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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9일 [연중 제14주간 화요일]
마태오 9,32-38
믿고 싶으면 어린이와 같은 관찰자로 살아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이적에 대한 두 상반된 반응이 나옵니다.
마귀를 쫓아낸 것을 본 군중들은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라며 놀라워하고, 바리사이들은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라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늘 나라에 들어가려거든 어린이처럼 되라고 하십니다.
어린이들은 관찰합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어린이의 행동을 심판합니다. 따라서 이런 때는 어른의 모습보다는 어린이의 겸손한 모습이 필요합니다.
아이들은 부모의 모습을 관찰하며 결국엔 부모를 찾아내고 믿게 됩니다.
우리가 부모를 아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관찰을 통해 찾아내고 믿은 것입니다.
저는 어머니를 의심해봐서 이 과정을 잘 압니다. 자연과 사람, 법칙과 존재의 놀라움을 관찰하면 창조자를 만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창조자를 만나지 못하는 이유는 교만 때문입니다.
『나니아 연대기』로 유명한 C.S. 루이스(1898-1963)는 30대 초반에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무신론자였습니다.
그는 법이 존재하면 그 법을 만든 곳이 있어야 하고 화폐가 있다면 그 돈을 찍어낸 곳이 한 곳만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법도 화폐도 상대화되기에 가치가
사라집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법칙이 존재합니다.
그는 자신의 책 『순전한 기독교』에서 자신의 추론을 명확히 설명했습니다.
유신론의 대가인 C.S. 루이스와 대척점에 서서 무신론을 주장하며 1950년 토론 대결 이후 30권 이상의 책을 쓴 교수가 앤서니 플루(1923-2010)입니다.
그는 무신론 대표주자입니다.
1976년 발행한 그의 유명한 논문 ‘신학과 위증성’은 그동안 무신론의 교과서처럼 인용되었습니다.
그가 신을 믿지 않거나 신이 있지 않다고 믿는 근거는 이것입니다.
a. 우주가 영원하며, 항상 있어 왔고 항상 존재할 것이다.
b. 생명은 무작위적 화학 작용의 결과물이다.
c. 하느님의 존재는 자기 모순적이다; 악과 하느님은 공존할 수 없다.
그는 이 세상을 어떤 지적인 인격체가 설계하였다는 데 대해 과학이 그 복잡성을 설명해 줄 것이라 믿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주와 함께 시작하고 끝납니다.
매일 느낄 수 있는 상식과 경험에 의해 이 세상의 숨겨진 매커니즘은 과학의 발전과 함께 밝혀질 것입니다.”
약 50년의 세월 동안 무신론에 관한 30권의 책을 낸 플루 교수는 2004년 뉴욕 대학에서 진행된
대담에서 온 우주를 창조한 신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지적인 존재의 작업이라고 여겨지는 거대한 복잡성 때문입니다.”
과학의 발전이 오히려 플루 교수의 생각을 바꾸었습니다.
동물계 전체에 걸쳐 나타난 시각은 물론 기본적인 번식의 필요까지 완전한 형태로 갑작스럽게 등장하는 화석 증거가 있으며, 이 생명의 발생은 DNA에 기록되어 있고 DNA에서 RNA로의 전사, 그리고 RNA에서 단백질로의 전환, 이어지는 단백질의 접힘은 플루 교수가 창조주를 믿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습니다.
“DNA가 하는 일들은 믿을 수 없는 복잡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배열과 존재를 구성하는 데 있어서요.
극도로 다양한 물질들의 조합에는 지적인 존재의 개입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우연히’라는 말이 적용되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번개가 쳐서 무생물에서 아미노산이 만들어지고
그것들이 단백질의 형태를 띠며 자기를 복제하는 능력을 갖추고 단세포 동물이 되는 데까지
우연적으로 일어날 확률은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모래가 우연히 모여서 시계가 되거나 반도체가 되거나 아니면 원숭이가 무작위로 타자기를
두들겨 햄릿이라는 책이 만들어질 가능성보다 비교도 안 되도록 어렵습니다.
진화론자들은 다 우연히, 우연히라고 하며 넘기지만, 앤서니 플루는 50년간 무신론의 책을 내다가 결국 두 손을 들고 만 것입니다.
그는 이제 진화론자들에게 이 세 가지를 묻습니다.
a. 자연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을까?
b. 목적론적 구조를 가진 생명이 어떻게 무생물에서 비롯되었을까?
c. 생명의 복잡성과 법칙들은 어떻게 존재하는가?
