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쇄 관상 생활은 산에서 기도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파스카 신비, 곧 부활을 위한 죽음에 구체적이며 근본적으로 부합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과제로 삼은 교회의 옛 영성 전통은 관상 생활을 예수님의 ‘산상’ 기도와 연결시키거나, 누구나 가까이 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함께 머물라고 따로 부르신 사람들만이 갈 수 있는 한적한 곳과 연결시킵니다.
성자께서는 언제나 아버지와 일치를 이루고 계시지만, 당신의 생애 동안 고독과 기도, 만남과 친교의 특별한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순간들에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큰 기쁨을 맛보셨습니다. 이렇게 성자께서는 영원으로부터 당신을 낳으신 분을 향하여 아들로서 당신의 열정적 사랑과 끊임없는 활동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한적한 곳에서 드리신 기도와 관상 생활을 관련짓는 것은 관상 생활이 그리스도와 아버지의 관계에 동참하는 독특한 생활 방식임을 암시합니다. 예수님을 사막으로 인도하셨던 그 성령께서 수녀들에게 “영원하신 성령을 통하여”당신 자신을 아버지께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의 고독에 동참하라고 초대하십니다.
봉쇄 수녀원의 독방은 사람이 되신 말씀의 신부인 수녀가 그리스도와 함께 오로지 하느님께 몰입하여 사는 곳입니다. 이 친교의 신비는 수녀가 성령께 순종하는 정도와 성령의 은혜에 힘을 얻는 정도, 그리고 성자께 귀 기울이고, 그분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하며, 그분 영광을 찬양하고자 아버지께 자신을 바치고, 그분의 삶에 일치하는 정도에 따라 달리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봉쇄 생활은 그 구체적인 형식에서도 주님과 함께하고, 가난으로써 자신을 비우신 그리스도, 사물뿐 아니라 공간, 접촉, 세상의 많은 혜택을 포기함으로써 비움의 삶을 표현하신 그리스도와 함께하며, 십자가 위 말씀의 효과 풍부한 침묵과 하나 되는 특별한 삶의 방식이다. 따라서 고독 속에서 더욱 열심히 기도 생활에 전념하고자 세상을 등지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파스카 신비를 실천하고 표현하는 특별한 방법입니다.
곧, 봉쇄 생활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의 참 만남이며, 아버지 집을 향하여 쉬지 않고 올라가는 하나의 여정인 것이지요.
주님의 재림을 깨어 기다리는 이들에게 봉쇄 수녀원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절대적 사랑에 응답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말씀과 이루는 내밀한 신비 안으로 인간을 맞아들이시려는 하느님의 영원한 바람의 실현이기도 합니다. 말씀이신 성자께서는 성찬례를 통하여 당신 자신을 신랑으로 내어 주셨고 하느님과 이루는 완전한 친교의 중심으로 감실 안에 머무르시며, 봉쇄 수녀들의 삶 전체를 당신께 이끄시어 끊임없이 아버지께 바치십니다. 십자가 위에서 아낌없이 당신 몸을 바치신 신랑 그리스도의 은혜에 수녀들도 자기 ‘몸’을 바쳐 같은 방법으로 응답합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자신을 아버지께 바치며 구원 사업에 협력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탈속은 봉쇄 생활 전체에 성찬례의 특성을 부여합니다. 그것은 봉쇄 생활이 희생과 속죄의 요소에 더하여, 성자의 감사에 동참함으로써 성부께 감사하는 모습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인류와 맺으시는 관계의 역사는 배우자의 사랑의 역사입니다. 이 역사는 구약 시대부터 준비되었고 때가 차자 이루어졌습니다.
하느님과 그분 백성의 친밀하고 영속적인 유대를 설명하고자 하느님의 계시에는 혼인의 표상이 사용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을 신랑-메시아로 소개하시고, 신비로운 사랑의 교류를 통하여 하느님과 인류의 혼인을 성사시키시려고 오셨습니다. 강생으로 시작된 이 사랑은 당신 몸을 바치신 수난으로 절정에 이르며, 성찬례를 통하여 영원히 선물로 주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마음 속에 당신의 사랑과 아버지의 사랑을 부어 주시어, 그들이 성령의 은혜를 통하여 완전한 응답을 할 수 있게 하십니다. 봉헌 생활은 이 혼인의 생생한 표상입니다. 봉헌 생활이 신랑에 대한 사랑을 더욱 분명하게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신부인 교회가 주님과 이루는 완전한 결합의 신비는 봉쇄 수녀들의 소명을 통하여 더욱 의미 있고 철저하게 표현됩니다. 그들의 삶은 만유 위에 사랑받으시는 하느님께 전적으로 봉헌된 삶이며, 천상 예루살렘을 향한 끊임없는 전진이고, 하느님께 속하고 하느님을 관상하는 종말론적 교회의 예표입니다. 그들의 삶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하느님께 나아갈 근본 소명을 상기시켜 주며, 모든 교회 공동체가 어린양의 신부로 영원히 살아가기 위하여 나아갈 목표를 예시합니다.
