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 끝에 안간힘을 주어 간신히 창문을 닫는다. 하지만 톱질 소리는 기어이 창문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내 귓구멍에 파고든다. 나는 몸부림을 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밖을 내다보니 기다란 각목을 자르기 위해 애를 쓰고 있는 아저씨의 뒷모습이 보인다. 아저씨는 톱질을 멈추고 톱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다시 허리를 숙인다. 톱질 소리는 끊기고 이어지기를 반복한다. 나는 한숨을 내쉰다. 누군가가 도와주지 않으면 톱질은 하루 종일 계속될 것이다. 나는 무거운 몸을 달래며 옷을 갈아입기 시작한다. 이 집에 사는 사람은 아저씨와 나 둘뿐이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잠이 다 깨기도 전에 톱질부터 해야 한다니. 나는 거울을 보며 눈곱을 닦아내고 머리를 대충 틀어 묶고는 방을 나선다.
발을 내딛기가 무섭게 계단이 앓는 소리를 낸다. 나무로 만들어진 계단은 오래된 탓인지 조금 세게 밟았다 싶으면 여지없이 나뭇결이 뒤틀리는 소리가 난다. 생각 없이 계단을 급하게 내려가다가 바닥을 비집고 나온 나무가시를 밟고는 발바닥에 박힌 가시를 빼느라 진땀을 뺀 적도 있다. 밖으로 나가는 모든 통로는 이 계단과 이어져 있기 때문에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이 계단을 밟곤 한다. 그때마다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늘 신경이 쓰인다. 나의 동선을 아저씨에게 꼬박꼬박 보고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계단이 있기 때문에, 아저씨와 한집에서 지내면서도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할 때가 많지만 이 계단이, 누군가를 신경 쓰며 생활해야 한다는 사실을 이렇게 알려주기도 한다. 덕분에 나는 계단을 밟고 내려갈 때마다 발을 최대한 가볍게 내딛어야 했다.
나는 1층 거실이 어둡다는 것을 느끼고 창가에 다가가 커튼 한쪽을 젖힌다. 유리창이 한쪽 벽면을 다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될 만큼 커서 커튼을 한쪽만 젖혔는데도 거실이 순식간에 밝아진다. 반대쪽 커튼을 오른쪽으로 끌어내자 유리창 너머로 아저씨의 뒷모습이 불쑥 나타난다. 아저씨의 작은 몸이 톱질을 할 때마다 이리저리 흔들린다. 각목은 아저씨가 짧은 다리로 애써 버팅기고 있는 것이 무색하리만큼 제멋대로 움직인다. 나는 미세하게 떨리는 아저씨의 다리를 쳐다본다. 잠시 몸을 일으켜 허리를 뒤로 젖히려던 아저씨는 창가에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톱을 흔들며 웃는다. 톱을 앞뒤로 흔들자 톱날 끝이 크게 휘청거린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아저씨, 뭐하세요? 아저씨는 내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검지를 입에 갖다 대더니 톱으로 어딘가를 가리킨다. 날카로운 톱날이 공격적으로 느껴진다. 톱날 끝을 따라가던 내 시선이 나무그늘 밑에서 팔자 좋게 잠을 자고 있는 강아지 한 마리에 가 닿는다. 아저씨가 아침부터 이 난리를 피운 이유를 알 것 같다. 나는 속으로 또 한 번 깊은 한숨을 내쉰다. 강아지는 이 난리 통에도 꿈적하지 않고 배를 뒤집어 깐 채 늘어지게 자고 있다. 비를 맞은 것처럼 얼굴이며 몸이 흠뻑 젖은 아저씨는 곧바로 다시 톱질을 하기 시작한다. 나는 아저씨 옆에 쭈그리고 앉아 여전히 제멋대로 흔들리고 있는 각목을 꽉 붙든다. 아저씨는 나를 향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는다. 각목이 전과 달리 움직이지 않자 아저씨의 톱질이 점점 빨라지기 시작한다. 덩달아 각목을 쥔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간다. 어깨가 뻐근해지자 나는 당장에 손을 놓고 싶었지만 각목에 떨어지는 아저씨의 땀방울을 본 이상 차마 그럴 수는 없었다.
어깨가 거의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질 때가 돼서야 끝난 톱질은 곧바로 망치질로 이어졌다. 망치질도 그다지 수월하게 진행되지 않았다. 못 끝이 여기저기 튀어나와서 몇 번씩 다시 박아야 했다. 망치를 내려칠 때마다 머릿속에서 종이 울리는 것 같았다. 댕댕. 아저씨의 망치는 못을 잡고 있는 내 손가락을 아슬아슬하게 비켜갔다. 그럴 때마다 강아지 집에 장식품처럼 대롱대롱 박혀있는 내 손가락이 떠올랐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망치질도 내 몫이 되고 말았다. 아저씨는 나를 말리기는커녕 멀쩡히 생긴 못을 골라 미리 건네기까지 했다.
아라야, 이리와. 강아지는 원래부터 아라였던 것처럼 아저씨에게 쪼르르 달려오더니 자기 집에 잘도 찾아 들어간다. 아라가 또 늘었다. 아저씨는 아라를 안아 들어 몸을 이리저리 살펴본다. 아라야, 목욕해야겠다. 아저씨는 아라를 품에 안고 마당에 있는 수돗가로 가 자리를 잡고 앉는다. 나는 아라를 다루는 아저씨의 서툰 손길을 보며 또다시 고민에 빠진다. 아저씨 손안에서 발버둥을 치는 아라를 보며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 위해 할 수 없이 발걸음을 떼는 순간 아저씨가 고개를 홱 돌린다. 아참! 갈비찜 해놨는데 좀 가져가서 먹어. 나는 아저씨의 뒤통수를 확인한 후 재빨리 집을 향해 뛴다.
