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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문제의 중심에는 무왕과 선화공주가 있습니다.
우선 이상한 점은 위덕왕 이후 혜왕과 법왕의 행적입니다. 각 재위 1년 남짓이고, 무슨 연유로 그랬는지도 모른채 단지
중간에 비워진 기간만 채우고 있습니다.
이 것들에 대한 의심을 더욱 증폭시키는 유물이 최근 발견되었고, 삼국사기 법왕때에 만들기 시작했다는 왕흥사의
건축기간이 앞으로 올라가기에 이릅니다.
무왕 즉위에는 여러 사연이 있는 것 같습니다. 서동요라는 향가를 보면, 무왕이 즉위할때의 상황이 평범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수 있고,
이 연장선에서 익산 지방에는 왕궁 유적과 미륵사지가 발견되지만, 사서에는 삼국유사 이외에는 그 어떤 책도 이 기록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이후 무왕의 행적 때문에 신라, 가야방에서 토론을 한 글이 있습니다.
무왕의 토목 공사는 의자왕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신라 목공들을 대거 보조받아 미륵사를 만들고, 이 인력이 왕궁 유적을 만드는데도 일조했음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어느 정도 신라와의 긴밀한 협조안에서 공사도 하고, 전쟁도 했음을 알수 잇습니다.
제가 줄곧 주장한 것은 무왕의 신라 왕권에 대한 지분 문제였습니다.
삼국유사 무왕조에는 분명 신라의 공주를 데려오고, 금을 진평왕에게 보낸 것을 이유로 백제의 인심이 움직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신라 왕실에 대한 지분 이외에는 딱히 설명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증거로 신라는 최초로 두번이나 여왕을 즉위시킵니다.
백제에는 또다른 영향력을 가진 선화 공주가 있죠.
그 아들이 의자왕입니다.
당시 백제의 정식 국호는 남부여입니다. 옛 조선을 이은 정통성 있는 국가는 고구려와 남부여 두 국가입니다.
남부여의 마지막 왕 의자왕의 기록입니다.
의자왕은 무왕의 맏아들이다.
그는 용감하고 대담하며 결단성이 있었다.
무가 왕위에 있은지 33년에 태자가 되었다.
부모를 효성으로 섬기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어서 당시에 해동증자(海東曾子)라 불렸다.
무왕이 죽고 태자가 왕위를 이었다.
우선, 알아 볼 것은 의자왕이 태자가 된 것은 신라 선덕여왕이 즉위하던 해입니다.
이미 그때부터 심상치 않은 변화를 알수 있습니다. 기간을 신라 선덕여왕 즉위에 맞춘 것이죠.
AD 642 ( 의자왕 2년 )
2월 왕이 주,군에 순행하면서 백성들을 위무하고 죄수들을 재심사하여 사형수를 제외하고는 다 용서하여 주었다.
7월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침공하여 미후 등 40여 성을 항복 시켰다.
8월 장군 윤충을 보내 군사 1만을 거느리고 신라의 대야성을 치니 성주 품석이 처자를 데리고 나와 항복, 윤충이 그들을 모조리 죽여 그의 목을 베어 서울에 전달하고 남녀 1천명을 사로잡아 나라 서쪽 주, 현들에 흩어져 살게 하고, 군사를 머물러 두어 그 성을 지키게 함.
왕이 윤충의 공로를 표창하여 말 20필과 곡식 1천 석을 줌.
AD 643 ( 의자왕 3년 )
(신라 기록 : 9월 당에 사신을 보내 " 고구려와 백제가 나라를 침범하여 여러번 공격을 당한 것이 수십성인데,
두 나라는 군사를 연합하여 꼭 이 것을 빼앗으려고 이번 9월에 군사를 장차 크게 일으키려 하니, 이러고는 나라의 강토가 부지 될 수 없으므로 대국에 운명을 부탁하오니, 일부 군대를 빌려 구원하여 달라. ")
11월 고구려와 화친 맺고, 신라의 당항성 빼앗아 당나라에 연결되는 길을 끊으려고 생각하여 군사를 내어 신라를 치니, 신라왕 덕만이 당에 사신을 보내 구원을 청하니 왕이 이 사실을 듣고 군사를 철수
AD 644 ( 의자왕 4년 )
정월 당 왕이 사농승 상리 현장을 보내 두 나라에 부탁하니, 왕이 사례 했다.
