깎아지른 하얀 석벽이 안개에 싸인 백암산(白巖山)에는 고불(古佛)총림 백양사(白羊寺)가 자리잡고 있다. ‘하얀 양의 절’이라는 이름 때문에 하얀 석벽이 마치 양떼처럼 보이기도 한다. 특히 백양사 주위는 천연기념물 제153호인 비자나무 숲과 차밭이 펼쳐져 있어 온화하고 부드러운 기품이 있다. 1996년 5대총림 중 마지막으로 ‘공식’ 총림 지정을 받은 고불총림 백양사는 사실 가장 먼저 총림을 자체적으로 결성한 곳이다. 1947년 만암(曼庵)스님은 일제잔재 청산과 민족정기 함양, 승풍진작 등 3대 목표 아래 호남의 20여개 사암과 포교당을 동참시켜 호남 고불총림을 결성했던 것이다.
또 백양사는 조선말에 전국 선방을 휩쓴 경허스님의 선풍 대신 자체적인 ‘독립 선맥’을 자랑한다. 선교(禪敎) 양종 통조인 청허 휴정선사의 5대 적손 환성지안(喚惺志安)선사의 심인을 전해 받은 이들이 대대로 백양사에 주석하며 선풍을 드날렸다. 특히 소요대사 태능(逍遙大師 太能·1563~1649)은 조선 중·후기 선종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로 그의 법명을 딴 ‘소요파’는 조선시대 억불정책 속에서도 그 흐름을 이어왔다. 경허스님의 선풍이 전국을 뒤덮은 조선말, 유독 백양사 일대에서는 경허의 선풍 대신 학명스님과 만암스님이 선풍을 진작시켰고, 만암의 제자인 서옹스님이 현재 백양사의 방장으로 그 선맥을 받았다. 대흥사, 선운사는 백양사와 한 문중으로 한국불교의 독자법통을 이어가고 있다. 또한 백양사의 스님들은 모두 직계스승과 관계없이 방장스님 밑으로 들어가는 전통이 있기 때문에 다른 사찰처럼 한 문중 안에서도 계보를 따지는 법이 없이 화합된 모습을 보여준다.
-선·교 쌍전 수행…‘이 뭣고’ 화두 유명-
◇만암종헌(曼庵宗憲·1876~1956)스님의 출가와 수행=만암스님은 백양사의 근대 역사에서 가장 핵심적인 인물이다. 4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11살에 어머니마저 세상을 뜨자, 스님은 백양사 취운도진(翠雲道珍)선사의 문하에서 출가한다. 환응(幻應)강백으로부터 전강을 받은 스님은 운문암과 청류암에서 경을 가르치다가 32세때인 1907년 해인사 강백으로 추대되었다. 특히 만암스님은 어수선한 일제 강점기에 대부분의 승려가 결혼을 하는 상황에서도 백양사의 가풍에 따라 결혼하지 않은 비구로서 청정한 모습을 보였다. 현재 조계종의 고승으로 추앙받는 스님들 중에서도 상당수가 속가에 자녀들을 두고 출가한 것으로 미루어볼 때, 백양사의 청정가풍은 미루어 짐작이 되는 것이다.
스님은 항상 선과 교를 쌍전하며 수행하였다. “승려는 행(行)이 기본이 된다”면서 “자기 공부가 먼저 이루어진 뒤에야 다른 이를 위해 헌신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또 “중이 되기 전에 부처를 말하지 말라”며 머리를 깎았다고 다 승려가 아니요, 먹물 옷을 입었다고 모두 중일 수 없다는 분명한 승가상을 제시했다.
하루하루의 일과가 철저한 수행이었던 스님은 매일 새벽 3시 아침도량석과 함께 냉수욕으로 시작해 예불이 끝나면 후학들의 아침인사를 받으면서 한사람 한사람씩 공부를 지도했다. 그후 선방에 모두 들어가 입선(入禪)하고 공양도 대중과 더불어 했다. 방선(放禪)때는 수행삼아 붓글씨를 썼고 저녁예불이 끝나면 선정에 들었다가 삼경이 되면 대중들에게 저녁인사를 받으며 다시 한사람씩 지도를 했다고 한다. 특히 스님은 화두로 ‘이 뭣고’를 권해 후학들로부터 ‘이 뭣고 스님’이라고 불렸다.