나는 갈비를 허겁지겁 입안으로 밀어 넣는다. 갈비는 허기진 속을 빨리 채울 수 있을 만큼 적당히 식었다. 정신없이 뜯다 보니 갈비는 금세 바닥을 드러낸다. 나는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냄비를 씻는다. 나는 아저씨가 음식들을 갖다 줄 때면 당장에 먹지 않더라도 냄비나 그릇들은 곧바로 씻어서 갖다 준다. 내 나름대로 예의를 차리는 것이다. 아저씨는 빈 그릇들을 가져다 줄 때마다 귀찮지 않게 밥을 같이 먹자고 했지만 나는 단번에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나는 누군가와 함께 밥을 먹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조차 어색했다. 언젠가 아저씨는 나에게 일일이 그릇을 씻어다 주는 일이 불편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하지만 나는 누군가를 기다리지 않고 혼자 식사할 수 있다는 편안함이 조금 불편할 뿐, 그릇을 씻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나는 덜 닦인 곳이 없는지 냄비를 이리저리 확인하며 1층으로 내려간다. 아저씨는 아라에게 물을 주며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다. 창가에 있는 '아라'는 아저씨가 키우는 난초다. 나는 아저씨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본다. 일주일 전쯤에 아저씨는 낑낑대며 화분 하나를 들고 집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얼른 물 한잔을 떠다 내밀며 물었다. 사 오신 거예요? 아저씨는 창가에 화분을 내려놓고는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말했다. 멀쩡한 화분을 누가 버렸길래 가져왔어. 아저씨는 내가 내민 물을 받아 그대로 난초에 부으며 대답했다. 멀쩡하다고 하기엔 난초는 거의 말라 죽어있었다. 그리고 화분은 여지없이 '아라'가 되어 아저씨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았다.
나는 언젠가 '진짜' 아라를 본 적이 있다.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던 아라는 푹 파인 보조개가 특히 예뻤다. 아저씨는 하루에도 몇 번씩 주머니에서 사진을 꺼내 보곤 했다. 나는 아저씨가 아라를 어떻게 저 멀리 캐나다로 떠나보낼 수 있었을까 싶었다. 아라는 아저씨를 강하게 만들어주는 힘이 되기도 했지만, 곧 아저씨가 가진 최대약점이기도 했다. 아라와 관련된 일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졌기 때문이다. 늘 외국에서 살고 싶어 하던 아줌마는 그 약점을 노린 것이 분명하다. 어느 날 아라는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아저씨를 향해 작은 입을 오물거렸다. 캐나다에 가고 싶어요. 결국, 아줌마의 작전은 성공했다. 아저씨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했지만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라가 캐나다로 떠난 그 후로 아저씨에게는 버려진 화분도, 길 잃은 강아지도 아라가 되었다. 아저씨는 사진 속 아라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을 것 같다고 내게 말했다. 아저씨의 눈가가 촉촉해지는 것을 본 나는 아저씨에게 휴지를 건네며 그 마음을 이해한다고 거짓말을 하곤 했다.
잘 먹었어요, 아저씨. 나는 식탁에 냄비를 내려놓으며 말한다. 아저씨는 아라에게 물을 주는 것을 멈추고 뒤를 돌아본다. 귀찮지 않게 같이 먹으면 좋을 텐데. 아저씨는 다시 아라에게 고개를 돌린다. 그렇지 않니, 아라야? 난초는 떨어지는 물줄기를 맞으며 고개를 푹 숙인다. 나는 그대로 방에 들어와 침대에 벌러덩 드러눕는다. 몸이 순식간에 나른해진다. 정신이 희미해지려는 순간 불쾌한 냄새가 얼굴에 훅 끼친다. 겨드랑이에 얼굴을 들이밀자 시큼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아침에 일어나 지금까지 씻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속옷을 챙겨 들고 화장실로 향한다.
샤워를 끝내고 나오니 아저씨의 노랫소리와 텔레비전 소리가 온 집안을 가득 메우고 있다. 샤워를 한 후 한숨 잘 생각이었던 내 계획이 힘없이 무너지는 순간이다. 아저씨는 일요일마다 빼놓지 않고 노래자랑대회를 시청한다. 일요일 이 시간에는 아저씨의 노랫소리를 피할 수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도 있다지만 아저씨와 함께 그 프로그램을 본 적이 없다면 그런 말은 입 밖에 꺼내서는 안 된다. 한 번 아저씨와 나란히 앉아 방송을 본 적이 있는데 아저씨의 반응은 콘서트장에 온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열광적이었다. 아저씨는 참가자가 나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면 아는 노래는 물론이고 모르는 노래까지 기어코 따라 불렀다. MC가 무슨 말만하면 뒤로 자지러졌다. 나는 솟구치는 짜증을 간신히 참으며 텔레비전을 보다가 텔레비전 속 MC와 아저씨가 왠지 닮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면 그제야 피식피식 웃었다. 아저씨의 흥분은 아라와 또래처럼 보이는 아이가 나와 노래를 부를 때 최고조에 이르렀다. 아저씨는 휴지를 뜯어 눈가를 닦기도 했다. 나는 아저씨의 노랫소리가 들릴 때면 조용히 집을 나갔다가 방송이 끝날 시간이 될 쯤에 돌아오곤 했다.
아저씨는 내가 나가는 것도 모를 만큼 텔레비전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슬쩍 본 텔레비전 화면에는 남자아이가 깜찍한 율동을 추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 아저씨가 나를 발견하기 전에 재빨리 걸음을 옮겼다. 나는 대문을 나서기 전 무언가를 정신없이 먹고 있는 아라에게 슬그머니 다가갔다. 갈비덩어리가 아라 입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아라를 보고 있으니 방금 전에 갈비를 뜯던 내 모습이 이랬나 싶어 웃음이 났다. 나는 갈비를 흡입하느라 정신없는 아라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고는 대문을 나서 걷기 시작했다. 아저씨의 노랫소리를 피해 내가 갈 곳이라고는 뻔했다. 나는 편의점에 잠깐 들렀다가 아빠를 만나러 갈 것이다.
