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가는 배
박용철
나 두 야 간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
나 두 야 가련다.
아늑한 이 항군들 손쉽게야 버릴 거냐
안개같이 물어린 눈에도 비치나니
골짜기마다 발에 익은 묏부리 모양
주름살도 눈에 익은 아아 사랑하는 사람들
버리고 가는 이도 못 잊는 마음
쫓겨가는 마음인들 무어 다를 거냐
돌아다 보는 구름에는 바람이 희살짓는다.
앞 대일 언덕인들 마련이나 있을 거냐
나 두 야 가련다
나의 이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 거냐
나 두 야 간다.
<시문학>(1930) -
해 설
[ 개관정리 ]
◆ 성격 : 서정적, 의지적, 낭만적
◆ 표현
* 수미쌍관의 구조
* 나 두 야(호흡을 느리게 함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특별히 주의하게 함)
→ 아쉬운 마음과 머뭇거리는 태도의 표현.
남성적 강인함과 슬픔을 극복하는 의지적 표현.
차마 떠나고 싶지 않은 화자의 마음.
◆ 중요시어 및 시구
* 아늑한 항구 → 시적 자아의 삶의 현장
* 안개같이 물어린 눈 → 눈물을 글썽이는 인간적인 나약함
* 희살짓네 → 짖궂게 훼방하는 것
* 바람 → 시적 자아의 불안감 내포
* 앞 대일 언덕 → 장소. 정해진 목적지
◆ 서정적 자아
→ '떠나가는 배'(객관적 상관물)
암울한 식민지 치하에서 젊은 시절을 보내지 않으면 안되는 사람.
주어진 여건에 대한 불만과 불안으로 떠나기를 결심하지만, 일정한 목적지도
지향도 없을 뿐더러, 떠나지 못하게 막는 현실적 여건 앞에서 또한 망설임을
보이며 갈등하는, 다소 감상적 인물.
◆ 주제 ⇒ 비참한 조국의 현실 앞에서 쫓겨 떠나갈 수밖에 없는 비애
[ 시상의 흐름(짜임) ]
◆ 1연 :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떠남에 대한 결단
◆ 2연 : 국토와 동포에 대한 미련와 안타까움
◆ 3연 : 불안한 미래에 동요되는 심정
◆ 4연 : 화자의 결연한 의지
[ 이해와 감상의 길잡이 ]
이 시는 일제하에서의 조국의 청년의 심정을 반영하고 있는 작품으로, 이 시인의 대표작으로 볼 수 있는 시이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시대 현실 속에서, 그래도 미래 지향적인 의지를 지니고 '나 두 야 가련다'하고 말하고 있지만, 기실은 차마 버리고 떠나지 못하는 마음이 오히려 더욱 진하게 깔려 있다. 말하자면 떠나려는 마음과 차마 떠나지 못하는 마음이 얽혀서 갈등을 빚고 있는 것이다.
1연에서는 '젊은 나이'를 '눈물로야 보낼'수 없으므로, 떠나야겠다는 마음을 서슴없이 표현하고 있으나, 2연에서는 차마 매정하게 떠나지 못하는 '안개같이 물어린 눈'을 보이고 만다. 즉 시의 화자는 '눈물'로 세월을 보내지 않기 위해서 떠나기로 작정했으나, 막상 떠나려고 하는 마당에 이르러 '눈물'을 보이게 된 것이다. 전자의 '눈물'은 일제 생활에서 나오는 눈물이지만, 후자의 '눈물'은 향수에 어린 눈물이다. 그러므로 이 시에서는 '돌아선 자'의 포즈와 '되돌아보는 자'의 포즈를 동시에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3연에 이르러 한 실마리를 잡는다. '버리고 가는' 것이나 '쫓겨 가는' 것이나 결국 한 가지 마음이라는 사실, 그리하여 '앞 대일 언덕'도 없이, 정처없이 떠나는 것일지라도 떠나야 한다고 매듭짓는다. 이 시가 가치가 있다면 일제하에서의 청년들의 의식을 충실하게 반영해 주고 있는 점일 것이다. 그러나, 떠남에의 열망과 그것에의 주저함이 교차되고 있을 뿐, 떠남의 이유와 목적이 결여되어 다소 공허한 느낌을 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작가소개]
박용철[ 朴龍喆 ] : 시인.
호 : 용아(龍兒)
출생 – 사망 : 1904년 ~ 1938년
성격 : 시인
출신지 : 전라남도 광산
성별 : 남
본관 : 충주(忠州)
저서(작품) : 떠나가는 배
<정의> 1904∼1938. 시인.
<개설>
본관은 충주(忠州). 아호는 용아(龍兒). 전라남도 광산(지금의 광주광역시 광산구) 출신. 아버지 박하준(朴夏駿)과 어머니 고광고씨(高光高氏, 혹은 長澤高氏)의 4남매 중 장남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16년 광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휘문의숙(徽文義塾)에 입학하였다가 바로 배재학당(培材學堂)으로 전학하였다. 그러나 1920년 배재학당 졸업을 몇 달 앞두고 자퇴, 귀향하였다.