만암스님의 제자인 현재의 방장 서옹(西翁·92)스님은 “스님은 매우 자상하셨지만 공부에 있어서만큼은 엄격하셨다”고 회고했다. 특히 만암스님의 사랑을 받았던 서옹스님은 “몸이 약했던 나를 위해 어려운 살림에도 불구하고 보약을 지어 먹이셨다”면서 자상했던 스승의 기억을 떠올렸다.
-교육사업등 벌여 사찰 재정자립 꾀해-
◇스님의 교육과 자립불교 정신=특히 사찰의 재정이 극도로 빈곤하던 당시에 스님은 교육과 재정자립에 힘을 쏟았던 깨인 선지식이었다. 1916년 백양사의 주지가 된 만암스님은 교육사업에 혼신의 힘을 다했다. 백양사 바로 옆의 청류암에 ‘광성의숙(廣成義塾)’을 설립했는데, 이곳에서는 전통 강원의 교육을 한 것이 아니라 교학, 선, 율과 함께 국어 국사 수리학 등 현대 학문도 가르쳤다. 또한 쌍계루 옆에 일반인을 위한 보통학교인 ‘심상학교’를 세워 한글과 국사, 수리와 농학을 교육했는데, 인근부락은 물론 멀리 정주 순창에서까지 이곳으로 찾아왔다고 한다.
이같은 교육사업의 경험을 바탕으로 1925년 서울에 올라온 만암스님은 박한영(朴漢永)스님과 함께 재단법인 조선불교 선교양종 중앙교무원을 세우고, 전국사찰로부터 출자를 받아 1928년 불교전수학교를 개교시켜 초대교자에 취임했다. 바로 이 학교가 중앙불교 전문학교를 거쳐 현재의 동국대학교이다. 또한 해방된 후 1946년에는 목포 정광중·고등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
재정자립을 위한 만암스님의 노력도 앞서가는 것이었다. 항상 반농반선(半農半禪)을 강조하며 사찰재정 자립을 역설한 스님은 매일 일정시간의 울력(공동노동)을 통해 수입을 모아 ‘선불장(選佛場)’이란 공동기금을 조성했다. 스님들은 주로 농사와 양봉, 숯 굽기, 죽세공품 만들기를 통해 선불장 기금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뿐 아니다. 훗날 금호고속과 전남방직의 모태가 되는 ‘전남 여객버스회사’와 ‘전남 베어링 공장’을 세웠고, 목포에는 ‘동광 유지회사’를 설립해 사찰재정의 독립을 꾀했다. 또 어려운 인근주민들을 돕기 위해 일부러 연못 수리, 논 자갈 치우기 등 일거리를 만들어 사하촌 사람들을 불러 일을 시켰다.
-이승만의 ‘대처승 축출’에 절충안 내놔-
◇교단정화의 소용돌이=1910년 이회광(李晦光) 등 승려들이 일본의 조동종과 결탁해 우리 불교를 예속시키려 하자 1911년 만암스님은 박한영, 한용운 등과 함께 임제종을 세웠다. 이후 1941년 훗날 조계사로 명칭을 바꾼 태고사를 서울 한복판에 세우는 데 앞장선 스님은 1세교정으로 한암스님을 추대한다. 한암스님의 뒤를 이어 2세교정이 된 스님은 조계종으로 종명을 바꾸고 초대 종정에 취임한다.