수녀들은 봉쇄 생활로 세상에서 벗어나 ‘봉쇄된 사막’의 고독 안에서 하느님을 만납니다. 이 사막은 내적 고독과 영적 시련, 그리고 공동체 생활에서 요구되는 일상의 노동을 포함합니다. 이로써 말씀의 신부는 게쎄마니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느끼신 고독과 인류 구원을 위한 그분의 십자가의 고통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수녀들은 ─여성의 본질을 통하여─ 흠 없는 어린양의 흠 없는 신부인 교회의 신비를 더욱더 분명하게 드러내며, 개인적으로는 배우자 차원에서 오로지 관상에만 전념하는 성소 안에서 자신을 재발견합니다.
수녀들은 믿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이고 침묵을 사랑하며 강생의 신비에 봉사합니다. 또한 그들은 아버지께 자신을 바치신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하여 구원 신비의 협력자가 됩니다. 마리아께서 다락방에서 기도하시며 마음으로 교회의 출발을 지켜 보셨던 것처럼, 이제 교회의 여정은 봉쇄 수녀들의 사랑의 마음과 기도에 맡겨져 있지요.
무한한 가치를 지닌 수덕의 수단인 봉쇄 수녀원은 오로지 관상만을 지향하는 삶에 특히 잘 어울립니다. 봉쇄 수녀원의 완전성은 하느님께 대한 절대적인 봉헌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봉쇄 수녀원은 당신 창조물을 거룩하게 지켜 보시는 하느님의 표징이 되며, 오로지 그분께만 속하는 독특한 방식이 됩니다. 봉쇄 수녀원은 사람이나 물질적인 것에 쓸데없이 얽매이지 않고 오직 하느님만을 사랑하며 그분과 맺은 혼인 관계를 거룩하게 지키며 살아가는 전형적이고 효과적인 길입니다. 그렇게 하여 인간은 하느님만을 지향하며 하느님께 사로잡혀 오직 그분의 영광을 찬양하고자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관상 수녀들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여 주님이신 네 하느님을 사랑하라.”하신 주님의 첫째 계명을 가장 훌륭하게 실천하며, 이 계명을 자기 삶의 완전한 의미로 삼아 하느님 안에서 모든 형제 자매를 사랑합니다. 수녀들은 완전한 사랑을 향하여 나아가며,“오직 필요한 한 가지”이신 하느님을 선택하고, 모든 것 가운데 모든 것이신 그분만을 사랑합니다. 수녀들은 하느님께 대한 조건 없는 사랑을 통하여, 복음이 제시하는 포기의 정신으로 모든 좋은 것을 제물로 바치고, 모든 좋은 것을 하느님께만 봉헌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느님께서만 봉쇄 수녀원의 완전한 침묵 속에 계시며, 그곳을 당신의 말씀과 현존으로 채우시고, 신부는 절대적이고 완전한 사랑의 신비 안에서 끊임없이 기도하고 기꺼이 보속하며 유일하신 하느님께 참되게 자신을 봉헌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에서, 초기의 영성 전통은 속세나 모든 사도직 활동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일을 자연스럽게 이러한 봉쇄 생활과 연관시켰습니다. 그리하여 봉쇄 수녀원은 신부인 교회의 고동치는 심장 안에서 사랑과 은총이 말없이 넘쳐 흐르는 곳이 되었습니다. 수녀들은 그 곳에서 하느님을 위하고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만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 안에서만 살아가는 삶을 통하여 그분을 더욱 자유롭게 추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수녀들은 내적·외적인 모든 집착과 걱정과 혼란에서 벗어나 자신의 역량을 모아 하느님을 향하고, 기쁘게 흠숭과 찬미를 드리며 그분의 현존을 받아들입니다.
관상은 마음이 깨끗한 이들의 행복이며, 깨끗한 마음은 그 사람 안에 있는 것을 비추는 맑은 거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으로 정화되고 사랑에 한결같은 사람 안에 모습을 드러내시며, 그 안에 머무르십니다. 깨끗한 마음은 하느님의 빛을 받아 반짝이는 수정과 같이 광채를 냅니다.