왕의 아들 융(隆)을 세워 태자를 삼았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 하였다.
9월 신라 장군 유신이 군사를 거느리고 침입하여 7개 성을 빼앗았다.
AD 645 ( 의자왕 5년 )
신라본기 [ 유신이 백제를 치고 돌아와 왕도 못만났는데, 백제의 대군(大軍)이 다시 와서 변경을 침범.
왕이 유신에게 출정을 명하고, 유신은 집에도 가지 않고 나가 이를 부수고 2천명의 목을 베었다.
( - 결자 6자 )
아직 집에 못가던 차에 또 백제가 와서 공격한다는 급보가 왔다.
왕은 " 나라가 부지하고 망하는 것이 공의 한 몸에 달렸으니, 수고를 어려워 말고 가서 대책을 취하라. "
3월 황룡사(皇龍寺) 탑을 처음으로 세웠다. 자장의 청을 들은 것이다.
5월 당 왕이 고구려를 치매 왕은 군사 3만을 내어 이를 도왔다.
백제가 이 틈을 타서 습격하여 나라 서쪽의 일곱 성을 빼앗았다.]
나라가 부지하고 망하는 것이 김유신 한명에게 달렸다고 말할 정도 신라는 의자왕 5년부터 굉장히 다급한 상황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의자왕의 공세는 이전처럼 치고 빠지거나, 성 몇개 획득해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는 것과는 다르죠.
AD 647 ( 의자왕 7년 )
신라본기 [정월 비담과 염종등이 여왕이 정치를 잘못한다하여 즉시 반역을 도모하고 군사를 일으켰다가 이기지 못한다.]
10월 장군 의직이 보,기병 3천을 거느리고 신라 무산성 아래 진을 치고, 군사를 나누어 감물과 동잠 두 성을 치니 신라 장군 유신이 직접 군사들을 격려하여 죽기를 결심하고 싸우매 크게 패배를 당하고 의직이 단신으로 돌아 옴.
의자왕 8년 : AD 648
3월 의직이 신라 서부 변경의 요차 등 10여 성을 습격하여 빼앗고
4월 옥문곡으로 진군하여 갔더니 신라 장군 유신이 마주 반공하매 백제 군사가 두번 싸워 크게 패하였다.
의자왕 9년 : AD 649
8월 왕이 좌장 은상을 보내 정예한 군사 7천을 거느리고 신라의 석토 등 7개 성을 쳐서 빼앗았더니 신라 장수 유신, 진춘, 천존, 죽지 등이 맞받아 치므로 흩어진 군사들을 모아 도살성 아래 진을 치고 재차 싸워서 우리 군사가 패하였다.
의자왕 13년 : AD 653
8월 (王與倭國通好) 왜국과 우호를 맺었다.
(왕이 왜국과 함께 하기로 했다.)
의자왕 15년 : AD 655
2월 태자의 궁을 수리하는데 극히 사치스럽고, 화려했으며 왕궁 남쪽에 망해정을 건축 했다.
5월 붉은 말이 북악 오함사에 들어와 돌면서 울다가 수일 뒤 죽었다.
7월 마천성을 중수 했다.
8월 왕이 고구려 말갈과 함께 신라 30여 성을 쳐서 깨뜨렸다. 신라 왕 김춘추가 당에 사신을 보내 예방하고 표문을 올렸다.
" 백제, 고구려, 말갈 등이 우리 북쪽 지경에 침입해 30여개 성을 함락 시켰다. "
이 부분에서 질타를 받는 것 같은데, 6개월 후의 기록을 보십시오.
백제는 고구려, 말갈과 연합하여 신라를 압박하고 있습니다. 30여개 성을 함락시키죠.
백제는 아직 안정적입니다. 또한 외교를 통해 당과의 관계도 계속 고려하고 있죠.
백제본기 의자왕편의 시작은 의자왕이 효심이 가득하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자왕이 아들의 태자궁을 수리하는 것이 이상하다면,
다시 무왕편을 보시면 궁남지라고 추정되는 곳에 수로 공사를 하거나, 익산에서 왕궁과 미륵사의 대규모 공사를 벌인 무왕은 폭군입니까.
의자왕 16년 : AD 656
3월 왕이 궁녀들을 데리고 음란과 향락에 빠져 술 마시기를 그치지 않으므로, 좌평 성충이 극력으로 말렸더니 왕이 성을 내어 그를 옥에 가두니 이로 말미암아 감히 말하는 자가 없었다. 성충은 옥에서 말라죽었다.
