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하멜표류기의 이해
(가) 하멜표류기의 재해석
1653년 8월 16일 켈파르트섬에서 표류되어 1666년 9월 14일 일행 8명이
왜의 낭가사께長崎로 탈출하기까지 조선에서 체험했던 일과 풍습에 관하여
스뻬르베 호의 생존한 사관과 선원들이 본국 네덜란드에 돌아가
자신이 속한 동인도 해운회사에 밀린 봉급을 받기 위해 만든
업무 보고를 기록한 일지가 하멜표류기의 원 제목이다
당시 조선은 해상을 왜세력들에게 맡겨서 그들 관할지역내 왜구들의 침공을 막고자 했다.
조선장군들을 임명하여 해상에 성곽을 쌓고 해금령을 내려
바다로 나가는 것을 막았고 심지어 섬에 조선인이 살지 못하게 아예 공동화 시켜버렸다.
왜구들의 침략이 그만큼 심했다는 말이다.
이 왜 장군들이 해안지대를 지배하면서 점점 서세동점의 분위기를 감지하고
란학(네덜란드-화란을 통해 들여 온 서구학문)을 수입하였으며
영국, 네덜란드 해상강국이 조선해안선을 침탈하면서
이 왜 군벌들은 중국 중심의 세계관에서 벗어나기 시작했고
급기야 아시아에서 탈출하여 서구열강에 기댄다.
조선의 폐쇄성은 대륙 동남부의 왜로 탈출하여 하멜이 쓴 보고서는
단 며칠 만에 작성되어 회사에 전달되었는데
조선은 그 13년 28일 동안 하멜의 네덜란드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이들을 감시하는 데만 주력했다고 적었다.
네덜란드(화란)가 어떤 나라인지에 대해 이들을 취조도 했지만 그때뿐이었으며
조선당국자들은 이들을 감시하고 노동력을 착취하는 데만 관심이 있었다고 했다.
한반도의 인천항, 군산항이 건설된 것은
대륙조선이 이 새로운 땅과 자원이 필요했기에
19세기 말에 몰려와서 개항되었고 춘천 옥 광산을 개발했다.
한반도는 이때 19세기 세계시장개방화 시대에 차츰 서구에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영국의 해군기지가 한반도 거문도에 건설되었고 미군도 진출하였다.
이 대륙조선인들이 대거 한반도로 이주한 것이
바로 지금의 남북한이 된 것이고
대한민국도 원래는 대륙에 있었던 정부였다.
그러다가 서구열강의 이해관계에 의해
포츠담 회담 등의 결과에 의해 코리아가 한반도에 들어서게 되고
이 후 미‧소양국의 삼팔선 분할 점령이 일어난 것은 이곳을 관할하던 왜 제국과
영국, 미국의 이해관계가 얽혀져 있는 왜 제국점령지였기에 한반도에 전쟁을 일으켜
영구분단이 되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이었다.
조선은 대륙에 있었기에
하멜이 이 은둔의 땅을 탐사한 책이 서구사회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당시 조선은 대외활동을 철저히 차단한다.
1666년은 17세기 서세동점의 터닝 포인트가 되는 시대로
조선 대륙이 분할되는 첫 시점이 이 시기였음이 하멜표류기에서 감지된다.
조선은 한반도가 아닌 대륙에서
거대한 8개의 왕국으로 구성된 나라라고 하멜은 증언하고 있다
(나) 하멜은 한반도에 온 적이 없다
360년 전 한반도에 왔다는 하멜의 표류기는 잘못 번역된 것이다.
후딘크본 하멜표류기에는 그가 한반도의 제주도에 표착한 것이 아니라
산동반도 남쪽에 있는 제주濟州라는 대륙내륙에 풍랑에 휩쓸려 표류하다가
조선관군에게 압송되어 서울에 도착하여 효종을 만난 과정,
대륙일대를 돌아다니며 보고 들은 내용과 후에 탈출하게 되는 과정을 묘사한 책이다.