비가 쏟아지고 난 후 모든 것들이 축축하게 보였던 저녁, 나는 갈 곳이 없는 사람답게 큰 트렁크를 끌고 많이도 걸었다. 하염없이 걷기만 하니 다리가 아픈 것은 당연하고 배가 고팠다. 나는 빈 테이블을 발견하고는 편의점에 들어가 인스턴트 미역국을 전자레인지에 돌려서 들고 나왔다. 편의점에 들어가기 전까지만 해도 텅 비어있던 테이블에는 아저씨가 자리를 잡고 앉아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미역국을 전자레인지에 돌리는 동안 아저씨가 자리를 꿰찬 것이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아저씨와 같은 테이블에 앉아 미역국을 먹기 시작했다. 학생, 오늘 생일이야? 나는 생일이라는 단어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저씨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네. 나는 다시 미역국에 고개를 박았다. 왜 집에서 먹지 않고. 아저씨의 눈은 나를 향한 걱정과 동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저씨가 자꾸만 너 버림받았구나라고 말할 것만 같았다. 혼자 사는데 방세 못 내서 쫓겨났거든요. 나는 되도 않는 변명으로 아저씨를 외면했다. 아저씨는 소주잔을 내게 내밀었다. 괜히 생일선물을 받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소주잔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바로 입안에 털어 넣었다. 스무 살 생일에 처음으로 맛본 소주는 역겨울 정도로 썼다. 나는 얼른 미역국 한 숟갈을 떠먹었다. 술맛 떨어지게 무슨 미역국이냐고 말하던 아빠의 목소리가 자꾸만 귓가에 울렸다. 눈물은 결국 볼을 타고 흘러내려 미역국에 뚝뚝 떨어졌다. 가야 할 곳도, 갈 곳도 없는 나는 아라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놀이터 그네에 앉아 우리 집을 올려다본다. '우리'라는 단어가 낯설다. 어쨌든 나는 최종목적지에 도착했다. 나무들이 2층 높이까지 높다랗게 솟아오른 탓에 베란다조차 잘 보이지 않는다. 일요일마다 아저씨의 노래를 피해 이곳에 왔으니까 오늘로써 여덟 번째다. 이렇게 앉아 있다가 혹시나 아빠에게 들키지 않을까 걱정이 될 때도 있지만 차라리 아빠가 나를 발견했으면 싶기도 하다. 아빠와 눈이 마주친다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대로 뒤돌아 뛰어갈 것이다. 보란 듯이 대놓고 도망가는 내 뒷모습을 보고 상처받을 아빠의 얼굴을 상상하면 기분이 조금 들뜨기까지 한다. 나는 동네 슈퍼에 가서 냉동고 제일 깊숙이에 있는 아이스크림을 사 들고 놀이터 그네에 앉아서 먹다가, 아이스크림을 다 먹고 나면 집으로 되돌아갔다. 일주일에 딱 하루, 하루의 딱 그 시간만큼만 나는 아빠를 생각한다.
집으로 돌아오니 부엌 쪽에서 여전히 노랫소리가 새어나오고 있다. 조심스럽게 부엌 쪽으로 가보니 아직 여운이 가시지 않은 듯 설거지를 하면서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는 아저씨가 보인다. 다녀왔습니다. 아저씨는 호들갑을 떨며 나를 향해 다가온다. 토끼가 앙증맞게 그려진 앞치마가 아저씨에게 썩 잘 어울린다.
나 노래자랑대회에 나갈 거야.
해외 동포를 위한 특집방송이지만, 예선을 통과한다면 국내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도 캐나다에 갈 수 있다는 소식은 아저씨의 귀와 눈을 번쩍 뜨이게 만드는데 충분했다. 아저씨는 벌써 예선이라도 통과한 사람처럼 들떠있다. 아저씨는 고무장갑에 묻어있던 거품이 바닥에 떨어지자 황급히 제자리로 돌아가 설거지를 한다. 나는 아저씨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본다. 그러니까, 아저씨가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가족을 만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방으로 들어와 창문과 방문을 닫고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갔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이마에 땀이 맺히기 시작한다. 곧 이불 속이 답답하게 느껴지지만 이러고 있는 것이 마음이 편할 것 같다. 아빠의 술 냄새가 나를 따라왔는지 자꾸만 나를 괴롭힌다. 떨쳐내려 몸부림을 칠수록 아빠는 자꾸만 내 뒤꽁무니를 붙잡고 놔주지 않는다.
엄마는 자신과 아빠를 연결해주던 끈을 내게 묶어놓고 도망갔다. 그 이후로 나는 아빠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이어져 있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나는 그것을 만질 수는 없었지만 느낄 수 있었다. 끈의 주인인 엄마는 나타나지 않았고 나 또한 엄마에게 그 끈을 넘겨주고 싶지 않았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아빠에게 이리저리 이끌려 다녀야 했다. 끈은 엄청 단단하게 묶여 나를 점점 조여 왔다. 아빠에게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서 빨리 이 끈을 다른 누군가에게 묶어야 했다. 하지만 막상 아빠가 끈을 자르고 도망갈 때면 그것을 다시 고쳐 묶는 것은 결국, 나였다.
아빠는 사람을 불러 모아 거실에서 카드놀이를 자주 했다. 나는 아빠에게 그렇게 많은 돈이 있는 줄 처음 알았다. 하지만 아빠 옆에 아무렇게나 쌓여있던 돈은 금세 다른 사람들 옆으로 이리저리 옮겨갔다. 그럴 때마다 아빠는 밥상을 뒤집듯 판을 엎거나 욕을 해댔다. 거실은 안개가 낀 것처럼 담배연기가 자욱했다. 나는 방으로 들어와 이불을 덮어쓰고 몸을 한껏 웅크린 채 억지로 잠을 자고는 했다. 꿈속을 한참 헤매고 있는 나를 거칠게 흔들어 깨운 사람은 항상, 경찰이었다. 급하게 뛰어나가 봤지만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난장판이 된 거실을 보며 내 손 대신 돈뭉치를 쥐고 도망가는 아빠의 뒷모습을 상상했다. 경찰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나를 보며 아빠와 공범이라고 몰아세우곤 했다. 나는 공범이라는 말을 듣고 웃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집에 빚쟁이들이 찾아올 때면, 아빠는 술에 취한 정신에서도 잽싸게 도망쳤다. 베란다를 넘어 1층으로 뛰어내리려는 아빠의 등에 달라붙었지만 그때마다 아빠의 발길질에 치여 바닥에 나뒹굴었다. 아빠가 도망가고 나면 빚쟁이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빚쟁이들은 칼을 빙빙 돌리며 다가와 아빠를 어디로 숨겼냐고 따졌다. 나는 손가락으로 대충 베란다를 가리켰다.