관상이란 하느님과 사랑의 친교를 나누는 것이라는 견지에서 볼 때, 깨끗한 마음은 순결한 영혼 안에서 가장 잘 표현됩니다. 왜냐하면 깨끗한 마음은 죄에서 정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결같이 하느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마음, 따라서 완전하고 오롯한 사랑, 곧 교부들이 “최초의 동정녀”라고 불렀던 복되신 삼위일체의 가장 순결한 사랑을 반영하는 고결한 마음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봉쇄된 외딴 공간은 깨끗한 마음을 추구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곳은 외부 세계와 접촉할 기회를 최소한으로 줄이기 때문입니다. 외부 세계와의 접촉은 수도원의 평화로운 분위기를 깨뜨리거나, 한 분이신 주님, 그리고 다른 자매들과 거룩한 일치를 이루는 것을 방해함으로써 여러 가지로 수도 생활에 지장을 주게 됩니다. 이렇게, 봉쇄 수녀원은 흔히 속된 생각과 헛된 욕망의 근원이 되는 불필요한 접촉들과 온갖 형상들, 필요한 것 한 가지에만 정신을 집중하지 못하게 하거나 내적 조화를 방해하는 소식이나 감정들에서 생기는 분심을 많이 없애 줍니다. 수도원에서는 모든 것이 하느님을 추구하는 데에 지향을 두고 있으며, 모든 것이 본질적인 것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오직 하나 중요한 것은 하느님께 다가가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수도원의 명상은 하느님의 현존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명상이 많은 것들의 방해를 받을 때 그 여정은 느리고 종착지는 멀어집니다.
외적인 것에서 벗어나 존재의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 기도와 포기, 형제적 생활, 하느님 말씀의 경청, 향주덕의 실천 등 성실한 수련으로 마음과 정신을 정화하는 수녀들은 성령의 감도 아래, 천상 신랑과 대화를 나누고 밤낮으로 그분의 계율을 묵상함으로써 말씀의 지혜를 선물로 받고 그분과 하나 되도록 부름 받습니다.
봉쇄 수녀들이 끝없는 갈망으로 신랑을 관상하는 마음을 끊임없이 추구하며 하느님 안에서 완성되기를 염원할 때, 그들은 더욱더 수덕에 정진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아름다움에 완전히 매료된 수녀들에게, 봉쇄 수녀원은 은총의 자리이며 주님을 뵙는 행복을 미리 맛보는 자리입니다. 정화력을 지닌 하느님 현존의 불꽃으로 깨끗하여진 수녀들은 충만한 참 행복을 준비하며, 희생과 봉헌의 산 위에서 그리고 성전과 하느님을 관상하는 산 위에서, 구원받은 이의 새로운 노래를 마음으로 부릅니다.
관상을 통하여 하느님과 일치하라는 특별한 부름을 받은 봉쇄 수녀들은 온전히 교회의 친교 안에 있으며, 하느님과 모든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긴밀한 결합을 나타내는 독특한 표징이 됩니다. 봉쇄 수녀들은 기도와 전례 거행, 매일의 자기 봉헌을 통하여 하느님의 모든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며,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아버지께 감사합니다.
그러므로 관상 생활은 수녀들이 교회의 일원이 되고, 교회의 친교를 쌓으며, 교회 전체의 선익을 위하여 사명을 수행하는 특별한 생활 방식입니다. 따라서 봉쇄 관상 수녀들은 새로운 형태의 적극적인 현존으로 친교를 이루도록 요청받지는 않지만, 삼위일체적 친교의 원천에 머무르며 교회의 중심에 있도록 요청받습니다.
봉쇄 공동체는 또한 형제의 삶을 가르치는 훌륭한 학교이고, 참된 친교의 표현이며, 친교로 이끄는 힘이기도 합니다.
형제의 삶을 사는 공동체는 서로 사랑 때문에, 하느님으로 충만하며 부활하신 주님의 신비로운 현존을 체험하게 되는 공간입니다. 수녀들은 친교의 정신으로 그들 공동체의 구성원들과 같은 소명의 은총을 나누고, 같은 길을 따르며, 서로 돕고, 한마음 한뜻으로 주님을 향하여 나아갑니다.
나그네의 길을 가고 있는 교회는 본질상 선교하는 것을 사명으로 합니다.따라서 선교는 관상 생활 수도회에도 근본적인 것입니다.봉쇄 수녀들은 교회의 선교 중심에 머무르며 끊임없는 기도와 봉헌, 찬미의 희생 제사를 바침으로써 선교 사명을 수행합니다.