조선의 자연과 동식물은 열대와 아열대에 사는 동식물이 등장한다.
자연산 야자수가 있고 강에는 악어가 있다고 하멜은 적었다.
이러한 증거는 하멜이 13년 28일간
조선에서 겪은 배경이 결코 한반도가 아닌 대륙임을 말한다.
나카사키 총독이 있다는 것은
당시 대륙은 이미 서구세력이 깊숙이 들어와 있었고,
일본은 대륙남부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산동성 일대에 왜관을 두고 대륙조선과 접촉을 하고 있었다.
당시 북쪽은 청나라 달단 타타르인이 있었고,
남쪽 왜인들은 왕이 없는 (나라가 존재하지 않는) 쇼군 장군들이 다스리는 왜가 있었던 곳이다.
옛 대륙조선어는 3성이다.
한반도로 건너온 조선어에 성조를 제거하여
대륙조선어와의 관계를 단절시킨 것이 현 한국어이다.
옛날 대륙 왜어에도 성조가 있었다.
왜 현재는 없어졌느냐 하면
바로 일제의 조선사편수회가 동원되어 변조시킨 한반도 조선어인 것이다.
이들은 두음법칙이라는 것을 만들어 철저히 대륙조선어와 차별을 두기 시작한 것이다.
새로운 한반도조선을 창출하기 위해 두음법칙이라는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는
음운법칙을 만들어 조선을 한반도에 고착, 세뇌시키기 위한 것이다.
하멜이 탈출하여 왜의 나가사키에 도착했다고 하는 나가사키는
바로 양자강하류 지역이다.
이곳은 왜라는 지역이지 결코 왜라는 나라가 존재 했다는 말이 아니다.
왜 장군들이 관할하는 왜인들 지역이 바로 양자강 하류였으며
당시에는 왜인, 조선인이 구별 없이 이런 대륙남부에 같이 살고 있었던 것인데
조선인들은 풍토병 때문에 가급적 이 지역으로 이주하는 것을 꺼렸다.
지금의 국경 개념으로 당시 역사를 이해해서는 안 된다.
지금 우리가 사는 국가체계와 국경선은 2차 대전 이후에 정착된 개념이다.
(다) 하멜표류기에는 왜가 대륙에 있었다고 적었는데
거기서 하멜은 강 하나를 건너서 왜로 탈출했다고 썼다.
그하멜이 탈출한 낭가사께는 흔히 왜어로 나가사키라 불리는 이 지역은
양자강 하류의 진강현 동쪽의 랑산진狼山鎭이다.
이 나가사키라는 말에서처럼 이 왜어 지명은
그 발음 그대로 지금 현재 왜어의 발음이 된다.
주목할 점은 이 랑상진을 왜인들은 낭가사께
즉 일본 왜구들의 발음에서 ㄹ을 ㄴ으로 발음하는 두음법칙이 존재함을 알게 된다.
자신들의 식민지로 삼으려 했던 조선에 이렇게 두음법칙이란 것을 만들어서
대륙조선어를 쓰는 한국인들을
왜어식 어법으로 강요한 흔적이며 언어 강탈 사건이다.
과연 제주도에서 지금의 일본열도로
그 넓은 해역을 겨우 뗏목 같은 작은 배로 횡단이 가능한가?
하멜이 아무리 향수병이 심했어도 자기 목숨을 걸 정도로 무모한 사람이 아닌 이등항해사였다.
바다가 얼마나 무서운 곳인지 그 누구도보다 잘 아는 선장이다.
그가 탈출한 왜는 양자강을 건너서 왜 무역항이 있는 곳으로 탈출한 것이다.
1925년 한참 대륙을 석권하던 시절 왜는 동시에 일본열도에 나라를 세우고 있었다.
