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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10일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호세아 10,1-3.7-8.12 마태오 10,1-7
남과 비교하며 살고 싶지 않아요?
남과 비교하며 살고 싶지 않은데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느냐고 묻는 분들이 계십니다.
남과 비교하면 힘들어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어떤 분이 ‘비교’로 이행 시를 지었는데 이렇게 지었습니다.
비: 비참해지거나,
교: 교만해지거나.
내가 남과 비교하는 이유는 우월해지기 위해서입니다.
남과 비교해서 열등감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열등감 때문에 우월해지려고 남과 비교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선은 사람은 어차피 비교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내가 누군가와 비교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 살아서 어떠한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불교나 뉴에이지와 같은 쪽에서는 남과 비교하는 것조차 내려놓아야 한다고 하는데, 어쩌면 이는 달리지 말고 그 자리에 멈추어 서라는 말과 같습니다.
사실 스님들도 자신이 부처처럼 되기 위해 달리는 것이고 누가 더 앞서가는지 뒤처지는지 같은 길을 가는 다른 이들과 자신을 비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누군가와 나 자신을 비교하고 있다는 것은 어디를 향해 달리고 있다는 것이니 좋은 징조입니다.
다만 방향은 좀 수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부터 제가 말씀드릴 이 두 사람 중 누가 더 부러운지 생각해보십시오.
둘 다 수천억의 자산가입니다.
이탈리아의 ‘잔루카 바키’라는 인물이 있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금수저를 입에 물고 있었습니다.
수천억의 재산과 초호화 보트, 개인 제트 비행기, 수영장 딸린 저택은 기본입니다.
지금은 나이가 들어 거의 할아버지인데도 미스 유니버스와 같은 젊은 최고의 미녀들을 바꾸어가며 삽니다.
그의 저택에는 잡지에나 나올법한 미녀들이 몇 명씩 함께 삽니다.
그는 SNS를 통하여 자신의 삶을 세계 많은 이들과 공유합니다.
부러움을 사기 위해 올리는 것입니다.
행복하다면 다른 사람들의 부러움을 구하기 위해 그렇게 열심히 자신을 홍보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자랑은 부족한 행복을 채우기 위한 수단입니다.
그리고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그의 추종자가 되어 그의 하루하루를 부러워하며 그의 부족한 행복을 채워주고 있습니다.
그다음은 우리가 잘 아는 홍콩의 ‘주윤발’ 씨가 있습니다.
얼마 전에 자신의 재산 ‘8천억 원’을 전액 사회에 기부하겠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아내도 이에 동의하였습니다.
주로 지하철을 이용하고 저렴한 식사를 하고 싸구려 시계와 옷을 입습니다.
건전하고 겸손한 생활의 대명사입니다.
하느님께서 만약 두 사람의 인생 중 누구를 택하겠느냐고 물으시면 어떤 삶을 택하시겠습니까?
바키를 선택하시는 분들은 돈과 쾌락과 명예를 추구하시는 분이고, 주윤발 씨를 택하는 분은 그것보다는 하느님 뜻에 맞는 삶을 원하시는 분들입니다.
결국, 내가 부러워하는 것은 단순한 그 사람이 아닙니다.
내가 도달하고 싶은 방향으로 나보다 앞서가는 사람입니다.
나의 달리는 방향을 바꾼다면 이전에 부러워하던 사람들은 마치 만화영화에나 나오는 사람처럼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열두 사도를 뽑으십니다.
열두 사도를 뽑아 파견하신다는 말은 ‘소명’을 주신다는 뜻입니다.
소명은 삶의 방향이고 인생의 목적지입니다.
주님께서 목적지를 지정해주시는 것입니다.
그 목적지가 삶의 이유이고 행복임을 믿는다면 이제 그들은 누구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다만 자신과 함께 달리는 동료들이 있을 뿐입니다.
소명은 그 사람 개인에게 주어진 것이기에 소명대로 사는 사람의 경쟁자는 결국, 자기 자신입니다.
소명을 받은 이들은 주님께서 정하신 목적지에 다다르지 못할 것만을 걱정하여 남 신경 쓸 겨를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나의 비교 대상은 나 자신이고 나의 주위에서 달리고 있는 이들은 또한 내 협조자들이고 나의 위로자들이고 나를 발전시킬 수 있는 대상들입니다.