나를 버리고 도망치기 바쁜 아빠에게 무엇을 바랐던 건지, 나는 바보같이 미역국을 정성스럽게도 끓였다. 미역국은 아빠의 안주거리조차 되지 않았다. 술 맛 떨어지게 무슨 미역국이냐. 술병을 들고 방으로 들어가는 아빠의 뒷모습을 보고 나는 싱크대에 미역국을 냄비 채로 부어버렸다. 나는 하수구에 빨려 들어가는 미역들을 보며 결심했다. 이번엔 내가 정말로 끈을 끊을 차례야. 나는 아빠 몰래 트렁크에 짐을 아무렇게나 구겨 넣고 도망쳤다. 내 몸 구석구석에 붙어있는 술 냄새를 없애기 위해 빨리도 걸었다.
눈을 뜨니 주위가 온통 깜깜하다. 언제 잠이 들어 도대체 몇 시간을 잔 건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온몸이 땀으로 흥건히 젖었다. 창문을 열자 시원한 바람이 불어든다. 방문을 열자 텔레비전 소리와 함께 아저씨가 코고는 소리도 들린다. 아저씨는 자기 방을 놔두고 꼭 거실 소파에서 잠을 잔다. 방문을 닫으면 잘 들리지 않지만, 잠을 자다가 중간에 화장실을 가야한다거나 물을 마시기 위해 방문을 열면 여지없이 아저씨의 코 고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어찌나 심하게 코를 고는지 한 번은 컥하고 숨이 넘어가는 소리에 놀라서 1층으로 뛰어 내려가 아저씨를 흔들어 댄 적도 있다. 몸을 사정없이 흔들자 아저씨는 그제야 커어억하며 다시 드르렁 코를 골기 시작했다. 나는 아저씨가 코를 골다가 숨이 컥하고 막힐 때마다 덩달아 흡하고 호흡이 멈춰지곤 했다. 아저씨가 멀쩡한 침대를 놔두고 소파에서 자는 이유는 새벽에 걸려오는 전화 때문이다.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 마침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하고, 화장실에 가려던 나는 그대로 멈춰 선다.
"아라야, 아빠야. 어? 안 잤지~. 아라 전화 올 줄 알고 안 자고 있었어. 밥은 먹었어? 그래 많이 먹고 얼른얼른 커야지. 아빠도 먹었지. 아빠도 아라 보고 싶어. 조금만 기다려. 아빠가 돈 많이 벌어서 아라한테 꼭 갈게. 엄마는? 아, 그거? 어……그게. 아라야 엄마한테도 아빠가 보고 싶어 한다고 꼭 전해줘. 그래, 잘 자고! 아빠도 사랑해!"
후……. 아저씨의 깊은 한숨과 함께 텔레비전 소리가 더 커진다. 아저씨의 코 고는 소리는 오늘 밤 더 이상 들리지 않을 것이다. 아저씨 옆에 앉아 텔레비전을 볼까 했지만 텔레비전 소리에 섞인 아저씨의 노랫소리를 듣고 나니 1층이 멀게만 느껴진다. 나는 화장실 가는 것도 포기한 채 조용히 방문을 닫는다.
아저씨는 아침부터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댄다.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울부짖는 아라도 한 몫 거든다. 벌써 일주일째다. 고함처럼 들리는 저 소리는 아저씨의 노랫소리다. 아저씨의 노래는 시끄러운 소음에 더 가깝다. 노래에는 강약이 있기 마련인데 아저씨가 부르는 노래에는 강, 그중에서도 엄청난 '강'만 있는 느낌이랄까. 톱질 소리에도 꿈쩍하지 않던 아라도 노래를 부르는 아저씨를 향해 사정없이 짖는다. 내가 아라였다면 아저씨를 물어뜯었을지도 모른다.
예선을 위한 아저씨의 준비과정은 요란했다. 아저씨는 폐활량을 늘려야겠다며 새벽에는 아라를 데리고 산에 다녀오고 오전과 이른 저녁까지는 발성연습을 한다며 마당에 서서 허공에 대고 악을 썼다. 아저씨는 자기 발밑에 꼭 계란 한 판을 놔두고, 발성연습을 하거나 노래를 부르는 중간에 계란을 하나씩 깨서 빨아먹는다. 자기 전에 배 즙을 먹으며 목을 관리한다. 덩달아 아라까지 날계란과 배즙을 먹는다. 아저씨 때문에 거의 하루종일 짖어대는 아라를 보면 아라도 날계란과 배즙을 먹는 것이 당연하다. 아저씨는 감을 잃으면 안 된다며 집안에 항상 음악을 켜놓는다. 집안 구석 어디에 숨어들어도 아저씨의 노랫소리나 오디오에서 나오는 음악 소리는 피할 수가 없다. 아저씨가 부르는 노랫소리나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 거기에 아라가 짖는 소리까지, 집안은 그야말로 난장판이다.