그러므로 봉쇄 수녀들의 삶은 사도적 결실의 신비로운 원천이며 그리스도인 공동체와 온 세상에 축복이 됩니다. 성령께서 수녀들의 마음에 부어 주신 사랑은 그들을 진리의 협력자이며 그리스도 구원 사업의 동참자가 되게 합니다. 또한 신비체의 다른 구성원들과 활발히 결합함으로써 그들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모든 이를 위하여 사랑의 추구에 전념하게 합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은 '순수한 사랑은 아무리 미미한 것이라도 주님의 눈에는 실로 다른 모든 것을 합친 것보다 더욱 귀중하며 교회에 큰 유익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놀라운 통찰력으로 이렇게 단언하였다. '저는 교회에는 심장이 있고 그 심장은 사랑으로 불탄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오직 사랑만이 교회의 모든 지체를 움직이게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 그렇습니다. 저는 교회에서 제 자리를 찾아 냈습니다. …… 어머니이신 교회의 마음 속에서 저는 사랑이 되겠습니다.' 리지외의 성녀 데레사의 통찰은 교도권이 수차례 강조하여 온 교회의 확신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하느님 나라의 확장과 기도, 회심과 기도, 구원과 정신의 고양을 가져다 주는 복음 메시지의 효과적인 수용과 기도 사이에 긴밀한 연관성이 있다는 것을 잘 알며 이를 주저하지 않고 선포합니다.
수녀들은 다양한 문화 안에서 펼쳐지는 복음화와 교회 일치 운동, 하느님 나라의 성장에 구체적이고 탁월하게 영적으로 이바지합니다. 이러한 영적 기여는 사도직 활동의 혼이며 누룩과 같고, 그 구체적 실천은 이를 소명으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맡겨집니다. 하느님의 완전한 소유가 된 사람들은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선물이 됩니다. 따라서 수녀들의 삶은 참으로 교회 친교의 신비 중심에 있는 선물이며, 복음 선포를 위하여 노력하는 이들의 사도직 사명을 동반합니다.
수녀들은 그 어느 때보다 참된 영성 가치가 요청되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 공동체와 세계에 그들의 관상 생활을 빛나게 함으로써, 하느님의 신비를 말없이 선포하고 겸손하게 증언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신부인 교회의 마음에 예언이 살아 있게 합니다.
완전한 자유 의사에 따라 오로지 하느님만을 찬미하며 살아가는 봉쇄 수녀들의 삶은 그 자체로 하느님의 최고성과,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인간의 초월성을 선포하고 전합니다. 그러므로 봉쇄 생활은 모든 사람에게 각자가 주님과 일치하도록 부름 받은 그 마음의 자리를 상기시켜 줍니다. 주님의 현존 안에서 주님의 현존으로 살아가는 수녀들은, 변함 없이 하느님께 속하고 하느님을 관상하는 종말론적 교회의 특별한 전조이며, 교회의 모든 공동체가 나아갈 여정의 목적지를 가시적으로 드러냅니다.
수도원은 하느님께서 호위하시는 곳이며, 만남의 장막처럼 하느님께서 독특하게 현존하시는 거처입니다. 그 곳은 날마다 하느님을 만나는 곳이며,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당신의 현존으로 가득 채우시고, 유일하신 주님으로 찬미와 영광을 받으시는 곳입니다.
관상 수도원은 그 수도원이 속한 지역 교회에 주어진 하나의 선물이기도 합니다. 수도원은 교회의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지역 공동체에 교회의 현존을 더욱 완전하고 의미 있게 합니다. 수도원 공동체는, 기도 안에서 이스라엘 전쟁의 운명을 결정하였던 모세에 비길 수 있으며, 새벽을 기다리며 밤 새워 망을 보는 파수꾼에 비길 수 있습니다
수도원은 지역 교회의 가장 내밀한 부분인 심장에 해당합니다. 곧, 성령께서 언제나 모든 공동체를 위하여 신음하며 탄원하시는 곳이며, 그분께서 날마다 보내 주시는 생명에 대하여 끊임없이 감사 드리는 곳입니다
중요한 것은 신자들이 관상 수도자들의 은사와 특수한 역할을 존중할 줄 아는 것입니다. 관상 수도자들의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결정적인 현존, 그들의 말 없는 증언은 기도에 대한 초대이며 하느님의 존재 사실을 상기시켜 주는 것입니다.