‘우연히’라는 말을 빼고는 답을 할 수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은 열역학 법칙들에 위반되는 것이고
모든 에너지는 저절로 생기거나 증가할 수 없기에
그 에너지를 준 창조자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앤서니 플루는 ‘전화기의 비유’를 합니다. 무인도에서 어찌어찌 전화기가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무언가를 누르니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현자는 이 전화기가 보이지 않는 세계와 연결하는 기계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은 조금만 고장 나도 소리가
들리지 않자 이것은 기계가 만들어내는 소리라고 결론짓습니다.
그리고 무인도에서 계속 외롭게 사는 것을 택합니다.
하지만 이 기계를 가만히 살펴보다가 언어는 알아들을 수 없지만, 자신들의 말에 반응하는 것을
보고는 기계가 내는 소리가 아니라 전화기는 보이지 않는 세계와 연결해주는 기계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때 “이제 내 목소리가 들리느냐?”란 음성이 들리고 믿게 된 사람들은 ‘우리가 혼자가 아니구나!’라는 마음의 평화에 머물게 됩니다.
바리사이들처럼 이 현상을 자기 판단으로 확정하고 본래 존재하는 것이라고 여기면 그 뒤에 있는 창조자의 존재를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린이처럼 관찰하는 이는 결국 전화기와 같은 이 현상들을 통해 보이지 않는 창조자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창조자가 우리를 사랑하여 그 소통의 도구를 만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며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안 믿어서 좋은 게 뭐가 있을까요?
자기가 하느님으로 살며 온갖 걱정과 두려움에서 사는 일밖에는 없습니다.
어린이는 부모 말을 들어야 하지만, 그래도 가출해서 혼자 사는 것보다는 부모의 존재 안에서
머무는 게 더 행복임을 알고 관찰자로 머뭅니다.
심판자가 아닌 관찰자로 살아갑시다.
반드시 이 존재하는 모든 것의 창조자를 만나게 됩니다.
아이작 뉴턴(1643-1727)은 우주의 질서와 복잡성을 신성한 창조자의 증거로 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른 증거가 없다면 엄지손가락만으로도 신의 존재를 확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7월9일 [연중 제14주간 화요일]
복음: 마태 9,32-38
우리에게는 양들에게 사랑과 기쁨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희망의 목자가 필요합니다!
때 이른 폭염과 장마로 얼마나 고생이 많으십니까?
특히 농사짓는 분들의 고생이 손에 잡힐 듯이 느껴집니다.
불볕더위와 과도한 비바람에 농작물들도 힘겨워하는 분위기가 역력합니다.
예초를 한다고 잠깐 나갔었는데 사우나가 따로 없습니다.
잡초들을 바라볼 때 마다 드는 생각이 있습니다.
‘참으로 대단하다!’ 어찌 그리도 생명력이 왕성한지요.
뽑아도 뽑아도 또 자라납니다.
한바퀴 예초를 쭉 하고 돌아서면 벌써 저쪽 끝에서는 또 다른 잡초가 자라나기 시작합니다.
뿌리는 얼마나 튼튼하고 깊이 내려가는지 모릅니다.
방심했다간 피정 센터 전체가 순식간에 잡초로 뒤덮이게 됩니다.
잡초제거에 신경을 쓰지 않다가는 정작 원하는 농작물은 조금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왕성한 식욕을 지닌 잡초들이 모든 영양분들을 다 흡수하다보니 농작물들은 시들시들, 삐쩍 말라
휘청거리다가 결국엔 죽어버립니다.
좋은 결실을 기대한다면 방법이 따로 없습니다.
꾸준히, 일상적으로 잡초를 뽑아줘야 합니다.
그것이 농작물을 살리는 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밭에서 열심히 일할 일꾼이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 말미에 예수님께서도 일꾼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37-38)
오늘 우리에게는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품위있고 예의바른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가난하고 고통 받는 백성들이 자신의 유일한 존재 이유인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양들에게 극진한 사랑을 베풀기도 하지만 반대로 그들로부터 애틋한 사랑을 받는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잠시라도 떨어져 있으면 보고 싶고, 혹시라도 장거리 출장이라도 가면 세상 다 끝난 것처럼
마음이 허전해지는 그런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오늘 우리에게는 정말이지 착한 목자가 꼭 필요합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의 성장과 안녕과 구원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양들에게 쾌적한 성장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는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돈이나 명예, 인기나 허황된 꿈이 아니라 영혼 구원이 유일한 삶의 목표인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양들이 오늘 겪고 있는 고통과 괴로움, 그들이 안고 있는 상처와 십자가를 대신 짊어지고 갈
착한 목자가 필요합니다. 힘겹게 걸어가고 있는 이 시대 양들을 위해 틈만 나면 위로와 격려,
사랑과 기쁨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희망의 목자가 필요합니다.
당시 여러 부류의 사람들 가운데 가장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던 사람들, 가장 천대받고 멸시 당하던 사람들만을 우선적 사목 대상으로 선택하셨던 예수님을 바라보며, 만일 지금 다시 한번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면 과연 어떤 사람들을 찾아가실 것인가 생각해봅니다.