그가 죽을 때에 왕에게 글을 올려 말하기를 " 관찰하건데 기필코 전쟁이 있을 것입니다. 장소를 가려야 하는 바 상류에서 대적을 맞아야만 군사를 보전할 수 있습니다. 만일 다른 나라 군사가 오거든, 육로로는 침현을 통과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하고 험준한 곳 들로써 방어해야만 견딜 수 있습니다. " 하였으나 왕이 깊이 새기지 않았다.
의자왕 17년 : AD 657
정월 왕의 서자 41명을 좌평에 임명하고 그들에게 각각 식읍을 주었다.
16년과 17년 기록도 질타의 표적이 되는 것 같은데, 의자왕도 외교는 아는 군주라는 것이 충분히 앞에 드러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충의 간언을 무조건 무시했다고 보기에는 17년 기록이 이상합니다.
나쁘게 보면, 41명의 아들을 둔 것도 나빠보이고 ( 이건 다른 글에서 이스라엘의 솔로몬, 고려의 태조를 예로 들었습니다.)
그 아들들에게 1품 좌평의 자리를 준 것도 나빠 보일수 있습니다.
하지만, 41명의 아들 좌평들의 외가는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그들이 모두 왕의 힘이 될 수도 있다는 의미입니다.
전쟁이 일어난다하더라도, 이 아들 좌평들의 41개의 외가의 힘이 곧 왕의 힘으로 연결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문제 아닙니까?
의자 19년 : AD 659
장수를 보내 신라의 독산, 동잠 두 성을 침공하였다.
오히려 의자왕은 앉아서 노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의자 20년 : AD 660
4월 왕머구리 수만 마리가 나무 꼭대기에 모였다.
서울 시민들이 까닭도 없이 누가 잡으려 오는 듯이 놀라 달아나다가 쓰러져 죽은 자가 1백여명, 재물을 잃은 것은 계산 할 수도 없었다.
5월 갑자기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면서 천왕, 도양 두 사찰의 탑에 벼락이 쳤으며, 백석사 강당에 벼락이 치고 동쪽, 서쪽에서는 용과 같은 검은 구름이 공중에서 서로 부딪혔다.
6월 왕흥사의 여러 중들이 모두 배 돛대와 같은 것이 큰 물을 따라 사찰 문간으로 들어 오는 것을 보았다.
여기서 잘 보면 왕머구리라는 생물이 등장하는데, 신라측 기록에도 중복되어 나오는 생물입니다.
은유적인 표현인 걸 알수 있죠.
당 왕이 소정방, 유백영, 풍사귀, 방효공을 앞세워 군사 13만으로 백제를 치게 했다. 신라 왕 김춘추를 자기 나라 군사를 이끌고 당 군과 세력을 합하게 했다. 소정방이 군사를 이끌고 성산에서 바다를 건너 나라 서쪽 덕물도에 이르매, 신라왕이 김유신을 보내 정예 군사 5만을 거느리고 당 군과 합세하게 했다.
의자왕도 당의 움직임은 살피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전의 기록들을 보면 당과 사신도 교류하고, 또한 당의 힘을 적당히 경계하고 있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전후의 기록들은 면밀히 살펴야 합니다.
왕이 이 소문을 듣고 여러 신하게 물으니 좌평 의직이
" 신라 사람들이 큰 나라의 응원을 믿으니, 만일 당이 불리한 것을 보게 되면 반드시 머뭇거리며 빨리 오지 못할 것이니, 우선 당과 결전이 하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
달솔 상영 등은 말하기를
" 당군은 멀리서 와서 빨리 싸우려 할테니, 전일 누차 우리에게 패배했던 신라와 적은 군사로 싸우고 당은 들어오는 길을 막은 후에 형편을 보면서 싸운다면 군사를 완전히 유지하고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이 때에 죄를 짓고 고마미지 현 에서 귀양살이 하던 좌평 흥수가 사람을 보내 물었다.
"사태가 위급하니 어떻게 하면 좋으냐. "
흥수가 말했다. " 백강과 탄현만 지키면 반드시 이긴다. "
이 말에 대해 대신들은 믿지 않았다.
" 흥수는 오랫동안 옥에 있었으니,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사랑하지 않으니 그 말을 채택할 수 없습니다. "
그 사이 당과 신라가 백강과 탄현을 넘었으므로 장군 계백을 시켜 결사대 5천으로 황산에서 신라군과 싸우게 한다.