나는 끝이 보이지 않는 소음에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이 되었다. 낮에는 방안에 들어오는 소음을 조금이라도 막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창문과 방문을 꼭꼭 닫고 있다가 잘 때가 되어서야 창문을 열 수 있었다. 덕분에 나는 간밤에 모기에게 사정없이 물어뜯긴 팔을 보며 아침마다 놀래야 했다. 나는 긴 팔을 꺼내 입고 자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창문을 닫고 자는 것이나 창문을 열고 긴 팔을 입고 자는 것이나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내 인내심에 점점 한계가 보이기 시작했고 나는 아저씨에게 직접 맞서기 전에 이 소음을 어떻게 줄일 수 있을지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벽에 계란판을 붙이기 시작했다. 사실 계란판의 효과는 거의 무의미했다. 하지만 나는 무엇이라도 해서 정신적으로라도 안정을 찾아야 했다. 나는 마당 구석에 가서 아저씨가 모아놓은 계란판을 야금야금 가져왔다. 다행히 나는 벽에 계란판을 붙이는 것만으로도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 아저씨의 노랫소리가 들리면 나는 계란판을 벽에 붙이며 중얼거렸다. 소리가 작아질 것이다, 이 계란판이 나를 소음으로부터 지켜줄 것이다. 그러다 보면 아저씨의 노랫소리가 점점 희미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노래하는 아저씨가 내게서 조금씩 멀어졌다. 한 쪽 벽면에 점점 늘어나는 계란판을 보면서 나는 아저씨가 행여나 이 모습을 볼까 봐 겁이 나기도 했다. 방을 이 꼴로 만들어 놓은 것은 둘째 치고 자신의 노랫소리 때문에 계란판을 붙였다는 사실을 알면 아저씨의 마음에 큰 상처를 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 상처는 아저씨의 소음이 내게 줬던 스트레스보다도 더 클 것이다. 하지만 아저씨의 노래가 시작되면 그런 마음은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나는 그렇게 아저씨를, 아니 아저씨의 노랫소리를 내 방으로부터 점점 밀어내고 있었다.
나는 창가에 서서 아저씨가 있는 마당을 내려다본다. 아저씨는 아아, 하고 목소리를 가다듬는다. 본격적인 노래연습을 알리는 신호와도 같은 것이다. 옆에 놓인 계란판에서 계란 하나를 집어 들어 쪽쪽 빨아 먹는다. 그리고 나서야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사실, 아저씨가 먹는 날계란 양은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다. 아저씨가 내게 말을 걸 때마다 비릿한 향이 내 코를 스쳐 지나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말릴 생각이 없다. 아저씨가 날계란을 빨리, 그리고 많이 먹는 만큼 내 방에도 계란판이 붙어지게 될 테고 그만큼 아저씨의 노랫소리가 멀어지게 될 테니까. 아라는 아저씨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자마자 짖기 시작한다. 아저씨는 아라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라의 머리를 몇 번 쓰다듬고는 그대로 안아 든다. 아라의 얼굴이 겁에 질린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시 노래가 이어지고 아저씨 품에 안긴 아라는 더 이상 짖지 않는다. 아라는 현명하지 못한 방법으로 아저씨의 소음에 맞선 것이다. 나는 아저씨의 품에 조용히 안겨있는 아라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꾸루루루룩. 갑자기 뱃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손바닥으로 뱃가죽을 문지르자 뱃속의 반응은 더욱더 격해진다. 나는 재빨리 화장실로 뛰어가 급하게 변기에 앉는다. 어제저녁, 바람이라고는 조금도 들어오지 않는 방 안에 앉아 아이스크림 한통을 다 먹어치운 것이 생각난다. 나로서는 더운 방안에서 찬 음식을 먹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나는 밤마다 아이스크림이나 수박 따위의 시원한 음식을 입안 가득 물고 더위를 식히곤 했다.
오늘 밤에도 아이스크림 한 통을 비울 생각이었다. 아이스크림을 생각하자마자 뱃속이 요동친다. 나는 얼른 뱃가죽을 감싸 쥐고 화장실로 뛰어들어간다.
굳이 힘을 주지 않아도 뱃속을 말끔히 비울 수 있었다. 일주일 동안 먹은 것을 한 번에 다 내보낸 기분이다. 나는 조금 기운이 빠진 채로 침대에 쓰러진다. 배가 살살 아픈 것이 신경을 긁는다. 나는 창가에 다가가 마당에 있는 아저씨에게 소리친다. 아저씨! 배탈약 있어요? 아저씨는 이쪽을 향해 고개를 치켜든다. 햇빛 때문인지 아저씨는 잔뜩 인상을 쓰고 있다. 응! 가져다줄까? 발성연습을 해서 그런지 목소리가 유난히 우렁찬 것 같기도 하다. 나는 힘없이 대답하고는 몸에 있는 수분이 죄다 빠진 사람처럼 침대 위에 축 늘어진다. 하지만 얼마 안 가 또다시 뱃속으로부터 강한 신호를 받고 화장실로 비틀비틀 걸어간다.
변기에 앉기가 무섭게 묽은 변이 주룩주룩 쏟아진다. 정말이지 괄약근에 아무런 힘을 주지 않아도 저절로 쏟아져 나온다. 벌써 다섯 번은 온 것 같다. 아저씨는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1층에 내려가려다 비비 꼬인 계단을 보고는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끼고 관두었다. 계속해서 속을 비우는데도 복통은 잦아들지 않는다.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는다. 나는 변기에 앉은 채 무릎에 얼굴을 파묻는다. 이게 다 아저씨 때문이다. 아저씨가 노래를 엉망진창으로 부르지 않았더라면 방안에 틀어박혀 아이스크림 한 통을 다 먹어치우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 계단이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들리며 아저씨가 다가오는 것이 느껴진다. 나는 당장에라도 뛰쳐나가서 아저씨 얼굴에 대고 노래자랑 따위 집어 치워요라고 소리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학생, 약이 찾아보니까 없어서 약국에 다녀오느라 좀 늦었어. 아저씨는 엉뚱한 문을 두드리며 말한다. 나는 무언가 꼬이기 시작한 것을 느낀다. 학생, 괜찮아? 나는 무릎에 파묻고 있던 얼굴을 들어 화장실 문을 쳐다본다. 아저씨……. 저 여기 있어요……. 내 목소리를 듣지 못했는지 아저씨의 목소리는 점점 더 커지기 시작한다. 학생! 학생! 나가야겠다 싶어 휴지를 끊어 엉덩이를 닦으려고 하자 또 다시 뱃속이 뒤틀린다. 나는 그대로 변기에 다시 주저앉는다. 그때, 문이 거칠게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갑자기 적막이 흐른다. 나는 알 수 없는 긴장감에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계란판. 아저씨가 계란판을 보고 만 것이다. 나는 당장에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내 엉덩이는 변기에 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더 이상 나를 애타게 부르는 아저씨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아저씨가 벌컥 연 것이 차라리 화장실 문이었으면 좋으련만. 삐거덕거리는 계단 소리가 내 온몸을 찌르는 것 같다.
