현실에 근거한 냉정한 판단이 요구되는 것처럼, 해방 후 미국의 역할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성취로 드러난 사실을 부정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적어도 남한에서는 미국이 후견인이 되었기 때문에 경제적, 사회적, 제도적, 문화적으로 미래와 연결되는 통로가 마련된 면이 있다.
하지만 이것이 전적으로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었다는 것은 60여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미국 패권주의 하에서 우리는 사실상 주권을 상실했던 일제 강점기와 유사한 상태였다. 특히 미국의 동북아시아 정책의 일환으로 남북한이 분단된 상태로 민족 간 전쟁을 겪고, 지금도 전쟁의 위기가 상존해 있는 것은 굉장히 부정적인 일이고.
여기서 다시 한번 냉정한 판단을 할 필요가 있다. 앞으로 동북아시아에서 예상되는, 조금 전에 얘기했듯이,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미국의 정책을 우리가 그대로 추종하는 것이 과연 미래를 보장하는 것일까? 60년 전에 우리의 역량이 워낙 형편없었던 때에는 우리에 대한 미국의 지배와 역할이 혹시 어느 정도 타당성을 가졌다고 지금도 그것이 타당성을 가지는 것은 아니다. 지난 2~30년 사이에 변화돼 온 미국과 우리나라의 관계를 염두에 둬야 한다. 더구나 앞으로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미국과 관계를 지속시켜 나갈 때 발생할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들을 생각한다면 더욱더 전혀 다른 판단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우리의 약점과 못남 직시해야, 뼈아픈 자기반성 있어야 미래로 나아갈 수 있어
김민웅: 아까 에펠탑, 알함브라 궁전에서의 소회도 말씀을 했지만, 우리 민족의 역량과 관련한 이야기를 좀더 해보고 싶다. 사실 19세기 말의 동북아시아의 역사를 유심히 살펴보면 일본과 우리나라에만 초점을 맞춰 봤을 때, 일본의 근대화 세력들이 보였던 동양 정세에 대한 치밀한 분석과 그에 기반을 둔 준비와 훈련의 치밀성은 전율을 느낄 정도이다. 결국 침략주의로 귀결된 근대화 과정이기는 했지만, 일본의 입장에서는 아시아의 낙후한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한 치열한 몸부림의 과정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그 당시 우리와 일본의 세계정세에 대한 인식의 차이는 평지와 에펠탑의 높이만큼이 아니었던가 싶기도 해서 아찔해지기도 한다. 이것이 우리민족의 역량을 근본적으로 부정하거나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나, 우리 자신을 세계적 문맥 속에서 냉철 또는 냉혹하게 자기평가 해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1백년이 지난 지금은 과연 이런 상황이 변했을까? 선생님께서는 이미 1974년에 <전환시대의 논리>에서 동아시아는 물론 세계적인 시야를 갖고 우리가 서 있는 위치를 일깨웠지만, 사실 동아시아로 시야를 확장해 우리를 살펴보려는 사회적 자세가 형성된 것은 얼마 안 된다. 흔히 우리나라가 일본에 비해 경제가 3~40년 뒤진다고 하지만, 정세에 대한 인식이나 사태를 조망하는 시야는 안타깝지만 거의 한 세기 이상 뒤지는 게 아닌가 생각된다. 지금이야말로 루쉰이 <아Q정전>에서 중국 민족의 약점을 통렬히 지적하면서 일깨웠던 것과 같은 일이 우리 민족에게도 다시 한번 필요하지 않나? 우리 자신에 대하여 스스로 좀 뼈아픈 이야기가 필요한 것이 아닌가 해서 말이다. 청일전쟁 당시 일본의 외상 무쓰 무네미스가 쓴 회고록 <건건록(蹇蹇錄)>같은 것을 읽어보면 기습을 당하는 느낌이다. 당대의 조선 내정을비롯하여 동양정세에 대한 심도 있고 해박한 지식은 물론, 일본의 국가적 지향점에 이르기까지 치밀한 고뇌와 전망의 제시가 있다. 당연히 이는 침략주의의 소산이라는 비판을 전제로 하는 것이나, 세계에 대한 기본인식의 수준에 있어서 우리 자신 돌아봐야 할 바가 적지 않다.
