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에게. 20년 동안의 공백 뒤에 귀국했던 나에겐 두 가지 충격적인 언어가 있었습니다. 남대문이나 서울시청 건물이 작아 보인 것은 ‘성장의 그늘’처럼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처음으로 나를 갸우뚱하게 했던 말은 “부자 되세요!”였습니다. 내가 20여 년 동안 살았던 프랑스 사회의 가치관으로도, 그 이전에 살았던 한국 사회의 가치관으로도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화두였기 때문입니다.
그 뒤에도 ‘기업하기 좋은 나라’처럼 납득할 수 없는 말들이 있었지만 가장 충격적이었던 말은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줍니다”라는 광고 문구와 가난한 아버지가 자식에게 내뱉은 “너는 나처럼 살면 안돼!”였습니다.
오늘 첫 수요편지의 제목을 <늠름한 민중>으로 단 이유는 내가 아직 두 말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첫 편지를 소년에게 부치는 이유는 소년은 아직 ‘5년 안에 10억 만들기’ 위해 내달리기 전이라고 믿어 <늠름한 민중>에 대한 기대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년이라면 알아야 합니다. 설령 일제 말기에 중학생이었던 리영희 선생처럼 소년 시절에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놓고 데칸쇼(데카르트, 칸트, 쇼펜하우어)를 만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소년인 그대는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줍니다”가 얼마나 폭력적인 말인지 알아야 합니다.
양극화로 치닫는 사회에서 “대한민국 1%의 힘” 따위의 말에 분노하기는커녕 롯데 캐슬이나 타워 팰리스에 대한 선망에 매몰되어 그 말의 폭력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어른들과 달리, 타자에 대한 상상력을 간직하고 있는 그대는 가령 쪽방촌 사람들이 그 말을 듣는 광경을 그리면서 그 말의 폭력성을 충분히 알아차릴 것입니다.
그리하여 소년은 그 말을 다음과 같이 바꿔 말할 줄 알 것입니다.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속물인지 말해줍니다.” 가난한 아버지가 자식에게 내뱉는 “너는 나처럼 살면 안돼!”는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해줍니다”의 대구(對句)입니다. 뒤의 말이 물질지상주의의 폭력성을 담고 있다면, 앞의 말은 그런 사회가 가난에 강요한 비참함을 반영합니다.
&nbs p;아직 소년인 그대의 친구들이 벌써 장래 희망을 CEO로 꼽고 있을 때, 세계와 만나는 창문인 책을 자주 펼치며 성찰하는 그대는 일생 땀 흘려 일한 아버지들의 “너는 나처럼 살면 안돼!”에서 슬픔과 함께 분노를 느낄 것입니다. 그 슬픔과 분노는 <늠름한 민중>이 이 시대를 사는 조건입니다. 물론 이 사회를 지배하는 속물들은 <늠름한 민중>을 용인하지 않습니다.
한겨레신문도 지난주에 비슷한 일을 겪었습니다. 10월21일치 1판 뒤표지 면에 실렸던 삼성의 광고가 2판 이후엔 사라졌습니다. 모든 일간지에 실린 삼성 전면 광고가 한겨레신문의 2판 이후부터 사라진 이유는 그날 치 한겨레 1면 머리기사 “삼성 이재용씨 또 편법 증여 의혹” 때문이었습니다.
삼성 계열사인 서울통신기술이 1996년 11월 주당 5천원에 주식으로 바꿀 수 있는 조건으로 전환사채 20억원 어치를 발행했는데 이재용씨가 그 중 대부분인 15억2천만원 어치를 인수하여 최대주주가 됐는데, 비슷한 시점인 96년 12월에는 기존 주주(삼성 임직원)가 갖고 있던 주식 20만주를 주당 1만9천원에 사들였다는 등의 내용이 담긴 기사입니다.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편법 증여와 비슷한 방식을 밝힌 한겨레 보도에 대한 삼성의 반응은 광고 빼기로 나타났습니다. “사주에 대한 비판기사를 실은 신문에 광고를 함께 실을 수는 없는 일 아니냐”는 주장이었는데, 그것은 다른 말로 “먹고 살려면 진실 보도를 외면하고 굴종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른들은 말해왔습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그러니 나서지 말라고, 편안하게 살려면 적당히 굴종하라고 말합니다. 자본의 독재 시대에 늠름한 민중이 설자리가 없어지고 있습니다. 소년이 정녕 늠름한 민중이 되고자 할 때, 이 시대가 필연적으로 요구하는 분노와 슬픔을 비판하고 참여하고 행동하는 근거로 삼아야 하는 까닭입니다.
|
첫댓글 홍세화씨같은 어른이 아직도 이사회에 존재한다는 것은 정말 행운이다. 만일 그분이 계속 한국에서만 살었다면 어땠을까? 그는 이미 세상의 속물이 되었거나 아니면 낙오자가 되었을 것이다. 내주위에는 홍세화씨같은 어른이 한명도 없다.
소위 진보적 혹은 인간적 혹은 생명, 평등, 평화적이라는 사람 또는 조직의 이야기 속에는 시장 경쟁 경제 체제에 대한 분명한 대안 및 시스템을 따져보거나 그 성공 사례 하나 만나보기 힘듭니다. 속물? 어떤 인간 삶의 모습을 기준으로 속물이라는 답을 내릴 수 있을까요? 가족을 위해 부조리와 타협하는 아버지의 모습?
홍세화씨가 하고자 하는 말이 어떤 의도인지 모르는 바아니지만, 마치 수많은 스텝의 노고에는 무관심하면서 화려한 무대 위의 뮤지션들에 환호하고 대리 만족하는 듯한 유명 인사 '대하기, 따라 생각하기'하는 우리 모습도 돌아볼 필요가 있는 것 같네요. 홍세화는 아니여도 나름으로 최선을 다해 사는 우리들 아닐까요?
논점이 다들 빗나가 있군..홍세화씨 같은 분은 아직도 사회에 남아잇습니다.그들이 대한민국 나름의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거나 변방에 위치에 있을 뿐..일상 속에서 여러분이 그런 사람을 만나지 못하더라도 벽을 쌓고 나도 묻어가야지 하는 태도는 올바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진보나 대안을 생각하며 행동하는 사람들 역시 다수의 대중과 살을 부대끼며 현실 속을 살아갑니다. 하나의 미래가 열리지 않는 이상 그전의 틀안에서 살아가며 희망과 미래를 꿈꾼다는 건 여러가지 삶의 방식으로 변주됩니다.
또,위의 글에서 속물이라 홍세화씨가 지칭한건 우리 세대 아버지들의 일상속 부조리가 아니라 속물을 생산하고 부추키는 사회적 풍토와 자본의 논리를 이야기한 것 입니다. 나름으로 최선을 다하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을 구분하는 시선 정도는 갖추고는 살아야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