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의 세 단계 1
마음은 혼란과 의심으로 좀먹어
들어간다.소갈 린포체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티베트의 지혜>
불교 경전에 따르면 대자유에 이르기
위해서는 세 가지 단계가 필요하다.
귀 기울여 듣기. 참구. 그리고 명상이다.
처음 두 단계는 오늘날 학교에서
가르치는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귀 기울여 듣기 '는
스승에게서 직접 듣든 책을 통해서
접하든 새로운 사실과 생각을
귓속의 귀로 받아들인다는 의미이다.
여행을 통해 내가
만난 많은 교사들에 따르면
이 단계는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구구단 기초 문법, 교통신호 등의
기본 원리를 가르치는 것과
같은 배움의 초기 단계에 해당한다.
실천의 두 번째 단계인 '참구'는
애매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책이나 말로 행해진 가르침을
통해 배운 내용들을 깊이 생각하고
자신이 듣거나 읽은 내용이
삶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이해하고
반응하는 데 적합한 수단인지
아닌지 의문을 던져 보는 일이다.
9에다 9를 곱하면 실제로 81이
되는가를 알아보는 데는 아마도 많은
참구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붉은색 바탕에 '우선멈춤' 이라 쓰인
교통 표지판이 정지를 하고서
보행자나 다른 차가 있나 살펴보라는
의미임을 이해하는 일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자신의 삶이 불편함과 고통에
얼마나 깊이 물들어 있거나 조건
지워져 있는가를 생각해 보는 일처럼
더 큰 주제일 경우에는 시간을 가지고
좀 더 오래. 더 중요하게는 좀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 더 큰 주제에 대한 참구는
단순히 이렇게
자문하는 것으로 시작할 수 있다.
"지금 나는 내 피부에 만족하는가?
나는 이 의자에, 머리 위 이 전등에,
주위에서 들리는 이 소리들에 편안한가?"
이것에는 많은 분석이 요구되지
않으며 오래 검토할 필요가 없다.
이것은 지금 여기, 지금
이 순간으로 돌아와 살아 있음을
느끼는 하나의 과정이다.
그 다음으로는 가끔이든 자주든
자신이 자각한 적이 있는 생각과 감정
들에 대해 스스로 물음을 던질 수 있다.
과거에 자신이 내린 결정에 대해
몸을 떨며 후회한 적이 있는가?
최근에 개인적인 일이나
회사 업무 때문에 혹은
당신 삶 속의 누군가를 향해 화를
터뜨리거나 분개한 적이 있는가?
이런 물음을 던지는 것은
도덕적이나 윤리적으로 살펴
보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런 물음은 당신이
지적. 감정적.신체적 차원에서
불편함을 겪고 있는지 아닌지.
자신의 경험이 '네가지 고귀한 진리'의
근본 통찰과 일치하는지 아닌지를
참구하는 출발지점일 뿐이다.
'나는 불편한가?'
'나는 불만족스러운가?'
'나는 삶에서
무엇인가를 더 원하는가?'
어떤 단어들로 질문을 만드는가는
특별히 중요하지 않다.
당신이 지금 살펴보려는 것은 나의
스승님들이 말한 것처럼 개인적인
경험의 즉각적인 혹은 신선한 본질이다.
실천의 세 번째 단계인 '명상' 은
몸과 마음과 감정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판단 없이 다만
관찰하는 데서 시작된다.
적어도 불교 전통에서는
판단이 개입하지 않는 순수
관찰이 명상의 기초이다.
물론 많은 문화들은
자신들만의 특정한 명상 수행법을
발전시켜 왔으며 각각 그것이 생겨난
문화 환경과 특히 잘 어울린다.
나는 불교 전통 안에서 발달한
명상법에 기초해서 배워 왔기 때문에
다른 전통과 다른 문화에서 전개된
수행에 대해서는 자세히 설명할 수 없다.
붓다에 의해 소개되고 불교가
전파된 나라의 위대한 스승들에 의해
수 세기에 걸쳐 발전되고 다듬어진
수행법들이 매우 다양하긴 하지만
이것들의 기초는 판단
없이 경험을 관찰하는 일이다.