리영희: 맞다. 김 박사 말대로 1백년 이상 뒤졌다고 봐야지. 아까도 잠시 언급했지만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강조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다른 민족, 국민이 무엇을 이룩했는지, 이걸 볼 필요가 있다. 그 연장선상에서 일본에 대해서도 한번 따져볼 필요가 있어. 민족적 자부심을 가지는 것은 의미 있겠으나 매우 정직한 자기평가를 기초로 해야 그것도 진실성이 있다.
지금 아주 선의로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강조하고 민족 사랑의 감정을 얘기하는 이들 중에는 일본을 거의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칫 그것은 편협하고 균형을 잃은 경우가 많다. 나는 일본과 우리나라의 차이에 대해서 많은 걸 생각해봤다.
우선 첫째, 우리나라의 중앙 집권적 통치체제와 일본식 봉건제의 차이를 우선 주목할 필요가 있다. 메이지 유신에서 근대화를 앞당기는 인물이 왜 많이 나왔을까? 이미 일본은 막부 3백여년 동안 상당한 정도까지 서구와 교역을 하면서 서구식 근대화에 대한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김민웅: 당시 일본에서는 난학(蘭學)이라고 해서 서양문명에 대한 연구의 역사가 가볍지 않았다. 메이지 유신의 주체세력인 조슈, 사쓰마 등의 번벌 세력에서 이후 일본 근세사를 이끄는 출중한 인물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도 그런 각도에서 파악이 되는 것 같다.
리영희: 그렇다. 조슈, 사쓰마 뿐만이 아니라 각 번벌 세력 내부에서는 번주에 의한 지원을 통해 대단한 인물들이 길러졌다. 당시 조선이 완강한 쇄국 정책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과는 크게 대조되는 부분이지. 한 가지 주의해서 봐야 할 것은 일본식 봉건제는 오늘날의 의미로 보면 일종의 '분권적인 소왕국'인 '번'들이 경쟁하는 체제였던 것이다. 자기 번 내의 백성들에 대한 복리후생을 전면적으로 책임져야 할 막부들은 우선적으로 기술을 양성하고, 무역에 앞장설 수밖에 없었지. 그렇지 않으면 이웃에게 당하니까. 각 번들이 지역의 특성에 기반을 둔 발전을 하는 동안 차곡차곡 근대 국가를 지향하는 준비를 해 온 거야. 이 토대가 메이지 유신에서 그대로 근대화를 지향하는 동력이 된 것이지.
그 기간은 조선에서는 아주 추상적인 주자학의 형식주의에 빠져 있을 때다. 일본 정도의 인식의 단초를 보여준 게 정약용과 그 시대부터다. 그러니 1백년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일본의 역사적 책임을 비난하는 것과 함께 동시에 더 필요한 것은 '왜 우리가 그렇게 됐나', 우리 자신을 시험, 분석, 해부의 대상으로 삼아서 가슴 아프게 분석하지 않고 남만 욕한다면 안 되는 것이지.
혹자는 이런 얘기를 들으면 '민족 니흘리즘(허무주의)'이라고 비판할지 모르겠다. 이광수의 '민족 개조론'과 비슷하다고 들을 수도 있겠고.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광수가 '민족 개조론'을 내놓은 것과 루쉰이 <아Q정전>을 쓴 게 똑같이 1920년대 초다. 이광수가 자기 민족에 절망해서, '이건 죽은 민족이고, 되살아 날 수 없다', 이런 생각을 가지며 출세를 위해서 자기 민족을 아예 시체로 전제하고, 그 시체를 밝고 일본에 아부하려고 내놓은 게 '민족 개조론'이다. 이때 루쉰은 어떻게 했는가? 루쉰은 철저하게 중국 대중의 무지몽매, 교활, 탐욕, 무능, 이런 생각해 낼 수 있는 모든 부정적 속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그의 글을 읽는 중국 민족으로 하여금 스스로 각성하는 것을 유도했다. 뼈아픈 자극을 통해 정신적 혼을 일으키려고 노력했던 것이다.