네번 싸워 모두 이겼지만 군사가 적고 힘이 모자라 마침내 패하고 계백은 죽임을 당한다.
결사대 5천의 전쟁은 마지막 전쟁이 아니었습니다. 최종 방어선에서 싸운 전쟁이죠.
다음 기록들은 이제 본격적인 전쟁입니다.
그제서야 군사를 모아, 웅진(熊津) 어귀를 막고 강가에 군사를 둔취시키니, 소정방이 강 왼쪽으로 나와서 산에 의지해 진을 치매 그들과 싸워서 크게 패한다.
소정방이 보,기병들을 거느리고 곧바로 진도성 30리 바깥까지 와서 멈췄다.
우리 군사들이 모조리 나가서 싸우다가 또 패하여 죽은 자가 1만여명에 달하였고, 당군은 이긴 기세를 타서 성에 육박했다.
왕이 성충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을 탄식하고 태자 효(孝)와 함께 북쪽 변경으로 달아났다.
소정방이 성을 에워싸매 왕의 둘째 아들 태(泰)가 자신이 왕이 되어 군사를 거느리고 굳게 지켰다.
태자의 아들 문사(文思)가 왕의 아들 융(隆)에게 말하기를 " 왕께서는 태자와 함께 나갔고, 숙부가 마음대로 왕 노릇을 하니, 만일 당군이 풀려가면 우리 생명은 어떻게 보전 할 수 있는가. " 하고 측근자들과 밧줄을 타고 성을 넘어 나가니, 태(泰)가 이를 만류하지 못했다.
이 기록을 잘 보면, 당 군이 물러가면 우리 생명은. 이라는 문장이 있습니다.
아직 백제의 전세는 충분히 뒤집을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의미로는 보이지 않으십니까?
그렇다면, 의자왕이 북쪽으로 이동한 것은 일시적 수단이라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소정방이 군사들을 시켜 성에 뛰어 올라, 당 깃발을 세우매, 태(泰)는 사태가 긴박하여, 성문을 열고 항복했다.
이 때에 왕과 태자 효(孝)가 여러 성들과 함께 모두 항복 했다.
이 부분이 참 이상합니다.
태가 항복했는데, 의자왕과 효가 함께 항복했다는 대목은 앞의 말과 맞지 않습니다.
태에게 사비성의 권한을 직접적으로 준 것도 언급되어 있지 않고, 오히려 나중에 문책 받을것을 두려워하는데 말이죠.
아무튼 기록은 여기까지입니다.
소정방이 왕과 태자 효(孝), 왕자 태(泰), 융(隆), 연(演)과 대신들, 군사 88명과 주민 1만 2천 8백 7명을 당의 서울로 호송했다.
백제는 원래 5부 37군 2백 성 76만 호로 되어 있는데, 이 때에 와서 지역을 나누어,
웅진, 마한, 동명, 금련, 덕안 등 5개의 도독부를 두어 각각 주,현들을 통할하게 하고 두령들을 발탁하여, 도독, 자사, 현령을 삼아 관리케 하고 유인원에게 명하여 도성을 지키게 하고 왕문도로 웅진 도독을 삼아 남은 백성들을 무마하게 하였다.
참, 허무하게 전쟁이 끝나는군요.
그래서 의자왕이 전쟁에 소극적이었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뭔가 이상하지는 않습니까?
아무튼 이 것으로 백제는 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소정방이 사로잡은 사람들을 당 왕에게 보이니, 수치를 당하고 용서를 하였다.
왕이 병으로 죽으매, 옛 신하들이 상중에 가서 보는 것을 허락했다.
손호, 진숙보 등의 무덤 곁에 장사하고 그 무덤들과 나란히 비석을 세우게 했다. 왕자 융(隆)을 사가경에 임명했다.
이제부터 부흥전입니다.
무왕의 조카 복신이 일찍이 군사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이 때에 중 도침을 데리고 주류성에 웅거하여, 당과 싸울 준비를 하였다.
전 왕의 아들로써 일찍이 왜국에 있던 부여 풍(豊)을 맞아다가 세워서 왕을 삼으니 서북부에서 모두 호응하매, 군사를 이끌어 도성에 있는 유인원을 에워 쌌다.
당 왕이 유인궤가 왕문도의 군사와 신라 군사를 적당히 발동 시켜 유인원을 구원하게 했다.