1955년 이승만 대통령의 ‘대처는 물러가라’는 교시로 시작된 교단정화의 소용돌이가 불어닥친다. 300여명의 비구들이 7,000여명의 대처승들을 몰아내는 이 작업의 부작용과 ‘불교의 자비심’을 강조한 스님은 “한꺼번에 대처승을 몰아낼 것이 아니라 종단을 수행승과 교화승으로 이원화해 중요직은 수행승이 맡되 그밖의 사찰사무나 포교 등 수행승이 하기 어려운 일은 교화승이 할 수 있도록 하자”는 절충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이것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게다가 비구 중심의 선학원측이 ‘조계종의 종조를 기존의 태고보우(太古普愚)로부터 보조지눌(普照知訥)로 바꾼다’는 선언은 만암스님이 도저히 묵인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길로 백양사로 돌아간 만암스님은 “종조를 바꾸는 것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될 환부역조(換父易祖,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바꾸는 일)”라며 용납하지 않았다. 학인시절 직계조상인 연담(蓮潭)스님의 진영을 다른 절에서 가지고 나오기 위해 그 절의 스님과 아랫도리를 걷어올리고 누가 더 오래 견디는가를 겨루어 이겼던 만암스님으로서는 도저히 환부역조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제자들에게 모든 물품 나눠준뒤 열반-
◇만암스님의 열반=만암스님은 1955년 8월 어느날 문도들을 큰 방에 불러모아 “이제 사흘 후 옷을 벗어야겠다”고 했다. 특별한 병세가 없이 정정한 만암스님이었기에 대중들은 황망하고 민망해했다. 만암은 이때 슬퍼하는 제자 석호(서옹스님의 옛 법명)에게 전법게를 내리며 후사를 부탁했다. ‘백암산 위 한 사나운 범이/한밤중에 돌아다니며 사람을 다물어 죽인다/서늘하고 맑은 바람을 일으키며 날아 울부짖으니/가을하늘에 밝은 달빛은 서릿발처럼 차가웁다’
“마지막 입는 옷에는 주머니가 없다”는 말과 함께 가지고 있던 모든 물품을 제자들에게 나누어 준 만암스님은 사흘뒤 자는 듯 눈을 감았다.
다비식에서 영롱한 사리 8과가 나왔는데 백양사와 제주도 사라봉 보림사의 사리탑에 나뉘어 보관되었다. 특히 제주도로 가는 중에 스님의 사리에서 빛이 나고 증식을 하는 기이한 현상을 보였고, 이 일을 계기로 사리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이 더욱 커졌다고 한다.
[5대총림 禪의 현장을 찾아서](5)古佛총림 백양사下
근세불교의 중시조로 추앙받는 경허스님의 법맥 대신 400년간 면면히 내려온 독자법맥을 가진 고불총림(古佛叢林) 백양사(白羊寺)의 근세 중시조는 만암(曼庵)스님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특히 백양사의 모든 스님들은 공식적으로 방장스님의 법제자가 되는 가풍 때문에 어른에 대한 효와 예의는 그 어느 절집보다 지극하다. 만암스님이 1955년 정화의 혼란기에 비구측이 종조를 태고보우에서 보조지눌로 바꾸려 하자 “환부역조(換父易祖)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대로하며 종정자리를 버리고 백양사로 내려온 것도 이 때문이다. 일찍이 학교와 회사를 세우며 교육과 사찰 자립에 열의를 보여온 만암스님의 정신은 ‘선교(禪敎)’를 함께 중시하고 호화불사를 자제하는 근검절약의 가풍과 일맥상통한다. 총림이면서도 방장스님의 거처인 염화실이 단독별채가 아닌 곳은 백양사 밖에 없을 정도다. 이러한 가풍은 만암스님이 가장 사랑했던 제자이자 현 방장인 서옹스님에게 그대로 전수되었다.
-고교때 간디 책 읽다가 출가 결심-
▲서옹석호(西翁石虎·1912~)스님의 출가와 일본유학=고고한 백학을 연상시키는 단아한 서옹스님은 충남 논산에서 대대로 벼슬을 하던 유학자 집안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속명은 이상순(李尙純)이다. 7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할아버지 밑에서 홀어머니와 지낸 서옹스님은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했다고 한다. 14세에 서울로 이사와 이듬해 월반해 양정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입학과 동시에 홀어머니가 세상을 뜨고 할아버지마저 뒤를 따르자 큰 충격을 받는다. 서옹스님은 “한꺼번에 몰아닥친 비운으로 어린 나는 하늘과 땅도 보이지 않고 막막할 지경이었다”고 회고했다. 다행히 스님의 숙부가 집안을 돌보았기 때문에 학업이나 생활에는 지장이 없었다.
당시 양정고등보통학교에는 무교회주의 기독교인으로 유명했던 김교신(金敎臣) 선생과 위암 장지연(張志淵) 선생이 있었다. 서옹스님은 김교신 선생으로부터 간디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관련서적을 탐독하던 중 불교와 만나게 된다. “철학 책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는 서옹스님은 “간디의 책을 읽다가 불교의 참맛을 알게 되었고, 결국 머리를 깎기로 결심했다”고 말했다.