바로 우리가 부족한 게 이 뼈아픈 자기반성이다. 우리 자신의 긍정적인 차원만을 강조하면서 상대방의 부정적인 측면만 계속 얘기한다면 갱생, 발전이 있을 수 없다. 정(正)과 반(反)을 지양할 때 비로소 긍정을 획득할 수 있다. 루쉰이 중국 백성을 자극해 자각을 이끌어냈듯이, 우리의 약점과 못남을 가슴 아프고, 뼈아프게 자기반성을 해야 한다. 물론 그게 열등감이나 허무주의로 연결된다면 그건 더 못난 것이 되는 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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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앞세운 미국의 흉계 확실히 파악해야
김민웅: 20여년 미국에서 살다가 최근에 귀국해서 6개월 정도를 살면서 새삼 우리나라 사람에게 느끼는 게 굉장히 많다. 충분한 고려 없이 쉽게 단정적이고, 더 이상 다른 요인이나 조건 등에 대한 가정을 세우지 않고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이 전부인 자세가 두드러진다. 특히 열린 자세로 남을 들여다보고 또 자기를 들여다보고 냉철한 사유를 기반으로 대안을 모색하는 훈련이 부족한 느낌이다. 이러다보니 세계적인 시야에서 넓게 세상사를 파악하려고 하기보다는 편협한 시각으로 재단하고 성급하게 판단해서 움직이는 경향도 엿보인다. 최근에 와서 좀 달라지는 것 같기는 하나 여전히 이것은 우리가 미래로 나아가는 데 큰 약점인 것 같다. 최근의 일본과의 문제에서도 그런 면이 엿보인다. 큰 원칙을 세워 긴 안목에서 무게 있게 해결책을 밀고 나가는 힘을 우리가 가지고 있는지는 좀 돌이켜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다.
리영희: 맞다. 당장 최근 일본과의 관계에서 우리나라 지도자, 국민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지 않은가? 내가 제발 부탁하고 싶은 것은 우리나라 지도자나 국민들이 불독과 또 여우와 같아져야 한다는 거다. 쉽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가볍게 동요하지 않고, 끈질긴 불독의 뚝심과 지속성을 가져야 한다. 뚝심과 끈질김이야말로 지금 상황에서 꼭 필요한 덕목이다. 영국인들이 한번 결심하면 겁날 만큼 뚝심 있게 밀고 가는 것처럼 말이지. 이런 자세에 기반을 두고 일본인이 보였던 치밀함, 조직력, 협상력과 같은 여우의 교묘함을 조화시켜 나갈 때 비로소 이 상황을 극복할 수 있다.
이걸 갖추지 못하고 지도자부터 국민들까지 쉽게 동요하고, 흥분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싸움을 하기도 전에 저들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거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런 식으로는 절대 일본을 따라 갈 수 없다. 의분은 필요하지만 치밀하고 섬세한 전략적 사고가 요구된다.
아까 한승조 교수 얘길 하면서도 잠시 언급했지만, 지금 일본의 행보 뒤에 미국이 있음을 항상 염두에 둬야 한다. 독도 문제 등이 큰 관심을 끌고 있지만 지식인들이나 대중들이나 정말 중요한 핵심을 놓치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에 대항하는 축으로서 미일 동맹이 강화되는 가운데 일본이 우리나라나 중국에 대해서 영토 문제를 들고 나오고 있는 상황을 유심히 살펴봐야 한다. 마치 1905년 영국이 일본을 앞세워 중국과 러시아를 공략하고, 더 나아가 동남아를 장악하게 했던 것처럼 말이야. 지금 미국이 당시 영국이 했던 것과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다. 향후 전개될 중국, 러시아의 대립 관계를 염두에 두고 일본의 팽창주의를 미국이 부추기고 있는 것이다. 현재 일본에서 이뤄지고 있는 것은 일본만을 욕해서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독도 문제는 필연적으로 미국의 동북아시아 정책과 맞서는 지점에 우리를 몰고 갈 것이며 우리는 한미 관계의 변화라는 문제와 직면하게 된다.