유인궤를 맞아, 복신 등이 웅진강(熊津江) 어귀에 두 목책을 세워 막고 있었더니, 유인궤가 신라 군사들과 합력하여 치니,
우리 군사들이 퇴각하여 목책 안으로 뛰어 들어 올때에 물이 막히고 다리가 좁아서 물에 빠지고 전사한 자가 1만여 명이었다.
이리하여 복신 등의 도성의 포위를 풀고 물러 나와서, 임존성을 확보하고 있으니, 신라 군사들이 군량이 떨어져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이 때에 도침은 영군장군을 자칭하고, 복신은 상잠장군을 자칭하여,
여러 무리들을 불러 모으니, 그 세력이 더욱 확장 되었다.
사람을 시켜 인궤에게 말했다.
" 들으니 당이 신라와 역속하기를, 백제 사람은 늙은 이, 젊은 이 할 것 없이 모조리 죽여버리고, 그렇게 한 뒤에는 나라를 신라에 넘겨주기로 하였다고 하니, 차라리 앉아서 죽느니 싸우다가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여 이렇게 집결하여 자기 진지를 고수하고 있을 따름이다. " 하니 인궤가 편지로 조롱했다.
도침 등은 군사가 많은 것을 믿고 교만해져, 인궤의 사자를 바깥방에 재우면서 멸시하는 태도로 말하기를, " 사자의 벼슬은 낮고 나는 일국의 대장이다. 때문에 말 할 대상이 되지 않는다. " 며 답장을 쓰지 않고 돌려 보냈다.
인궤가 자기 군사가 적어 인원의 군사와 합치고, 휴식하면서 신라와 협력하기를 원했다.
신라왕 춘추가 장수 김흠을 보내 그들을 구원하러 보내니 고사(古泗)에 이르러 복신이 그를 마주쳐서 깨뜨리니, 김흠이 갈령 방면으로 도망하며 돌아간 뒤 신라는 다시 출정하지 못했다.
부흥군의 전력도 결코 약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신라가 더 이상 출정하지 못했다고 기록된 것을 보면 백제의 부흥군의 전력을 다시 한번 더 생각할 수 있게 만듭니다.
얼마 뒤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그의 병사를 겸병한다. 부여 풍(豊)은 이를 제어하지 못하고, 다만 제사 때 주례만 할 뿐이었다.
복신 등은 인원등이 성이 고립되어 원조 받지 못하자, 사람을 보내 타이른다.
" 대사들은 언제 서쪽으로 돌아 가려는가. 우리가 사람을 보내 전송해 주겠다. "
이후의 기록은 따로 보시면 알겠지만, 동아시아 최초의 대규모 해전으로 이어집니다.
또한 왕자 융이 돌아와 웅진도독이 되고, 부여풍은 모든 것을 수습하고 왕을 칭합니다.
중간 중간에 기록이 누락된 것 같은 느낌을 받지 못했습니까?
감정적인 얘기가 아니라, 자세히 살펴볼수록 그렇다는 것입니다.
또한, 한국이 일본에 종주권을 얘기할 때 언제나 들먹이는 것이 백제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백제의 역사에 관해서는 그렇게 홀대합니까?
또한, 결사대 출전 이전의 일이나 3천 궁녀의 이야기 때문에 조롱하고 비웃는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애국심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까?
충분히 3천명의 궁녀는 가능한 이야기이고, 그만큼 나라가 강성했다는 얘기일수도 있습니다.
첫댓글 근데.. 불명예의 1350년의 의미가 궁금하군요.. 잘 이해가 안 가는데 무슨 뜻인지?
2007년에서 660년을 빼면 1347년이 나옵니다. ^^ 백제가 멸망한 가장 큰 이유는 당 때문인데, 이후 신라 이후의 나라들이 중국과의 관계 설정을 어떻게 했느냐를 생각하시면 알 것 같습니다. 결국 어떻게든 백제는 계속해서 질타의 대상이죠. 특히 마지막 왕이라는 이유로 의자왕까지요.
백제의 멸망이 당때문이라는 것은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것 밖에 안됩니다..고구려든 백제든, 훗날 신라이든 모두 멸망한 가장 큰 이유는 스스로 내부 분열로 인한 자멸이 가장 큰 이유지요...대역죄인이다 아니다는 천년 이후인 우리 후손들이 입에 담을 문제가 아니며 그것은 백제인 조상들의 입에서나 나올수 있는 말일 뿐입니다.