매년 우등상을 받을 정도로 뛰어난 성적이었던 스님은 중앙불교전문학교 입학을 결심하지만 경성제대 예과에 진학할 것을 권유하던 선생님과 숙부의 심한 반대에 부딪힌다. 그럼에도 서옹스님은 각황사(현 조계사)에서 대은스님에게 머리를 깎을 결심을 밝힌다. 대은스님은 “훌륭한 스님을 소개하겠다”면서 만암스님의 제자가 될 것을 권했다. 숙부는 스님의 출가를 결사적으로 반대했으나 만암스님을 뵙고는 “조카를 잘 부탁한다”며 물러섰다고 한다.
백양사에서 2년간 외전강사(영어 및 일반 사회학문을 가르치는 사람)를 하다가 오대산 방한암 스님 밑에서 다시 2년간 용맹정진한 스님은 1939년 일본 교토 임제대학으로 유학을 떠난다. 스님이 임제대학 졸업논문으로 쓴 ‘진실자기(眞實自己)’는 일본 불교학자 니시타 기타로와 다나베 하지메의 선(禪)학설의 오류를 지적해 큰 화제를 일으키기도 했다. 일본의 대학자로 추앙받았던 히사마츠 신이치 박사(경도대 화엄학·작고)는 서옹스님에게 일본에 남을 것을 간곡히 부탁했지만 귀국한다. 훗날 한국전쟁 소식을 들은 히사마츠 박사는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서옹스님만 살아준다면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했다고 전한다.
-“속이 빈 사람이 겉을 치장 하는 법”-
▲수행과 깨달음=일본 임제종 총본산인 교토 묘심사(妙心寺)에서 3년간 수행정진하다가 1944년 귀국한 서옹스님은 백양사와 목포 정혜원에서 잠시 주석하다 부산 선암사 선방에서 수행정진을 계속한다. 이때 서옹스님은 통영 안정사 천제굴에서 정진하던 성철스님과 처음으로 만나 평생 도반이 된다. 서옹스님은 “동갑이었던 성철스님이 간 지 벌써 10년이 되었다”며 뜻이 통하던 성철스님을 그리워했다. 이후 1963년 동국대 대학선원 원장으로 취임하기까지 20년간은 제방선원을 떠돌며 수행을 했다고 한다. 1965년 서울 천축사 무문관(無門關·6년간 밖에 나오지 않고 참선만 함) 초대조실이 되었고, 68년 묘심사를 다녀온 후부터 석호라는 법명 대신 현재의 법명인 서옹을 쓰기 시작한다.
동화사 조실로 주석하던 1971년경 큰 깨달음을 얻은 스님은 다음과 같은 오도송을 읊었다. ‘상왕은 위엄을 떨치며 소리치고 사자는 울부짖으니/번쩍이는 번갯불 가운데서 사와 정을 분별하도다/맑은 바람이 늠름하여 하늘과 땅을 떨치는데/백악산을 거꾸로 타고 겹겹의 관문을 벗어나도다’. 스님은 이후 백양사 운문선원, 봉암사 희양선원 조실로 잇달아 주석했고 1974년 고암스님 후임으로 5대종정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서옹스님은 제자들을 가르침에 있어서도 결코 화를 내거나 큰소리를 내지 않는다. 서옹스님의 상좌인 정도스님은 “서옹스님은 결코 남을 나쁘게 이야기하는 적이 없는데, 가장 심한 말이 ‘저 사람은 왜 저래’ 정도일 것”이라고 기억했다. 다만 시간을 지키지 않는데 대해서는 따끔하게 이르는 편이다. 13년째 서옹스님을 시봉하고 있는 시자 호산스님은 “운문선원에서 시봉할 때, 한번은 새벽 3시 예불시간에 늦잠을 잤더니 정확히 3시5분에 문앞에서 주장자로 댓돌을 쿵쿵 두드리시며 큰소리로 ‘호산! 호산!’ 하고 부르셔서 깜짝 놀라 기겁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이후부터 호산스님은 저녁에 잠들 때마다 물을 큰대접으로 마시고 자는 버릇을 들여야 했다. 그래야 화장실에 가고 싶어서라도 제시간에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스님은 근검한 가풍에 따라 절대 치장하는 일에는 뜻을 두지 않는다. 다른 총림과 달리 방장실을 독채로 짓지도 않으며, 주지실 바로 옆방을 그대로 쓴다. 서울에 볼일이 있을 때마다 머무는 상도동 백운암도 70년대의 낡은 2층양옥이다. 오히려 주변에서 ‘누추하니 좀 수리를 하시라’고 권하면 “속이 빈 사람이 겉을 치장하는 법”이라며 물리친다. 대신 백양사의 손님방은 어느 절의 것보다 깨끗하고 정갈하게 지어놓았다.