과거 1960년대에 미국은 일본, 남한, 대만, 필리핀을 잇는 축을 만든 적이 있다. 미국은 지금 중국과 러시아에 대항해 북한이 붕괴된 한반도를 포함한 새로운 축을 다시 만들기 위해서 일본을 앞세워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표피적으로 드러난 일본 우익에 대한 감정적 대응보다는 미국이 일본을 앞세워 한반도와 동북아시아에서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그 목적, 흉계, 전략을 확실히 파악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우말 안 개구리'식 폐쇄적 사고에서 세상으로 나와야
김민웅: 현재 상황을 훨씬 더 복합적으로 생각해야 된다는 말씀인데 현재 우리사회의 정신적 특징을 보면 그것이 쉽지 않은 듯 하다. 한 가지 더 언급하자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대화나 토론을 할 때 남의 얘기를 진지하게 경청하지 않고, 자기 얘기할 것만 생각하고 몰두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부담스럽기는 하지만 우리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스스로 절감해야 할 자화상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정말 중요한 것은 진지하게 절차를 밟아야 하는데 그런 과정을 너무 가볍게 무시하는 것도 큰 문제다. 합의를 내세우면서도 일방적 동의를 요구하거나 권력이 일단 정하면 이견을 용납하려 들지 않는 분위기도 생각해봐야 하지 않나 한다.
리영희: 사실 우리는 진지하게 토론을 하는 훈련의 기회를 가져본 적이 없다. 토론은 얘기를 주고받는 상호가 동격인 위상을 지니면서, 상대방과 인격적, 지적인 우열을 놓고서 얘기하는 게 아닌가? 그러면서 더 발전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거다. 과거 봉건사회, 계급사회에서 토론은 불가능했다. 오로지 일방적인 얘기만이 있을 뿐이었다.
여기에 더해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그야말로 폐쇄 사회에서 세상을 넓게 보지 못하고, 비슷비슷한 생각을 가진 이들끼리만 어울렸다. 사실 우리가 해외에 일상적으로 나가서 다른 민족이 이룩해놓은 문화유산에 깜짝 놀라게 된 게 채 20년도 안 된다. 보는 만큼 알고,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지 않나?
이런 제약 때문에 여전히 우리는 자기 위주로 모든 상황을 판단하는 한계를 갖고 있다. 이런 심리 상태를 고치지 않으면 여전히 우리는 '우물 안 개구리'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다. 물론 조금씩 나아지고 있긴 하지만….
탐욕과 경쟁과 물질적 부를 추구하는 사회 '절망적'
김민웅: <대화> 말미에서 선생은 자본주의 극복의 필요성을 조심스럽게 언급했다. 우리 사회의 경제적 생활의 근본에 대한 깊고 깊은 성찰이 절실한 것 같다. 그렇지 못하면 우리는 계속해서 물질적 기준을 놓고 자신과 세상을 판단하려 들지 않겠는가?
리영희: 그렇다. 내가 최근 절망하고 있는 심각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사회는 지난날 생존의 위협을 느낄 만큼 절박한 상태에서 3~40년 동안 물질적으로 나아졌다. 그런데 지금 주위를 둘러보자. 오로지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한 상태에서, 개개인의 생활이나 전 사회가 마땅히 지향해야 할 정신적 가치, 더불어 사는 미래상에 대한 고민은 부재하다.
어쩌면 내가 외톨이로 주장하고 있는 것이기도 한데, 민주노동당과 같은 정당이 이제 겨우 생겨나긴 했지만, 그러한 인간의 온유하고, 상호 융합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 필요해. 즉 인간적 요소를 물질적 가치의 하위에 놓는 경제 제도, 정치 구조 이런 것을 배격해야 한다.
특히 이익만을 좇는 인간성이 상실된 미국의 '벌거벗은 자본주의'를 우리가 IMF 사태 이후 더욱더 추종하고 있는 것은 굉장히 우려스러운 일이다. 탐욕과 경쟁과 물질적 부를 추구하는 그 속에서는 절대 평화로운 사회, 나누는 사회, 토론하는 사회, 더불어 기뻐하는 사회가 될 수 없다.