제가 말하려던 것은, 한국의 입장에서 대국 중국이 백제를 쳤다. 백제가 중국의 공격을 받을만했던 나라였다. 마지막 왕은 의자왕이었다. 이런 논리가 가능했다는 것을 말씀드리려 했던겁니다.
망국의 책임은 있죠..그의 잘못이든 신하들의 잘못이든..그가 가장 높은 위치에 있었고 책임질 위치에 있었으니까..그러나 사실이상의 비난은 불필요하다고 봅니다..그리고 의자왕은 치세의 전기와 후기가 극명하게 갈리므로 명군이다 성군이다 논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의자왕에 대해 왜곡된 건 사실이지만 그 스스로가 자만심에 빠졌던 것도 사실이니까요..
저도 의자왕의 정치를 구지 나쁘게 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는 분명 백제의 국가시스템을 붕괴시켰습니다. 왕권강화든 민생안정책이든 왕이라면 국가가 잘되는 방향으로 이끌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에 분명 실패하였습니다. 그가 즉위초중반에 보여준 공세적전략은 누가보아야 빛나는것이었습니다. 대외적으로 위세가 올라가자 그는 대내적으로도 강력한 권력을 만들죠. 왕자들에게 벼슬을 다 내리고, 신하들을 마음대로 감옥에 넣을정도로 권력이 강력해 집니다. 그러나 그것이 독재가 되고, 귀족들은 이반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 보여준 의자왕의 행동은 왕으로서의 행동이 아니죠.
의자왕 그가 성군이었던 폭군이었던 그는 마지막 왕입니다. 또 백제가 그전부터 망국의 조짐이 있었던것도 아닙니다. 백제가 멸망하자 하늘이 놀라고 땅이 흔들렸습니다.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죠. 오직 신당의 수뇌부들만 멸망을 예상하고 있었죠. 그렇다면 백제멸망의 책임은 거의다 마지막왕 의자왕에게 있었던 것입니다. 그가 진짜로 술만 마시면서 국사를 내버려 두었던, 자만에 빠져서 그랬든, 권력강화를 위해서 그랬든 그가 한일이고, 그결과는 백제멸망이었습니다. 그것이 의자왕이 암군으로 찍힌 이유죠.
사서에 대한 면밀한 검토없이 당위적 관점에서 특정인물을 '만고의 충신'이라고 하는 것 자체가 다케다님이 엄밀하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적어도 역사를 공부하시는 분이라면 어느 역사적 인물을, 특히 정치인을 감정을 가지고 대하는 것은 오류를 양산할 가능성이 큽니다.
이 오류란 어떠한 인물을 두고 '전제'를 깔아놓고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님이 사서에 대한 엄밀한 분석이 없이, 당시 시대상황에 대한 치밀한 검토없이 성충을 '충신'으로, 의자왕을 '암군'으로 이미 전제하는 것은 전혀 객관적이지 못합니다.
의자왕을 동정적으로 본다고 해서 실정까지 눈감는 것이 아닙니다. 이걸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또한 성충을 폄하하지도 않습니다. 마지막 왕이었고 국정의 책임자 였으니 욕 먹는 것이야 감수해야 겠지만 지나친 비난은 좋지 않다는 뜻입니다. 대한제국의 고종황제가 아직까지 무능.유약.부패 군주로 낙인찍혀서 나라 말아먹은 놈으로 비난받고 흥선대원군은 쇄국정책으로 근대화를 늦췄고 명성황후는 부패,사치를 일삼았던 사람으로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것이 현실입니다. 최근 대한제국을 재평가하는 움직임이 있으나 반론도 만만치 않습니다. 2007년 대한민국의 정치인들은 의자왕이나 고종
황제를 폄하하고 비하할 만큼 정치를 잘하고 청렴결백하며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는지 전 모르겠습니다. 고조선 부터 대한제국때까지 마지막 군주들이 망국의 책임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왕조의 멸망이 단순히 개인의 실정때문에 망했다고 보는시각이 절대적인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현 대한민국은 왕.귀족,특권층이 없는 이상사회가 되었지만 돈.권력을 가지고 떵떵거리며 잘 살고 법을 무시하는 사람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물질적인 가치가 중요하게 여겨지 고 인간을 존중하는 마음이 사라져가고 자기보다 낮은 사람은 은근히 깔보는 것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