이때 대규모로 대륙 동부지역 사람들이 유구제국을 그 훨씬 이전 시대에 제압한 것은
일본열도로 들어가기 위함이었고
일본열도 자체가 유구국의 영역에 속하는 땅이었기에 왜제국은 유구국을 합병한 것이다.
이때 당시 유구왕국은 환태평양문화권과 조선의 유교문화가 공존하는 나라였다.
페리제독이 왜에 개항을 요구할 때 먼저 유구국을 거쳤다고 나온다.
당시까지만 해도 유구국은 독립 국가였다고 페리제독은 증언하고 있다.
왜가 지금의 남경에서 가장먼저 한일이 유구국 침공이었다.
그 점령은 곧 일본열도로의 진군을 의미하는 것이다.
유구제도를 이용해 일본열도로 들어가게 되는 통로가 열리고
이때 일본열도에 본격적으로 진출하여 토착민들을 포섭 제압하는 과정에서
일본열도의 사무라이 집단과의 전쟁을 묘사한 사건이 ‘라스트 사무라이’의 영화 내용이다.
대륙의 근대화된 왜 제국군과 아직 활 쏘고 칼 휘두르는 전쟁문화를 가진
일본열도 토착민들을 제압하는 과정을 그린 것으로서
결코 근대화된 왜 제국군은 일본열도에서 자생한 군대가 아니다.
이 왜 제국군들은 복건성 일대에서 발흥하여 대만에서도 호응을 하여 이것이
왜 제국의 근간이 되었고, 이때 산동성의 왜 세력은 없어지게 되었다.
산동성의 왜는 임진왜란 이후 토요토미 가문이 덕천가문에 의해 붕괴되어
왜의 중심지는 남경 덕천가문의 중심지로 옮겨지고
산동성의 왜 세력은 거의 없어지고 조선의 영역으로 넘어가게 된다.
덕천가강이 왜 이렇게 했을까?
덕천가강은 조선의 충실한 신하였다.
그래서 임진왜란 때도 군대를 보내지 않았다.
자신의 중심지였던 남경을 에도라고 발음하는 것도 현대 일본어이고
당시 강도 江都라 불린 지역이 이 남경이었다.
1912년 지금의 북경에 중화민국이 들어서고
중화민국의 남쪽수도를 남경이라고 지칭할 때 일본열도로 아주 일본이 옮겨졌다.
에도막부의 에도는 오도吳都에서 나왔으며 고또江都와 에도吳都를 같이 썼다.
오나라수도가 에도이며 왜는 오나라를 기반으로 한 나라였고
이들이 역사상의 왜이며 왜였고
왜 지역을 침공한 동아시아 바다를 떠돌아다니던 해적들이 왜구들이었으며
이들을 제압하고 다스리라는 뜻으로
막부에게 평남대장군이라는 직함을 조선에서는 보냈던 것이며,
이 직함 하나로 강호 지역을 평정하게 되니
우리가 중국 무협지에서 강호를 평정했다고 하는 것은
이 일본장군이 그 지역 무사들을 제압하고 우두머리가 되어 조선조정에 충성한 것을
후에 무협지 작가들이 중국의 옷을 입혀서 써낸 소설이다.
강호를 떠돌았다고 하는 무협지의 이야기는 미야모토 무사시 등의
일본무사들의 이야기와 매우 비슷하다.
강호의 무사들은 왜 무사들이었고
이것을 일본열도로 옮긴 왜 세력들은
일본열도를 배경으로 새롭게 각색한 이야기인 것이다.
이들이 남색을 즐겼다는 기록이
결국 대륙에서 있었던 남색열풍에 편승한 성 풍조였고
이 왜의 성 풍조는 후에 일본열도로 옮겨져 역사가 된 것이다.
당시 대륙 동남부 사람들은 혼도시를 하고 다녔다는 기록이 있으며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왜 사무라이 머리는 대륙남부 사람들의 풍속이었다.
원래 왜구들은 머리를 산발한 해적들이었다.