사실 세계 어느 나라를 가도 우리나라 사람처럼 무제한적인 사치, 방종, 이기주의, 이런 구제불능과 같은 행태를 보이는 나라가 없다. 인도네시아 사람들 우리와는 비교가 안 되게 순정하다. 우리나라보다 더 앞선 자본주의 국가인 일본도 물질적 가치에 우선하는 가치, 예를 들면 정직과 같은 것을 신봉한다. 중국과 인도가 급속히 자본주의화되고 있지만 우리나라 사람들 같을까? '인간이 인간과 더불어 살지 않는'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전체가 마음을 합치고, 희망을 공유하고, 북핵ㆍ독도 문제와 같은 외교적ㆍ정치적 난제를 잘 풀어나갈 수 있을지 회의하지 않을 수 없다.
다음 세대의 밑거름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
김민웅: 그래도 우리나라 사람들이 오랜 고난의 시기를 거치면서, 특히 민주화 과정에서 보여줬던 저력이 있지 않나? 나를 포함한 우리 세대는 물론이고, 지금 3~40대의 많은 후배들이 선생님의 뜻을 존경하고 따라 우리 사회를 변화시킨 것도 사실이다. 선생님은 우리 세대의 “사상의 은사”라는 칭호까지 받으셨다. 이런 후배들의 성장이 어떻게 느껴지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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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웃음) 그 점에서는 나는 참 보람을 느낀다. 짧은 시기에 그만큼 한두 세대 정도가 과거의 부정적 유산을 단절하고, 경제, 학문 여러 분야에서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 놀랍고 대견하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지난 몇 천 년에 걸쳐 쌓아온 역사의 부정적인 유산을 하루아침에 없었던 것으로 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지난 2~30년은 우리 역사의 과거 어떤 특정한 시기의 몇십년보다도 더 큰 변화를 이룩했다고 단언할 수 있다. 물론 우리가 희망하고 지향하는 사회를 향해 나아가는 양과 질의 속도를 놓고 보면 불만이 없지는 않지만, 우리가 앞으로 계속 나아갈 수 있는 '희망의 근거'를 마련했다고 생각한다.
덧붙이자면 탈 정치적이기는 하지만, 아주 역동적이고, 또 결국 우리나라의 미래를 책임질 지금 20대에서 30대 초반의 다음 세대들은 이러한 루쉰의 이야기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는 '앞 세대는 뒷 세대의 밑거름으로 살아간다'라는 얘기를 했다. 간혹 큰 성취를 이룬 이들 중에는 자신의 성취를 무덤까지 가지고 갈 것처럼 처신하는 것을 보는데 잘못 된 거지. 그 성취가 밑거름이 돼서 자기보다 큰 나무가 되고, 아름다운 꽃이 되게끔 거름이 되어야 하고, 앞 세대는 그 때문에 존재하는 거지.
그래서 지난 세기 그 흉악한, 불행한 세대를 살아온 나를 비롯한 선배들이 포함된 앞 세대들이 가꿔온 나무에 달린 열매를 지금 세대들은 아무 생각 없이 따 먹고 있다. 누가 씨를 뿌렸는지, 나무가 커 오는 과정에서 어떤 고난을 겪고, 얼마나 많은 피눈물이 거름이 됐는지 생각하지 않고 열매를 당연한 것처럼 취하는 경우가 많다.
이제 그런 젊은이들도 이제 다음에 오는 세대에게 뭔가를 남겨야 하는 '생명의 원리'를 깨우쳐야 한다. 단지 열매만 취하기보다는 그 옆에다 나무를 심고, 꽃을 심어 더 크게 자라고, 더 예쁘게 피게 하는 노력을 해야지. 그래야 '생명의 연속성'이 보장되는 것이고.
나는 <대화>를 젊은이들이 읽을 때, 저마다 '리영희'가 돼 책 속의 상황과 직접 부딪쳐보라고 말하고 싶다. 그래서 지나간 역사를 성찰하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도 성찰해서 또 다음 세대를 위한 밑거름이 될 수 있는 능력을 길렀으면 한다.
독재 정권 때와는 다른 대응 필요해, 넓고, 깊고, 유연하게 가라
김민웅: 아, 이건 후배 세대들이 되풀이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런 게 혹시 있으면 들려 달라.