교회는 교회 본연의 사명인 교세 확장에 관심을 기울이는 일도 중요합니다.
이를 위해 새로운 성당을 짓기 위한 신축부지 마련이나 신축도 중요합니다.
성지의 개발도 중요합니다.
신자 재교육도 중요합니다.
각종 단체의 활성화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일이 한가지 있습니다.
이 시대 살아있는 교회이자 성지인 가장 가난한 사람들,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 어디에 있는지를
살펴보는 일입니다.
그들의 인간성 회복을 위해, 그들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켜주기 위해 어떤 일을 할 것인가
머리 싸매고 고민하는 일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4주간 화요일 강론>
(2024. 7. 9. 화)(마태 9,32-38)
<아버지의 일은 곧 자녀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마태 9,35-38)”
1) 여기서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라는 말은, 예수님의 ‘자비’를 나타내는 말인데, 그 ‘자비’는 곧 ‘사랑’입니다.
예수님의 ‘자비’와 ‘사랑’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이기도 하고,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병자들을 고쳐 주시는 등의 일을 하신 이유이기도 합니다.
<‘자비’와 ‘사랑’ 말고는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다.” 라는 말은, 메시아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의
인류의 상태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참 목자’이신 주님이 계시는데도 목자를 모르고 있었거나, 알지만 떠나 있었거나, 떠난 것은 아닌 경우라도 목자를 만날 길을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기가 꺾여 있었다.”는, “희망 없이 방황하고 있었다.”입니다.
이 말은, 앞의 4장에 있는 다음 말에 연결됩니다.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마태 4,15-16).”
예수님은, 죽음의 그림자에 갇혀서 아무 희망도 없이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또 죽음을 향해서 가는 길 외에는 다른 길을 알지 못한 채 방랑자처럼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생명의 빛’으로 오신 분이고, ‘구원의 길’로 사람들을 인도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2) 예수님이 오시고 나서 이천 여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고, 알면서도 거부하는 사람들도 많고, 인생의 목적이나 목적지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도 없이, 아무 의미도 없이 그냥 하루하루 살고 있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들은 모두 여전히 ‘죽음의 그림자’에 갇혀서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빛’을 전해 주고, 그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일은 신앙인들의 사명입니다.
‘구원의 길’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가야 하는 길입니다.
‘함께 가려고 노력하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 실천’입니다.
사랑 없는 신앙은 신앙이 아닙니다.
‘구원의 길’을 혼자서만 알고, 혼자서만 간다면,
그 길은 ‘구원의 길’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은 하나도 없고, 자기 혼자만 있는 곳이 하늘나라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선교활동을 능동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해야 하는 것은, 의무이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이고, 모두가 함께 살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3) “수확할 것은 많은데”는 “심판 날이 다가오는데”입니다.
“일꾼은 적다.” 라는 말씀은, 여기서는 “구원받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적다.” 라는 뜻입니다.
<복음을 믿고 회개하는 사람이 적은 것을 안타까워하는 당신의 심정을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일꾼’이라는 말의 표현만 보고서, 이 말을 성직자, 수도자, 선교사 등을 가리키는 말로만 생각하기가 쉬운데, 여기서는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고, 구원받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람들”을 모두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는 모두 하느님의 일꾼입니다.
즉, 신앙인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두 하느님의 자녀이고, 동시에 하느님 나라 건설 사업에 동참하는 일꾼입니다.
신앙인은 손님도 아니고 삯꾼도 아닙니다. 주인공입니다.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자녀이면 상속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상속자입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 상속자인 것입니다(로마 8,14.17).”
아버지의 집은 자녀의 집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는 남의 나라가 아니라 나의 나라이고,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해서 일하는 것은 곧 나 자신을 위해서 일하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느님을 위한 일이면서, 동시에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4) ‘수확할 밭의 주인님’은 하느님입니다.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라는 말씀은,
여기서는 “더 많은 사람들이 믿고 회개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사고 청하여라.” 라는 뜻인데,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은, 우리가 청하지 않더라도 처음부터 하느님의 뜻이었고 계획이었기 때문에,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노력하여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나에게 필요한 것’을 청하는 기도를 할 때가 많지만,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함께 하겠다고 다짐하는 기도를 먼저 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청하지 않아도(청하기도 전에), 하느님께서는 일꾼이 더 많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
즉,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고 있음을 알고 계시고, 그들을 회개시키기 위해서 애를 쓰고 계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각자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해 실행하면서 주님과 함께 일하는 것입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는 날이 오면, 무엇이든지 하려고 노력한 사람은 그 나라에 들어갈 것이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구경만 한 사람은, 그 나라의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안’을 바라보기만 하면서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