나는 방으로 들어와 한쪽 벽면을 거의 뒤덮고 있는 계란판을 바라본다. 계란판을 향한 나의 무한한 사랑은 금세 미운털로 바뀌어 내 몸 구석구석에 박힌다. 계란판을 본 아저씨의 얼굴을 상상하니 미안함에 몸서리가 쳐진다. 화분처럼 주는 거나 받아먹고 강아지처럼 가끔가다 짜증이나 내면 될 것을 뭘 그렇게 유난을 떨었는지 후회가 밀려온다. 아저씨 몰래 계란판을 붙여대며 뿌듯해하던 내 자신이 혐오스럽게 느껴진다. 나는 벽에 다가가 계란판 하나를 떼어낸다. 본드로 붙여서인지 하나를 떼어내는데도 시간이 꽤 오래 걸릴뿐더러 벽지도 엉망이 되었다. 나는 '내가 잘못한 게 뭐가 있어.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니야?'라는 생각에 계란판 떼는 것을 멈추다가도 '무조건 내가 잘못 한 거야. 잠시 미쳤었나 봐.'라고 한없이 내 자신을 채찍질 하며 손을 부지런히 움직였다. 나는 몇 번이고 손을 멈추고 움직이기를 반복했지만, 결국은 후자에 마음을 굳히고 계란판을 뜯는 데 열중했다. 한참을 집중하고 있는데 어렴풋하게 인기척이 느껴진다. 벽에 달라붙어 있던 나는 얼른 침대로 뛰어들었다. 목까지 이불을 끌어 덮고 자는 척 눈을 감는다. 다행히 방문은 열리지 않았다. 곧 인기척이 사라지자 나는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일어난다. 문짝에 귀를 대보아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나는 조용히 방문을 열어본다.
식탁에 작은 냄비 하나가 놓여있다. 뚜껑을 열어보니 계란죽이 담겨있다. 나는 뚜껑을 다시 덮고 의자에 털썩 앉았다. 나는 멍한 눈으로 계란죽을 본다. 몇 분 동안 고민 끝에 나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큰 그릇에 계란죽을 모두 붓고 냄비를 씻는다. 늘 그랬듯 음식을 다 먹고 나서 냄비를 씻어다 주는 것뿐이다. 나는 애써 최면을 건다.
아저씨는 마침 아침밥을 먹고 있었다. 마침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등장이 뜬금없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아저씨는 나의 등장에 약간 몸을 움찔했다. 나는 아저씨에게 빈 냄비를 불쑥 내민다. 더 끓여 주세요. 나와 빈 냄비를 번갈아 보던 아저씨는 조용히 냄비를 받아 들어 싱크대 쪽으로 걸어간다. 냄비를 받아드는 아저씨의 손길이 왠지 거칠게 느껴진다. 나는 입술을 지그시 깨문다. 나는 얕은 한숨을 쉬고는 아저씨 맞은편에 슬그머니 앉는다. 아저씨도 식탁에 앉아있는 나를 보고 조금 놀란 눈치다.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다. 함께 밥을 먹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린 쪽은 나였는데 결국 내 발로 아저씨 맞은편에 앉고 만 것이다.
나는 죽을 떠먹으며 아저씨 눈치를 슬쩍 본다. 아저씨는 말없이 밥만 먹는다. 아저씨의 숟가락은 자꾸만 반찬 위를 어슬렁거리다가 결국은 밥그릇 근처로 되돌아갔다. 나는 계란판에 대해서 변명이나 사과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자꾸만 입을 달싹거렸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겠다 싶어 입을 떼려는데 아저씨는 식사를 다 마쳤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싱크대 쪽으로 걸어간다. 나는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최대한 머리를 굴렸지만 어찌 된 일인지 머릿속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잠시 후 아저씨는 500cc 맥주잔을 들고 나타났다. 맥주잔 안에 계란 노른자가 둥둥 떠 있는 것이 보인다. 날계란이 다섯 개는 더 되는 것 같다. 아저씨는 자리에 다시 앉더니 심호흡을 한 번 하고는 그대로 들이키기 시작했다. 나는 깜짝 놀라 입이 떡 벌어졌다. 잔에서 노른자가 하나씩 사라질 때마다 먹은 죽이 조금씩 다시 올라오는 것 같다. 아저씨도 세 개부터는 넘기기가 힘든 듯 얼굴을 찌푸린다. 덩달아 나도 얼굴이 구겨진다. 마지막 노른자가 잔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아저씨는 잔을 내려놓았다. 그런데 순간 켁하는 소리와 함께 아저씨의 고개가 앞으로 홱 꺾이더니 맥주잔에 노른자 하나가 쏟아졌다. 마지막 노른자를 목구멍으로 넘기지 못하고 뱉어낸 것이다. 나는 맥주잔에 덩그러니 놓인 노른자를 본 순간 풋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만다. 아저씨는 웃음기가 서린 눈으로 나를 살짝 째려본다. 나는 간신히 정색하고는 아저씨의 눈을 똑바로 보고 말했다. 그건 내 나름대로의 변명이기도 했고 사과이기도 했다.
아저씨 노래 진짜 못 불러요.
식사를 마치고, 나와 아저씨는 거실에 앉아 함께 노래연습을 했다. 아저씨의 음악선생 노릇을 하기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왜 하필 여자노래를 골랐는지 아저씨에게 맞는 키를 찾기 위해서 엉망진창인 노래를 몇 번이고 되풀이해야 했다. 노래를 바꿀 것을 권유했지만 아저씨는 기필코 이 노래를 부르겠다고 거의 생떼를 부리다시피 했다. 나는 아저씨의 고집을 꺾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엄청난 노력 끝에 음은 다행히 점점 제자리를 찾아갔다. 아저씨는 내가 알려준 대로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도 종종 고개를 갸웃거렸다. 의심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저씨가 혼자 불렀던 때와는 전혀 다른 노래가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아저씨를 겨우 어르고 달래 가르치고 난 후 거의 녹초가 되어 2층으로 올라온 나는 씻을 기운도 없이 침대에 드러눕는다.