리영희: 일단 지금은 우리 국민들 상당수가 과거의 중압에서 벗어나서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이제는 지난 2~30년 사이에 오늘과 같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쌓아온 정열과 믿음과 이런 것이 집약된 집념과는 다른 자세가 필요하지 않나 싶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그 동안은 적이 너무나 강력하고 완벽해 보이니까 최대한 단시간에 무너뜨리는 것을 목표로 싸워왔다. 이제 앞으로는 목적과 발전을 이룩하기 위한 시간의 단위를 좀더 길게 잡고, 여러 가지 닥쳐오는 상황을 판단하고 행동하는 데도 훨씬 더 유연하게 대처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 과정에서 그 동안 배제했던 이웃, 정치적 집단들과 대화하고, 상호 융합을 모색하면서 나아가는 게 좋겠다. 그 동안 바위에 목숨 걸고 부딪치듯이 더 빠른 속도, 더 강한 충격에 의존했던 행동에서 벗어나 모든 변화에 필요한 요소를 좀더 여유있게 잡았으면 좋겠다.
김민웅: 그런 충고는 선생님이 그 동안 살아오면서 스스로 생각했던 한계 이런 걸 염두에 두고 한 것인가?
리영희: 그런 거다. 내가 늘 부족했던 것이 그런 거였다. 여유를 가지고 너그럽게 둔각적으로 대응을 하기보다는, 남의 의견을 반드시 정면으로 돌파하는 예각적인 방식을 위주로 세상을 대해 나갔으니까.
악기 연주, 시 쓰지 못한 것이 큰 아쉬움
김민웅: 개인적인 차원의 질문 하나 드리고 싶다. 선생님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방면에 탁월한 능력을 가졌는데, 그래도 개인적 소양에 있어서 틈새, 아쉬움 같은 게 있나?
리영희: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악기를 연주하고 싶은 거다. (웃음) 이 나이가 되도록 악기 하나 연주 못하는 삶이 참 삭막한 것 같다. 꼭 특별한 악기를 지칭하는 건 아니고. 바이올린은 너무 어려우니까, 피아노를 즐길 수 있을 정도로만 연주할 수 있었다면 참 좋았겠다, 이런 생각을 가끔 해본다. 내 또래 중에서 트럼펫, 아코디언, 피아노를 연주하는 이를 보면 너무 부럽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내 성질이랄까 성향 때문에 시를 쓰지 못한다. 시는 가슴에서 나오는 정서적인 것 아니냐. 내가 그 동안 해왔던 것이 심장보다 뇌에 의존한 거였으니까.
김민웅: (웃음) 이번 책은 어느 시 못지않게 심장에서 문장들이 튀어나온 것 같다. 어느 독자가 그러는데, 시보다 더 뜨거운 감동을 느꼈다고 하니 이미 시인이 되신 것 아닌가?
리영희: (웃음) 그렇게 읽어주면 고맙지. 김지하 그 친구가 생명 사상의 원초를 서대문 형무소의 썩은 콘크리트 창문에서 돋아나는 싹을 보면서 형성했다고 하더라. 그와 관련한 시들이 많이 나오지.
나라고 형무소에서 그런 광경을 안 봤겠고, 그런 생각을 안 했겠나. 나도 노력을 했지. 그런데 시가 안 나오는 거야. 이제는 더 뭉클한 게 많은데, 그러니까 재료는 준비돼 있는데 반죽해서 완성을 못 시키는 것이다. 멋지게 시를 쓰고 싶어.
나처럼 실증적인 자료에 기반을 두고 작업을 하는 사람들은 건조하기가 이루 말할 데 없다. 제일 부러운 게 문인들이다. 또 시인이나 소설가는 고향에 시비도 세워 주잖아. (웃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예술, 그런 힘이 부럽다.
김민웅: 이 기회에 시집 하나 내시면 어떤가? 여기 산본에서 '리영희 시비' 하나 세워줄지 아는가?
리영희: (웃음) 아니야. 어렸을 때 접한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이 말을 지금에야 실감한다니까. 너무나 반대되는 삶을 살아왔으니까.
리영희: 견딜 수 없이 미안하다. 참을 수 없는 고생을 많이 했으니까. 요새는 그래서 잘해주려고 노력해. 내가 유일하게 아내한테 해 주는 게 설거지 해주는 거야.