정리하자면, 우선 비교 대상이 없는 사람이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비교하지 않고 사는 것은 무기력에 빠지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제자리 뛰기를 하는 사람보다 목적지를 향해 눈이라도 돌리는 사람이 더 활기차고 행복합니다.
그러나 세속적인 것들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과 비교하며 비참해지거나 교만해지거나 합니다.
비참해져도, 교만해져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소명을 깨달은 사람은 누구도 부러워함 없이 함께 뛰는 사람들을 발전의 기회로 삼습니다.
그래서 나에 대한 주님의 소명을 찾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나의 진정한 비교 대상은 ‘어제의 나’여야 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7월10일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복음: 마태 10,1-7
오늘도 큰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예! 하고 외치며 주님 앞으로 나아갑니다!
당신을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예수님께서 직접 이름을 한명 한명 호명하면서,
당신 가까이 부르시는 장면을 묵상해봅니다.
그분으로부터 선택받은 제자들 입장에서 얼마나 큰 기쁨이고 영예였겠습니까?
저희 사제나 수도자들도 비슷한 체험을 했습니다.
종신서원때, 사제수품식때, 신학교 학장 신부님이나 수도원 양성 책임자는 회중들 앞에서
저희의 이름을 크게 부릅니다.
잔뜩 긴장해있던 저희는 이름이 불려지면, 네 여기 있습니다! 하고 일어나 주교님 앞으로 나아갑니다.
이토록 부족하고 나약하며, 허물과 죄 투성이인 저를 당신 가까이 불러주신 하느님께 깊은 감사의 눈물을 흘리며 그분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내 이름을 직접 불러주신다는 것, 얼마나 놀랍고도 은혜로운 일인지요.
오늘도 아무것도 아닌 나, 정말이지 보잘것없는 나, 내세울 것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나를 불러주신 그분께 백번 천번 감사드리면서, 또 다시 그분 앞으로 나아갑니다.
사실 하느님의 인류 구원 사업이란 대 명제 앞에 때로 거추장스럽고 별 도움도 되지 않는 우리 인간들입니다.
그러나 과분하게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구상하는 위대한 사업에 별 효용가치도 없는 우리를 끌어들이십니다.
참으로 은혜로운 초대요 너무나 분에 넘치는 초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열두 제자들에게 있어 부르심 그 자체가 구원에로의 초대였습니다.
그분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하고 따라나서는 그 자체가 구원되는 길이었습니다.
하느님의 구원 사업은 예수님을 통해 정점에 도달합니다.
용서하고 해방하며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참 모습이 예수님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그러우시고 겸손하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구원사업 여정에 우리를 참여하라고 부르십니다.
우리 같은 소자본 주주들 당신이 구상하는 큰 사업에 별 도움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파트너가 되어줄 것을 바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인간 본성을 취하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신성하게 만드셨습니다.
필멸의 운명을 지닌 우리를 당신 나라의 영원한 생명의 문으로 인도하셨으며, 썩을 몸인 우리를 불변의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참스승이신 예수님께서는 오랜 세월 우리 인간이 지니고 온 고통과 죽음을 말끔히 가져가지 않으셨습니다.
당신 스스로 고통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당신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통해 고통과 죽음을 대하는 올바른 방법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을 뚫고 나아가시면서 고통을 변화시키신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그 옛날 의기소침해있던 제자들을 부르셔서 당당한 당신 사업의 파트너로 부르셨듯이 오늘 우리도 부르십니다.
우리에게 죽음을 대면하도록 부르시고, 죽음의 두려움 앞에 나를 세우기 위해 부르시고, 부활에 대한 신뢰로 두려움을 넘어서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할 일이 뭐가 뭔지, 돌아가는 분위기 파악도 제대로 못하는 무책임한 제자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말씀, 그분의 삶 전체, 십자가 죽음 앞에 자신의 온 삶으로 응답하는 제자를 원하십니다.
구원은 과거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늘 새롭게 일어나야 하는 현실입니다.
부르시는 주님의 초대에 시시각각으로 응답하는 일, 고통과 두려움을 딛고 일상적으로 일어서는 일이 오늘 내 하루를 구원합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하느님의 구원과 해방, 사랑의 힘이 우리 안에 자리 잡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 힘으로 내가 변화되고 성장해야 합니다.