쾅쾅쾅. 정신이 몽롱해지려던 찰나에 나는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다. 창밖을 내다보니 대문 앞에 낯선 사람이 서 있다. 잘 보이지는 않지만 모르는 사람인 것은 틀림없다. 나는 조금 경계심이 곤두선다. 이곳에 사는 동안 아저씨네 집 대문을 저렇게 요란하게 두드리는 사람은 없었다. 이 집에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쾅쾅쾅. 나는 공격적인 소리에 도망가듯 1층으로 내려간다. 아저씨 또한 고슴도치처럼 잔뜩 긴장을 한 채 현관문 앞에 서 있다. 나는 현관문으로 향하는 아저씨 뒤에 바짝 따라붙는다.
대문 밖에는 우악스럽게 생긴 아줌마가 거친 숨을 내쉬며 서 있다. 나는 아저씨 뒤에 숨어 아줌마를 관찰했다. 동네 어딘가에서 본 것 같기도 하고 아예 처음 보는 사람 같기도 하다. 분명한 것은 아줌마가 몹시 화가 난 상태라는 것이다. 그때 아라가 이쪽을 향해 컹컹 짖어댄다. 아라는 조용히 하라는 나의 손짓을 가볍게 무시하고 짖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아저씨와 내 뒤로 고개를 기웃기웃거리던 아줌마는 무언가를 발견한 듯 그대로 마당 안으로 뛰어들어간다. 미자야!
아줌마가 미자야를 외치며 달려간 곳은 다름 아닌 아라가 있는 곳이었다. 미자? 나는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가 싶어 아저씨를 쳐다본다. 아저씨는 어째 나보다도 상황파악이 덜 된 듯 아줌마와 미자, 아니 아라, 아니, 아직은 우리 집에 있으니까 아라라고 하겠다. 어쨌든 둘을 넋이 나간 채 바라보고 있다. 아줌마는 아라를 안아 들고 우리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온다. 아저씨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한 발짝 뒤로 물러난다. 아줌마의 새빨간 입술이 거침없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아니, 아저씨. 주인 있는 개를 가져다가 키우시면 어떻게 해요! 미자가 없어지는 바람에 우리 미숙이가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는지 알아요?"
미자 엄마 미숙이라니. 나는 순간 우리가 어린아이를 데려다 키웠나 하는 착각에 사로잡힌다. 그러니까 아줌마 이야기는 이랬다. 아라는 항상 집을 나가서 동네를 돌아다니며 놀다가 저녁이 되면 알아서 집에 잘 찾아왔다고 한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록 아라가 돌아오지 않자 아줌마는 아라 사진을 담은 전단지를 곳곳에 붙이며 찾기 시작했고, 얼마 후에 산에서 어떤 남자와 함께 있는 아라를 본 것 같다는 전화를 받고는 수소문 끝에 그 남자를 찾아 이 집에 온 것이다. 그러니까 폐활량을 기른답시고 아라를 데리고 아침부터 산을 오른 것이 문제였다. 나는 가만히 아저씨를 째려본다. 아저씨는 아라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나는 아저씨를 대신해 아줌마에게 연신 사과를 한다.
"주인 있는 거 알고도 데리고 간 거 아니니까 이정도로 끝내는 줄 아세요. 가자, 미자야! 이건 뭐야."
아줌마는 아라의 목에 걸려있던 이름표를 바닥에 내던지고는 집을 떠난다. 잔디 속에 내팽개쳐진 아라의 이름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저씨는 그대로 집으로 들어가 버린다. 나는 이름표를 주워들고 급히 아저씨를 뒤따른다. 아저씨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나는 손에 쥔 이름표를 바라본다. 아라를 예뻐했던 만큼 충격이 클 것이다. 위로라도 해야 하는 걸까. 나는 아저씨의 방 문 손잡이에 몇 번이고 손을 갖다 댄다. 아저씨, 노래연습 또 할까요? 아무런 대답이 없다. 굳게 닫힌 방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결국 내 자리로 되돌아가기로 한다.
저녁이 되도록 아저씨의 노랫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혹시나 아저씨가 저녁을 함께 먹자고 하지 않을까 싶어 기다렸지만 아저씨는 내 방 문을 두드리지 않았다. 아저씨를 기다리는 것을 포기하고 나는 쌀을 씻었다. 쌀을 씻는 동안 나도 모르게 아저씨와 연습했던 노래를 흥얼거렸다. 나는 문득 아저씨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했다. 하지만 넋이 나간 채 아라를 쳐다보던 아저씨의 얼굴이 떠오르자 궁금증은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나는 밥을 몇 번 떠먹고는 숟가락을 내려놓는다. 분명 배가 고팠는데 밥을 한 숟갈 떠먹을 때마다 입맛이 떨어졌다. 아저씨가 준 반찬, 식기들이 놓여있는 식탁 위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밥통에 도로 부을 생각으로 밥그릇을 들고 일어나는데 계단 쪽에서 발자국소리가 들린다. 나는 얼른 자리에 다시 앉아 괜히 밥을 먹는 척을 한다.