그 뒤 일본 동경의 아오야마학원[靑山學院] 중학부를 거쳐 1923년 도쿄외국어학교 독문학과에 입학하였으나, 관동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였다. 이어서,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에 입학하였으나 몇 달 만에 자퇴하였다. 16세 때 울산(蔚山) 김씨 김회숙(金會淑)과 혼인하였다가 1929년 이혼하고, 1931년 5월 누이동생 박봉자(朴鳳子)의 이화여자전문학교 친구였던 임정희(林貞姬)와 재혼하였다.
재학 중 수리과목에 재능을 보였는데, 문학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아오야마학원 재학 때에 사귄 김영랑(金永郎)과 교우로 관계하면서 비롯되었다. 문단 활동 이외의 경력은 전혀 없다. 1930년대에는 사재를 털어 문예잡지 『시문학(詩文學)』 3권, 1931년에는 『문예월간(文藝月刊)』 4권, 1934년에는 『문학(文學)』 3권 등 도합 10권을 간행하였다.
또한 그가 주재하였던 시문학사에서 1935년 같은 시문학동인이었던 정지용(鄭芝溶)의 『정지용시집』과 김영랑의 『영랑시집』을 간행하였다. 문단 활동으로는 자신이 주축이 된 시문학동인 활동과 ‘해외문학파’, ‘극예술연구회’ 회원으로 참여하여 입센(Ibsen,H.) 원작의 『인형의 집』 등 연극공연을 위한 몇 편의 희곡을 번역하였다. 정지용 등과 시집과 문예지를 간행하는 등 문학 활동에 전념하면서도 자신의 작품집은 내지 못하고 1938년 서울에서 후두결핵으로 사망하였다.
그의 시작 활동은 1930년 3월『시문학』 창간호에 「떠나가는 배」·「밤기차에 그대를 보내고」·「싸늘한 이마」·「비내리는 날」 등 5편의 시를 발표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는데, 그 뒤로 『문예월간』·『문학』 및 기타의 잡지에 많은 시작품을 발표하고 있다. 그러나 발표되지 않고 유고로 전하여지다가 뒤에 전집에 수록된 작품도 상당수에 달한다.
“나 두 야 간다/나의 이 젊은 나이를/눈물로야 보낼거냐/나 두 야 간다”로 시작되는 대표작 「떠나가는 배」는 어딘가 정박지를 찾아 떠나가는 ‘배’에다 인생을 비유한 작품이다. 즉, 인정과 고향을 되돌아보는 현실과 ‘삶’의 행정(行程) 속에서 아무런 마련도 없이 또 다른 정박지를 향하여 떠나가는 이상과의 내적 갈등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1938년『삼천리문학(三千里文學)』에 발표된 「시적 변용에 대해서」는 지금도 널리 읽혀지는 그의 대표적인 평론으로서 그의 시작이론(詩作理論)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의 시는 같은 시문학동인인 정지용이나 김영랑의 시를 못 따르지만, 『시문학』·『문예월간』·『문학』 등 문예지를 간행하였고, 방대한 역시편(譯詩篇) 등을 통하여 해외문학을 소개하는 역할을 하였다는 점은 한국 근대문학사에서 큰 공적이 되고 있다.
지나치게 서구문학사조에 편향되어 혼류를 이루었던 1920년대 문단을 크게 전환시켜 ‘살’과 ‘피’의 결정으로 이루어진 보다 높은 차원의 시창작, 즉 ‘민족언어의 완성’이라는 커다란 과제를 제시하였던 것이다. 유해는 고향 광주광역시 광산구 송정동 우산리에 안장되었고, 광주공원에 영랑의 시비와 함께 그의 시비도 건립되어 있다. 시비에는 대표작 「떠나가는 배」의 한 절이 새겨져 있다.
유작집으로 『박용철전집』 2권이 각각 1939·1940년 동광당서점에서 간행되었고, 대표적 평론으로 「효과주의비평론강(效果主義批評論綱)」(1931)·「문예시평(文藝時評)」(1931) 등이 있다.
<참고문헌>
『한국현대문학사탐방』(김용성, 국민서관, 1973)
『한국현대시인연구』-기타(정태용, 어문각, 1976)
『한국현대시인연구』(김학동, 민음사, 1977)
『한국작가전기연구』(이어령, 동화출판공사, 1980)
「박용철의 인간성과 예술」(김광섭, 『조광』, 1940.8.)
「박용철과 나」(김영랑, 『자유문학』, 1958.6.)
「용아박용철연구」(김윤식, 『학술원논문집』 9, 1970)
[네이버 지식백과] 박용철 [朴龍喆]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