-‘참사람 운동’ 시작 무차선대회도-
▲참사람 운동과 무차선 대회=1996년 정식으로 고불총림 인준을 받은 스님은 본격적으로 ‘참사람 운동’을 시작한다. 참사람 결사의 세가지 서원은 다음과 같다. ‘첫째, 무상무주(無相無住)의 참나를 깨달아 자비생활을 합시다. 둘째, 어디에도 걸림없이 자유자재하여 세계인류가 평등하고 평화스럽게 사는 역사를 창조합시다. 셋째, 자기와 인류가 생물과 우주가 영원의 유일 생명체이면서 각각 별개이므로 서로 존중하고 서로 도와서 집착함이 없이 진실하게 알고 바르게 행하며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세계를 건설합시다’
1998년 백양사에서 86년 만에 처음으로 무차선대회(지위고하나 재가·출가에 관계없이 평등하게 법을 물음)가 열렸다. 한국선을 정립하고 국내외 학자들에게 조사선의 종지를 정확하게 알리는 자리였다. 이 무차선대회는 2년뒤에 다시 백양사에서 열렸고, 지난해에는 부산 해운정사에서 ‘한·중·일 국제무차선 대회’로 이어졌다. 92세의 나이에도 정정한 서옹스님은 제자들을 볼 때마다 “한번 법을 일러보라”며 부쩍 다그친다. 시간은 별로 많지 않은데 눈밝은 수좌를 하나라도 더 찾아내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이다.
초라한 거처서 손수빨래 요즘도 제자들과 선문답
◇서옹스님 시봉한 두백스님
“아마 백양사는 5대총림 중에서는 물론이고 24개 교구본사 중에서도 가장 경제력이 취약한 곳일 겁니다. 그러나 우리처럼 두 군데의 선원을 유지하는 곳은 아무데도 없습니다. 눈밝은 선지식을 길러내야 한다는 방장스님의 강력한 의지 때문이죠”
다른 절처럼 불전을 모으기 위한 이벤트성 불사를 하지 않기 때문에 자연히 신도들이 많이 찾지 않는다. 그래서 운문선원과 고불선원에서 공부하는 대중들의 뒷바라지가 쉽지만은 않다. 그러나 오로지 스님들이 조용히 공부만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떠들썩한 이벤트는 사양이다.
두백스님은 “아무리 스님의 거처를 좀 수리하고 지내시라고 해도 큰스님께서는 ‘그런 허튼 곳에 돈 쓸 생각말라’며 나무라십니다”라며 손을 저었다. 부드러운 인상과는 달리 서옹스님은 한번 마음 먹은 일에는 타협이 없다는 것이다.
“건강이 괜찮으시면 새벽 3시에 일어나 5시까지 정진하시고, 요가를 1시간쯤 하십니다. 1주일에 한번씩은 전 수좌들을 다 불러다가 1대 1 지도를 하셨죠”
서옹스님은 양말이나 속옷빨래도 최근까지 손수했다. 시자들이 몰래 빨래를 해놓으면 “왜 공부는 안하고 시키지 않는 일을 하느냐”며 역정을 내었다고 한다. 호랑이 스님으로 불리던 성철스님 밑에서 있다 백양사로 와서 서옹스님의 시봉을 들었던 한 스님은 “시봉은 하는 것 같지도 않다”며 감탄했다고 한다.
“요즘 기력이 떨어져 예전처럼 왕성한 활동을 하지는 않지만 큰스님이 가장 좋아하는 것은 제자들과 선문답을 나눌 때”라고 두백스님은 말했다. 서옹스님은 눈밝은 제자가 마음에 드는 대답을 하면 “좀더 일러보라”며 신선같은 웃음을 빙긋이 짓는다는 것이다.
첫댓글 덕분에 좋은 자료 감사히 늘 잘 보고 갑니다 날마다 좋은 날 되소서 나무아미타불관세음보살()()()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공부하고 갑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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