(이 대목에서 계속 대담을 지켜보고 있던 사모님은, "손이 마비된 뒤로 손 운동을 겸해서 설거지 해주는 거지", 하면서 즐겁게 웃는다. 평생을 리영희 선생님과 같이 해온 사모님은 선생님만큼이나 선생님의 삶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 같았다.)
김민웅: 이제 마무리 질문을 드린다. 역사적으로, 인간적으로 '리영희'란 인간이 어떻게 기억되기를 바라나?
리영희: (웃음) 기억이 될까. 기억 안 될 거야. 예술은 남아도 인생은 남지 않는다고. 만약 후세에 나를 기억해준다면 한 시기 그러니까 20세기에 '스스로보다는 더불어 사는 동포, 인류의 행복과 인간됨과 자유를 위해서 그것을 제약하고, 봉쇄하고, 탄압해왔던 외적 요소에 대해 과감히 싸워온 투사였다', 이 정도로 알려지겠지.
나이 들면서 생각해보니까 내가 시를 쓰고 그러진 못했지만 논문 쓰고, 상황 분석하고 이런 것도 나름대로 '삶에 대한 사랑'을 표시한 거야. 내 삶이든 타인의 삶이든. 그런 것 아니겠어? 그런 면에서 부끄럽지는 않아.
김민웅: (웃음) 지금 말씀하신 투사 뒤에다가 시도 쓰려고 무진 애쓴 아름다운 사람, 이렇게 덧붙이고 싶다. (웃음) 우리도 선생님을 지극히 사랑한다. 내내 건강하시라.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는 말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적의 존재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이번 독도 문제나 역사왜곡에 있어서도 미국이 배후에 있다는 것을 모르면, 우리의 진짜 적이 누구누구인지..하는 적의 정확한 실체조차 모르고 싸우는 꼴이 되지요. 고로, 유비무환의 자세가 중요한 시점이라는..
리영희 선생의 건강을 빕니다. 말씀대로 불독과 여우의 그것이 필요합니다. 미국은 결코 영원한 우리의 우방이 아닙니다. 국수와 민족주의 라는 비판을 감수하더라도 특히 우리에게 필요한건 민족주의라고 봅니다. 언제 우리가 민족을 위해 본적이 있나요? 아니죠. 민족은 언제나 공허했을뿐 빠져 있었습니다. 민족을
도외시한 결과가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자주를 상실한 지독한 외세의존과 사대의식이 아닐까요. 감히 말씀드리자면 민족주의를 감정적이라는 꼬리를 달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은 다른 나라에 적용되어야 할 것이고 우리는 아닙니다. 그럼요. ..다시 한번 더 선생의 건강을 빌며 존경을 보냅니다.
첫댓글 정신차리지않으면...또 먹힌다!!!!!!! 카페 차원에서, 국민 계몽 운동을 합시다!!!!!!!!!!!!
지피지기면 백전불태..라는 말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적의 존재를 정확히 알아야 합니다. 이번 독도 문제나 역사왜곡에 있어서도 미국이 배후에 있다는 것을 모르면, 우리의 진짜 적이 누구누구인지..하는 적의 정확한 실체조차 모르고 싸우는 꼴이 되지요. 고로, 유비무환의 자세가 중요한 시점이라는..
리영희 선생의 건강을 빕니다. 말씀대로 불독과 여우의 그것이 필요합니다. 미국은 결코 영원한 우리의 우방이 아닙니다. 국수와 민족주의 라는 비판을 감수하더라도 특히 우리에게 필요한건 민족주의라고 봅니다. 언제 우리가 민족을 위해 본적이 있나요? 아니죠. 민족은 언제나 공허했을뿐 빠져 있었습니다. 민족을
도외시한 결과가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자주를 상실한 지독한 외세의존과 사대의식이 아닐까요. 감히 말씀드리자면 민족주의를 감정적이라는 꼬리를 달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은 다른 나라에 적용되어야 할 것이고 우리는 아닙니다. 그럼요. ..다시 한번 더 선생의 건강을 빌며 존경을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