심지어 '아.20년 전에
나는 이러이러한 일을 했지.그것을
후회한다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가.
그때 난 어렸지 않은가!' 라는
생각을 바라보는 것조차 명상이다.
명상은 우리 안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생각과 감정과 신체적인
느낌들을 단순히 관찰하는 연습이다.
그리고 그것은
실제로 하나의 연습이다.
몇 해 전, 한 서양인이
세랍 링 수도원을 찾아왔다.
당시 그곳에서는 티베트 불교의 매우
영향력 있는 스승이자 수도원장인
타이시투 린포체가 명상과
공에 대해 가르치고 있었다.
아마도 그 서양인은 명상 강의
시간에 잠을 잤거나 아니면
마음이 딴 데 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타이 시투 린포체가 공에
대한 가르침을 시작하자
그는 불현듯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런 결론에 이르렀다.
''나는 '나'를 제거할 필요가 있어.
'나'를 제거하면 공을 깨닫게 될 거야
나는 자유로워지겠지.
그렇게 되면 나에게는 더 이상 어떤
문제도 고통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
그러니 나는 앞으로 '나' 라는
말을 절대로 사용하지 않겠어."
그가 타이 시투 린포체에게 자신의
해결책을 말하자 린포체는
그것엔 어떤 이점도 없다고 말했다.
문제는 '나'가 아니다.
공을 깨닫기 위해서는 '나'의 근원인
무지와 욕망을 봐야만 한다.
하지만 그사람은 듣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생각해 낸 지름길이
붓다가 가르친 낡은 방식보다 더
빠르고 효과적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래서 그는 그 이후
'나'라는 단어를 일절 쓰지 않았다.
그는 "나는 자러 잘 거야''
대신 "자러 갈 거야''라고 말했다.
누군가 다람살라에 가는데 자신은
가지 않을 생각이면 이렇게 말했다.
"롭상은
다람살라에 갈 거야. 안 갈 거야."
처음엔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그런 식으로 일 년을
보내자 그는 완전히 미쳐 버렸다.
그는 공을 체험하지도 못했고 고통의
근본 원인들을 격파하지도 못했다.
단지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 척만
했을 뿐이다.셰랍 링 수도원을 떠난
그에게 그 후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지만 그의 지름길은
그다지 효과가 없었음이 분명하다.
사실 그것은 불교의 가르침에
대한 공통된 오해이다.
자유를 찾기 위해서는 '에고'라고
일컫는 것을 제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최근에 배운 바대로
에고는 본래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마음의 의식적인 측면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한 단어를
다른 사람들이 잘못 해석한 것이다.
그가 말한 에고는 결정을 내리고
계획하고 정보를 분석하는
일을 포함한 일련의 기능으로,
이것들이 모여서 욕망과
혐오라는 본능적인 성항들.
어린 시절 깊은 인상을
준 기억과 생각과 습관들,
그리고 우리의 환경에서 일어나는
사건들과 조건들 사이에서
균형을 취하는 일을 맡는다.
원래의 논문에서 프로이트는
이 기능들의
집합체를 '나'라고 언급했다.
섬세하게 균형을
잡는 행위에서 생겨나는 일관된
자아의식이 바로 '나' 인것이다.
'에고' 라는 단어는 후에
그의 통찰이 20세기 중반의
과학계에 더 잘 받아들여지도록
번역을 달리하면서 사용된 것이다.
지난 수년간 '에고'라는 말뿐 아니라
그것과 관련된 모든 용어들에
다소 부정적인 면들이 쌓여 왔다.
사람들은 큰 소리로 말한다.
"저 사람은 너무 에고가 강해."
"미안, 내가 너무
에고이스트처럼 굴었어''
이 다소 부정적인 의미의 '에고' 가
그 관련 용어들과 함께 붓다의
가르침을 담은 많은 책들과
번역서들 속에 쏟아져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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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 기초교리
실천의 세 단계 1
고구마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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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8.10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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