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문화대혁명(1966~76년) 당시 재학 중이던 고교의 여자 교감 등을 구타한 일로 마오쩌둥 (毛澤東) 당시 주석의 칭찬을 듣고 고무돼 교사 구타 등의 폭력을 주도, 홍위병의 상징이 됐던 쑹빈빈(宋彬彬)이 지난 16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에서 지병으로 77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국내 일간 중앙일보는 18일 홍콩 매체와 소셜미디어(SNS) 등을 인용해 쑹빈빈의 사망을 알리며 런민르바오(人民日報)를 비롯한 중국 관영 매체들은 그녀의 사망 사실을 기사화하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다만 검색 엔진 바이두(百度)의 인물 소개란에는 사망했다는 정보가 실려 있다. 문화대혁명이 6·4 톈안먼 사태처럼 언급하는 일조차 금지된 때문으로 보인다. 위키피디아에도 사망 일시만 표시돼 있다. 단, 지난 17일 당 역사지인 '홍선(紅船)'의 SNS 계정이 유일하게 쑹빈빈의 부고를 실으며 "그는 숨진 뒤 어떤 형식의 추모 활동도 하지 말고 조용히 떠나기를 원했다"고 전했다. 사망 당시 정황이나 원인, 유족 등은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야후! 뉴스의 검색 창에 그녀의 영어 표기 'Song Binbin'을 입력해도 기사가 뜨지 않는다.
쑹빈빈은 문화대혁명 초창기인 1966년 8월 18일 톈안먼(天安門) 성루에 올라가 마오 주석의 팔에 직접 홍위병을 상징하는 붉은 완장을 채워준 인물로 유명하다. 마오 주석은 쑹에게 이름이 '논어'에 실린 겉과 속이 조화를 이룬다는 의미인 "문질빈빈(文質彬彬)의 빈인가?"라고 물었다. 쑹이 "그렇다"고 말하자 마오는 "무력이 필요하지 않나(要武)?"라고 다시 물었다. 그녀는 이때부터 '야오우(要武)'로 이름을 바꿨다. 이어 고등학생의 교사 구타와 자식의 부모 고발 등 전국적인 무장투쟁을 선동하면서 잔인한 폭력 시위를 적극 주도했다.
그녀의 이름을 마오에게 알린 일은 모교인 베이징사범대학 부속여중의 볜중윈(卞仲耘) 교감 등 7~8명을 죽창 등으로 때려 숨지게 한 일로 알려져 있다. 문화대혁명 기간 중국의 상당수 중고생과 대학생들은 홍위병이라는 이름으로 마오 주석이 획책한 정치적 대중운동에 동원됐다. 당시 이들에게 직접 살해당하거나 박해를 받아 사망한 희생자들은 최대 수십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지난 3월 공개된 넷플릭스 공상과학(SF) 시리즈 '삼체'에도 주인공이 지구를 버려야겠다고 결심하는 계기로 문화대혁명 때 부친과 가족이 당한 수모에 대한 환멸이 묘사되는데 누가 봐도 쑹빈빈을 모티프로 삼은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마오 주석을 만난 이듬해(1967년) 8월 당시 동북국 제1서기였던 아버지 쑹런충(宋任窮)이 자본주의를 추구하는 '주자파(走資派)'로 몰려 박해를 받게 돼 그녀 역시 어머니와 함께 수모를 겪었다. 쑹런충은 중국 공산당을 이끈 8명의 장로 중 한 명인데도 마오의 정적으로 간주돼 이런 수모를 당했다. 결국 그녀는 문화대혁명이 막을 내린 4년 뒤인 1980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마오 사후에 복권돼 덩샤오핑의 배려로 실세는 아니었지만, 상당한 영향력을 당과 정부에 행사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톈안먼 사태 때 무력을 동원해 진압해야 한다고 덩샤오핑이 결심했을 때 열렬히 지지한 이가 쑹런충이었다.
쑹빈빈은 1983년 보스턴 대학에서 지구화학 석사학위를, 1989년 매사추세츠 공과대학(MIT)에서 박사학위를 땄다. 미국 시민권을 얻어 매사추세츠주 환경보호청에서 환경분석관으로 2003년까지 일한 뒤 중국으로 돌아가 영국인이 운영하는 베이징 코비아 시스템 엔지니어링이란 기업의 회장으로 일했다.
지난 2006년 3월 13일 베이징 저장빌딩에서 촬영한 혁명 원로 2세대 사진을 보면 쑹빈빈을 비롯한 많은 2세대들이 기념촬영에 임했는데 당시 저장성 당 서기였던 시진핑 현 주석의 모습도 보인다.
이듬해 9월 모교가 뽑은 90명의 '존경받는 동문'에 이름을 올려 볜중윈 교감의 남편 왕징야오 전 중국과학원 역사연구원의 격렬한 항의를 받았다.
쑹빈빈은 2014년 홍위병으로 함께 했던 동료들과 함께 모교를 찾아 잘못을 빌었다. 교정의 볜중윈 교감 흉상에 머리 숙여 사과한 뒤 '나의 사죄와 감사'라는 제목의 글도 낭독했다. 이 공개 사과문에서 그녀는 "문화대혁명은 한바탕의 대재앙이었다"면서 "평생 괴로웠고 후회했다"고 소회를 피력했다. 이어 "과거의 비극과 잘못을 잊는다면 비극은 다시 재연될 수 있다. 잘못을 다시 저지를 수 있다"는 입장도 밝혔다.
하지만 볜 교감의 유가족은 그녀의 사과를 거부했다. 볜 교감의 남편 왕징야오는 "홍위병의 거짓 사과를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면서 진상 규명을 촉구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