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신각의 수수께끼
보신각(普信閣 )은 1395년 한양 천도 이듬해 세워졌다. 여러 차례 소실되어 다시 세웠고 위치도 조금씩 달라졌지만, 600년이 넘도록 서울 한가운데를 지키고 있다. 그런데 보신각에는 아직도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두 가지 있다.
첫째는 보신각의 이름이다. 보신각은 원래 이름이 없었다. 2층 누대였을 때는 ‘종루’, 1층 건물이었을 때는 ‘종각’이라고 불렀다. 보신각이라는 이름은 1900년이 다 되어서야 등장한다. 고종이 하사한 이름이라는 설도 있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다.
이름의 의미도 불분명하다. 어떤 이들은 방위 때문이라 한다. 전통적 음양오행설에 따르면 동서남북과 중앙은 각기 인의예지신에 해당한다. 그래서 동대문은 흥‘인’문, 서대문은 돈‘의’문, 남대문은 숭‘례’문, 서울 북쪽에 홍‘지’문이 있으니, 중앙의 종루는 보‘신’각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의심스럽다. 서울 중앙에 위치한 건물이 한둘인가. 게다가 대문과 건물은 다르다. 대문은 사람이 드나드는 통로일 뿐, 별다른 기능이 없다. 따라서 어디에 있는지가 중요하므로 방위가 이름에 들어간다.
반면 건물은 방위보다 기능이 중요하다. 조선 시대 건물의 이름은 모두 기능과 관련이 있다. 천문을 관측하는 건물은 ‘흠경각’이다. ‘하늘을 공경한다’는 경전 구절에서 따온 말이다. 물시계를 설치한 건물은 ‘보루각’이다. 물시계로 시간을 알려준다는 뜻이다. 보신각이라는 이름 역시 기능과 관련지어 해석해야 한다. ‘신(信)’은 시간의 미덕이다. 시간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일정한 속도로 흘러가기 때문이다. 보신각은 시간을 널리 알리는 건물이라는 뜻으로 보아야겠다.
두 번째 수수께끼는 종 치는 횟수다. 조선 시대에는 하루 두 차례 보신각종을 쳤다. 저녁에 28번을 쳐서 하루의 끝을, 새벽에 33번을 쳐서 하루의 시작을 알렸다. 도성 문도 종소리에 맞춰 열고 닫았다. 저녁 타종 28번은 별자리 28수, 새벽 타종 33번은 불교에서 말하는 33천을 상징한다고 하는데, 이 역시 소문에 불과할 뿐 확실한 근거가 없다.
별자리는 그렇다 치고, 조선은 유교 국가다. 불교적 세계관에 입각해 타종 횟수를 정했다고 믿기 어렵다. 이 때문에 정동유는 ‘주영편’(1805년)에서 “시간을 알려주는 일이 얼마나 엄중한데 경전에 없는 숫자를 가져다 썼겠는가”라며 강력히 부인했다. 하지만 그 역시 근거를 대지 못했다. 그냥 고려 시대부터 전해오는 관습인지도 모르겠다.
보신각의 존재를 상기시켜 주는 건 제야의 종 행사다. 벌써 70년이 넘어간다. 일제강점기에 유입된 일본 풍속이다. 비록 일본 것이긴 하나 굴곡진 우리 현대사를 함께한 행사다. 게다가 우리 전통과 아예 무관한 것도 아니다.
“도성의 남녀가 모두 쏟아져 나와 종각에서 저녁 종소리를 듣는다. 그러고는 흩어져서 여러 다리로 가는데, 왕래하는 행렬이 밤새 끊이지 않는다.” ‘동국세시기’가 전하는 조선 시대 정월 대보름 밤 풍경이다. 오늘날 제야의 도심 풍경과 다를 바 없다. 대보름 밤이 새해 첫날 밤으로 바뀌었을 뿐, 1년에 한 번, 심야의 도심을 활보하는 제야의 종 행사는 엄연한 우리의 전통이다.
장유승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