그러나 대륙 왜 사람들은 조선의 풍속을 따라서 상투를 틀었고
그것을 투구를 쓰는데 편리하게 변발 비슷한 앞머리를 깎아 낸 것이다.
왜가 대륙에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그런 머리를 했던 것이다.
왜 무사의 그 상투 머리는 대륙의 풍속이었고 상투는 조선의 풍속,
그리고 앞머리를 깎아 버리는 것은 대륙조선 북쪽 올랑해의 풍속이었다.
이들이 이런 상투를 잘라버린 것은
조선을 버리고 서구열강에 들어가겠다고 하는 선언이었으며
메이지 유신 때 상투를 제거하였다.
중국에 새로운 혁명정부가 들어서자
메이지정권은 대륙의 일부지역과 대만을 남겨둔 채
일본열도에서 본격적으로 일본시대를 열게 된다.
이 영향으로 대만은 친일국가가 된다.
대만의 1.21사태는 이런 친일토착민들이 대륙의 중국정권에 대해 반기를 든 사건이며
이때 대륙국민당군대는 학살을 하여 전에 왜인이었던 사람을 제압한다.
그런 분위기가 남아 있어서 대만사람들이 비록 대륙식 이름을 가지고 있지만
그전에는 왜식 이름을 더 많이 가지고 있었고 지금도 대만은 친일국가이다.
대만은 유구왕국의 일부였으며 장개석이 대륙에서 쫓겨 오기 전까지는 왜 땅이었다.
일본이 패망한 이후 미국 주도 하에 국민당 정부가 대만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이런 배경이 있었기에 이등휘 총통이 퇴임 후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를 했던 것이다.
http://www.koreahiti.com/
코리아 히스토리 타임즈
http://misahyeop.com/gnu/
미래로 가는 바른 역사 협의회 -줄여서 미사협
대한민국 미래100년 바른역사 세우기
http://cafe.daum.net/coreahistech
아시아=조선 - 하멜표류기 원본 번역한 최두환 박사 카페
http://cafe.daum.net/munmoo-chosunsa
문무의 조선사
http://cafe.daum.net/asiahistoryreserch
동북아 역사 연구소
http://cafe.daum.net/manjumongolcorea
다물회 (고토수복과 역사회복)
대륙조선이란 말은
무슨 음모가 있는게 아니라
고구려 고려 조선초기에는
중국 대부분을 지배했지만
110년전에는 국력이 약해져
동간도 서간도 북간도 연해주가 속한 간도영역까지(한반도 1.5배) 축소되었다는 말
고려한양.조선한양이 간도지역
그래서 100년만인 2009년
정부가 간도되찾기 유엔에 제소
세종때 정인지가 편찬한 고려사 제 56 권 2째줄에 강토가 만리라고 기록 ㅡ 내글 1000가지와 하멜 표류기 참조
반대하는 사람들은
왜놈 자손이거나
친일 종미파인 자한당 바른당 하수인들 이라고 봄
아님 뉴라이트나 이병도 후예들
고대사학회 김원룡 제자들이겠지요
또 강단에서 왜곡역사를 가르치는 사람들이거나
하수인들 ..
과거 중국 대륙땅 일부가 조선땅이었다는것을 반대하는 사람은
미국이 핵실험하고 미사일 발사하는것은 됀찮고,
북한이 하면 안된다는 논리에 동조하는 사람이라고 봄.
그럼 독도도 일본이 다케시마라고 우기니까 그냥 주면 되겠지요
동북공정이 간도지역 조선역사를 중국역사로 편입하는것..
그기에 반대해서 동북아 역사재단을 만든것..
반대하는 사람들은 2개 단체의 설립목적도 모르는 사람들이고 봄
고로 친일파=종미파겠지요.
아님 해방후 한국인으로 개명한 왜놈 후손이겠지요..
이병도는 이완용 조카..
http://cafe.daum.net/sisa-1/f8lD/732
통일준비정부, ‘간도협약 무효’ 국제사법재판소에 소송 제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