아저씨는 서류봉투 같은 것을 들고 나타났다. 밥 좀 주라. 나는 얼른 밥통에서 밥을 퍼다 맞은 편 자리에 내려놓는다. 아저씨는 말없이 자리에 앉더니 밥을 먹기 시작한다. 한참 동안 밥을 먹던 아저씨는 들고 있던 서류봉투를 내게 건넨다. 봉투 겉표지에는 영어가 잔뜩 쓰여 있다. 뭐에요? 대신 좀 읽어 줄래, 영어라서. 나는 뭔가 어려운 숙제를 대신 하게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나는 서류를 쥔 채 아저씨를 가만히 바라본다. 아저씨는 여전히 아무렇지 않게 밥을 먹고 있다. 목소리를 몇 번 가다듬을 때마다 아저씨의 손이 멈칫하는 것을 보고 나는 끝내 입을 열지 못했다. 나는 한참 동안 아저씨와 서류봉투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억지로 입을 뗐다. 이혼하재요. 아저씨는 잠깐 멈칫하는가 싶더니 다시 입안으로 흰 쌀밥을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나는 물이 든 컵을 아저씨 쪽으로 밀었다. 그리고 나도 물 한잔을 그대로 들이킨다. 나는 영어로 잔뜩 써져 있는 서류를 바라본다. 우편이 온 날짜는 얼핏 계산해봐도, 아저씨가 잔뜩 흥분한 채 나에게 노래자랑에 나가겠다고 말한 날보다 훨씬 전이었다.
그날 아저씨는 단단히 체했다. 밤에는 아저씨의 코 고는 소리 대신 구역질을 하는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나는 아저씨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바늘로 엄지를 찌르자 까만 피가 고여 나왔다. 아저씨가 그동안 참고 있던 모든 것들이 폭발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날 이후 더 이상 노랫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아저씨의 노랫소리는 물론이고 테이프 음악도, 텔레비전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아저씨는 여전히 창가에 있는 난초에 물을 줬지만 한 번도 '아라'라고 소리 내어 부르지 않았다. 밤에 전화벨이 울려도 아저씨의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집이 점점 고요해졌다. 집 안에 흐르는 적막을 막아 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조용한 집 안에서 혼자 밥을 먹고 있으면 술에 취한 아빠가 밥상을 뒤엎는 상상이 들곤 했다. 이불 속에 갇혀 있는 시간이 점점 늘어갔다.
오랜만에 방 청소를 하려고 창문을 열자 매미가 일제히 울어댄다. 그동안 어찌나 숨죽인 채 지냈는지 매미에게 말을 걸고 싶기까지 하다. 걸레를 빨기 위해 방을 나서자 텔레비전 소리가 계단을 타고 올라온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걸레를 내팽개치고 당장에 계단에 발을 내딛는다. 삐거덕 소리가 나는 계단도, 발바닥에 가시가 박힐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집어 던진 채 나선형 계단에 빨려 들어가듯 서둘러 1층에 내려가 보니 아저씨는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다. 나는 집을 나서는 대신 조용히 아저씨 옆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나는 아저씨 쪽으로 눈동자를 계속 움직였지만 아저씨는 무엇에 홀린 듯 정면만 주시했다. 곧 무대에 여자 참가자가 나와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고, 나는 반사적으로 아저씨를 쳐다본다. 굳어있던 아저씨의 얼굴이 조금씩 움직인다. 입꼬리가 위아래로 씰룩이더니 곧 아저씨의 눈에서 굵은 눈물이 떨어진다. 아저씨는 얼마 동안 버티는가 싶더니 눈을 거칠게 비비고는 결국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오랜만에 듣는 노래다. 아저씨의 울음소리가 점점 크게 들린다. 나는 텔레비전 볼륨을 높이고 집을 나선다.
나는 아무런 생각 없이 걷다가 편의점을 지나쳤고 슈퍼마켓에서 아이스크림을 사는 것을 깜빡했고 그대로 놀이터를 지나 우리 집 문 앞까지 오고 말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비밀번호를 눌러 문을 연다. 나는 비밀번호가 바뀌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그 순간 나는 또다시 어떤 기대감을 갖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버린 아빠는 어떤 모습으로 망가져 있을까, 내 빈자리를 보며 얼마나 후회를 하고 있을까. 나는 더럽혀진 집안을 보고 인상을 찌푸릴 준비를, 온 집안에 진동하는 술 냄새를 맡으며 코를 감싸 쥘 준비를 마치고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하지만 모두 쓸데없는 짓이었다. 나는 또 내 발로 아빠를 찾아온 것이다.
현관문에서 바라본 거실은 유난히 깨끗했다. 쓸데없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물건들을 정리했는지 더 넓어 보이기도 하다. 그것이 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자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거나 코를 감싸 쥐는 대신 낯선 사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했다. 나는 낯선 사람의 목소리에 이끌리듯 부엌 쪽으로 걸어간다. 하지만 부엌에는 그것보다 더 낯선 사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수염이 사라진 깨끗한 얼굴에 깔끔한 머리 모양을 하고 잘 다린 와이셔츠를 입고 있는 아빠의 모습을 천천히 훑어본다. 아빠 앞에는 먹다 남은 소주병 대신 하얀 쌀밥이 놓여있다. 나를 발견하고는 그대로 굳어버린 아빠의 모습을 보고도 나는 어쩐지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가 없다. 여자가 뒤를 돌아 나를 보며 기겁을 하며 놀란다. 어머, 누구세요? 나는 그대로 뒤를 돌아 집을 나온다. 아빠를 피해 멀리 도망갈 필요도, 억지로 누군가에게 끈을 묶을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인정하기 싫지만, 이번에도 버린 쪽은 내가 아니었다.
집으로 가는 길에 초등학교 앞 문방구에서 병아리 한 마리를 샀다. 삐약삐약. 병아리는 쉬지 않고 울어댔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끔힐끔 쳐다봤지만 나는 손바닥에 올려놓은 병아리에 시선을 박은 채 걸었다. 아저씨는 텅 비어있는 아라집 앞에 멍하니 쭈그려 앉아있다. 삐약삐약. 나는 아라 집에 병아리를 집어넣고 아저씨 옆에 주저앉는다. 삐약삐약. 그놈 쪼그만 게 엄청 시끄럽네. 아저씨는 병아리의 머리를 톡톡 건드린다. 아저씨와 나는 아무 말 없이 병아리를 바라본다. 삐약삐약. 나와 아저씨 대신, 병아리가 쉬지 않고 울었으면 좋겠다. 삐약삐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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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요건 나중에 읽고 감상문 쓸게요. 밤이 너무 늦어서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