분열과 방황, 죄와 타락의 세력 앞에 담대히 맞서 오늘 내가 구원되는 하루가 되길 빕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강론>
(2024. 7. 10. 수)(마태 10,1-7)
<‘가정의 복음화’가 먼저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다.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동생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토마스와 세리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 열혈당원 시몬,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예수님께서 이 열두 사람을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마태 10,1-7)”
1) 열두 사도의 명단에 대해서, “복음서 저자들은 왜, 배반자 유다의 이름을 기록했을까?” 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의 이름을 지우고 ‘마티아’를 기록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순전히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세속의 역사 기록에서는 부끄러운 일들을 그런 식으로 감추고 덮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그렇게 감추고 덮어버린 것들을 후세의 학자들이 다시 찾아내기도 합니다.
성경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기록한 책이고, 성령께서는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사실 그대로 기록하라고 복음서 저자들에게 명령하셨을 것입니다.
만일에 부끄럽다고 해서 감추고 덮어버렸다면, 그래서 성경에 사실과 다른 내용이 하나라도 들어 있다면, 바로 그 하나 때문에 성경 전체가 권위와 신뢰를 잃게 될 것입니다.
복음서와 사도행전과 서간문에, 사도들이 잘못한 일들까지 모두 기록되어 있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어떻든 예수님께서 사도로 뽑으신 제자들 가운데에서 배반자가 생긴 것은 사실이고,
유다는 영원히 ‘배반자’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유다를 사도로 뽑으셨는지, 그가 배반한다는 것을 아시면서도 뽑으셨는지,
모르셔서 뽑으셨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만일에 아시면서도 뽑으셨다면, 유다에게 배반의 책임을 묻기가 어렵게 되고, 모르셔서 뽑으셨다면 주님의 ‘전지전능’이 완전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 되어버립니다.
그 문제는 세상 종말까지 수수께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마티아를 사도로 뽑을 때, 교회 공동체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 이 둘 가운데에서 주님께서 뽑으신 한 사람을 가리키시어, 유다가 제 갈 곳으로 가려고 내버린 이 직무, 곧 사도직의 자리를 넘겨받게 해 주십시오(사도 1,24-25).”
이 기도는, 주님께서 유다에게 사도 직무를 맡기신 일은 취소되지 않았지만, 그 직무는 유다 자신이 ‘내버림으로써’ 마티아에게로 넘어갔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내려 주신 은총은 취소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받은 사람 쪽에서 그 은총 속에서 머무르지 않고, 주님께서 주신 은총을 내버린다면, 그 사람은 은총을 잃게 되고, 그 은총은 다른 사람에게로 넘어갑니다.
2)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라는 말씀은, ‘지금은’ 이방인들에게 가지 말고 ‘나중에’ 가라는 뜻입니다.
그 ‘나중’은 ‘성령 강림 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실 때,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ㄱ).”, 또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ㄴ).” 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이라는 말은,
여기서는 그냥 ‘유대인들’이라는 뜻입니다.
‘길 잃은 양들’이라는 말은, 앞의 9장 36절에 있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라는 말에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가는 것은 나중에 하고,
지금은 유대인들에게만 가라고 명령하신 것은
세 가지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1) 그것은 하느님께서 정하신 순서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특별히 선택하셔서 뽑으셨습니다.
<모든 민족들 가운데에서 ‘이스라엘만’ 뽑으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을 먼저 뽑으셨습니다.>
예수님도 아버지의 뜻에 따라서 유대인들에게 먼저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2) 사도들이 아직 준비가 안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령 강림 후에는 믿음과 용기로 가득 차서 온 세상의 모든 민족들을 상대로 선교활동을 하게 되지만, 성령 강림 전에는, 동족인 유대인들을 상대로 선교활동을 하는 것도 힘들어 했을 것입니다.
(3) 이방인들 쪽에서 아직 준비가 안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에 대한 복음을 선포하려면, 우선 먼저 하느님부터 믿게 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아예 모르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알려 주지는 않고 예수님의 복음부터 전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의 명령을,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에게 먼저 복음을 전하여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을 놓아두고, 즉 자기 가족을 놓아두고 먼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복음을 전해 주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사람들을 ‘구원과 생명의 길’로 인도하는 일인데, 우선 먼저 자기 가족부터 그 길로 인도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가정의 복음화’가 세상의 복음화보다 먼저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